"늦은 저녁, 지하철 3호선 전철에 탔을 때 백인 남자가 앉아있고 그 옆자리가 비어 있다면 당신은 그 옆에 앉을 수 있는가? 어쩌면 앉을 것이다. 만약 흑인의 옆자리가 비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앉을 수 있는가? 어쩌면 앉지 않을 것이다. 앉았다 해도 '나는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지 않아'라고 마음 속으로 외칠 것이다. 그 외침 자체가 흑백의 편견이다."
- '흑백 편견에서 진실은 어떻게 승리할까' 중, <논객닷컴> 2017.10.31.
[논객닷컴=김호경] 늦은 저녁, 지하철 3호선 전철에 탔을 때 백인 남자가 앉아 있고 그 옆자리가 비어 있다면 당신은 그 옆에 앉을 수 있는가?...
(위의 상황에 대한 판정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어쨌든) 편견이란 건 어느 상황에서든지, 아니 좋은 것으로 낙인찍혀 있기에, 일단 제가, 신앙의 깊이를 말할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기는 하나 어쨌든, ---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으며, 기독교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나, 현재 집사 직분에까지 (어쩌다보니) 이르러있는 사람임을 미리 밝히는 것이, 이 감상문에 대한 '편견'의 시비를 미리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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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재위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고종이 탄생한 해이기도 하더군요. 고로, 2017년 지금의 잣대로 이 작품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대하여, 소설로서의 구성이나 형식 등에 대해 대해 (시대적 보정 없이) 이야기 (할 지식도 없지만) 하기엔 적잖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소설의 목적은 우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그들의 슬픔을 묘사함으로써, 현재의 제도가 얼마나 잔인하고 불공정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p6)
에서처럼, 대놓고 이건, 뭔가를 일깨우고 보여주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쓴 소설임!'이라 선포하고 시작된, 그러하기에 당연히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의 형태를 빌린 명백한 '프로파간다'라는 본질 역시, 일단 이 작품을 읽(어 보)기로 선택했던 이상, 시시비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도 봅니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란 문학작품의 가장 중요한 대표값일 '줄거리'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이 작품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는, 뭔가 대단하다라는 인상을 줄만한 임팩트를 도무지 찾아낼 수 없기마저 합니다.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 톰 아저씨 삶의 업&다운 및 누구나라도 '안타깝다'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그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라 말하는 것으로 왁꾸 다 잡히는 소설이니까요. 또 뭐 그렇다고, 이 소설이 주창하고 있는 '반(反) 노예제'라는 기치에 반기를 들만한 사람이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한다라 생각할 수도 없는 겁니다. 한 마디로,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그려낸 소설이란 것이죠. 아 그럼, 대체 뭘로 감상문 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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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제도의 본질 】
법의 관점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었다. (1권 p33) … 법은 노예를 모든 면에서 권리가 전혀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한다. (2권, p191)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이란 게 결국엔 소유권의 부재로부터 초래된 것이었으며, 소유권의 불명확함은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란 것을 가져왔/오듯이, 일반적으로 소유권에 대한 명확한 규정/획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이고 아주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품에 대한 소유권은 '배타성'을 지닌다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즉, 내 소유의 상품에 대해 타인은 간섭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게다가, 상품에 대한 소유권은 당연히 --- 그 상품의 처분권까지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요. 이같은 배타성과 처분권이 결합되어지면,
소유권이 흑인들을 보호해준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자기 물건은 자기가 알아서 아끼리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재산을 파괴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참으로 난감한 거지요. (2권, p13)
내 소유의 물건을 지극히 소중하게 다루는 것 뿐 아니라, 땅바닥에 패대기 친다든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라든가에 대해,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 해도 타인의 의견은 기본적으로 그 어떠한 제약조건도 될 수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제, --- 그저 하나의 상품일 뿐인 노예에겐 오직 소유자인 주인님의 처분만이 유일하게 중요해지게 되지요.
