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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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알리오님 댁과 함께 저녁을 먹다가(라 쓰지만 실은 술을 마시다가), 다시 태어나도 핸드폰 번호는 바꾸지 말자,란 약속을 저의 그녀에게 권유해 보았습니다만, 그녀는 '반드시 바꾸겠다!'라 대답해주더군요. 그 말을 들은 알리오님께선, 자신의 그녀는 다시 태어난다면 어찌하여서라도 자기를 찾아오게 되어있기에, 자신만 핸드폰 번호를 바꾸지 않으면 된다라, 아주 자신있게 말씀하시더군요. (그 단호함, 정말 멋있었었었!!!) --- 기독교 신자의 저희 부부와, 카톨릭 신자인 알리오님 댁 부부가 실제, '환생'이란 걸 믿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건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또 뭐, 


"사람이 하늘이 정한 운명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숙명론(宿命論)이라 한다면, 정성과 의지로써 타고난 운명조차 바꾸어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조명론(造命論)이라 할 수 있다." 


- 방민호,「연인 심청」중 p399, 다산북스, 2015.

위와 같은 의미로서의 '조명론'을 선택했다고도 할 수 없는, 심각함이나 진중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그냥 술자리에서의 가벼운 이야기였었었던 거죠. 그런데 말입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남녀에게 죽을 때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어. 하나는 나무처럼 죽어서 씨앗을 남기는, 자신은 죽지만 뒤에 자손을 남기는 방법. 또 하나는 달처럼 죽었다가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방법. 그런 전설이 있어. ……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면, 난 달처럼 죽는 쪽을 택할 거야. … 달이 차고 기울 듯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거야. 그래서 아키히코 군 앞에 계속 나타나는 거야.(pp181~182) 

누군가가 나에게, 죽어서도 다시 너의 앞에 나타나겠노라고, 그게 한 번도 아닌, "생명의 릴레이"(p294)라는 표현까지 동원하여야 할 만큼 계속 반복해서1 그럴 거라 말한다라면, 야~ 이거 정말 오싹하겠죠? 핸드폰 번호를 바꾸네 마네의 수준이 아닌, 뭐가 경찰서에 접근금지신청이라도 내야겠다란 마음이 혹시 들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의 두려움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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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지금 현실이라고 부르는 게 어제는 상상에 불과했다는 걸 잊지 마."


- 주제 사라마구,「도플갱어」중 p14, 해냄, 2006. 

아내와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뭔가가 작동되어, 아내의 영혼이 딸의 육신으로 들어간 일이 발생된 거야. 그러니까 남자는 딸의 육신을 하고 있는 아내와 살게된 거지. ---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비밀」에 대하여, 이런 나레이션으로 조교수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만... '혼자 나가서 그런 책 읽고 있었던 거야?"란 투의 힐난 어린 대답을 들었어야 했더랬었죠. 허나!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다시 꿈꾸기 시작한 거다.(p205)

'있을 수 없는/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상상은 '신화'라 불리웁니다. 그리고 ---  '지금'의, 그리고 '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상상을 가능케해 준다라는 기능, 그리하여, 우리의 사고 지평을 넓혀준다라거나 혹은 이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었던 새로운 사고(思考)의 방향을 보여준다라는 것, 더 나아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을 향해 작동되는 '유혹'이란 감정에 대한 정신 승리와,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것에 작동 시키곤 하는 '상상'이라는 메커니즘까지를 통틀어 우리는 --- 바로 '소설'(의 순기능)이라 부르고 있지요. 그러하기에,


남녀의 사랑이 얼마나 제멋대로일 수 있는가, 그 궁극의 모습, 그 부당함을 그리려고 했다면「달의 영휴」는 성공했다. (P402)

이 작품에 대한 어느 심사위원의 위와 같은 평가는, 작가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으로 선택해 놓은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하고 그는 말했다"(p396)이란 문장에 대한,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이 쉴 정도로 소리내어 울었다."


- 히가시노 게이고,「비밀」중 p474, 창해, 2008.

유사한 구조의 스토리를2 지니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위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 지니고 있는 처절한 슬픔에의 격한 공감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하고 그는 말했다"(p396)란 문장은 왜 지니고 있지 못한가에 대한, 거의 완벽한 설명이자 평가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웬지 인물의 관계도같은 거라도 그려가며 읽어가야할 듯도 한 이 작품, 여타 현대 일본소설들처럼 줄줄줄 잘 읽혀가는 이 작품을 향해, 스토리의 허망함을 들어 폄하하는 건, 제 생각에는 정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 소설은 어쩌면, 


누군가는 생각하느라 내려야 할 전철역을 그냥 지나갈 정도로 그리운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p171)

언젠가 한 번쯤은 당신 또한 가져보았었을, 어쩌면 지금도 가지고 있겠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해주는, 그런 역할만큼은 꽤나 잘 수행해주었다라, - 비록 두 개 뿐이지만, 읽어 본 역대 나오키상 수상작들에 비하자면, 어딘가 허전하다라는 느낌은 지워낼 수가 없다라는 아쉬움과 함께 - 흔쾌히 보내는 독자의 박수에, 작가 또한 충분히 만족해하는, 그런 의미의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 읽어 본, 나오키상 수상작들 (수상연도 순)

- 히가시노 게이고,「용의자 X의 헌신(2005년 하반기)

- 니시 가나코,「사라바(2014년 하반기) 


 ...금연 278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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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 / 베니토 세레노 / 수병, 빌리 버드 - 허먼 멜빌 법률 3부작 세계문학 마음바다 6
허먼 멜빌 지음, 안경환 옮김 / 홍익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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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인 역자가, '법률 삼부작'이라 칭하고 있기도 한, --- <바틀비>, <베니토 세레노> 그리고 <수병, 빌리버드>로 이루어진 세 편의 중·단편 소설들이 한 권으로 묶여있는 책입니다. 이 소설들에 주어져 있는/이 소설들이 지니고 있는 의의가 어찌되었건, 일단! 


1. 뭔가 읽는 맛이라는 걸, 거의 완벽하게 상실하고 있는 소설들입니다. 이게 원작의 탓으로부터 기인되는 것인지, 혹은 (전문 번역가가 아닌 이에 의한) 번역의 탓인건지 판단할 수 없으나, 암튼! (제 기준에서 보아) 읽는 재미 따위는 정녕 지지리도 없다라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2. 유난히도 어수선한 연말과 연초라는 시기적 특성 때문이었을까요? 꾸준히 몇 페이지라도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는 시간을 전혀 가져볼 수 없는 독서였었었고, 그러한 단속(斷續)이, 이 작품들에 대한 저의 몰이해를 초래했을 수도 있음을 빼놓지 않고 고백하겠습니다. 여튼! 


