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경제 공부 - 경제의 흐름과 쟁점이 보인다
로버트 하일브로너.레스터 서로우 지음, 조윤수 옮김 / 부키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 장하준,「장하준의 경제학 강의」p441, 부키, 2014.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겠다라는 젊었던 시절 제 결심의 계기는 온전히 '분석 도구로서의 경제학'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었습니다. '경제(economy)'가 아닌, '경제학(economics)'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라는 건 여전히 '분석의 도구'일 때의 경제학이 가장 활짝 날개를 펼칠 수 있다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죠.


"한기주에게 오른팔은 공을 던지는 도구가 아닌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와도 같다."


OSEN, <"급하게 할 필요없다" 한기주, 2보 전진 위한 1보 후퇴> 중, 2019.02.02.


그러하기에, '경제학에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란 장하준의 규정은 당연히 매우 낯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이름은 참 많이 들어보았으나, 정작 이 분들이 쓴 paper는 읽어본 기억이 없는) 경제학계의 big shot이라 불리우는 두 경제학자가 쓴 이 책에서 따온  다음의 한 문장은, 저의 그러한 낯설음을 예의 지지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시장 체제는 비록 효율적이고 역동적이기는 하지만 가치 판단이 배제되어 있다. (p226)


…………………………………………………………………… 

 

애덤 스미스는 … 미국이 독립 선언을 한 해인 1776년에 자신의 걸작「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를 발표했는데, … 독립 선언문은 '생명, 자유, 행복 추구'를 목표로 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새로운 외침이요,「국부론」은 이런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것. (p39) 


경제학의 역할이란 것이 '사회는 이러이러하게 작동하여야 한다'라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 아닌, "사회가 어떻게 협력을 이루며 움직여 나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p38)이라는 두 저자의 규정은, 여전히 경제학이 정치적 논쟁이라는 장하준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어하는 저에게 유용한 논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이론으로서의 '경제학(economics)'을 공부하는 입장이 아닌, 매일 매일 맞닥뜨리게 되는 일상의 '경제(economy)'를 알아야 하는 생활인이 되어 있는 지금에도 '분석의 도구'로서의 경제학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옳은/도움이 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게 되는 요즈음,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거의 하나에 가까운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p298) …… 다국적 기업의 등장과 경제의 세계화로 인해 빚어진 새로운 문제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국가 경제간의 갈등이 아니다. 그 저변에 깔린 문제는 국가의 주권 자체를 다시 정의하는 데 따른 갈등이다. 다국적 기업과 경제의 세계화가 야기한 실질적인 고민은 경제 지도가 정치 지도와  딱 들어맞지 않다는 데에 있다. 국가의 주권이 금융이나 생산이 국제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된 지점까지 미쳐야 하는지 아닌지 질문에 제기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는 세계 시장을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21세기에는 국가 주권 자체가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pp309~310)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란 장하준의 규정을 이제 더 이상은 부인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것이, 이 책으로부터의 가장 큰 배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가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체제이고, 이런 갈등의 연속이 바로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발전 과정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 (p55) 

경제학사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무게감이란 게,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로 인해 너무나 과소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도 가져보게 되네요.


……………………………………………………………………     


거진 20여 년간을, 그저 소장하고만 있어왔던「Economics Explained」의 개정판이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그 번역본의 개정판인 이 책,「한번은 경제 공부이 저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행운이 생겼습니다. 때마침 어느덧 고딩 2학년이 된 종원군이 새로운 학기부터 경제학을 배우게 되었다 하며, 이 아빠에게 모르는 부분 나오면 설명해주세요~ 라는 요청을 해왔기에, 녹슬대로 녹슬어 버린 저의 경제학 지식을 다시금 구축해야할 시점이기도 했었는데 말이죠. 물론 이 책이, 고등학교 2학년생의 경제과목을 가르치는 데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1 그러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단계를 흔히 '로하는 설명 → 그래프를 이용한 설명  수학을 동원한 설명'의 세 단계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수학으로 설명하는/배우는 경제학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자칫 그 안에서 '경제학' 본연의 목적을 잊게되버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지요. 그러하기에, 경제학 강의의 정점은 또 다시 '로하는 설명'으로 끝맺음된다고들 합니다.  


경제학자들에게 투자는 저축의 '실질' 작용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저축의 실질 작용이 투자에 사용될 수 있도록 소비로부터 자원을 해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투자의 실질 작용은 이 해제된 자원으로 자본재를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p140)


'저축'과 '투자'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는 위의 한 문장이야말로, 이 책을 쓴 두 경제학자가 왜 경제학계의 big shot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정점으로서의 '로 하는 설명'의 일례라 생각됩니다. ---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의 핵심은 투자가, 경제 내의 저축 규모와는 독립적으로, 경영자나 기업의 의사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2이란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저 위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끝맺음된다고나 할까요?3


·

·

·


이 책은 경제 이론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p7)


생활인으로서 맞닥뜨리게 되는 '경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분명, 일정 수준의 '경제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허나, 그 진입장벽이란 게 은근 높기도 하지요. ---「Economics Explained : Everything you need you know about how the economy works and where it's going」라는 이 책 원서의 제목처럼, 이 책은 경제학자가 아닌 생활인으로서 알아야 할 '경제'에 대해, 제가 읽어 본 경제학 입문서 중에서 이 책보다 더 낮은 진입장벽을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라 생각될만큼 평이한 문장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은 첫째도 둘째도 이익이지. 그러니 모든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만 있을 뿐이야. 자본의 원리는 대결에, 전쟁에, 약자를 짓밟아버리는 데 있어."    


- 장 지글러,「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p176, 시공사, 2019. 


라는 반자본주의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이 변화의 창출 (p333) …… 자본주의 체제에는 위협적인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 제도를 변경하거나 보완함으로써 위협적 변화에 따른 부정적 파장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상당 부분 줄여낼 수 있는 것이다.(p346)


이 책이 설파하고 있는 위와 같은 자본주의의 능력에 아직은 여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또한, 주류 경제학을 공부했던 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에, 생활인으로서 '경제(economy)'가 궁금한 당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 '경제학' 입문서 : 

- 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 유시민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 보다 깊숙한 '경제학' : 

- 홍기빈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 세일러 :「불편한 경제학

- 데이비드 보일&앤드류 심스 :「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1.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때 더 잘 보인다"라는 뒷 표지의 문구처럼, 이 책은 철저하게 숲의 모습을 한 경제학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지요.
  2. 마크 라부아,「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p52, 후마니타스, 2016.
  3. 이 밖에도 이 책 속에는 소비 진작을 통한 경기 부양이라는 '소득주도성장'에의 비판을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되는 저자들의 주장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 "그 비중이 어떻든 소비는 GDP의 엔진이 아니다. … 소비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소비는 본질적으로 경제 활동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인이 될 수는 없다. … 소비는 분명 경제의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반영하지만 소비가 경제의 장기적 성과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이같은 경제학적 통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pp138~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유엔인권자문위원이 손녀에게 들려주는 자본주의 이야기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시공사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표작「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이어, 이 책 또한「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라는 의문문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그 의문에 대한 저자 장 지글러의 답변은 그지 없이 간단하지요. --- "경제 생산 방식이면서 동시에 사회를 조직하는 형태"(p23) 로 정의되는 '자본주의'가 원인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원칙은 첫째도 둘째도 이익이지. 그러니 모든 개인들과 민족들 사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만 있을 뿐이야. 자본의 원리는 대결에, 전쟁에, 약자를 짓밟아버리는 데 있어. (p176) 


이 책에서 장 지글러는 자본주의는 "극히 적은 소수를 위한 풍요와 대다수를 위한 살인적인 궁핍"(p19)이라는 일종의 '식인 풍습'을 만들어내었다라 역설하고 있습니다.「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계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다"1라 주장했던 바와 동일한 맥락이지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우리가 모르고 있던 빈곤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였었다면, 이 책「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는 그같은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저자의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 


"아프리카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되면 한 집단에 속한 들소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 성석제,「투명인간」p147, 창비, 2014.


"이데롤로기가 최고의 수준으로 성립하는 것은 명시적인 형식을 갖추었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 마음 속에 내면화할 때"2라는 류동민 교수의 지적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 작가 성석제가 사용한 '그럼으로써'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인과 관계는,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을 위한 '약한 개체의 죽음'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와, (그 죽음 뿐만이 아닌) 우리의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너무도 당연하기에 그러한 희생이 존재하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불변의 진리'가 되어버리죠.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성석제, 위의 책 p364.   


작가 성석제가 언급한 '노력'이란 '희생'의 순화된 표현인 것이며,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란 작가의 말은 '알고는 있으나 너무도 잔인한 그 현실에 대해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에 대한 일종의 비난일 것이라 이해합니다만,


"처음에는 강요에 의해 힘에 눌려 복종하지만 그 다음 세대들은 자유를 전혀 보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후회도 유감도 없이 앞선 세대들이 강제적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자발적으로 행한다. … 멍에를 지고 태어나 노예 상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전 세대가 어떤 삶을 누렸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태어난 대로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재산,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도 하지 않고 출생 당시부터 주어진 삶의 조건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게 된다." 


