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 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p435, 부키, 2014.
경제학(의 정치적 측면)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단언은 여전히 저에게 '낯설고 의아'합니다만,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이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경제 문제들이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점만큼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하한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역시 나름의 (말이 되는)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현실 경제가 정치학이나 윤리학의 대상이 아닌 한, 적어도 특정 정책 혹은 현상에 대한 논리적 근거의 제시를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필요로 하게 되겠지요.
몇 번 언급했었습니다만, 저는 학문으로서의 거시경제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라는 건 결국 그에 대한 지식이 매우 빈약하다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재에도 관심이 없다라는 건 그 빈약함을 개선할 의지 또한 없다라는 걸 의미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작년 2018년 논란의 중심에 자리잡았던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정책은 대한민국 사회의 일 구성원인 저에게도 그 찬반의 핵심이 대체 무얼까란 호기심을 자아내 주었고, 그 정책의 이론적 배경에 대한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라는 (이게 뭔 --;;) 의무감 같은 걸 안겨주더군요. 이것이 바로,
위 기사에서 언급된 바로 이 책,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을 펼쳐들게 된 계기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본 감상문에서는 '소득주도 성장'과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만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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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원론에서 배우게 되는 국민소득계정 수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 국가 경제의 총수요(AD)는 가계소비(C)와 민간투자(I), 정부지출(G), 그리고 수출과 수입(NX)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같은 총수요의 대상이 되는 재화와 서비스는 또한 동일한 경제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국민소득(Y)은 곧 총수요(AD)와 동일하다는 것이죠. 이를 바탕으로 --- 총수요의 일 구성 요소인 가계소비를 증대시킴으로 총수요를 진작하면 (이래저래한 과정을 거쳐) 국민소득 또한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기본적으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가계소비의 진작을 통한 성장 촉진'이란 모토 자체는 이론적인 면에서 딱히 태클 걸만한 사안이 없을뿐만 아니라, 예의 정치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 대공황 시절에는 (가계소비가 아닌) 정부지출의 증대를 통한 총수요 진작 정책을 시행하여 성공을 거두었었기도 하며, 심지어 개별 기업의 차원에서도 현실적 효과를 나타내었던 유사한 역사적 전례가 있기도 하지요. (물론, 이 모토에 정치적 의도가 가미되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미 현실적 유용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 '낙수효과(trickle-down)'를 줄기차게 정책에 반영했던 '이명박 - 박근혜 정부'의 경우가 그러했었죠.) 이같은 정책이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문구로 시행되었던 것일 뿐인데, 대체 왜 이런 논란이 생겨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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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요의 감소는 노동자의 살림을 악화시키는 소득분배의 변화로부터 발생한다. 즉 노동자의 소비성향이 이윤 취득자의 소비성향보다 높기 때문에, 노동자가 차지하는 분배율이 적을수록 총수요는 감소한다. (p161)
로또 1등 당첨자가 많아질수록, 각 1등 당첨자가 수령하게 되는 금액은 당연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로또 뿐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적으로도 동일하게 적용되지요. 즉, 일 경제 전체가 생산해낸 결과물을 분배함에 있어, 자본(가 계급)에게로의 분배몫이 늘어나게 되면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아갈 분배몫이 줄어들게 되며, 그 반대 역시 성립되게 되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 소득주도 성장론이란 결국, 분배의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으며, 총수요의 (보다 많은) 증대를 위해서는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노동자에게 보다 더 많은 몫이 분배되어야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이 주장하는 바는, 노동소득분배율을 향상시키자입니다. "실질임금이 상승하면 소비가 증가하고, 그 결과로 노동 수요가 증가해 실업이 감소"(p147)한다라는 내용이죠. 그리고 "판매가 증가했기에 이제 기업은 더 높은 설비 가동률을 예상해 자본축적률을 높인다"(p192)라고 결론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질문인 임금 상승으로 인한 기업 이윤의 감소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비용의 역설'이라는 논리로 설명해주고 있지요.