3. 예의, 사놓은 지 오래된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온전히 --- <베니토 세레노>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었습니다. 그간 이어져 온,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해서 말이죠. 이러한,  


세 가지의 이유로, 저의 감상문은 오로지 <베니토 세레노>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 편의 소설을 읽고서도, 단 한 편에 대한 감상문만 쓴다는 게 뭐랄까, 이 책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읽은 작품에 대한 감상문은 반드시 남겨놓아야지란 의무감스런 의지와의 타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고 있었던 내내, 어딘가에 묶여/매여 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었기에, 그렇게 해보게도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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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무엇'을 진실이라 믿게 하느냐/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1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에, 특히 '사상'과 관련하여 이러했던 시절이 있었었으며, 혹자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와는 정반대 방향으로부터의 '사상'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러한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누군가는, 


"종교는 믿음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 실체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덤불 속」중 <작품 해설>의 p267, 문예출판사, 2008.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남경의 그리스도>2에 대한, 역자 김영식의 위와 같은 견해처럼, '종교'란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란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3 그리고 또한 --- 전에 읽었던 네 편의 소설들4로부터,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시선, 흑인 스스로도 (적어도 한 때엔)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인식이란 것이, 기실은 그것이 사실(fact)이었기 때문에 성립된 것이 아닌, 그러하길 바랐고, 그리하여 그러하다라 믿고싶어 끝내는 (self-fulfilling prophecy의 실현으로서) 믿어지게 된, 또한 그러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종국에는, 바람()을 기어이 현실로 만들어 낸, 심히도 기형적인 역사에 대하여도, 정확히 똑같은 말을 할 수 밖엔 없음을 배웠었지요. 


"모든 백인은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문화생활의 혜택을 누릴 어떠한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흑인노예들은 모든 면에서 '확실히' 백인보다 열등했다. 따라서 흑인 자신들도 스스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세뇌되었다." 


- 유시민,「거꾸로 읽는 세계사」중 p310, 푸른나무,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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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도 적고 있듯,「세상을 바꾼 판결」5에서 배웠었던, "1841년의 '아미스타드 사건'"(p22)을 떠올리게만 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마로 향해 가던) '산 도미니크 호'의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백인 선장(베니토 세레노)은 포로나 다름 없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른 배의 선장(아마사 델라노) 앞에서는, 그것이 정상(正常)이라 짐작되는 '원래의 상황', 즉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는 상황'을 연기하다가, 블라블라 …. 뭐 스토리 자체는 이것 말고는 딱히 별 언급될만한 것 없다고 말해도 될 것 같지요. 단지 그 스토리로부터...


정말 이상한 배야. 사연도 이상하고 배 위 사람들의 행태도 죄다 이상하기 짝이 없어. 그러나 그 뿐이지. 더 무슨 일이 있을라고?(p164)

'산 도미니크호'의 (연기되고 있는) 분위기를 가리켜 '이상한' 이라 표현하고 있는 선장 아마사 델라노의 화법이란 게 결국 알고보면, 그 상황이 '연기(演技)'되고 있었던 것이기에 생겨난 것이었지, 결코! ---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게 그야말로 '당연한' 것인, 백인이 흑인을 다스리고 있다라는 상황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는, 이 점이 흥미로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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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안경환 교수는 이 작품의 결말에 대해 "델라노 선장, 베니토 세레노, 흑인 바보 세 사람 중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에 따라 선상 노예 반란의 의미와 성격이 달라질 것"(p19)이란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만,


"짐승의 발톱과 뿔은 누군가를 사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 구병모,「파과」중 p51, 자음과모음, 2013.

(저는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구병모의 시선을 (당신 또한) 좇는다면, 이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가 아닌 '그같은 관점이 대체 어떻게 존재할/생겨날 수 있었었을까'가 될 것이라/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겐 --- 태어나 보니 노예라는 존재가 내 곁에서 나에게 복종하고 있는 상황이 주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 태어나 보니 나에겐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훨씬 더 많이 주어져 있는 그런 삶이 주어져 있다라는 상황 자체를, 당연히 당신이 이해할 수 없고,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없다라면, 그렇다면...


제 생각에, 이 작품 속에서 정녕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가에 대한 답은, '누구의 관점에 서느냐'와 상관 없이 딱 하나로 정해지게 된다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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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과장이 없다 하더라도, 정물 하나도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보는 이의 시력과 관념 때문에 달리 보인다. 그러니 정물이 아닌, 스토리가 사람들과 얽힌 사건에 대한 통일된 증언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건은 '덤불'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위의 책 pp 286~269.

물론, 역사라는 것이 우연으로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닐테고, 집단의 어리석음에 의해 진행되어 온 것 또한 아닐 것이기에, 특정 제도의 기원에는 반드시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물론, 이 때의 '합당'이라는 것이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지는 않겠죠만.) 그리고 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말한 '덤불 속'과 같은 상황이, 우리의 매일매일에서, 우리의 일주일간에서, 우리의 한달간에서 그렇게 항상/어디서나 일어나고 있음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짐승의 발톱과 뿔은 누군가를 사냥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 구병모,「파과」중 p51, 자음과모음, 2013.

노예제도에 대한 우리의 답은, 그 어떠한 방향, 그 어떠한 렌즈로 바라보는 시선에 구속됨 없이, 딱 하나일 수 밖에 없다라 우리 모두가 동의하기에,  

 

"도박판이나 닭싸움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검둥이 아기를 상품으로 내건다는 그런 소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 그는 또한 검둥이 아이들이 대출을 받는 담보물 노릇을 하고, 채권자들은 아직 어머니 배 속에 든 태아에 대해서 벌써 청구권을 신청하는가 하면, 채무자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아기들을 미리 팔기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 알렉스 헤일리,「뿌리(상)」중 p388, 열린책들, 2009. 

이 작품 <베니토 세레노> 속 흑인들의 '발톱과 뿔'이, 그렇게 사용된 것에 대해, (여하한 이유로도) 허용되는 비난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6년~2017년 대한민국 민중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발톱과 뿔'을 사용했던 것이, '부패한 권력'을 공격하고자 했던 의도의 행동이 아닌, 우리와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보호기제의 작동이었었음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듯 말이죠.  