에티엔 드 라 보에시,「자발적 복종」pp68~69, 사과나무, 2015.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란 작가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게도 됩니다. 내 집 앞 거리가 버려진 쓰레기 없이 깨끗하다 하여, 세상에 쓰레기가 없다라 판단하는 오류 비슷한 것이죠. 누군가가 내 집 앞의 쓰레기를 치워갔을 것이고, 그렇게 모여진 쓰레기를 분리하고 처리하는 또 다른 누군가들이 있다라는 사실이, '내 집 앞에 쓰레기가 없다'라는 눈 앞의 현실에 파묻혀 버릴 수 있다라는 겁니다. 


「나는 세계일주로 자본주의를 만났다 Unfair Trade3라는 어처구니 없는 책에서 저자는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이 고작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받으며 그렇게 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라며 사뭇 공자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뭐 할 게 있는 줄 알아?'라는 고용주의 항변엔 한 마디도 못하죠. 더 큰 문제는 ---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이라는 저자의 가치 판단입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애널리스트였던 그에게는 그 돈이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이었겠으나, 그 일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생활의 유지를 가능케 하는 큰 금액'일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죠. 장 지글러의 시선은 코너 우드먼의 그것과는 스케일 자체가 아예 다릅니다.  


·

·

·


장 지글러는 이 책을 통해 현재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이 '가장 우월한, 가장 진보된' 시스템이라 사람들이 믿고 있는 현실에 대해 비판합니다. 


자본주의자들이 쟁취한 가장 큰 승리는 우리로 하여금 '경제는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른다'고 믿게 만든 거라고 할 수 있어. 시장의 힘은 완벽하게 자율적이고 통제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들은 거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심어준 거라고. …… 세계주의자들은 그들이 지배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공동의 이익,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지킨다'고 믿게 만드는 데 성공했어. (pp153~158)4


이같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저자는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5 그에 따르면 --- '사유재산권'이라는 해악6으로 인해 현재와 같은 빈곤이 발생되었고 또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죠.7 그리하여 장 지글러가 선택한 해결책은 바로,


자본주의를 개혁하기란 불가능해. 완전히 파괴해야 해. 전적으로, 과격하게. 그래야 새로운 세계 사회경제질서가 창조될 수 있을 테니까. (p169) ……  다시 한 번 거듭 말하거니와 자본주의 체제는 서서히, 점진적으로, 평화로운 가운데 개혁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소수 부자들의 양팔을 부러뜨려야만 한다고.(p176)

경제학을 공부한 저에게는 그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타파'입니다. "내게 극좌파란 반자본주의자가 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8란 목수정에 정의(definition)에 따르자면, 장 지글러는 '극좌파'이며, "시장 자본주의를 그 내부로부터 해체하고 사회를 인본주의적 원리에 따라 재건"9하는 것을 '진보'로 정의하고 있는 김상봉의 견해에 따르자면 '진보인사'가 되는 것이겠죠. - 장 지글러는 우리 모두에게도 극좌파 혹은 진보가 되어 '자본주의 타파'라는 '혁명'10에 동참할 것을 청하고 있는 겁니다.  


"이 모든 모순의 구조를 인지하고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1


목수정,「파리의 생활좌파들」p239, 생각정원, 2015.


그러나, 일 개인의 행동으로는 자본주의 타파라는 거대한 목적을 이루어낼 수 없다라는 지적에 대해 장 지글러 또한 ---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좌파 혹은 진보로 통칭되는 집단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가치인 '연대(solidarity)'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적 주제가 급부상하고 있단다. 바로 '지구촌 시민사회'야. …… 이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동기만 있을 뿐이야. "나는 타인이고 타인은 나다" …… 이들이 모두 한데 모이면 신비한 형제애가 형성되고, 이러한 연대감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강력한 힘이 되어 자본주의라는 야만에 맞서 투쟁하게 되는 게지. ……  시간은 곧 인간의 목숨이야. 가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단체들의 요구가 과격해질 수밖게 없는 거고. 그런데 가까운 시일 안에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워 보이는 전투라고 해서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 일도 벌이지 않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한 전투가 되어버리고 말테지. (pp178~179)


이처럼 장 지글러는 --- 큰 산불에, 작은 나뭇잎에 물을 떠다 그 불위에 끼얹은 한 마리의 벌새(colibris)에게 건네진 '너, 그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거 알아?'란 신(God)의 조롱에 대해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야"12란 벌새의 대답, 이처럼 "각자 자기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면 세상은 비로소 바뀔 수 있다"13란 (일종의) 인식의 전환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무슨 결의안을 제출하는 건 언제나 돼지들이었다. 다른 동물들은 투표하는 법까지는 알았지만 자기네 스스로 무슨 결의안 같은 걸 생각해 내지는 못했다."


- 조지 오웰,「동물농장」p31, 민음사, 2006.


현재 자본주의 혹은 자본가들이 휘두르고 있는 권력이란 것이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함"14, 그리고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15와 같은 맹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란 자기 반성, 그리고 목표의 달성을 위한 실제적인 행동의 이행이 필요하다란 겁니다. 비록/물론 --- 그 행동이 원하는 목표를 지금 당장은 이루어낼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죠.


"진보의 힘은 현실성, 실현가능성에 있기보다 '진짜 진보'를 꿈꾸는 상상력과 용기에 있다."


- 강수돌 외,「리얼 진보」 p11, 레디앙, 2010. 


그러나!

 

·

·

·


【 빈곤의 원인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21세가 자본」p30, 글항아리, 2014.


'가난'이라는 조건 하의 누군가는, '풍족함'이라는 조건을 지닌 다른 누군가와는 분명 다른 '가치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라 생각합니다. 그같은 차이가 '가난한 이들' 특유의 가치관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라, 즉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그 반대로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형성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 말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건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지요. 작가 성석제는 그의 작품「투명인간」을 통해 "조건이 환경을, 환경이 인간을 바꾼다"16라며 단언코, '가난이라는 조건 탓에 그들의 가치관이 그렇게 성립될 수 밖엔 없다'라 주장했지요.17 이는, 


ⓐ 탈식민지화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 몇 년동안,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기구들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대대적으로 돈을 빌려주었지. 서구 자본주의 방식으로 자기 나라를 산업화하고 국가 인프라를 개발하라는 취지에서였어. 식민 국가들은 사라졌지만, 과거 식민 제국을 일구었던 나라들은 과거의 식민지에 널려 있는 부를 계속해서 착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자기들을 위한 시장을 열고자 했어. ⓑ 일부 독재 정권들은 이러한 빌린 자금을 이용해서 무기 구입에 열을 올리고 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반대하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억압 수단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지. (pp123~124)


ⓑ와 같은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부작용 역시 ⓐ라는 시스템적 착취로부터 기인된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란은 예의 (장 지글러가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아프리카 빈곤의 '원인'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점은 아무래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할아버지는 5초마다 10세 미만 어린이 1명이 배가 고파서 혹은 배고플 때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걸린 병 때문에 죽어가는 곳에서는 살고 싶지 않아. (p180) 


라는 저자의 바람(), 그리고 위 문구를 책의 뒷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수록해 놓은 출판사의 편집은 흡사 '불평등 자체를 악()'으로 판단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아쉬운 점은,


【 대안의 제시 】 


"반대는 대안으로 조직되어야 하며, 대안으로 반대해야 한다. 그리고 반대는 대안을 만들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 되어야 한다."


- 강수돌 외, 위의 책 p96.


'자본주의 타파'를 원하는 당신이 그럼 추구하는 이상(ideal)은 무엇이냐,란 질문에 대한 장 지글러의 답변은, 저 개인적으로는 무척 허무했었습니다.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새로운 사회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죠.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탈환한 시위대는 그들이 봉건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공화국의 탄생을 알리는 주역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노예 제도의 폐지만 해도, 당시엔 아무도, 거의 아무도 그런 것이 감히 현실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식민주의나 여성 해방도 마찬가지고요... (p196)


'자본주의의 타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공언하면서도,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에 대하여 장 지글러는 아무런, 단 한 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요. 


"존재론적으로 현실이 그러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당위론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나아가 현실도 결국에는 당위를 향해 움직여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거니와 앞으로도 당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는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 류동민,「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p169, 위즈덤하우스, 2012.


"현실에서 완전하게 달성될 수는 없으나 현실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이념적 원형"18으로 정의(define)되는 '이상' 없이, 즉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파괴부터 하여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 '대안 없음'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권력을 쥐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 또한 불가능하게 한다라는 점에서19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라 생각합니다. 저의 이해가 맞다면,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 마르크스·엥겔스,「독일 이데올로기」중20 


장 지글러는 '공산주의'를 자본주의 이후의 시스템으로 상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장 지글러가 '공산주의'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와해되는 사건"(p60)을 공산주의의 완전한 패배로 규정짓고 있는 듯한 그의 인식이 공산주의의 재등장 자체를 아예 고려 대상에 넣지 않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는 됩니다.21 지금 당장, 


자본주의의 타파를 이루어낼 수 없다라면, "심지어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수준에서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을"22것이라는 류동민 교수의 판단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정확하지 않을까요?   