다른 조건들이 일정할 때, 한 기업만이 실질임금을 올리고 총비용 마진을 줄이는 경우, 확실히 이윤이 감소하고 이윤율은 하락한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총비용 마진을 줄이는 경우에는 경제 전체의 가동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거시 경제적 이윤율은 상승한다. (p194)
이는 단지 포스트 케인스학파만의 주장은 아닙니다. KDI에서 내놓은 보고서에서도 위와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으니까요. 거시경제학에의 지식이 빈약한 저에게는, 이 책과 KDI의 보고서를 반박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여 위와 같은 이론적 결론을 '사실'이라 받아들이겠습니다만, 대한민국에서 현재에도 진행 중인 논란의 근원은 다름아닌 --- '임금주도 성장 wage-led growth'이란 학술적 용어를 대한민국에서 '소득주도 성장income-led growth'이라는 정치적 용어로 변화시킨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Terminology 】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다. …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p231, 제3의공간, 2017.
'글쓰기'만이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952년 민주당이 대선에서 내걸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란 캐치프레이즈로부터 시작하여, '공장일을 내일처럼'이란 1970년대 공장 새마을 운동의 구호, 심지어 '정의사회 구현'이란 문구로 자신의 정의롭지 못한 집권 과정을 감추려 했었던 제5공화국 정권까지 한 단어, 한 문장이 지닌 프로파간다적 성격은 지극히 정치적인 색채로 포장되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게 되지요.
"소득주도성장은 임금주도성장 개념을 한국 경제의 현실을 반영해 수정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자영업 비율이 높은 특징이 있다. 그리고 자영업자 중에서도 극히 영세한, 경제적인 약자들이 많다. 그래서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을 포함해 영세 사업자들도 소득이 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금 주도 대신에 소득 주도로 개념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로에 선 소득주도성장, 나원준 교수와 파헤치다", 경북대 신문, 2018.09.16.
매우 높은 자영업자(self-employed) 비율을 지닌 대한민국이기에 '임금'이란 단어 대신 '소득'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겁니다. 이제 --- 대한민국 정부는 '임금'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계급적 의미를 '소득'이란 단어로 희석시킬 수 있게 되었죠. '임금'이란 단어가 풍기는(?) '노동자, 노동자 파업' 등의 의미가 아닌, 그 누구나에게 해당될 수 있는 '소득'이란 단어로 대체시켜 버린 겁니다. 뭐, 이 같은 견해가 너무 민감하고 심지어 정치적이지 않느냐라 지적에는 고개숙일 수 있다하여도,
'임금'이란 단어를 '소득'이란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노동력 구분의 단순화'가 초래되었다라는 점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기계공학과 교수가 지닌 노동의 퀄리티가 기계 공장 근로자가 지닌 노동의 퀄리티보다 높은 경우는 학교의 강의실 내에서이지, 밀링머신을 조작하고 제품을 가공하는 현장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하듯, 일 개인이 지닌 노동력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생산성이 현저하게 차이나게 되는 것이거늘, 그러하기에 '생산성에 따른 노동(력)의 구분'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 '소득주도'라는 문구로 인해 포스트 케인스학파 이론이 주창하고 있는 '임금주도 성장'의 진의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원인에의 치료 】
유효수요(effective demand)와 역사적 시간(historical time)은 확실히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모든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경제학 이론은 이 특징들에 기초하고 있다. … 유효수요의 원리에 따르면, 재화의 생산 자체는 수요의 크기에 따라 조정된다. 이 원리는 모든 포스트 케인스학파 접근법에서 핵심을 이룬다. (pp46~47)
지금의 논란은 '중소기업을 포함한 영세 사업자들'의 소득도(!)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유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상징적인/가장 큰 현실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해 과연 증가되었느냐, 그리하여 그들의 유효수요가 증대되었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자신있는 답변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건 결국 ---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라는 지긋지긋한/해묵은 논쟁을 다시 또 등판시켜 내지요.