 

...금연 273일째



  1. 2014년, 영화 <제보자>를 본 후의 느낌을, 저는 이렇게 적어 놓았었더군요.
  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덤불 속」중 pp 168~185, 문예출판사, 2008.
  3. 제가 참으로 많이 인용했었던, 이문열의 작품 속 다음 글 역시 그러합니다. - "세상은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이문열 作, 「사람의 아들」중 어느 제사장의 말, 민음사, 2004.​)
  4. 「빌러비드」,「배반」,「뿌리」,「톰 아저씨의 오두막」
  5. 마이클 리프 · 미첼 콜드웰 共著, 궁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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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3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이종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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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지하철 3호선 전철에 탔을 때 백인 남자가 앉아있고 그 옆자리가 비어 있다면 당신은 그 옆에 앉을 수 있는가? 어쩌면 앉을 것이다. 만약 흑인의 옆자리가 비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앉을 수 있는가? 어쩌면 앉지 않을 것이다. 앉았다 해도 '나는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지 않아'라고 마음 속으로 외칠 것이다. 그 외침 자체가 흑백의 편견이다."  


- '흑백 편견에서 진실은 어떻게 승리할까' 중, <논객닷컴> 2017.10.31.

[논객닷컴=김호경] 늦은 저녁, 지하철 3호선 전철에 탔을 때 백인 남자가 앉아 있고 그 옆자리가 비어 있다면 당신은 그 옆에 앉을 수 있는가?...


(위의 상황에 대한 판정에 동의하는가의 여부를 떠나 어쨌든) 편견이란 건 어느 상황에서든지, 아니 좋은 것으로 낙인찍혀 있기에, 일단 제가, 신앙의 깊이를 말할 처지가 아님을 알고 있기는 하나 어쨌든, ---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으며, 기독교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나, 현재 집사 직분에까지 (어쩌다보니) 이르러있는 사람임을 미리 밝히는 것이, 이 감상문에 대한 '편견'의 시비를 미리 차단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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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재위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고종이 탄생한 해이기도 하더군요. 고로, 2017년 지금의 잣대로 이 작품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대하여, 소설로서의 구성이나 형식 등에 대해 대해 (시대적 보정 없이) 이야기 (할 지식도 없지만) 하기엔 적잖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1 게다가,  

 

이 소설의 목적은 우리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그들의 슬픔을 묘사함으로써, 현재의 제도가 얼마나 잔인하고 불공정한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p6) 

에서처럼, 대놓고 이건, 뭔가를 일깨우고 보여주려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쓴 소설임!'이라 선포하고 시작된, 그러하기에 당연히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의 형태를 빌린 명백한 '프로파간다'라는 본질 역시, 일단 이 작품을 읽(어 보)기로 선택했던 이상, 시시비비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도 봅니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란 문학작품의 가장 중요한 대표값일 '줄거리'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이 작품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는, 뭔가 대단하다라는 인상을 줄만한 임팩트를 도무지 찾아낼 수 없기마저 합니다. 착하기 이를 데 없는2 주인공 톰 아저씨 삶의 업&다운 및 누구나라도 '안타깝다'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그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라 말하는 것으로 왁꾸 다 잡히는 소설이니까요. 또 뭐 그렇다고, 이 소설이 주창하고 있는 '반() 노예제'라는 기치에3 반기를 들만한 사람이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한다라 생각할 수도 없는 겁니다. 한 마디로,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도 당연하게 그려낸 소설이란 것이죠. 아 그럼, 대체 뭘로 감상문 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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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제도의 본질 】


법의 관점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었다. (1권 p33) … 법은 노예를 모든 면에서 권리가 전혀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한다. (2권, p191)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이란 게 결국엔 소유권의 부재로부터 초래된 것이었으며, 소유권의 불명확함은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이란 것을 가져왔/오듯이, 일반적으로 소유권에 대한 명확한 규정/획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이고 아주 기본적인 사항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품에 대한 소유권은 '배타성'을 지닌다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즉, 내 소유의 상품에 대해 타인은 간섭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게다가, 상품에 대한 소유권은 당연히 --- 그 상품의 처분권까지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지요. 이같은 배타성과 처분권이 결합되어지면, 


소유권이 흑인들을 보호해준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자기 물건은 자기가 알아서 아끼리라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재산을 파괴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참으로 난감한 거지요. (2권, p13)

내 소유의 물건을 지극히 소중하게 다루는 것 뿐 아니라, 땅바닥에 패대기 친다든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라든가에 대해,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 해도 타인의 의견은 기본적으로 그 어떠한 제약조건도 될 수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제, --- 그저 하나의 상품일 뿐인 노예에겐4 오직 소유자인 주인님의 처분만이 유일하게 중요해지게 되지요. 


노예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몰라? 이 나라에는 노예를 보호해주는 법이 없어. 만약 주인이 우리를 떼어놓기로 작정한다면 당신을 내 아내로 지켜줄 수가 없어. (1권, p44)

흑인 노예가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간주된다라는 현상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을 떠나, 일단 그것이 백인과 흑인 양측에게 하나의 '기정 사실(established fact)' 더 나아가 '법'이라는 형태의5 '사회적 강제'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순간 우리 앞에는, --- (이러한 전개가 마음에 든다 안 든다를 개의치 않는) '자본주의'의 세상이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오는 것은 '무역'으로 표현되며, 이후의 과정들에도 '경매'라든가 '거래', '담보' 등의 단어가 쓰여지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은 것이죠. 이같은 언어의 변화는 이내 그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심리적 거리를 더욱 멀게 해주는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며, 이는 다시 흑인들을 학대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위/쉴드(self-defence)를 선사해주게 됩니다.6 이 구분의 경계는 물론! 피부색이란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그렇게,7 


빨리 죽지요. 날씨가 덥고 또 다른 이유들도 있지요. 검둥이들이 그렇게 죽어나가기 때문에 시장이 활성화되는 겁니다. (1권, p182)

흑인 노예의 죽음이란 게 백인에겐 이제, 단지 상품의 유통속도와 연관지어지는 요소로만 여겨질 뿐인 겁니다. 물론!


탁자나 의자는 감정이 없지만 사람은 생생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노예가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있다고 판결하는 법령마저도 추억과 희망, 사랑, 두려움, 욕망 같은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가진 영혼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2권, p223)

소유주인 백인과 상품인 흑인 사이에 위와 같은,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감정의 교집합8 혹은 상호 작용 등이 벌어지기도 하나, 우리의 위대하고 강력한 '자본주의'는 오래지 않아, 그러한 감정의 작용마저를 '다수의 이익'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기어이 지워내 버리고 맙니다. 


이건 개인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아주 중대한 공공의 이익이 걸려 있다고. 대규모 소요 사태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감정은 잠시 젖혀 놓아야 해. (1권, p150)

물론, 이 '공공의 이익'이란 건 철저하게 백인, 즉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만 계산되는 '이익'이지요. 그리고 이 '이익'은, 단순히 어느 순간에 있어서의 경제적 의미 뿐만이 아닌, (이 소설보다 15년 여후인) 1867년 발간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등장하는 '잉여가치의 착취' 및 '사회의 상부 및 하부구조'와 같은, 보다 넓은 범위의 함의까지를 이미! 담고 있기도 한 겁니다. 