노예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몰라? 이 나라에는 노예를 보호해주는 법이 없어. 만약 주인이 우리를 떼어놓기로 작정한다면 당신을 내 아내로 지켜줄 수가 없어. (1권, p44)
흑인 노예가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간주된다라는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일단 그것이 백인과 흑인 양측에게 하나의 '기정 사실(established fact)' 더 나아가 '법'이라는 형태의 '사회적 강제'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순간 우리 앞에는, --- (이러한 전개가 마음에 든다 안 든다를 개의치 않는) '자본주의'의 세상이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오는 것은 '무역'으로 표현되며, 이후의 과정들에도 '경매'라든가 '거래', '담보' 등의 단어가 쓰여지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은 것이죠. 이같은 언어의 변화는 이내 그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심리적 거리를 더욱 멀게 해주는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며, 이는 다시 흑인들을 학대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위/쉴드(self-defence)를 선사해주게 됩니다. 이 구분의 경계는 물론! 피부색이란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게,
빨리 죽지요. 날씨가 덥고 또 다른 이유들도 있지요. 검둥이들이 그렇게 죽어나가기 때문에 시장이 활성화되는 겁니다. (1권, p182)
흑인 노예의 죽음이란 게 백인에겐 이제, 단지 상품의 유통속도와 연관지어지는 요소로만 여겨질 뿐인 겁니다. 물론!
탁자나 의자는 감정이 없지만 사람은 생생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노예가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다고 판결하는 법령마저도 추억과 희망, 사랑, 두려움, 욕망 같은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가진 영혼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2권, p223)
소유주인 백인과 상품인 흑인 사이에 위와 같은,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감정의 교집합 혹은 상호 작용 등이 벌어지기도 하나, 우리의 위대하고 강력한 '자본주의'는 오래지 않아, 그러한 감정의 작용마저를 '다수의 이익'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기어이 지워내 버리고 맙니다.
이건 개인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아주 중대한 공공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대규모 소요 사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감정은 잠시 젖혀 놓아야 해. (1권, p150)
물론, 이 '공공의 이익'이란 건 철저하게 백인, 즉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만 계산되는 '이익'이지요. 그리고 이 '이익'은, 단순히 어느 순간에 있어서의 경제적 의미 뿐만이 아닌, (이 소설보다 15년 여후인) 1867년 발간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등장하는 '잉여가치의 착취' 및 '사회의 상부 및 하부구조'와 같은, 보다 넓은 범위의 함의까지를 이미! 담고 있기도 한 겁니다.
그들(영국 귀족 계급)은 하층 계급의 육체와 뼈, 영혼과 정신을 그들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위해 '착취' 합니다. … 명목상이든 실제적이든 대중의 노예화 없이는 더 높은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 다시 말해, 육체노동을 하고 동물적 기질만 가진 하층 계급이 존재해 주어야 한다는 것 … 그러면 상류 계층은 그들 덕분에 부와 여가를 얻어 지식을 확대하고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여,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층 계급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 (2권, pp31~32)
이 소설의, 어쩌면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싶은 인물인 세인트클레어는, 이같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인용해 영국의 노동자들과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결국 본질적인 면에선 차이가 없다라 주장합니다.
아무리 세련된 형태로 노예제도를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 본질 면에서는 … 한 인간 집단이 자신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다른 인간 집단을 사용한다는 것이죠. 팔려가는 집단의 이익과 발전과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2권, p33)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적 판단, 더 나아가 그들의 합(summation)으로 정의(define)되는 사회적 판단은 이미 내려져 있었었거늘, '자본'의 속성은 이같은 인간의 판단을 끝내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중대한 공공의 이익'이 '인간적 고뇌'를 물리치고 결국 승리한다라는 것이죠.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누님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과거나 현재에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2권, pp15~16)
물론, 위와 같은 면피용 논리 또한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 제어되지 못한/않은 자본주의의 횡포가, 인류애라든가 인간의 존엄성 뭐 이런, 절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라 지금은 여겨지고 있는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았던 것이 바로 당시 미국에서의 노예제도였었던 것이죠. 여기까지는 뭐, 미국의 역사이기도, 또한 '자본주의의 역사'이기도 한, 그러니까 딱히 독자마다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그다지 크지 않은, 좋건 싫건 아니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허나,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그러하지 아니하나니...