………………………………………………………………………………………………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을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 …… 권력을 갖는 자는 실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 그러나 권력의 인정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자는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반대로 권력에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그 권력을 부여한 원천임을 깨닫지 못하고 일상적으로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에 기꺼이 복종합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p67~69


태어나보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이 되어 있었고, 그 대한민국이 채택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이 '자본주의'라는 것이기에 당연히! --- 이 시스템이 영영, 적어도 아주 오랜 기간의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험"(p194)로서의 자본주의를 바라보기도 해볼 것을 권유했다라는 점에서, 이 책의 유용성을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사유재산, 그리고 사유재산의 절대적인 보호는 집단의 이익을 희생할 뿐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자 흉물스럽기 그지 없는 자본주의의 원천 (p55)


경제학을 공부했었고, 여전히 사랑하는 저에게 위와 같은 저자의 주장은 사뭇 버겁기만 하네요. 


·

·

·


"손주들 모두에게 이 책을 바친다"란 문구가 책의 첫 페이지에 적혀 있듯, 이 책은 손녀와의 대화라는 구성을 통해 현재 전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아픔의 원인인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것의 극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어렵지 않게, 그러나 매우 과격한 톤으로 말이죠. ---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하여 내가 죽거나 그/그녀를 죽이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죽도록 사랑'하는 마음이 의심 받아서는 아니되겠는, 뭐 그 정도의 느낌으로 저자의 주장을 읽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 개인적 생각입니다.  


※ 저자의 대표작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다시 읽어보니 참 허접하게 써놓은 감상문이네요. --;;) 

※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 

- 류동민 :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엄기호 :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목수정 : 「파리의 생활좌파들

- 강수돌 외 : 리얼 진보

- 조지 오웰 : 「동물농장







  1.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p171, 갈라파고스 2007.
  2. 류동민,「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37, 웅진지식하우스, 2013.
  3. 코너 우드먼, 갤리온, 2012.
  4. "그들(자본주의자들)은 …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을 지배하며, 그 손은 중력이나 천체의 운동처럼 변치 않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 그 자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결정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이론을 내세우는데, 아주 일관성 있고, 공격적이며, 복잡하고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인 이 이론을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단다."(p144)
  5. "개별적인 인간을 미워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 반드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질서를 이해해야 해" (p83)
  6. "사유재산, 그리고 사유재산의 절대적인 보호는 집단의 이익을 희생할 뿐 아니라 문제의 핵심이자 흉물스럽기 그지없는 자본주의의 원천"(p55)
  7. "우리 별 지구는, 식량의 분배만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면 현재 인구의 2배 정도도 아무 문제 없이 먹여 살릴 수 있는데 말이야" (p180)
  8. 목수정,「파리의 생활좌파들」p237, 생각정원, 2015.
  9. 강수돌 외,「리얼 진보」p56, 레디앙, 2010.
  10. "사회 전체의 생산양식과 정치법률,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의 생활방식, 사유방식,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 자오팅양·레지 드브레,「상실의 시대 :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p31, 메디치, 2016.
  11. "봉기의 힘은 우리 각자가 '이런 세상을 언제까지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이성적으로 거부하는 데 있어" (p177)
  12. 목수정, 위의 책 p203.
  13. 목수정, 위의 책 p203.
  14. 조지 오웰, 위의 책 p157.
  15. 조지 오웰, 위의 책 p58.
  16. 성석제, 위의 책 p215
  17. 바버라 애런 라이크 또한「노동의 배신」을 통해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8. 류동민, 위의 책 p249
  19. "저는 이상을 하나의 척도로 간주하기를 희망합니다. 다시 말해, 이상은 실현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측정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고, 현실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위의 책 p24
  20. 류동민 위의 책, p248에서 재인용
  21.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기 전까지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우연히 성립하더라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 류동민, 위의 책 p121 : 류동민의 공산주의에 대한 해석에 의하면, 러시아라는 후진농업사회에서 선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 시작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를 가리켜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실패'라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오해이며, 오히려!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정당한 입증이라 평가받아야 한다가 됩니다. 장 지글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도 위와 같은 오류로 인함이 아닐까 , 감히 추정해봅니다.
  22. 류동민, 위의 책 p2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마터면 회계를 모르고 일할 뻔했다! - 재무제표와 돈의 흐름이 보이는
김수헌.이재홍 지음 / 어바웃어북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신제품을 설계하는 기술부 직원이라 하여,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부 직원이라 하여, 심지어 제품을 생산하는 직원이라 하여도, 기본적인 회계 지식은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 주위에 은근히 많더군요. 그렇다고 뭐 저란 사람이 회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건 역시 아닙니다. 유일하게 수강했었던 한 학기의 <회계원리 I> 학점도 C 였었었으며, 이후에도 회계 관련 책 한 권 전체를 다 읽어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저 제 업무에 필요한 부분만 공부했었을 뿐.  


·

·

·


회계를 공부하는 목적은 달라도 목표는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바로 재무제표 읽기입니다. … 기업들이 당면한 이슈는 재무제표에 숫자로 반영됩니다. (p6)


재무제표 읽기가 회계의 목표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재무제표를 읽고자 하는 목적은 각기 다를 수 있겠지요. --- 주주의 입장에서 재무제표를 읽어낼 때와, 그 회사의 직원으로서 재무제표를 읽어낼 때의 시선은 분명 다를 겁니다. 전 주식 투자를 하지 않기에, 또한 제가 이 책을 펼쳐 들었던 이유 역시 (주식 투자를 위함이 아닌) 회사 직원들에게 기본적인 회계 지식을 갖게해줄 적절한 권장도서(?)를 찾는 것이었기에 제 시선은 예의, 


'회계'는 기업의 언어, 경영의 언어입니다. (p6) … 회계는 '회사의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pp320~321)


('세무회계'같은 건 일반적 회사 업무를 위해서는 아예 관심 두지 않아도 되겠고) '재무회계'나 '관리회계'라 지칭되는 특정 목적의 수단이 되는 회계를 작성하거나 해석하는 수준이 아닌, --- 대체 '회사'라는 구성체의 살림살이라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집행되고 집계되는지에 대한 개략적인 뼈대만이라도 충분히, 그리고 쉽게 전달해주고 있는가의 여부에만 고정되어 있었었지요. 예를 들자면, 


생산현장에서 발생한 인건비는 제품을 만드는 데 직접 투입된 비용이기 때문에 제조원가에 포함됩니다. 제품의 제조원가가 계산되면 이 제조원가는 곧 재고자산 가치로 바뀝니다. 그래서 생산직 직원이 받은 연봉은 재고자산 장부가격에 포함됩니다. … 재고자산이 팔리면 제조원가가 매출원가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인건비 일부는 매출원가가 됩니다. 팔리지 않아 재고자산 상태로 남아있는 제품 속에도 당연히 생산현장의 인건비가 일부 들어있습니다. 영업팀이나 회계팀 인건비는 제품을 생산하는 데 직접 투입된 비용이 아니기 때문에 판관비로 들어갑니다. … 생산에 들어간 재료비, 인건비, 감가상각비는 처음에는 '비용'이 아니고 회사의 '자산'으로 기록됩니다. 나중에 제품이 판매되면 '매출원가'로 전환되어 손익계산서에 반영됩니다. (pp58~60) 


생산관리과 직원과 생산부 직원이 매일 같이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하여도 그 둘의 급여가 어떠한 이유로 각기 다른 항목으로 집계되는 것인지, 소위 말하는 '악성 재고'가 어떠한 경로로 회사의 이익액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이익잉여금이 적잖이 쌓여 있는데로 왜 회사의 부채율은 0%가 아닌 것인지 등등등, 그 누구든 자신이 속해 근무하고 있는 직장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늠 등을 적어도 어렴풋하게나마라도 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전달해줄 수 있는 책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었고, 다 읽어본 결과, ---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 책은 더할 것 없이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라 자신합니다.  회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더해 (예를 들자면)


거액의 계약을 앞둔 영업부 직원에게는 해당 회사의 재무제표상 당기순이익이 (+)라는 단순한 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심도있는 확인을 통해 계약의 안전성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과 간략한 방법까지를 이 책은 선사해주고 있지요.1 


영업이익은 회사의 본질적인 능력을 파악해 보는 단계입니다. … 회사의 당기순이익에도 우연한 행운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지분법이익에 의한 영업외수익의 폭발적 증가로, 당기순이익이 대폭 증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업이익은 그럴 가능성이 적습니다. 회사의 본질에 더욱 근접한 숫자가 영업이익입니다. (pp324~325) … 기업이 도산하는 건 거액의 당기순손실이 발생해서가 아니라, 가용 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액의 당기순손실이 발행한다고 해도 투자를 많이 받거나 차입금으로 현금을 조달할 수 있다면 회사는 망하지 않습니다. 현금이 돌기 때문이지요. (p351) 

 

……………………………………………………………………………… 


"What differentiates data from numbers is that numbers are mathematical abstractions, an idea. Because numbers are symbols or objects used in math, they can be neutral. But data, originating from the real world and real people, cannot." 


- <Why numbers can be neutral but data can't> 중

재무제표를 바라보는 목적에 따라, 각 항목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다를테고, 해당 숫자에 대한 만족도 또한 달라지는 건 명확합니다. 예를 들어 직원의 입장에서, 같은 회사의 직원이라 하여도 속해있는 부서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며, 주주의 입장에서, 또한 같은 주주라 하더라도 상정하고 있는 투자의 기간에 따라서도 같은 내용의 재무제표에 대한 만족도는 분명 다를 겁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는 명제에 지극히 충실합니다.   