그들(영국 귀족 계급)은 하층 계급의 육체와 뼈, 영혼과 정신을 그들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위해 '착취' 합니다. … 명목상이든 실제적이든 대중의 노예화 없이는 더 높은 문명이 존재할 수 없다. … 다시 말해, 육체노동을 하고 동물적 기질만 가진 하층 계급이 존재해 주어야 한다는 것 … 그러면 상류 계층은 그들 덕분에 부와 여가를 얻어 지식을 확대하고 사회의 발전을 추구하여,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층 계급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 (2권, pp31~32) 

이 소설의, 어쩌면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싶은 인물인 세인트클레어는, 이같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인용해 영국의 노동자들과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결국 본질적인 면에선 차이가 없다라9 주장합니다. 

 

아무리 세련된 형태로 노예제도를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 본질 면에서는 … 한 인간 집단이 자신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다른 인간 집단을 사용한다는 것이죠. 팔려가는 집단의 이익과 발전과는 무관하게 말입니다. (2권, p33)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적 판단, 더 나아가 그들의 합(summation)으로 정의(define)되는 사회적 판단은 이미 내려져 있었었거늘, '자본'의 속성은 이같은 인간의 판단을 끝내 그 정반대의 방향으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중대한 공공의 이익'이 '인간적 고뇌'를 물리치고10 결국 승리한다라는 것이죠.11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기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보십니까?12 누님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은 과거나 현재에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2권, pp15~16)

물론, 위와 같은 면피용 논리 또한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 제어되지 못한/않은 자본주의의 횡포가, 인류애라든가 인간의 존엄성 뭐 이런, 절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라 지금은 여겨지고 있는 가치들을 무참히 짓밟았던 것이 바로 당시 미국에서의 노예제도였었던 것이죠. 여기까지는 뭐, 미국의 역사이기도, 또한 '자본주의의 역사'이기도 한, 그러니까 딱히 독자마다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그다지 크지 않은, 좋건 싫건 아니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허나,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그러하지 아니하나니... 



【 종교는 아편 】


그 제도에 의해 돈을 벌어들이는 농장주들, 농장주의 비위를 맞추는 성직자들, 그 제도로 지배를 하고 싶어하는 정치가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묘한 재주를 발휘하여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언어와 윤리를 뒤틀고 구부립니다. 그들은 자연과 성경과 그 밖의 것들을 자기들 목적에 맞게 왜곡합니다. (2권, p18)

적어도! '믿음'이란 건,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믿음'은, 바람()과는 같지 않아, 더 이상의 추가적 전개가 필요하지 않은,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져야 하는 개념인 겁니다. 그러나! --- 2017년 대한민국에서도 그러하듯, 이 시대의 종교는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지는 믿음'을 주고 있다는 확신을,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주고 있지 못하지요. '전도'를 (매출의 향상을 위한 것에 사용되는 단어인) '영업'이라 칭하는 성직자에게서 대체 무슨 '구원'이 나오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여전히 '돈 되는 사업'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 '위로와 희망'이라는 재화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 그 재화의 공급을 맡고 있는 성직자들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권, p243)이란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환상의 주입을 통한 호객을13 하며, 재화의 수요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14(2권, p368)란 구절에 매달려 현생의 고통을 잊어내게 해줄 내세(afterlife)에의 희망이란 걸 품고 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 불쌍한 톰에게 그 말씀은 정말로 긴요한 것이었고 너무나 진실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떠오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1권, pp262~263)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닌, 진실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에 반드시 진실이어야 한다라는 당위15가 성립된다라는, 원인과 결과의 어처구니 없는 도치()는16, 자연스럽게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칼 맑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 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 


- <헤겔 법철학 비판>의 서문 중, 류동민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중 p206 재인용, 위즈덤하우스, 2012.

뭔가,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이란 게 옳지 않다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게 오로지 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닌 거에요.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정말 현실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한번 따져봐야 하는 게 당연하겠죠. 그러니까,  


①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 스티븐 랭,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중 p420, 들녘, 2007.


②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 엔도 슈사쿠,「침묵」중, 홍성사, 2003.


'내가 알아서 할께, 따지지도 묻지도 마!'란 신의  명령(①)에, '다 뜻이 있으실꺼야, 언젠간 알게 되겠지~'라는, 너무도 간단한 순종을 바치는(②) 이 권력 관계란 것이 과연 옳은 것일 수 있느냐라 한 번 물어보자라는 겁니다. 대체 왜 '행복'이란 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그저 내세에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하냐는 것이죠. 


"권력의 소유자가 신격화되고 정확하게는 물신(fetish)이 되면, 그 앞에 엎드리는 이들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미래의 불투명성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을 권력의 소유자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에 대한 복종이 그저 환상이라고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기초하고 극복을 도모할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그러므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물신과 환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동시에 그것들을 낳을 수 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205. 

설마?라, 당신이 묻고 싶다하여도 --- 이 작품 속 흑인들이 지닌 그 의심 없는 '신앙'이란 것도 알고 보면 애초에 누군가로부터 전파/소개된 것이었을 테고, 그 전파/소개한 이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이유가 고통스러운 영혼의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듣도록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17라는 지적에, 도대체 반박이란 걸 할 수가 없다라는 이 상황은 분명, 


'종교는 아편'이라는 다섯 자의 규정을, '반박할 수 없는(irrefutable) 명제'로 만들어 주고 맙니다. '종교는 아편이야!'라 우기는 것이 아닌, '종교가 아편이네~'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내가 처해 있는 이 현실이란 게 너무도 말도 안 되는 것이거늘, "당신도 그분처럼 참으면서 사랑 속에 분투하라. 그분은 하느님이시므로, '마침내 복수할 해가 올 것이다'"(1권, p239)와 같은, 실현 가능성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위로란 게 당췌,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2권, pp 212~213)와 같은, 확인되어질 수 없는 공허 (복수에의) 약속이란 게 도대체, 뭔 의미가 있느냐란 것이죠.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 엔도 슈사쿠, 위의 책.

위로란 게 되십니까? 내가 엄청나게 쥐어터지고 난 후 들리는, 그토록 도와달라고 애타게 간구했었었거늘, 상황이 다 종료되고 나서야, '아프냐? 나도 아프다!'란 위로란 게 도대체 뭔 소용이 있는 건가요? 