【 종교는 아편 】
그 제도에 의해 돈을 벌어들이는 농장주들, 농장주의 비위를 맞추는 성직자들, 그 제도로 지배를 하고 싶어하는 정치가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묘한 재주를 발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언어와 윤리를 뒤틀고 구부립니다. 그들은 자연과 성경과 그 밖의 것들을 자기들 목적에 맞게 왜곡합니다. (2권, p18)
적어도! '믿음'이란 건,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믿음'은, 바람(願)과는 같지 않아, 더 이상의 추가적 전개가 필요하지 않은,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져야 하는 개념인 겁니다. 그러나! --- 2017년 대한민국에서도 그러하듯, 이 시대의 종교는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지는 믿음'을 주고 있다는 확신을,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주고 있지 못하지요. '전도'를 (매출의 향상을 위한 것에 사용되는 단어인) '영업'이라 칭하는 성직자에게서 대체 무슨 '구원'이 나오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여전히 '돈 되는 사업'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 '위로와 희망'이라는 재화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 그 재화의 공급을 맡고 있는 성직자들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권, p243)이란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환상의 주입을 통한 호객을 하며, 재화의 수요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2권, p368)란 구절에 매달려 현생의 고통을 잊어내게 해줄 내세(afterlife)에의 희망이란 걸 품고 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 불쌍한 톰에게 그 말씀은 정말로 긴요한 것이었고 너무나 진실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떠오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1권, pp262~263)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닌, 진실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반드시 진실이어야 한다라는 당위가 성립된다라는, 원인과 결과의 어처구니 없는 도치(倒置)는, 자연스럽게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칼 맑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의 서문 중,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중 p206 재인용, 위즈덤하우스, 2012.
뭔가,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이란 게 옳지 않다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게 오로지 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닌 거에요.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정말 현실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한번 따져봐야 하는 게 당연하겠죠. 그러니까,
①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 스티븐 랭,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중 p420, 들녘, 2007.
②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 엔도 슈사쿠,「침묵」중, 홍성사, 2003.
'내가 알아서 할께, 따지지도 묻지도 마!'란 신의 명령(①)에, '다 뜻이 있으실꺼야, 언젠간 알게 되겠지~'라는, 너무도 간단한 순종을 바치는(②) 이 권력 관계란 것이 과연 옳은 것일 수 있느냐라 한 번 물어보자라는 겁니다. 대체 왜 '행복'이란 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그저 내세에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하냐는 것이죠.
"권력의 소유자가 신격화되고 정확하게는 물신(fetish)이 되면, 그 앞에 엎드리는 이들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미래의 불투명성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을 권력의 소유자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에 대한 복종이 그저 환상이라고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기초하고 극복을 도모할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그러므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물신과 환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동시에 그것들을 낳을 수 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205.
설마?라, 당신이 묻고 싶다하여도 --- 이 작품 속 흑인들이 지닌 그 의심 없는 '신앙'이란 것도 알고 보면 애초에 누군가로부터 전파/소개된 것이었을 테고, 그 전파/소개한 이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이유가 고통스러운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듣도록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라는 지적에, 도대체 반박이란 걸 할 수가 없다라는 이 상황은 분명,
'종교는 아편'이라는 다섯 자의 규정을, '반박할 수 없는(irrefutable) 명제'로 만들어 주고 맙니다. '종교는 아편이야!'라 우기는 것이 아닌, '종교가 아편이네~'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내가 처해 있는 이 현실이란 게 너무도 말도 안 되는 것이거늘, "당신도 그분처럼 참으면서 사랑 속에 분투하라. 그분은 하느님이시므로, '마침내 복수할 해가 올 것이다'"(1권, p239)와 같은, 실현 가능성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위로란 게 당췌,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2권, pp 212~213)와 같은, 확인되어질 수 없는 공허한 (복수에의) 약속이란 게 도대체, 뭔 의미가 있느냐란 것이죠.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 엔도 슈사쿠, 위의 책.
