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나 같은 여자한테 필요한 유일한 기술은 학교에선 가르치지 않는다. … 단 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 것)이다.(p30) …… 이 세상에서 여자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다.(p14)
15개 업체에게 총 2억원의 포상금을 나눠주려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기로 하죠. --- 동등 분배는 아니고, 각자의 다음 반기 실적에 따른 차등 분배 방식입니다. 과거 5년여 간의 실적을 바탕으로 simulation을 돌려봤더니, 이 분배의 기준이 제 아무리 '잘한 놈한텐 많이, 못한 놈한텐 적게'라지만, 잘한 놈들한테 너무 많이 돌아가는 겁니다. 고민 끝에, 매출이 발생되는 세 부분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묶습니다. A라는 매출 부분에서 제 아무리 탁월한 실적을 올렸다 하더라도, A 부분의 평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그렇게,
A/B/C 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 부분에 상한선을 두고 분배한 후, 전체를 계산해 봤더니, 그러한 구분 없이 분배했었을 때보다는 분배의 쏠림이 많이 줄어든 결과가 나왔으며, 더욱이, A/B/C 각 부분에의 할당액을 조정함으로써도, 분배자가 사전적(ex ante)으로 그리는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분배율을 선택까지 할 수 있었다라면 ---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러더의 권력이란 건, 가질 수만 있다면 이토록 매력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허나 그 반대로,
그러한 권력 혹은 체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순응하여야만 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위의 예에서 보자면, --- 실적이 탁월한 업체의 사장 홍길동은 (그가 극도의 이타주의자가 아닌 한) 많이많이 억울하게 됩니다.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올렸었건만, '너무 좋은 성과'라는 이유만으로 자신, 홍길동이 당연히 받아야 한다라 생각되는 몫을 빼앗겨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이 때, 권력을 쥔 자의, A/B/C 각 부분으로 나누어 할당액을 설정하겠다라 결정한 것, 그 할당액의 금액, 그리고 결정권자가 상정하고 있는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분배율'의 설정 등에 대한 홍길동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 되는걸까요? 만약, 홍길동의 비난이 정당하다면, 자동적으로 권력을 쥔 자의 결정은 불의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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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자의 한숨이라고 했었다. 그 모든 한숨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작은 눈송이로 나뉘어 아래에 있는 사람들 위로 소리 없이 내리는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 눈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고통당하는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거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걸 우리는 소리 없이 견디잖니"(p125)
「연을 쫓는 아이」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크게 보자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비슷한 주제의 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김지영C가 자신의 삶에 대한 불평과 합리적이지 못한 부분들을 조곤조곤 펼쳐놓았었다면, 이 소설 속 여인들, "삶에 요구하는 게 별로 없는 여인"(p544)들은 그저 "불평을 밖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로 짐을 지고, 체념한 채 운명을 견디고 있는 사람"(p335)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뿐.
작가는 「연을 쫓는 아이」에서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을 "다른 것들이 진실보다 더 중요했던 낯선 세계"라 표현했었죠. 이 때, 작가가 쓴 '낯선'이란 단어는, 명백히 미국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낯설음'이었다라 생각합니다. 반면, 자신보다 30살 쯤 어린 신부에게, "여자의 얼굴을 남편만 볼 수 있어. 그 점을 염두에 두라고"(p100)라 당연스레 생각하고, 그러하기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요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남성에겐, 결코 낯선 세계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제 3자로서 우리는 과연, 아프가니스탄의 남성, 더 나아가 그러한 문화에 대해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요?