아무리 먼 길이라도 끝은 있게 마련이다. 더이상 우울할 수 없을 것 같던 밤도 지나고 나면 결국 아침이 온다. (2권, p346)

아침이야 오겠죠. 하지만, 왜 그 아침을 퉁퉁 부어터진 입술과 시퍼렇게 멍이 든 눈을 하고 맞이하여야 하냐는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상태가 어찌하건, '아침이 왔다'라는 것만 중요하다라고, 대체 이럴 꺼면 왜 아침이 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또 다시 내일 아침을 기다리며 "우리는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고통을 참으며 기다려야 합니다"(2권, p326)라고, 반드시 그리하여야만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지상에서 맨 앞에 있던 자가 맨 뒤가 되고, 가장 뒤에 있던 자가 가장 앞이 되기 때문"(1권, p322)이라고 믿는 건, 


'조금만 기다려봐, 머지 않아 너도 네 집을 가질 수 있게 될 꺼야'라 속삭이는 정치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 기어이 한 표를 선사해주는, 허나 그 '조금만'이란 게 알고보니 대략 30년 쯤 뒤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인, 뭐 이런 상황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In the long run, we all die", 죽고 나서 그게 뭔 좋은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내 집에서 산다라는 것이 중요한 거지, 내가 살아보지도 못할 '내 집'이란 게 대체 뭐냐는 겁니다.  


"아티가 마음 속으로 거부한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에 의한 인간의 억압18이었다."


- 부알렘 상살, 「2084 : 세상의 종말」중 p100, 아르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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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우릴 떼어놓을 수 있는가?" (2권,  p364)


톰 아저씨의 마지막 한 마디입니다. 감동적인가요? 저의 가치관과, 저의 인격으론 그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서 보여졌었던, 기독교의 '지나치게 빠른 용서, 너무 쉬운 사랑'만이19 느껴질 뿐입니다. 저의 가치관과 저의 인격, 그리고 저의 신앙에, 염려를 가져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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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톰스 캐빈'이란 문구가 제 입에, 어색하지 않게 베어있을만큼, 유명한 소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어느 시점에선가 허클베리 핀이 등장하는 거 아니었던가?하는 의문도 정말 가지고 있었었을 만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그러나... 그러한 무지는 저에게만 있는 게 아닌 듯 싶더군요. (조교수를 포함한, 제가 물어본 너댓 명의 사람들 모두, 이 소설이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경주시 하동에 위치한 엉클톰스케빈은 이름 그대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펜션이다. 먼저, 펜션 입구에 들어서면 1,800여 평의 넓은 잔디정원과 노송 위에 지어진 방갈로가 눈에 들어온다. 각 객식마다 거실창문을 열면 전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데, 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나고, 가을에는 아름다운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모든 숙소는 친환경 통나무로 지어졌고, … 캐러밴이 마련되어 있어 캠핑 분위기도 연출할 수 있고 여름에는 펜션내 수영장에서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도 있다.



이 펜션의 주인과,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욕할 자격이 제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몰랐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 펜션의 이름을 그렇게 짓겠노라면서도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음에 틀림없는 펜션의 주인과, 역시나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것이 분명한 기자는,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하는 사업과 기사에 책임질 수 없을, (진중권의 표현을 빌자면) '한국인의 천박함'을 보여주는 일례일 수밖엔 없겠죠. 조지 셸비가, 자신 소유의 노예들에게 모두 자유를 선사하며 했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볼 때마다 여러분의 자유를 생각해. 그 집이 여러분에게 하나의 기념비가 되어, 여러분이 그의 뒤를 따라 그처럼 정직하고 충실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기원해. (2권, p399)

 



※ 함께 읽어 보길 권하여 보는 책들 

- 토니 모리슨 : 「빌러비드

- 알렉스 헤일리 : 「뿌리

- 폴 비티 : 「배반

- 존 하워드 그리핀 : 「블랙 라이크 미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 자발적 복종 


  ...금연 252일째




  1. 개인적으로 가졌던 불만(?)의 대표적인 예로 --- "독자들의 기분을 생각하여 이제 더 이상의 묘사를 삼가기로 하겠다."(p167)와 같은, 작가의 노골적 개입 및 자의적 판단이 작품 속에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라는 점을 들겠습니다.
  2. "그런 못된 일을 하는 자들의 영혼이 얼마나 괴롭겠는지를 한번 생각해봐. 당신은 그자들처럼 살지 않으니 하느님에게 감사드려야 해. 나는 그런 사악한 자가 되어 뒷날의 심판을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만 번이라도 남쪽으로 팔려가겠어."(1권, p106)
  3. "미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밀리언셀러가 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문학사상 크나큰 영향력을 가진 작품이다. 스토우는 1850년 도망노예법(도망노예의 재판을 금지하고 그를 도와준 이까지 처벌받게 한 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자 깊은 분노를 느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시인 랭스턴 휴즈는 이 소설을 두고 '미국 최초의 저항 소설'이라고 불렀다." - 네이버 지식백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 중.
  4. "1856년 1월, 켄터기 주의 노예였던 마거릿 가너는 …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녀의 삼촌이자 노예 출신인 조 카이트의 집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추격에 나선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들이 집을 포위해 끝내 붙잡힐 지경에 처하자,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고 두 살배기 딸을 칼로 베어버리고 다른 자식들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이후에 마거릿 가너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 이 재판은 이례적으로 길어졌는데, 그녀의 행동에 대한 인간적 이해나 연민 때문이 아니라, 마거릿 가너를 '사람'으로 인정하여 딸을 죽인 살인죄로 기소할 것인가, 아니면 1850년에 발효된 도망노예법에 따라 단순히 잃어버린 재산으로 취급하여 무죄방면할 것인가 하는 논쟁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지만 마거릿 가너의 변호사는 그녀를 살인죄로 재판해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고, 가너 역시 자신의 행동을 그저 이성이 없는 노예의 미친 짓으로 여기고 관대히 넘기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마거릿 가너는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재판받지 못하고 노예로 생을 마쳤다."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중 pp456~457, 문학동네, 2014.
  5. "살아 있고, 피 흘리고, 불멸의 영혼을 가진 이 '물건'을, 미국의 국법은 톰이 누워 있는 짐 꾸러미, 짐 뭉치, 상자들과 똑같이 판매 가능한 '물건'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1권, p237)
  6. "예를 들어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윤리적으로도 열등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두면 정의를 위한 살육이 된다. … 살육병기의 개발은 적을 얼마나 멀리, 보다 간단하게 대량의 희생자를 내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중, 황금가지, 2012.
  7. "전 세계의 귀족들은 사회의 특정한 구분선을 넘어버리면 인간적인 동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습니다. … 이 모든 국가들의 귀족들은 그 선을 결코 넘어가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계층 내에서 고난과 고통과 부정의 문제를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다른 계층에서의 그런 현상들은 대단치 않은 문제로 치부해버립니다. 아버지의 구분선은 바로 피부색이었습니다. 같은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선 아버지처럼 정의롭고 후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 흑인 피가 섞인 모든 흑인들을 인간과 동물의 중간적 존재로 인식했고, 이런 전제 위에서 정의 또는 관용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2권, p24)
  8. "검둥이 역시 … 인생의 고난과 비탄 앞에서는 동일한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1권, pp80~81)
  9. "마치 고용주에게 팔린 것처럼 고용주의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노예의 주인은 말 안 듣는 노예를 죽도록 매질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해고하여 굶어 죽게 할 수 있죠. 가족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거 더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 아이가 다른 데로 팔려가는 것과 아이가 집에 있으면서 굶어 죽는 것이."(2권, p32)
  10. "검둥이들을 팔아먹는 자나 사들이는 자나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거야?"(1권, p186)
  11. "미국 남부 지역이 면화 재배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동안 면화 재배가 불가능한 북부지역에서는 공업의 육성에 힘을 쏟았고 이에 필요한 각종 수송, 통신 등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자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남부와 북부 모두 애써 외면했던 것이 바로 노예 제도였다. 노예 제도는 당시 영국에서도 이미 폐지됐으며 대다수 유럽에서 불법으로 간주됐지만 미국에서만 합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남부의 면화 재배 업자들은 면화 재배를 위해 비옥한 서부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갔는데 노예 해방론자들은 이로 인해 노예 제도가 확대되는 것에 크게 우려했다." --- <매일경제> 2017.10.17.일자 '아브라함 링컨의 남북전쟁 승리와 4차산업혁명''의 기사 중
  12. "자신이 악이면서도 선이라 생각하고, 선한 사람이 자신이 실은 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인간성의 이원적 시각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전편을 관통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2권 <해설>중 p429)
  13.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도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 우리가 한 일은 다만 그 같은 저들의 믿음을 가로막거나 깨뜨리지 않은 것 뿐이었다." - 이문열, 「사람의 아들」 중 어느 제사장의 말.
  14. 마태복음 5장 4절.
  15. 실제로는 '어거지'.
  16. "모든 일에는 실제로 이유가 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늘 사건보다 앞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쓰나미는 해저 지진 때문에 일어나고, 지진은 지각판의 움직임 때문에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이때 '이유'는 '과거의 원인'을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유'를 전혀 다른 뜻으로, '목적'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 리처드 도킨스,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중 p234, 김영사, 2012.
  17. 알렉스 헤일리, 「뿌리」의 <해설>중 p829, 열린책들, 2009.
  18. "이젠 내가 너의 교회야!" (2권, p225)
  19. 김두식,「불편해도 괜찮아」중 p201,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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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42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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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6주 밖에 안 된 그 사내아이는 나 알렉스 헤일리였다. (p790) 