저 역시 성장의 최종적 목표는 분배라는, 다시 말해 성장은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라 생각합니다만, 동원 가능한 수단의 현재 상태에 대한 면밀한 검토 이전에, 그러니까 현재 지니고 있는 수단이 목표로 하는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에 대한 조사 없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의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가동을 먼저 시작해 버렸기에, 현재와 같은 삐걱거림이 많은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정확한 예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치킨집 사장의 소득에서 일부를 가져다가 치킨집 알바의 소득을 올려준다 한들, 포스트 케인스학파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계소비성향이 더 높은' 계층으로의 소득 이전(분배)이 이루어진 것인가란 질문에 현 정책 입안자들이 먼저 답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진정한 소득의 재분배를 통한 '소득주도 성장'을 원한다면,
"'만드는 자makers'란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일군의 사람, 기업, 아이디어다. '거저먹는 자takers'는 고장난 시장 시스템을 이용하여 사회 전체보다는 자기 배만 불리는 이들을 말한다. 거저먹는 자들의 범주에는 다수의 금융업자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그릇된 사고에 젖어 있는 민간 및 공공 부문의 리더들, 그러니까 금융화가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 심지어 민주주의도 좀먹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CEO, 정치인, 규제 담당자까지 들어간다."
- 라나 포루하,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p30, 부키, 2018.
경제 내의 (최저임금 상승과는 상관 없는) '거저 먹는 자'들의 몫을 가져와 (최저임금 상승과 커다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만드는 자'들에게 더 많은 분배가 돌아갈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죠. (현재와 같은) '만드는 자'들 내부에서의 소득 재분배만으로는 결코! 현 정책 입안자들이 이상으로 그리고 있는 수준의 '소득주도 성장'을 이루어낼 수 없을 겁니다. 이건 마치, 운전 중에 오른쪽 발바닥에 물린 모기 자국으로 인해 간지러워 죽겠는데, 차마 차를 멈추진 못하겠고 하여 입술을 깨물어 발바닥의 간지러움을 잊으려 한다든가, 그러다 입술에서 피가나면 왼쪽 허벅지를 꼬집어 발바닥의 간지러움을 잊으려 한다든가 하는 식의, 근본 원인의 처방을 외면한 채 몸의 다른 부위로 고통을 전가하는 것일 뿐입니다. 목적지에 좀 늦게 도착하게되더라도, --- 차를 안전한 곳에 세워 발바닥을 긁고, 버물리 같은 약을 발라 간지러움을 가라앉힌 다음에 운전을 하는 것이 올바른 처방이겠죠.
제 지식이 이해한 바로는,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임금주도 성장'에 대한 이론과 주장은 기본적으로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금융자본주의'하에서는 해당 이론의 정책적 수립과 집행을 위해선 현실적 교정이 반드시 사전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본집적도의 급격한 증가 … 이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의 산업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가 대체했음을 의미했다. 또한 부의 분배가 기업가와 노동자에게서 주주와 은행 등 금융자본가에게로 쏠리고 있음을 뜻한다."
- 홍익희, 「월가 이야기」 p89, 한스미디어, 2014.
【 국가 책무의 전가 】
경제 불황기는 정체기에는 기업들이 단위 비용을 당연히 삭감하고자 노력하며, 이는 거시 경제적 고용수준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런 기술적 실업의 악순환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유럽에서 발생한 상황과 유사하다. 포스트 케인스학파 연구자들은 유럽 국가들에서 나타난 실업 증가 및 높은 실업률의 원인이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유효수요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p172)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유효수요가 부족'하여 경기가 침체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저의 능력 밖입니다. 어쨌든 --- "경제가 수요 주도적demand-led이라는 주장이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하다"(p147)라고 하니, 과부족의 여부를 떠나 수요의 증대가 성장에 매우 중요한 한 축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노동자가 기업에서 받은 소득을 '시장임금'이라고 한다면, 사회에서 받는 보육료 지원금, 기초노령연금 등은 '사회임금'이라고 부를 수 있다. …… 2000년대 중반 한국의 사회임금은 7.9퍼센트이다. 우리나라 가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가계 지출의 92.1퍼센트를 직접 시장에서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 한국에서는 왜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갈등하는가? 다양한 사회,정치적 요인이 있지만, 사회임금이 전체 가구 운영비에서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원인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가계 파탄'을 의미한다. …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는 시장임금에만 의존해 사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구조조정에 취약한지,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낮은 사회임금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왜 초과 노동에 얽매이는지도 설명해 준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의 위기를 완화해 줄 수 있는 사회임금에 대한 기대가 없다. 일감이 있을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더 시장임금을 모아 두어야 한다. 종종 언론들이 한국의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임금 올리기에 몰두한다고 비판하지만, 노동자들이 시장임금에 목숨을 거는 건 척박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과도한 초과 노동, 격렬한 구조조정 비용은 역설적으로 낮은 사회임금에 대응해 노동자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합리적' 경제 행위일 수 있다. 노동자 개인에게 이것을 탓할 수는 없다."