회사가 창출한 이익은 '자본'으로 편입되어 '이익잉여금'이라는 이름을 달게 됩니다. 이익잉여금이 생기면, 자본은 이제 자본금과 이익잉여금이라는 두 가지 항목으로 구성됩니다. 기업의 모든 활동은 기본적으로 주인인 주주2의 몫 즉, 자본(순자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p29) …… 이익잉여금은 회사가 창출한 당기순이익을 해마다 자본 내에 누적시킨 수치입니다. … 이익잉여금은 주주의 몫입니다. 배당으로 주주에게 돌려주지 않고 회사에 남겨놓은 몫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보여줘야 하므로 이익잉여금을 누적합니다.(pp73~74) …… 주주들도 지분율만큼 이익잉여금을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배당'입니다. 상법에서도 이익잉여금을 한도로 배당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배당하는 만큼 이익잉여금은 줄어들게 됩니다. 배당은 이익잉여금을 처분하는(주주들에게 분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p77) 

제가 이 책을 보았던 관점이 아닌, 투자자의 입장에서도 '회계'라는 것을 왜 반드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사실 너무도 명백한 것이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만 실제 세상에는 --- 그 회사가 무슨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회사의 주인이라는) '주주'들도 정말 많더군요. 당신이 한 회사의 주주라면 너무도 당연히,

당신이 입사하고자 하는 회사에 대해 미리 알고 싶다면, 당신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심지어 당신이 자영업자라 할지라도 본인 사업의 손익과 그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알고자 한다면 --- 그 시작을 (그리고 아마도 필요한 대부분의 내용이 담겨져 있을이 책으로 하게 된다면, 중도에 지루해서라든가 혹은 어려워서 포기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듯. 





  1. 더 나아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인 '영업'이란 것이 회계적으로는 어떠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또한 이 책을 통해 명확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 "영업 활동은 간단히 말해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소모해(비용화시켜) 매출과 이익을 창출하는 과정입니다"(p50)
  2. "회사에 자본을 대고 주식을 발급받아 지분율만큼 회사의 주인이 된 사람"(p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 - 대안적 경제 이론
마크 라부아 지음, 김정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 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p435, 부키, 2014.


경제학(의 정치적 측면)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단언은 여전히 저에게 '낯설고 의아'합니다만,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이 아닌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경제 문제들이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점만큼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여하한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역시 나름의 (말이 되는)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현실 경제가 정치학이나 윤리학의 대상이 아닌 한, 적어도 특정 정책 혹은 현상에 대한 논리적 근거의 제시를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필요로 하게 되겠지요.


몇 번 언급했었습니다만, 저는 학문으로서의 거시경제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라는 건 결국 그에 대한 지식이 매우 빈약하다라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재에도 관심이 없다라는 건 그 빈약함을 개선할 의지 또한 없다라는 걸 의미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작년 2018년 논란의 중심에 자리잡았던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정책은1 대한민국 사회의 일 구성원인 저에게도 그 찬반의 핵심이 대체 무얼까란 호기심을 자아내 주었고,  그 정책의 이론적 배경에 대한 지식도 갖추지 않은 채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라는 (이게 뭔 --;;) 의무감 같은 걸 안겨주더군요. 이것이 바로, 



위 기사2에서 언급된 바로 이 책,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을 펼쳐들게 된 계기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본 감상문에서는 '소득주도 성장'과 연관된 부분에 대해서만 적도록 하겠습니다.) 


…………………………………………………………………………………………


경제원론에서 배우게 되는 국민소득계정 수식은 아래와 같습니다. 


Y%3DAD%3DC%2BI%2BG%2BNX%20


일 국가 경제의 총수요(AD)는 가계소비(C)와 민간투자(I), 정부지출(G), 그리고 수출과 수입(NX)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같은 총수요의 대상이 되는 재화와 서비스는 또한 동일한 경제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3 국민소득(Y)은 곧 총수요(AD)와 동일하다는 것이죠.4 이를 바탕으로 --- 총수요의 일 구성 요소인 가계소비를 증대시킴으로 총수요를 진작하면 (이래저래한 과정을 거쳐5국민소득 또한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가 기본적으로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바탕을 이루고 있게 됩니다. 이러한,  


'가계소비의 진작을 통한 성장6 촉진'이란 모토 자체는 이론적인 면에서 딱히 태클 걸만한 사안이 없을뿐만 아니라, 예의 정치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 대공황 시절에는 (가계소비가 아닌) 정부지출의 증대를 통한 총수요 진작 정책을 시행하여 성공을 거두었었기도 하며, 심지어 개별 기업의 차원에서도 현실적 효과를 나타내었던7 유사한 역사적 전례가 있기도 하지요.8 (물론, 이 모토에 정치적 의도가 가미되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미 현실적 유용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된 '낙수효과(trickle-down)'9를 줄기차게 정책에 반영했던 '이명박10 - 박근혜 정부'의 경우가 그러했었죠.) 이같은 정책이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문구로 시행되었던 것일 뿐인데, 대체 왜 이런 논란이 생겨난 걸까요? 


·

·

·


총수요의 감소는 노동자의 살림을 악화시키는 소득분배의 변화로부터 발생한다. 즉 노동자의 소비성향이 이윤 취득자의 소비성향보다 높기 때문에11, 노동자가 차지하는 분배율이 적을수록 총수요는 감소한다. (p161) 


로또 1등 당첨자가 많아질수록, 각 1등 당첨자가 수령하게 되는 금액은 당연히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로또 뿐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적으로도 동일하게 적용되지요. 즉, 일 경제 전체가 생산해낸 결과물을 분배함에 있어, 자본(가 계급)에게로의 분배몫이 늘어나게 되면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아갈 분배몫이 줄어들게 되며, 그 반대 역시 성립되게 되는 겁니다. 그러하기에 --- 소득주도 성장론이란 결국, 분배의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으며12, 총수요의 (보다 많은) 증대를 위해서는 한계소비성향이 높은 노동자에게 보다 더 많은 몫이 분배되어야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포스트 케인스학파13 경제학이 주장하는 바는, 노동소득분배율을 향상시키자입니다.14 "실질임금이 상승하면 소비가 증가하고, 그 결과로 노동 수요가 증가해 실업이 감소15"(p147)한다라는 내용이죠. 그리고 "판매가 증가했기에 이제 기업은 더 높은 설비 가동률을 예상해 자본축적률을 높인다"(p192)라고 결론 내립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질문인 임금 상승으로 인한 기업 이윤의 감소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비용의 역설'이라는 논리로 설명해주고 있지요.16  


다른 조건들이 일정할 때, 한 기업만이 실질임금을 올리고 총비용 마진을 줄이는 경우, 확실히 이윤이 감소하고 이윤율은 하락한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총비용 마진을 줄이는 경우에는 경제 전체의 가동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거시 경제적 이윤율은 상승한다. (p194)


이는 단지 포스트 케인스학파만의 주장은 아닙니다. KDI에서 내놓은 보고서에서도 위와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으니까요.17 거시경제학에의 지식이 빈약한 저에게는, 이 책과 KDI의 보고서를 반박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여 위와 같은 이론적 결론을 '사실'이라 받아들이겠습니다만,18 대한민국에서 현재에도 진행 중인 논란의 근원은 다름아닌 --- '임금주도 성장 wage-led growth'이란 학술적 용어를 대한민국에서 '소득주도 성장income-led growth'이라는 정치적 용어로 변화시킨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Terminology 】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다. …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p231, 제3의공간, 2017.


'글쓰기'만이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952년 민주당이 대선에서 내걸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란 캐치프레이즈로부터 시작하여, '공장일을 내일처럼'이란 1970년대 공장 새마을 운동의 구호, 심지어 '정의사회 구현'이란 문구로 자신의 정의롭지 못한 집권 과정을 감추려 했었던 제5공화국 정권까지 한 단어, 한 문장이 지닌 프로파간다적 성격은 지극히 정치적인 색채로 포장되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게 되지요. 


"소득주도성장은 임금주도성장 개념을 한국 경제의 현실을 반영해 수정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자영업 비율이 높은 특징이 있다. 그리고 자영업자 중에서도 극히 영세한, 경제적인 약자들이 많다. 그래서 임금 노동자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을 포함해 영세 사업자들도 소득이 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금 주도 대신에 소득 주도로 개념을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기로에 선 소득주도성장, 나원준 교수와 파헤치다", 경북대 신문, 2018.09.16.