위로란 게 되십니까? 내가 엄청나게 쥐어터지고 난 후 들리는, 그토록 도와달라고 애타게 간구했었었거늘, 상황이 다 종료되고 나서야, '아프냐? 나도 아프다!'란 위로란 게 도대체 뭔 소용이 있는 건가요?
아무리 먼 길이라도 끝은 있게 마련이다. 더이상 우울할 수 없을 것 같던 밤도 지나고 나면 결국 아침이 온다. (2권, p346)
아침이야 오겠죠. 하지만, 왜 그 아침을 퉁퉁 부어터진 입술과 시퍼렇게 멍이 든 눈을 하고 맞이하여야 하냐는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상태가 어찌하건, '아침이 왔다'라는 것만 중요하다라고, 대체 이럴 꺼면 왜 아침이 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또 다시 내일 아침을 기다리며 "우리는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고통을 참으며 기다려야 합니다"(2권, p326)라고, 반드시 그리하여야만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지상에서 맨 앞에 있던 자가 맨 뒤가 되고, 가장 뒤에 있던 자가 가장 앞이 되기 때문"(1권, p322)이라고 믿는 건,
'조금만 기다려봐, 머지 않아 너도 네 집을 가질 수 있게 될 꺼야'라 속삭이는 정치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 기어이 한 표를 선사해주는, 허나 그 '조금만'이란 게 알고보니 대략 30년 쯤 뒤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인, 뭐 이런 상황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In the long run, we all die", 죽고 나서 그게 뭔 좋은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 집에서 산다라는 것이 중요한 거지, 내가 살아보지도 못할 '내 집'이란 게 대체 뭐냐는 겁니다.
"아티가 마음 속으로 거부한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었다."
- 부알렘 상살, 「2084 : 세상의 종말」중 p100, 아르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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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떼어놓을 수 있는가?" (2권, p364)
톰 아저씨의 마지막 한 마디입니다. 감동적인가요? 저의 가치관과, 저의 인격으론 그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서 보여졌었던, 기독교의 '지나치게 빠른 용서, 너무 쉬운 사랑'만이 느껴질 뿐입니다. 저의 가치관과 저의 인격, 그리고 저의 신앙에, 염려를 가져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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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톰스 캐빈'이란 문구가 제 입에, 어색하지 않게 베어있을만큼, 유명한 소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시점에선가 허클베리 핀이 등장하는 거 아니었던가?하는 의문도 정말 가지고 있었었을 만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그러나... 그러한 무지는 저에게만 있는 게 아닌 듯 싶더군요. (조교수를 포함한, 제가 물어본 너댓 명의 사람들 모두, 이 소설이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경주시 하동에 위치한 엉클톰스케빈은 이름 그대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펜션이다. 먼저, 펜션 입구에 들어서면 1,800여 평의 넓은 잔디정원과 노송 위에 지어진 방갈로가 눈에 들어온다. 각 객식마다 거실창문을 열면 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나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모든 숙소는 친환경 통나무로 지어졌고, … 캐러밴이 마련되어 있어 캠핑 분위기도 연출할 수 있고 여름에는 펜션내 수영장에서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이 펜션의 주인과,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욕할 자격이 제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몰랐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 펜션의 이름을 그렇게 짓겠노라면서도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음에 틀림없는 펜션의 주인과, 역시나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한 기자는,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하는 사업과 기사에 책임질 수 없을, (진중권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인의 천박함'을 보여주는 일례일 수밖엔 없겠죠. 조지 셸비가, 자신 소유의 노예들에게 모두 자유를 선사하며 했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볼 때마다 여러분의 자유를 생각해. 그 집이 여러분에게 하나의 기념비가 되어, 여러분이 그의 뒤를 따라 그처럼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기원해. (2권, p399)
※ 함께 읽어 보길 권하여 보는 책들
- 토니 모리슨 : 「빌러비드」
- 알렉스 헤일리 : 「뿌리」
- 폴 비티 : 「배반」
- 존 하워드 그리핀 : 「블랙 라이크 미」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 「자발적 복종」
...금연 252일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