장장 80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읽어온 시점에서 맞이했던, 이 길지도 않은 문장을 읽는 순간, '아! 이거 뭐지?" 정말 무언가 둔탁한 것으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나 --- 스스로를 "쿤타 킨테1로부터 일곱 번째 세대"(p822)라 부르고 있는, 작가2 알렉스 헤일리가 써놓은, 이후 30여 페이지에 걸친, 이 한 편의 역사 이야기를3 쓰게 된 계기와 과정을 통해, 


앞서의 800여 페이지에 대한 요약 뿐 아니라, 이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작품의 딱 중간쯤 읽었을 때 써놓았던, '이 소설은, 단순히 흑인의 조상 찾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미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만도 아니며, 이건 여전히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도 보여지는, 어쩌면 인간의 근원적 성질에 관한 이야기일지도...'란 저의 미심쩍었던 예감에 대한 확신 또한 얻을 수 있었었지요.    


………………………………………………………………………………………


나 자신의 조상들에 관한 책이라면, 자동적으로 모든 아프리카 후손들의 상징적인 일대기가 될 터였으니 - 그들은 모두가 예외 없이, 아프리카의 어느 흑인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어떤 사람, 납치를 당해서 쇠사슬에 묶인 채 어느 노예선에 실려 같은 바다를 건너 항해했으며, 몇몇 농장을 전전하고, 그때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을 쿤타와 같은 어떤 사람들의 씨앗들이기 때문이었다. (pp 813~814)

폴 비티의 소설 제목, 우리말로 '배반'이라 번역되어진 sellout이란 단어의 뜻은 'someone who forgets their roots'이라 사전은4 말해줍니다. 그 단어와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듯한, 제목 「Roots」를 통해 짐작되어지듯 이 작품 속, '쿤타 킨테'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근원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왔지요.5 그리고/그러나 --- '잊지 않으려는' 그와 같은 노력에도 예의,  


열 일곱살 때, 노예 상인들에게 붙잡혀 미국으로 건너온 지 십칠 년이 지난 어느 날, 즉 그의 삶이 고향 주푸레에서 살았던 기간과 "흰둥이의 땅"(p326)에서 보낸 기간으로 정확히 양분되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이 "아직도 아프리카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듯 '검둥개'가 되었나?"(p326)란 의문을 가졌었던 초기 혼란의 시기는 존재했었더랬습니다. 이후, 


그가 세상물정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 다른 검둥이들과 가까이 지내는 요령도 터득하게 되었음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이 그가 결코 될 수 없듯이, 자기도 정말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p353)

비록 킨타 쿤테가 상당 기간 동안, "자유의 몸이 되어 아프리카로 가느니 차라리 노예로서 버지니아에 살고 싶어 한다"(p355)와 같은, 말하자면 '이민 2세대' 노예들의 정서에까지는 동화되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6 


"관습은 매사에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특히 복종의 의무를 알게 하는 데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 관습은 우리가 굴종을 거부감 없이 삼키게 함으로써 더 이상 굴종의 독으로부터 쓴맛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p70) ……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p81)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중, 생각정원, 2015.  


그 역시, 


인정하기는 부끄러운 노릇이었지만, 그는 … 이 농장에서의 삶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다. 가슴속 깊이 그는 고향을 다시는 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내부에서 소중하고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이 죽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p3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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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8란 구절로 특징지어질 수 있겠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과거의 모든 것은 고통 혹은 상실이었다"9라는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었다라면, 이 작품 「뿌리」는 


스스로 좋은 세상 만들지 않으면, 세상 절대 좋아지는 법 없어요! (p775) 

로 대변될 수 있겠는, 그러한 '고통 혹은 상실'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천착하고 있다라,10 그리고 그러한 극복이 (최소한 일부일 수일지도 모를 흑인들에겐 어쨌든) 실현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라 저는 생각합니다.11 다시 말해, --- "무엇이든 선택해서 사랑할 수 있는 - 욕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 곳에 도달하는 것"12, 혹 "아무도 더 이상 너 소유하지 않는다 그런 뜻"(p735)으로, 흑인 작가들에 의해 정의된 '자유'라는 개념, 이 '자유'의 쟁취란 것에 대해선 적어도,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란 메시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질 소지가, 다분히 있다란 것이죠. 왜 그러냐구요? 