매우 높은 자영업자(self-employed) 비율을 지닌 대한민국이기에19 '임금'이란 단어 대신 '소득'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겁니다.20 이제 --- 대한민국 정부는 '임금'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계급적 의미를 '소득'이란 단어로 희석시킬 수 있게 되었죠. '임금'21이란 단어가 풍기는(?) '노동자, 노동자 파업' 등의 의미가 아닌, 그 누구나에게 해당될 수 있는 '소득'이란 단어로 대체시켜 버린 겁니다. 뭐, 이 같은 견해가 너무 민감하고 심지어 정치적이지 않느냐라 지적에는 고개숙일 수 있다하여도, 

'임금'이란 단어를 '소득'이란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노동력 구분의 단순화'가 초래되었다라는 점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기계공학과 교수가 지닌 노동의 퀄리티가 기계 공장 근로자가 지닌 노동의 퀄리티보다 높은 경우는 학교의 강의실 내에서이지, 밀링머신을 조작하고 제품을 가공하는 현장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하듯, 일 개인이 지닌 노동력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생산성이 현저하게 차이나게 되는 것이거늘, 그러하기에 '생산성에 따른 노동(력)의 구분'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 '소득주도'라는 문구로 인해 포스트 케인스학파 이론이 주창하고 있는 '임금주도 성장'의 진의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원인에의 치료 】 


유효수요(effective demand)와 역사적 시간(historical time)은 확실히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모든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경제학 이론은 이 특징들에 기초하고 있다. … 유효수요의 원리에 따르면, 재화의 생산 자체는 수요의 크기에 따라 조정된다. 이 원리는 모든 포스트 케인스학파 접근법에서 핵심을 이룬다. (pp46~47)


지금의 논란은 '중소기업을 포함한 영세 사업자들'의 소득도(!)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유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나) 상징적인/가장 큰 현실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해 과연 증가되었느냐,22 그리하여 그들의 유효수요가 증대되었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자신있는 답변을 내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건 결국 --- 성장이 먼저냐, 분배가 먼저냐라는 지긋지긋한/해묵은 논쟁을 다시 또 등판시켜 내지요. 


저 역시 성장의 최종적 목표는 분배라는, 다시 말해 성장은 하나의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라23 생각합니다만, 동원 가능한 수단의 현재 상태에 대한 면밀한 검토 이전에, 그러니까 현재 지니고 있는 수단이 목표로 하는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에 대한 조사 없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로서의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가동을 먼저 시작해 버렸기에, 현재와 같은 삐걱거림이 많은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라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정확한 예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치킨집 사장의 소득에서 일부를 가져다가 치킨집 알바의 소득을 올려준다 한들, 포스트 케인스학파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계소비성향이 더 높은' 계층으로의 소득 이전(분배)이 이루어진 것인가란 질문에 현 정책 입안자들이 먼저 답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진정한 소득의 재분배를 통한 '소득주도 성장'을 원한다면, 


"'만드는 자makers'란 실질적인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일군의 사람, 기업, 아이디어다. '거저먹는 자takers'는 고장난 시장 시스템을 이용하여 사회 전체보다는 자기 배만 불리는 이들을 말한다. 거저먹는 자들의 범주에는 다수의 금융업자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그릇된 사고에 젖어 있는 민간 및 공공 부문의 리더들, 그러니까 금융화가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 심지어 민주주의도 좀먹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CEO, 정치인, 규제 담당자까지 들어간다."


- 라나 포루하,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p30, 부키, 2018.


경제 내의 (최저임금 상승과는 상관 없는) '거저 먹는 자'들의 몫을 가져와 (최저임금 상승과 커다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만드는 자'들에게 더 많은 분배가 돌아갈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죠. (현재와 같은) '만드는 자'들 내부에서의 소득 재분배만으로는 결코! 현 정책 입안자들이 이상으로 그리고 있는 수준의 '소득주도 성장'을 이루어낼 수 없을 겁니다. 이건 마치, 운전 중에 오른쪽 발바닥에 물린 모기 자국으로 인해 간지러워 죽겠는데, 차마 차를 멈추진 못하겠고 하여 입술을 깨물어 발바닥의 간지러움을 잊으려 한다든가, 그러다 입술에서 피가나면 왼쪽 허벅지를 꼬집어 발바닥의 간지러움을 잊으려 한다든가 하는 식의, 근본 원인의 처방을 외면한 채 몸의 다른 부위로 고통을 전가하는 것일 뿐입니다. 목적지에 좀 늦게 도착하게되더라도, --- 차를 안전한 곳에 세워 발바닥을 긁고, 버물리 같은 약을 발라 간지러움을 가라앉힌 다음에 운전을 하는 것이 올바른 처방이겠죠. 


제 지식이 이해한 바로는,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임금주도 성장'에 대한 이론과 주장은 기본적으로 '산업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금융자본주의'하에서는 해당 이론의 정책적 수립과 집행을 위해선 현실적 교정이 반드시 사전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본집적도의 급격한 증가 … 이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의 산업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가 대체했음을 의미했다. 또한 부의 분배가 기업가와 노동자에게서 주주와 은행 등 금융자본가에게로 쏠리고 있음을 뜻한다." 


- 홍익희, 「월가 이야기」 p89, 한스미디어, 2014.



【 국가 책무의 전가 】 


경제 불황기는 정체기에는 기업들이 단위 비용을 당연히 삭감하고자 노력하며, 이는 거시 경제적 고용수준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런 기술적 실업의 악순환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유럽에서 발생한 상황과 유사하다. 포스트 케인스학파 연구자들은 유럽 국가들에서 나타난 실업 증가 및 높은 실업률의 원인이 노동시장의 경직성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유효수요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p172)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연 '유효수요가 부족'하여24 경기가 침체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저의 능력 밖입니다. 어쨌든 --- "경제가 수요 주도적demand-led이라는 주장이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하다"(p147)라고 하니, 과부족의 여부를 떠나 수요의 증대가 성장에 매우 중요한 한 축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도,  


"노동자가 기업에서 받은 소득을 '시장임금'이라고 한다면, 사회에서 받는 보육료 지원금, 기초노령연금 등은 '사회임금'이라고 부를 수 있다. …… 2000년대 중반 한국의 사회임금은 7.9퍼센트이다. 우리나라 가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가계 지출의 92.1퍼센트를 직접 시장에서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 한국에서는 왜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갈등하는가? 다양한 사회,정치적 요인이 있지만, 사회임금이 전체 가구 운영비에서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원인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구조조정은 '가계 파탄'을 의미한다. …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는 시장임금에만 의존해 사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구조조정에 취약한지,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낮은 사회임금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왜 초과 노동에 얽매이는지도 설명해 준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의 위기를 완화해 줄 수 있는 사회임금에 대한 기대가 없다. 일감이 있을 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더 시장임금을 모아 두어야 한다. 종종 언론들이 한국의 노동자들이 지나치게 임금 올리기에 몰두한다고 비판하지만, 노동자들이 시장임금에 목숨을 거는 건 척박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과도한 초과 노동, 격렬한 구조조정 비용은 역설적으로 낮은 사회임금에 대응해 노동자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합리적' 경제 행위일 수 있다. 노동자 개인에게 이것을 탓할 수는 없다.25"


- 강수돌 외, 「리얼 진보」, pp223~228, 레디앙, 2010.


일 가계의 소득을 위와 같이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으로 나눈다면, '최저임금 인상' 등은 분명 '시장임금'에 해당하는 부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 정부는 더 많은 '사회임금'을 부담하려는 노력26을, 그리하여 '수요의 증대'를 유발하려는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걸까요?27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임금 주도 성장론의 핵심은 노동자의 '실질' 임금 상승이며, 특히 최저임금 상승이 중요하다. 최저임금 상승이 노동자 임금의 하한선을 끌어올려 전체 임금 상승에 기여하고, 기업가(고소득층)에 비해 노동자(저소득층)의 소비성향이 크기에 친노동자적 소득분배를 유효수요를 증대시켜 경제성장을 이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명목'이 아닌 '실질' 임금 상승(임금 몫의 증가)이라는 점이다. 기업이 노동자의 임금 상승분을 모두 가격에 전가할 경우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거나 '임금-가격 상승'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 가계 부문의 소비지출 증가를 통해 유효수요를 진작하려면 가계 소득의 증가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망의 확충이 필요하다. 사회보장제도가 약화될 경우 가계 부문은 미래 (소득 및 지출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행동 (과잉 저축)을 보이고, 이로 인해 경제성장이 둔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pp 236~237) 


기업에게 법률로 강제되는 명목 소득의 상승에 대응하여, 정부는 과연 어떤 면에서 국민들의 '실질' 소득 증대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지금과 같은 수준의 가계부채 상황에선, 늘어난 소득의 (극히) 일부만이 가처분소득의 증가로 이어지게 되겠죠.28 이게 뭐 다 '대출 받아 집사라' 했던 과거 정부의 폐해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확신으로 '소득주도 성장'을 밀어붙이는 현 정부라면 그에 대한 처방도 함께 내놓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에 더해,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인건비 상승은 결국 제품 가격 상승을 초래하게 되고, 결국 경제 전반적인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실질 소득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라는 기업들의 주장이 어불성설이라면, 마땅히 정부는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았어야 한다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정책의 효과를 체감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하다? --- '조금만 더 참아라. 1~2년 쯤 후면 정책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란 정책입안자의 발언은 지금 당장!이 중요한 (이 정책으로 혜택을 받을 것이라 말하는) 저소득층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겁니다.    