"너는 책을 갖고 다니고 시를 외우면서 네가 아주 영리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래, 너의 영리함이 지금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를 길바닥에 나앉지 않도록 해주는 게 너의 영리함이냐, 아니면 나냐? 내가 혐오스럽다고? 이 도시에 사는 여자들의 절반은 나 같은 남편을 만나려고 죽기 살기로 덤빌 거다. 죽기 살기로 말이야. … 내가 너한테 하나 말해주마. 균형이다. 라일라, 바로 그게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이다.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해라." 그날 밤 내내 라일라의 배를 꼬이게 만든 건 라시드의 말이 마지막 한 마디까지 구구절절 맞다는 사실이었다. (p383)
조선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일라는, 저보다 너댓 살 정도 어린 것으로 묘사된 인물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라일라 사이에 존재하는, --- 남자와 여자라는 점, 태어난 곳이 대한민국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점, 그리고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근본적인, 그리하여 사실은 굉장히 커다란) 차이가, 라시드의 위 주장에 대한, 옳다/그르다에 대한 상이한 판단을 낳게 해준 것이죠. 그러하기에, 제가 그르다 생각한다하여, 그와 똑같은 판단을 라일라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게 됩니다. 심지어, '보편적 인권'이라는 개념 하의 판단이라는 것마저도, 도무지 이 상황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란 생각까지 들기도 하지요. 왜 그러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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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하라미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말의 부당함을 이해하고, 죄가 있는 건 하라미를 만든 사람들이지 태어난 죄밖에 없는 하라미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 나중에 나이가 들었을 때 마리암은 … 하라미는 아무도 원치 않는 존재라는 걸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 가족, 가정, 애정 등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들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불법적인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pp10~11)
사생아라는 존재가 '불법적인 존재'가 되게 한 것은, 단연코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기인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회의 관습'이란 건 도대체 왜, 그렇게 shaping되어져 왔을까요? 그것이 정녕, 권력(자)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 그러한 사회적 관습은, 그러한 모습의 관습이 그 사회에 필요했었었기에, 그러니까 사생아에 대한 차별이 없는 것보다는, (지금엔 그 오래 전 시절에의 이유란 걸 추론조차 해볼 수 없을지언정) 존재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종족/민족의 보존이라든가 등등의 이유로 하여) 더 나았었다라는, 지극히 오랜 세월 동안의 결과물들이 차곡차곡, 그 먼지쌓인 세월을 겨쳐오며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립된 것이다라는, '사회적 진화'의 결과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이 논리에 별 거부감 없이 동의할 수 있다라면,
이 소설을 읽고 갖게 되는, 마리암과 라일라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인하여, 그네들 사회/문화에 대한 비난으로 곧장 이어지는 건 결코 옳은 태도일 수 없습니다. 비난하기 이전에 알아야 하고, 알고난 후에는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쯤은 진지하게 해보는 것이야말로, 단지 '이야기'의 소재로서만이 아닌, 이 작품 속 여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건네어주는 훨씬 더 근본적인 고민의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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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암은 부르카의 망사를 통해서, 그림자의 팔이 그림자의 칼라슈니코프 소총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마리암은 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많은 걸 소망했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 그녀에게 엄습해온 건 더 이상 회한이 아니라 한없이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한 시골 여자의 하라미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쓸모없는 존재였고,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불쌍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잡초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이자 벗의 보호자로서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 마리암은 이렇게 죽는 것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이건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대한 적법한 결말이었다. (pp505~506)
「연을 쫓는 아이」의 주인공 아미르에게 주어졌었던,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과 같은 기회가, 이 작품 속 마리암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녀에겐 그저 'destined to be'의 삶을 살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지요. 하지만 작가는, 또 다른 주인공인 라일라에겐, 이전과 다른 선택의 여지와 실행가능한 환경을 선사함으로써, 다른 모습으로의 '사회적 진화'가, 그곳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곳의 문화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 물론 관심을 가져볼 생각 또한 없구요 -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생겨나는 안도감/행복이라는 게 참으로 부질없고 잔인한 것이라 여러 번 저 스스로 말해왔었었거늘, 저 역시 강인하지 못한 사람인지라, 지금 제게 주어진 생물학적,사회적,시대적 환경에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건 부인할 수 없네요. 뭐 그렇다고, 2017년의 대한민국이, 이 작품 속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비난할 수 있는 우월함을 지니고있다라 느껴지는 것도 아니면서도 말입니다...
※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다른 작품 : 「연을 쫓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