………………………………………………………………………………………


"우리는 역사를 책이라고 생각한다. 페이지를 넘겨 버리면 과거를 잊을 수 있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적힌 종이가 아니다. 역사는 기억이며, 기억은 시간과 감정이자 노래다. 역사는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 폴 비티, 「배반」중 p159, 문학동네, 2017.


물론! 자신들의 처지를 '뼈다귀'로13 표현해야 했던 흑인의 지위가, 이 책에서 보여지듯 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상상도 못했던 변화를 맞이한 것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으며, 그 드라마틱했던 변화의 실제 과정을 보여주었다라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엔 더할 나위 없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져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 변화의 성공에 대해 가해지고 있는,  


"백인처럼 옷을 입고, 백인처럼 말하며, 백인처럼 생각하고 백인 중산층 문화의 가치를 표현"14해가며 이루어낸 약간의 성공이며, 하지만 그 약간의 성공이란 것마저 기실 "자신이 흑인에게 '양보할' 뭔가가 있는 듯한, 또는 흑인이 그들의 흑인 특성을 '극복하도록' 도와줘야할 것 같은"15 백인들의 지니고 있는 일종의 의무감스런 동정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란 비판을 이겨낼 만한 맷집이, 과연 이 작품 「뿌리」에 있느냐란 질문에, 전 긍정의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정말 듣기 거북하니까, 그 케케묵은 노예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해요!"(p792)라 항변하는 세대도 있겠으나, 아직은 "어떤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지만, 또 어떤 일들은 절대 잊지 못하잖니. … 자리가 여전히 거기 남아 있어. … 단지 내 재기억 속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 말이야"16라 생각하는 세대가 더 많지 않을까, 즉 '극복해내었다'란 성취감보다는, '과거에의 상처'가 아직은 더 크다라는 생각이 있기도, 그리고, 어쩌면 그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겠는...   


"자유를 찾는 일과 자유를 찾은 자신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별개"


-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중 p161, 문학동네, 2014.

미국에서 흑인으로 존재한다/살아간다라는 것이, 위와 같은 관념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느냐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워낼 수 없다란 것이, 자유에 대한 '쟁취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에, 맘 편히 열광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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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 이 작품에 5/5의 만족도를 표시하는 것엔, 하등의 주저함도 없었다라는... 




※ 함께 읽어보길, 주저함 없이 추천해보는 책들

- 토니 모리슨 : 「빌러비드

- 폴 비티 : 「배반

- 존 하워드 그리핀 : 「블랙 라이크 미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 자발적 복종 



...금연 242일째



  1. "'아프리카 인'이라 부르는 한 남자"(p793)
  2. "알렉스 헤일리는 '미국 전기 작가 biographer'나 '저자authro'로만 지칭되며, … '소설가 novelist'로 분류하지를 않는다." (p823)
  3. "마침내 나는 우리 가족 7대의 얘기를 여러분이 지금 읽는 이 책으로 엮어 냈다." (pp818~819)
  4. Urban dictionary.
  5. “나 이 얘기 하는 까닭은, 너 배 속 아기하고 또 낳을 다른 아기들 모두 증조부 어떤 사람이다 알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p597)
  6. 정서적 차이는 비단 세대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개인적 경험의 차이 또한, 매우 커다란 간극을 만들어 내었었죠. --- “한 번 팔렸던 경험 하면 영원히 그런 일 잊지 못해요! 그리고 다시는 옛날 같지 않아져요! 당신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죠. 그래서 당신 어떤 쥔님도, 여기 당신 쥔님 포함해서, 아무도 믿을 수 없다 하는 사실 이해 못해요!” (p606)​
  7.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앞의 책 p69.
  8. 토니 모리슨,「빌러비드」중 p448, 문학동네, 2014.
  9. 토니 모리슨, 앞의 책 p102.
  10. 치킨 조지가 닭싸움꾼으로 성공하는 과정이 유난히 길게 묘사되어 있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에 기인된다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좀 삐딱하게 보자면 결국엔 또 한 편의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기라 폄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11. 반면, 작가 폴 비티의 견해는 이와는 사뭇 반대되는 듯 보입니다. --- "나의 상대적 행복이 여러 세대가 고통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노예선을 타고 온 어느 조상님이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하는 사이, 자기 똥물에 다리를 무릎까지 담그고 잠시 쉬는 사이, 언젠가 손자의 손자의 손자의 손자가 와이파이를 쓸 수 있을테니 숱한 세대를 걸쳐 살인과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괴로움과 극심한 질병을 겪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가 그 와이파이가 속도도 늦고, 신호도 불안정하다면."- 폴 비티, 「배반」중 pp297~298, 열린책들, 2017.
  12. 토니 모리슨, 앞의 책 p269.
  13. 만약 북군과 남군간에 전쟁이 터지면 어느 편을 들겠느냐는 남부 백인 주인의 질문에 한 흑인 노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뼈다귀 하나 놓고 싸우는 개 두 마리 보셨죠, 쥔님? 글쎄요, 우리 검둥이들 바로 그 뼈다귀입니다." (p744)
  14. 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중, 살림, 2009.
  15. 존 하워드 그리핀, 위의 책 중.
  16. 토니 모리슨, 위의 책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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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너나 나 같은 여자한테 필요한 유일한 기술은 학교에선 가르치지 않는다. … 단 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 것)이다.(p30) …… 이 세상에서 여자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다.(p14)

15개 업체에게 총 2억원의 포상금을 나눠주려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기로 하죠. --- 동등 분배는 아니고, 각자의 다음 반기 실적에 따른 차등 분배 방식입니다. 과거 5년여 간의 실적을 바탕으로 simulation을 돌려봤더니, 이 분배의 기준이 제 아무리 '잘한 놈한텐 많이, 못한 놈한텐 적게'라지만, 잘한 놈들한테 너무 많이 돌아가는 겁니다. 고민 끝에, 매출이 발생되는 세 부분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묶습니다. A라는 매출 부분에서 제 아무리 탁월한 실적을 올렸다 하더라도, A 부분의 평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그렇게, 


A/B/C 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에 상한선을 두고 분배한 후, 전체를 계산해 봤더니, 그러한 구분 없이 분배했었을 때보다는 분배의 쏠림이 많이 줄어든 결과가 나왔으며1, 더욱이, A/B/C 각 부분에의 할당액을 조정함으로써도, 분배자가 사전적(ex ante)으로 그리는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분배율을 선택까지 할 수 있었다라면 ---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러더의 권력이란 건, 가질 수만 있다면 이토록 매력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허나 그 반대로, 