- 강수돌 외, 「리얼 진보」, pp223~228, 레디앙, 2010.
일 가계의 소득을 위와 같이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으로 나눈다면, '최저임금 인상' 등은 분명 '시장임금'에 해당하는 부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더 많은 '사회임금'을 부담하려는 노력을, 그리하여 '수요의 증대'를 유발하려는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걸까요?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임금 주도 성장론의 핵심은 노동자의 '실질' 임금 상승이며, 특히 최저임금 상승이 중요하다. 최저임금 상승이 노동자 임금의 하한선을 끌어올려 전체 임금 상승에 기여하고, 기업가(고소득층)에 비해 노동자(저소득층)의 소비성향이 크기에 친노동자적 소득분배를 유효수요를 증대시켜 경제성장을 이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명목'이 아닌 '실질' 임금 상승(임금 몫의 증가)이라는 점이다. 기업이 노동자의 임금 상승분을 모두 가격에 전가할 경우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거나 '임금-가격 상승'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 가계 부문의 소비지출 증가를 통해 유효수요를 진작하려면 가계 소득의 증가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확충이 필요하다. 사회보장제도가 약화될 경우 가계 부문은 미래 (소득 및 지출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행동 (과잉 저축)을 보이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pp 236~237)
기업에게 법률로 강제되는 명목 소득의 상승에 대응하여, 정부는 과연 어떤 면에서 국민들의 '실질' 소득 증대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가계부채 상황에선, 늘어난 소득의 (극히) 일부만이 가처분소득의 증가로 이어지게 되겠죠. 이게 뭐 다 '대출 받아 집사라' 했던 과거 정부의 폐해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확신으로 '소득주도 성장'을 밀어붙이는 현 정부라면 그에 대한 처방도 함께 내놓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에 더해,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인건비 상승은 결국 제품 가격 상승을 초래하게 되고, 결국 경제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실질 소득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라는 기업들의 주장이 어불성설이라면, 마땅히 정부는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정책의 효과를 체감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하다? --- '조금만 더 참아라. 1~2년 쯤 후면 정책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란 정책입안자의 발언은 지금 당장!이 중요한 (이 정책으로 혜택을 받을 것이라 말하는) 저소득층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겁니다.
【 시스템 개선에의 의지 】
물론 이러저러한 정책들을 통해, 정부가 부담하는 '사회임금'이 (위 인용구가 쓰여진 2010년보다는 적잖이) 증대되었다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청년들의 제조업 취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청년동행카드' 라든가 '청년내일채움공제' 등의 정책이 제가 볼 수 있는 실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년인력은 동질적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우리나라 청년의 역량 분포는 중간에 밀집되어 있으며 격차가 매우 작다. … 중간에 밀집된 우리나라 청년들은 취업에서도 사무직, 생산직 등 중간 수준의 일자리를 찾는다. 이런 일자리는 기술혁신으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흔히 우리나라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일자리 미스매치'란 보다 정확하게는 동질적으로 양성된 청년들이 저숙련 일자리를 기피하는 현상이다."
- <<청년실업률은 왜 상승하는가?>>, KDI FOCUS, 2017.12.20.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제도 등을 비롯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시스템의 개혁에 대한 대책이 ('소득주도 성장'의 시행과) 함께 수립되고 시행되어야 함에도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이라는 분은 난데없이 "소득주도성장이 혁신성장의 밑바탕이자 촉진제가 될 수 있다는 폴 로머 교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다"란 뜬구름 잡는 말만 하고 있으시더군요.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의 위 발언은 ---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란 미셸 푸코의 설명을, 앞뒤 다 잘라낸 뒤,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라는 오역으로 치환시켜 '근대화의 폭력성'을 자행하고 정당화시켰던 박정희와 그 정치적 후계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대놓고 무식하거나 작정하고 내뱉는 교묘한 사기란 걸, 폴 로머의 진의를 보고 나면 금새 알게 됩니다.