【 시스템 개선에의 의지 】


물론 이러저러한 정책들을 통해, 정부가 부담하는 '사회임금'이 (위 인용구가 쓰여진 2010년보다는 적잖이) 증대되었다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청년들의 제조업 취업을 독려하기 위하여 '청년동행카드'29 라든가 '청년내일채움공제' 등의 정책이 제가 볼 수 있는 실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년인력은 동질적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우리나라 청년의 역량 분포는 중간에 밀집되어 있으며 격차가 매우 작다. … 중간에 밀집된 우리나라 청년들은 취업에서도 사무직, 생산직 등 중간 수준의 일자리를 찾는다. 이런 일자리는 기술혁신으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흔히 우리나라 청년실업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일자리 미스매치'란 보다 정확하게는 동질적으로 양성된 청년들이 저숙련 일자리를 기피하는 현상이다."


- <<청년실업률은 왜 상승하는가?>>, KDI FOCUS, 2017.12.20.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교육제도 등을 비롯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시스템의 개혁에 대한 대책이 ('소득주도 성장'의 시행과) 함께 수립되고 시행되어야 함에도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이라는 분은 난데없이 "소득주도성장이 혁신성장의 밑바탕이자 촉진제가 될 수 있다는 폴 로머 교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다"30란 뜬구름 잡는 말만 하고 있으시더군요.


'소득주도성장 특별위원장'의 위 발언은 --- "서구의 근대화는 …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관념론적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신체를 길들이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란 미셸 푸코의 설명을, 앞뒤 다 잘라낸 뒤, "서구의 근대화도 어차피 감시와 처벌, 군대식 훈육의 결과였다"라는 오역으로 치환시켜 '근대화의 폭력성'을 자행하고 정당화시켰던 박정희와 그 정치적 후계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대놓고 무식하거나 작정하고 내뱉는 교묘한 사기란 걸, 폴 로머의 진의를 보고 나면 금새 알게 됩니다.  


"로머가 살펴본 바로는 … 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것을 더 빨리 배우게 되기 때문(에) … 만약 지식이 수확체증의 원인이라면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성장은 더 빨라진다. …… 지식 축적은 새로운 투자에서 오는데 그렇게 개발된 지식은 스필오버 방법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로 전파된다는 것이었다. 스필오버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성장이 내부의 힘에 의해 시스템 내부에서 내생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데이비스 위시, 「지식경제학 미스터리」 pp378~382. 김영사, 2008.


즉, 늘어난 소득으로 지식 축적을 하게 되면 지식의 수확체증으로 말미암아 더 빠른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다라는 것이지, (현재의 '소득주도 성장'이 내걸고 있는) 소득의 증가로 인한 소비 확대가 성장을 가져온다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닌 겁니다. --- 늘어난 소득으로 (예를 들어, 더 비싼 공무원 입시 학원에 등록한다든가 하여 공무원이 될 확률을 높이는 것과 같은) 동질적인 집단 내에서의 순위 다툼을 위한 지식 축적만을 한다한들, 그건 아무리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해봐야 폴 로머 교수가 말한 내생적 성장에의 원동력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이죠.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은, 늘어난 소득이 진정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내생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까?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현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해보셨습니까? 


 …………………………………………………………………………………………


앞서도 언급했었듯, 이 책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에 담겨 있는 이론적 내용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저에겐 없습니다. 그러나! --- 폴 로머 교수의 이론적 결과를 가지고 소득주도성장을 자화자찬하는 사기극에 또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라는 의혹은 어렵지 않게 생겨납니다. 


일자리 나누기 정책은 기업이 생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총 노동시간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즉 노동자가 1일 노동시간과 주당 노동일을 줄이면, 기업은 추가적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일자리 나누기는 고용와 임금 소득(주급 및 월급)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당 생산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 자리 나누기 계획의 일환으로 주간 노동시간이 감소하면 생산성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 어떤 생산성의 증대로 실질임금을 상승시켜 보상하지 않는 한 고용에 악영향을 미친다. … (따라서) 일자리 나누기 정책이 성공하려면 시간당 실질임금의 상승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만 각 노동자의 연간 구매력이 유지되고 유효수요의 규모도 유지된다.  이처럼 시간당 임금의 상승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공식 근무 시간이 줄어들어도 현재의 주급(혹은 월급)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시간당 실질임금의 상승을 동반하는 경우, 즉 노동일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주급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에만 일자리 나누기 계획을 지지한다.(pp174~175) 


무식하거나 교묘한 그 누군가가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이론적으로 검증된 주장'이라는 식으로 위 구절에 또 꽂히게 된다면, '주52시간 근무제'와 결부된 최저임금 상승은 그야말로 --- '임금'이란 단어를 '소득'으로 바꾸게 되었던 중소기업 및 영세 사업자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마무시한 어려움을 안겨줄 지도 모르는 겁니다.31


·

·

·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중 p30, 글항아리, 2014.


'소득주도 성장'이란 결국 분배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분배가 불평등하다고 생각되기에 보다 공평한 분배를 통한 '소득주도 성장'을 이루어내자라는, 의도 자체는 좋게 시작했었겠지요. 그러나, 세상 모두가 동의하는 정책이란 없는 겁니다. ---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해 아파트 경비원을 감축한다라는 기사에, 어디 아파트는 주민들이 조금씩 관리비를 더 부담하는 식으로 감원없이 해결했다라는 기사엔 칭찬의 댓글이, 결국 감원을 시행한 강남의 모 아파트 기사엔 '돈도 많은 것들이~'라는 류의 덧글이 달리더군요. 강남의 아파트 주민들이 과연 한달 몇 천원의 관리비 상승이 부담되어 경비인력을 감축시킨 것일까요? 아니죠. 그들의 선택은 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상징적 항의라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 정부가, 불평등의 개선을 위한 각종 경제 정책을 내놓음과 동시에, 현재의 불평등이 어떠한 이유로 고착된 것이며, 그러하기에 그러한 원인을 시정하기 위해 이런 이런 정책을 펼치는 것이다란 충분한 설명이 있었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논란까지는 생겨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 특정 이념에 경도된 언론이나, 무식 혹은 교묘한 정책 집행자에 의해 정치적이지 않은 경제학 이론이 다분히 정치적인 경제 현상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이 책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 입문」이 제게 남겨준 잔향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학습과는 별개로) 그러하네요. 