그러한 권력 혹은 체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순응하여야만 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위의 예에서 보자면, --- 실적이 탁월한 업체의 사장 홍길동은 (그가 극도의 이타주의자가 아닌 한) 많이많이 억울하게 됩니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올렸었건만, '너무 좋은 성과'라는 이유만으로 자신, 홍길동이 당연히 받아야 한다라 생각되는 몫을 빼앗겨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이 때, 권력을 쥔 자의, A/B/C 각 부분으로 나누어 할당액을 설정하겠다라 결정한 것, 그 할당액의 금액, 그리고 결정권자가 상정하고 있는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분배율'의 설정 등에 대한 홍길동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 되는걸까요? 만약, 홍길동의 비난이 정당하다면, 자동적으로 권력을 쥔 자의 결정은 불의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


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그 모든 한숨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작은 눈송이로 나뉘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 없이 견디잖니"(p125)

「연을 쫓는 아이」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크게 보자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비슷한 주제의 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김지영C가 자신의 삶에 대한 불평과 합리적이지 못한 부분들을 조곤조곤  펼쳐놓았었다면, 이 소설 속 여인들, "삶에 요구하는 게 별로 없는 여인"(p544)들은 그저 "불평을 밖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짐을 지고, 체념한 채 운명을 견디고 있는 사람"(p335)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뿐 


가는 「연을 쫓는 아이」에서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다른 것들이 진실보다 더 중요했던 낯선 세계"2라 표현했었죠. 이 때, 작가가 쓴 '낯선'이란 단어는, 명백히 미국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낯설음'이었다라 생각합니다. 반면, 자신보다 30살 쯤 어린 신부에게, "여자의 얼굴을 남편만 볼 수 있어. 그 점을 염두에 두라고"(p100)라 당연스레 생각하고, 그러하기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남성에겐, 결코 낯선 세계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제 3자로서 우리는 과연, 아프가니스탄의 남성, 더 나아가 그러한 문화에 대해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요?


​"너는 책을 갖고 다니고 시를 외우면서 네가 아주 영리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래, 너의 영리함이 지금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를 길바닥에 나앉지 않도록 해주는 게 너의 영리함이냐, 아니면 나냐? 내가 혐오스럽다고? 이 도시에 사는 여자들의 절반은 나 같은 남편을 만나려고 죽기 살기로 덤빌 거다. 죽기 살기로 말이야. … 내가 너한테 하나 말해주마. 균형이다. 라일라, 바로 그게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해라." 그날 밤 내내 라일라의 배를 꼬이게 만든 건 라시드의 말이 마지막 한 마디까지 구구절절 맞다는 사실이었다. (p383)

조선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일라는, 저보다 너댓 살 정도 어린 것으로 묘사된 인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라일라 사이에 존재하는, --- 남자와 여자라는 점, 태어난 곳이 대한민국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점, 그리고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근본적인, 그리하여 사실은 굉장히 커다란) 차이가, 라시드의 위 주장에 대한, 옳다/그르다에 대한 상이한 판단을 낳게 해준 것이죠. 그러하기에, 제가 그르다 생각한다하여, 그와 똑같은 판단을 라일라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게 됩니다. 심지어, '보편적 인권'이라는 개념 하의 판단이라는 것마저도, 도무지 이 상황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란 생각까지 들기도 하지요. 왜 그러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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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라미3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말의 부당함을 이해하고, 죄가 있는 건 하라미를 만든 사람들이지 태어난 죄밖에 없는 하라미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 나중에 나이가 들었을 때 마리암은 … 하라미는 아무도 원치 않는 존재라는 걸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 가족, 가정, 애정 등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들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불법적인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pp10~11)      

사생아라는 존재가 '불법적인 존재'가 되게 한 것은, 단연코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기인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의 관습'이란 건 도대체 왜,  그렇게 shaping되어져 왔을까요? 그것이 정녕, 권력(자)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 그러한 사회적 관습은, 그러한 모습의 관습이 그 사회에 필요했었었기에, 그러니까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없는 것보다는, (지금엔 그 오래 전 시절에의 이유란 걸 추론조차 해볼 수 없을지언정) 존재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종족/민족의 보존이라든가 등등의 이유로 하여) 더 나았었다라는, 지극히 오랜 세월 동안의 결과물들이 차곡차곡, 그 먼지쌓인 세월을 겨쳐오며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립된 것이다라는, '사회적 진화'의 결과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이 논리에 별 거부감 없이 동의할 수 있다라면,  

이 소설을 읽고 갖게 되는,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인하여, 그네들 사회/문화에 대한 비난으로 곧장 이어지는 건 결코 옳은 태도일 수 없습니다. 비난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고, 알고난 후에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쯤은 진지하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야기'의 소재로서만이 아닌, 이 작품 속 여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건네어주는 훨씬 더 근본적인 고민의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

마리암은 부르카의 망사를 통해서, 그림자의 팔이 그림자의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마리암은 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많은 걸 소망했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 그녀에게 엄습해온 건 더 이상 회한이 아니라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한 시골 여자의 하라미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불쌍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의 보호자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이건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대한 적법한 결말이었다. (pp505~506)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에게 주어졌었던,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4과 같은 기회가, 이 작품 속 마리암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녀에겐 그저 'destined to be'의 삶을 살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지요. 하지만 작가는, 또 다른 주인공인 라일라에겐, 이전과 다른 선택의 여지와 실행가능한 환경을 선사함으로써, 다른 모습으로의 '사회적 진화'가, 그곳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곳의 문화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 물론 관심을 가져볼 생각 또한 없구요 -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생겨나는 안도감/행복이라는 게 참으로 부질없고 잔인한 것이라 여러 번 저 스스로 말해왔었었거늘, 저 역시 강인하지 못한 사람인지라, 지금 제게 주어진 생물학적,사회적,시대적 환경에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건 부인할 수 없네요. 뭐 그렇다고, 2017년의 대한민국이, 이 작품 속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비난할 수 있는 우월함을 지니고있다라 느껴지는 것도 아니면서도 말입니다...

 여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 : 82년생 김지영」, 빌러비드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다른 작품 : 연을 쫓는 아이」, 




  1. '배아픔'의 해결을 위해선 '사회주의적 속성'이란 게, 거의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지요.
  2.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p443, 현대문학, 2010.
  3. "사생아를 비하하여 일컫는 말" - 역자 주
  4. ​"오거라.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이 있어." -
    할레드 호세이니, 위의 책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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