"로머가 살펴본 바로는 … 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것을 더 빨리 배우게 되기 때문(에) … 만약 지식이 수확체증의 원인이라면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성장은 더 빨라진다. …… 지식 축적은 새로운 투자에서 오는데 그렇게 개발된 지식은 스필오버 방법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로 전파된다는 것이었다. 스필오버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성장이 내부의 힘에 의해 시스템 내부에서 내생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데이비스 위시, 「지식경제학 미스터리」 pp378~382. 김영사, 2008.
즉, 늘어난 소득으로 지식 축적을 하게 되면 지식의 수확체증으로 말미암아 더 빠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라는 것이지, (현재의 '소득주도 성장'이 내걸고 있는) 소득의 증가로 인한 소비 확대가 성장을 가져온다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닌 겁니다. --- 늘어난 소득으로 (예를 들어, 더 비싼 공무원 입시 학원에 등록한다든가 하여 공무원이 될 확률을 높이는 것과 같은) 동질적인 집단 내에서의 순위 다툼을 위한 지식 축적만을 한다한들, 그건 아무리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해봐야 폴 로머 교수가 말한 내생적 성장에의 원동력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이죠.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은, 늘어난 소득이 진정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내생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까?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현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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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었듯, 이 책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에 담겨 있는 이론적 내용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저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 폴 로머 교수의 이론적 결과를 가지고 소득주도성장을 자화자찬하는 사기극에 또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라는 의혹은 어렵지 않게 생겨납니다.
일자리 나누기 정책은 기업이 생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총 노동시간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즉 노동자가 1일 노동시간과 주당 노동일을 줄이면, 기업은 추가적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일자리 나누기는 고용와 임금 소득(주급 및 월급)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당 생산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 일자리 나누기 계획의 일환으로 주간 노동시간이 감소하면 생산성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 어떤 생산성의 증대로 실질임금을 상승시켜 보상하지 않는 한 고용에 악영향을 미친다. … (따라서) 일자리 나누기 정책이 성공하려면 시간당 실질임금의 상승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만 각 노동자의 연간 구매력이 유지되고 유효수요의 규모도 유지된다. … 이처럼 시간당 임금의 상승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공식 근무 시간이 줄어들어도 현재의 주급(혹은 월급)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시간당 실질임금의 상승을 동반하는 경우, 즉 노동일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주급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에만 일자리 나누기 계획을 지지한다.(pp174~175)
무식하거나 교묘한 그 누군가가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이론적으로 검증된 주장'이라는 식으로 위 구절에 또 꽂히게 된다면, '주52시간 근무제'와 결부된 최저임금 상승은 그야말로 --- '임금'이란 단어를 '소득'으로 바꾸게 되었던 중소기업 및 영세 사업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마무시한 어려움을 안겨줄 지도 모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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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중 p30, 글항아리, 2014.
'소득주도 성장'이란 결국 분배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분배가 불평등하다고 생각되기에 보다 공평한 분배를 통한 '소득주도 성장'을 이루어내자라는, 의도 자체는 좋게 시작했었겠지요. 그러나, 세상 모두가 동의하는 정책이란 없는 겁니다. ---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해 아파트 경비원을 감축한다라는 기사에, 어디 아파트는 주민들이 조금씩 관리비를 더 부담하는 식으로 감원없이 해결했다라는 기사엔 칭찬의 댓글이, 결국 감원을 시행한 강남의 모 아파트 기사엔 '돈도 많은 것들이~'라는 류의 덧글이 달리더군요. 강남의 아파트 주민들이 과연 한달 몇 천원의 관리비 상승이 부담되어 경비인력을 감축시킨 것일까요? 아니죠. 그들의 선택은 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상징적 항의라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 정부가, 불평등의 개선을 위한 각종 경제 정책을 내놓음과 동시에, 현재의 불평등이 어떠한 이유로 고착된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러한 원인을 시정하기 위해 이런 이런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란 충분한 설명이 있었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논란까지는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 특정 이념에 경도된 언론이나, 무식 혹은 교묘한 정책 집행자에 의해 정치적이지 않은 경제학 이론이 다분히 정치적인 경제 현상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이 책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이 제게 남겨준 잔향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학습과는 별개로) 그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