  1. "최근 발표된 일자리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소득주도 성장을 국정철학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소득주도 성장론은 양극화 심화와 사회경제적 분배·재분배 구조의 왜곡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노동소득을 늘리고 소득격차를 해소하는 것이 단순히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제성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 LG경제연구원, <한국의 소득주도 성장 여건과 정책효과 제고 방안>중, 2017.07.04.
  2. 저 개인적으로는 이 기사와 같은 스타일은 배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아야지, 이 기사에서처럼 몇몇 부분만을 따와 인용하여 특정 이론을 소개하는 것은 고전문학을 어린이용 동화로 만들어 왜곡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3. 한 국가/세계 경제 내의 경제 주체 대부분은 생산자(=부가가치 창출자)인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합니다만, 편의상 한 국가/세계 경제의 국민 전체를 생산자와 소비자로 양분한다면, 생산자로 이루어진 한 국가/세계 경제의 총 생산물은 소비자들에 의해 소비될 것이며, 그 소비의 주체는 또한 생산자들이기도 한 가계, 기업, 정부, 그리고 외국으로 이루어진다라는 것이죠.
  4. 설명의 전후를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5. "노동소득 증대가 경제성장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체 소득은 자본에 대한 이윤과 노동에 대한 임금소득으로 나뉠 수 있다.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고 노동소득이 높아지게 되면 소비가 늘어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는 이자나 배당, 임대료 등 자본에 대한 소득을 얻는 사람들은 고소득층이 많아 소비성향이 낮고 임금소득자들의 소비성향은 높기 때문이다. 소비의 증가는 기업매출 확대로 이어져 투자와 고용을 증대시키고 다시 노동소득을 늘리는 선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6. '성장'이란 간단하게 말해 '국민 소득의 지속적 증대'라 정의될 수 있습니다.
  7. "포드는 이익공유제(profit-sharing)를 통해 노동자들이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당 5달러’라는 파격 조치도 바로 그런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자들에게도 자동차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 '포드는 어떻게 마르크스를 쫓아냈는가?', 네이버 <주제가 있는 미국사> 중.
  8. "내수확대를 통한 성장전략을 채택한 국가들 중 브라질, 일본, 중국 등은 노동소득 확대를 중요한 정책과제로 택했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9. "정부가 투자를 늘려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먼저 늘려주면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에게도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 결국 경기가 활성화되고 덩달아 경제발전과 국민복지가 향상된다는 이론" - 김민구, 「경제상식사전」 p22, 길벗, 2015.
  10. "과거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소위 MB노믹스)도 트리클다운 이론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B노믹스는 대기업들이 요구하는 규제철폐를 과감하게 실시했으며 세금(법인세)도 크게 줄여주었죠." - 김민구, 위의 책 p23.
  11. 노동자의 한계소비성향이 높다라는 것이 곧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 비해 '헤프다'라는 걸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라는 건, 쓸 수 있는 돈이 생기면 그 돈을 미래를 위해 저축하기 보다는 현재를 위해 쓸 수 밖게 없다라는 것이지요. 경제학에서 저축은 기본적으로 소득에서 소비를 제외한 잔여의 개념입니다.
  12. "포스트 케인스학파에서는 소득분배를 개선함으로써 수요를 늘리고 성장을 높일 수 있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을 제시했다. GDP는 생산, 지출, 분배의 측면에서 각각 볼 수 있는데 소득주도 성장론은 소득의 분배 측면에서 접근하는 개념이다. 생산을 통해 벌어들인 소득은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이윤)으로 나뉘게 되는데 이중 노동소득에 귀속되는 비중을 높임으로써 성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소득을 얻는 근로자들은 자본소득을 얻는 사람들보다 소득수준이 낮고 이에 따라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이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13. "일반적으로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1956년 로빈슨과 칼도 등 케임브리지 경제학자들이 발전시킨 성장·분배 모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초기 모형들의 주요 목적은 표준적 신고전학파의 한계 생산성 이론에 의지하지 않고 주어진 성장률하에서 소득분배, 특히 이윤율을 설명하는 데 있었다." (p181)
  14. "일반적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자들은 노동소득 내에서 분배의 형평성을 높이는 정책을 역시 강조한다. 저소득 근로자들은 고소득 근로자들에 비해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저소득자에게로 소득이 이전될 경우 경제전체의 평균 소비성향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단순히 분배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부양을 통해 소비를 확대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도 성장을 높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경제는 균형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에 과소소비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임금소득을 늘려 소비를 높여주게되면 성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은 노동소득과 자본소득과의 분배, 노동소득 내에서의 분배, 그리고 수요정책을 통한 내수부양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성장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15. "투자가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항목이지만 소비가 제약되는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의 소득과 생활이 안정되어 소비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추세가 지속되면 소비의 성장이 위축되어 성장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를 수 있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분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임금주도 성장론의 주장이다." - 류동민·주상영,「우울한 경제학의 귀환」pp282~283, 한길사, 2015.
  16. 결론적으로 말해,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은 기업 혹은 자본가의 몫을 줄이고 노동자의 몫을 늘려 총수요를 증대시킨다라는 주장입니다. --- "임금-가격 상승의 악순환은 소득분배를 둘러싼 계급 간 대립이 표면화되어 임금과 가격(인플레이션)이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이다. 이 현상은 기업 혹은 자본가가 이윤 몫을 높이려는 과정에서 발생하거나 외부 충격에 따른 비용 상승을 가격에 전가하는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후자는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시기에 발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류 파동으로 말미암아 비용이 크게 상승하자, 기업들은 비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전가했고 물가가 급격히 상승했다. 물가 상승으로 실질임금이 하락해 생활수준이 악화되자 노동자들은 (명목)임금의 인상을 강하고 요구했고, 기업들은 임금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다시 전가시켰다. 이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p257)
  17. "경제학에서는 개별 기업의 임금이 10% 인상되면 고용이 약 3% 감소하므로 고용의 임금탄력성은 -0.3이라고 상정된다. 즉, 다른 업체와 경쟁관계에 있는 개별 기업은 임금이 오를 경우 가격인상이 여의치 않으므로 생산비용을 낮추기 위해 고용을 줄이게 된다. 반면, 만약 최저임금과 같이 경제 내 모든 임금이 동시에 동등하게 상승하면 경쟁을 우려하지 않고 가격을 인상할 수 있어 고용감소폭은 작게 나타날 수 있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오해는 경제 전체에 걸친 임금인상과 개별 기업이 직면하는 임금인상의 효과를 혼동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가격구조가 변화하고 고용에 대한 영향은 작다." - KDI FOCUS,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2018.06.04.
  18. 다만, "포스트 케인스학파 경제학의 핵심은 투자가, 경제 내의 저축 규모와는 독립적으로, 경영자나 기업의 의사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p52)라는 주장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논거 하에서 포스트 케인스학파는 "실질임금이 상승하면 실질 총수요가 증가하고 생산과 고용이 증가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p162)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지요. 포스트 케인스학파의 이론이나 현재 대한민국의 '소득주도 성장'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이론적 논점의 시작은 바로 여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19. "현재 우리나라 자영업자 비율은 과도하게 높습니다. OECD 회원국 중 4번째인 27.4%에 달합니다.독일. 일본 등 제조업 기반이 충실한 나라들이 10% 내외임을 비교할 때 결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죠." - KTV 국민방송, <자영업자 대책, 효과낼까?> 중, 2018.12.21.
  20. "이론적 차원에서는 임금주도 성장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 경제주체를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하고 그에 상응하는 소득을 이윤과 임금으로 구분하는 고전주의 경제학 방법론에 비추어 볼 때 막연하게 소득주도라 하기보다 임금주도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의미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스트 케인스주의 학자들은 경제체제를 이윤주도 성장, 임금주도 성장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하다. 해외 학계에서도 소득주도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지만, 임금주도 성장의 개념이 한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자영업 비중이 높고 임금근로 부문에서도 노조조직률이 낮아 단체교섭에 의해 임금이 결정되는 비중이 낮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소득주도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다." - 주상영, <한국의 소득주도 성장>, 예산정책연구, 2017.11.
  21. '임금'이란 단어와 '급여'란 단어가 발산하는 사회적 의미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22. "대부분 최저임금 및 저임금 근로자들은 영세규모의 사업체 또는 소기업에 속해 있으므로 결국 최저임금 및 저임금 근로자의 임금 인상은 수익성이 낮고 충격흡수 여력이 없는 이들 영세 및 소기업들에게 큰 타격이 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음." - 박정수,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분석과 시사점>, 한국경제연구원, 2017.09.
  23. "분배를 소홀히 하면서 지속성장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특히 저성장 시대의 불평등은 더 위험하다. 성장을 제약하기 이전의 문제로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민주적 질서를 파괴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 주상영, 위 보고서 중.
  24. "민간소비의 원천은 가계소득인데, 한국의 국민소득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매우 낮다. 국민계정으로 본 소비성향이 낮은 것은 기본적으로 가계소득 비중이 낮기 때문이다." - 주상영, 위 보고서 중.
  25. 공정 개선 등을 통해 잉여 인력을 정리하여 인건비를 절감하려는 노력 자체도 또한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자본의 속성이니까요.
  26. "정부는 민간부문의 노동소득 증대를 유도하는 한편 공공부문 임금인상이나 재정지출을 통해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의 국가부채 규모로 보면 공공부문의 노동소득 증대 및 정부의 재정정책 확대 여지가 큰 편이다. 공공부문 근로자 비중이나 GDP 대비 국가부채 규모가 선진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IMF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노르웨이 다음으로 재정여력이 높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27. "노동소득 확대는 기업 및 자영업의 임금지불, 정부의 임금지불 및 이전 지출, 세금인하 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28. "시장소득의 불평등과 가처분소득의 불평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가처분소득의 불평등이란 세금과 이전지출 후의 불평등, 즉 순불평등net inequality이다." - 류동민·주상영, 위의 책 p269.
  29. "교통여건이 열약한 산업단지에서 근무하고 고용보험을 가입한 만 15세 이상 34세 이하(군필자 동일) 청년근로자의 교통비 부담 완화와 산업단지내 청년 근로자 고용 유지 및 취업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교통여건이 취약한 산업단지 재직청년의 교통비를 지원한다(청년동행카드 사업, 488억원). 산업단지 입주기업의 청년인력 수요는 높은 반면, 청년은 교통이 불편하여 산업단지 취업을 기피하고 있다. 이에 산업단지 중소기업 재직청년 중 교통여건 취약지역 근무자에게 매월 5만원씩 지급함으로써 산업단지에서 근무하는 청년근무자의 실질소득 향상 및 중소기업 인력수급의 애로를 해소할 계획이다. 신청대상은 교통여건이 열악한 전국 842개 산업단지에 소재한 중소기업에 재직하는 청년근로자로 청년동행카드를 발급받아 버스, 지하철, 택시, 자가용 주유 용도로 사용하면 카드청구내역에서 5만 원 한도로 차감 받을 수 있다." --- <추가경정예산>, 2018년 7월호, 한국재정정보원.
  30. <홍장표 "대기업 주도 낙수효과 끝 ... 소득주도성장 필수 불가결>중, NEWS1, 2018.10.17.
  31. "평균적인 기업들의 수익성은 높아졌지만 기업간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일부 기업에 이윤이 집중되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 상위 기업들은 임금 인상 여력이 있지만 노동투입 비중이 크지 않아 임금을 높여도 전체 노동소득을 늘리는 효과가 크지 않다. 반면 수익성이 낮은 기업들은 노동비용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임금인상에 따른 충격이 클 것이다." - LG경제연구원, 위 보고서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 - 방구석 문화여행자를 위한 58가지 문화 패키지 여행
한민 지음 / 부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당신의 고통은 당신 탓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p266, 사계절, 2013.


앞뒤 문맥을 살펴볼 여력마저 없는 상태에서 만났던 위 글은, 심지어 이 글의 목적이 위로를 주기 위함이라는 의도를 다분히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여도, 듣는/읽는 저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되어주었더랬습니다.1 --- 내 사업이 힘들어진 것도 내 잘못만으로 그리 된 것이 아닐 수도 있을거라는, 크게 보면(?) 이게 다 '신자유주의의 폐해' 때문인 거라고 스스로에게 억지 위로를 건낼 수 있는 일말의 건덕지를 찾아낼 수도 있었으니까요. 뭐 그렇게 대충 남 탓도 좀 하며 살아가도 괜찮겠구나,라 느낄 때 즈음...  






"한국 사회를 행복한 지옥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우리 한국 사람들 스스로다. 결코 누군가가 몰래 만들어놓은 함정에 우리가 억지로 빠져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은 바로 우리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넘어서, 그냥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 허태균, 「어쩌다 한국인 」 p28, 중앙books, 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워지지 않는 찜찜한 남 탓 타령에 기대고 있는 제게, 예의 이 모든 것이 남 탓이 아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탓이라 말하는 또 다른 사회학자의 책이 세상에 나오더군요. 이 분의 글을 읽으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 분의 글을 읽으면 저게 맞는 것 같고, 이거 참... 


………………………………………………………………………… 


문화는 한 집단이 최적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이자 습관입니다. (p164) 


예술의 전당에 가야만 볼/느낄/즐길 수 있는 것이 '문화'가 아님은 이젠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생각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문화는 자고로 '삶의 방식이자 습관'인 것이며, 그 방식과 습관은 전적으로 해당 집단의 생존이라는 최종 목표에 부합되는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것이죠. 그러하기에, 

"모든 인간은 같은 '류()'로서 이른바 공통된 '유적(類的)' 특성을 가지나, 특정 사안에 대한 생각, 특정 사건에 대한 느낌, 특정 자극에 대한 반응은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나타난다." 

-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 pp11~12, 웅진지식하우스, 2007. 

인류로서의 공통된 유적 특성이 분명 존재하겠으나, 각 민족, 각 시대에 따라 문화의 외형과 내용은 당연히! 변화하게 되는 것이겠죠. 그렇게 저자 한민은 --- 이 책 「슈퍼맨은 왜 미국으로 갔을까」를 통해 문화 상대주의, 그리고 기능주의적 인류학의 시선에서 타 문화를 바라보아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특수주의 historical particularism 는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입니다. 바로 이 역사적 특수주의에서 문화상대주의가 출발합니다. (p71) …… 기능주의 인류학의 관심사는 어떠한 문화적 현상 또는 요소가 구성원들의 생존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p108) …… 어떤 문화요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문화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것에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거나 필요가 없어지면 자연히 도태되어 없어지겠지요. 이것이 기능주의적 관점입니다. (p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푹 젖어 있는 우리(뿐만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문화에도 서열을 매기는 것에 훨씬 익숙해져 있기만 합니다.2 더 나아가 그 서열은 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인종 자체에까지 그대로 적용되기도 하지요.3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그 문화에서 온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비굴한 태도로 그를 대할 것이고,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고압적인 태도로 그를 대할 것입니다. (p35)

그러나 저자는 --- 이같은 시선이 결코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닌, 우리가 타 문화를 바라보는 학습/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진단하며, 이 책을 통해 그러한 학습/훈련을 조금이나마 독자들이 얻어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것들 달리 생각해 보는 것"(p39)으로부터 우리의 문화, 그리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를 시작하자 말해주고 있지요.       

사실상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기괴하고 엽기적인 문화들은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 때문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능들은 관광객 같은 외부인의 눈으로 본다고 알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문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p114)  
·
·
·

이같은 문화 더 나아가 인종에의 서열 매기기는 아무래도 과거 역사를 통해 이 세상을 이끌어 왔다라 생각하는 서양인들에게 더욱 더 심합니다. 저자는 아메리카 대륙에 이미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단어로 콜럼부스의 항해를 표현하는 것을 서양인들이 지닌 이기적 시각의 단적인 예로 들고 있지요.4 

동양이나 동양 문화, 동양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을 뿐이죠. 바로 이것이 오리엔탈리즘이고 오리엔탈리즘의 폐해입니다. (p45)

이같은 서양인들의 우월주의는 외계인들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는 무리수까지 두게 된다라, 저자는 또한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외계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의 논리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저로서는 그것이 실제로 외계인들의 개입이라 말할 수도 있다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을 때에는 예의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죠? ^^;;)

서양인들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그럴 만한 능력과 기술이 없는 애들 - 예를 들면 남미 사람들 - 이 상상도 못할 규모의 건축물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런 고대 문명의 흔적은 자신들이 제일 진화한 인간일 거라는 서양인들의 가정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설을 택한 것이죠. "아! 외계인들이 와서 만든 거구나!"  … 외계문명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진화한 종족이라는 서양인들의 지위는 유지되고 다른 민족들은 진화를 못한 이들이라는 진화론적 설명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pp 60~61)


………………………………………………………………………… 

우리는 우리나라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났고, 자랐고,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이야기해 보려 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생각보다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 한국인들이 한국을 잘 모르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이고, 둘째는 알려고 하지 않아서입니다. (p207)

1부에서는 세계의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내용을, 2부에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담겨져 있습니다.5 --- 서양인들이 지닌 우월적 문화관보다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는 문제는 아마도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적 충돌이 아닐까 싶습니다. '태극기 부대'로 통칭되는 세대 간 대립과, '페미니즘'의 외관을 띤 남녀 간 대립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지요. 그 중에서도 '태극기 부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그 분들을 그저 '주말 광화문 일대를 교통 지옥으로 만드는 노인들'로 생각했었던 저의 시선을 교정하는 데 매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노인들은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인생이었는지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을 준비하는데, 만약 자신이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면 곧 다가올 죽음 앞에서 인생 잘못 살았다는 절망감이 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자신의 인생이 성공적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을 재조정하여 분리, 분열되었던 자아상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 현재 한국의 노인들이 살아오신 시대는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란 트라우마가 모조리 집약된 그런 시대였습니다. 과거의 자기 모습이 늘 밝고 희망찰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어두웠던 과거의 기억은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노년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입니다. … 부정적이었던 과거의 사건들은 재정의되고 성공적인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재조직됩니다. 어느 것 하나 넉넉지 않았던 가난한 삶은 가족과 이웃의 정으로 포장되고, 국가가 개인의 삶을 통제하던 시절의 기억은 통금 시간을 어기고 사랑하던 그녀와 사랑을 속삭이던 추억으로 변모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내렸던 모든 결정과 더 잘살기 위해 취했던 모든 행동은 '그나마 이렇게 발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그래서 너희를 '남부럽지 않게 가르치고 키운' 당신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을 살지 않은 너희는 모른다. 다 너희를 위한 것이었다."(pp 360~361) 

그 분들의 가치관에 대한 폄하라든가, '나는 정의이기 때문에 그 분들은 정의가 아니다'라는 이분법적 단정은 지금의 우리 사회를 개선시키는 데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들을 이해함'이 곧 '그들의 주장에 수긍함'이나 '굴복함'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성의 부족을 극복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과연 우리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도 자랑스러울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느낀다라면,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하겠죠.

지금 우리가 살게 된 헬조선은 저마다의 개인적 욕망이 쌓이고 쌓여 나타난 결과입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인들은 자신만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다른 이와 다른 가치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내가 잘살기 위해 다른 이의 아픔을 외면했고 내가 잘 살기 위해 정의에 눈감았습니다. … '나만 잘되면 돼, 나만 아니면 돼'가 많은 이들의 좌우명이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 개인적인 욕망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사는 헬조선이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순수할 수도 있는 개인적 욕망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다른 이들의 욕망을 짓밟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어느덧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개인적인 노력이 개인적 욕망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외면한 모든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외면할 것입니다. (p324) ……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개인의 성공보다 공공의 선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 혼자 잘사는 것보다 모두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때로는 내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p330)

이렇게 --- 노명우 교수와 허태균 교수의 상반된 듯한 구절이, 기실은 일맥상통하고 있다라는 것에 대한 힌트를, 이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습니다. 노명우 교수가 이야기했던 '당신'의 범주에 이미... 누군가에게 '당신'인 제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었을까,라고 말이죠.

 함께 읽어보길 권하여 드리는 책들 
- 김찬호 : 「사회를 보는 논리
- 진중권 : 「호모 코레아니쿠스
- 허태균 : 「어쩌다 한국인
- 노명우 : 「세상물정의 사회학
- 김두식 : 불편해도 괜찮아
- 김형민 :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썸데이 서울」 · 「삶을 만나다
- 마빈 해리스 : 「작은 인간




  1. 그 시절, 다음의 구절들도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었지요. : "어떤 기업이 망했다고 그 기업과 기업주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평가받아야만 하는가?"(p252) …… "우리가 성공이라 여겼던 것이 성공이 아니었듯, 우리가 실패라 여겼던 것이 실패만은 아니란 점"(p6) --- 이건범, 「파산」, 피어나, 2014.
  2. "외국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너 어느 나라에서 왔니?'라고 묻는다. …… 상대가 대답을 하면 이제 머릿속에 당장 그 나라의 1인당 GDP가 떠오른다. 모든 문화적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돈 내고 돈 먹는 사회의 '시장주의 코드'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좌변에 그 나라의 GDP, 우변에 우리나라의 GDP를 놓는다.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좌변과 우변 사이에 들어올 부등호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보다 GDP가 많으면 괜히 그가 존경스러워진다. 우리보다 적으면 은근히 무시하면서 괜히 그에게 '잘살아보세". 새마을운동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사람을 늘 위아래로 놓고 보는 '보수주의 코드'다." - 진중권, 위의 책 중.
  3. "우리의 상식 속 나라 사이의 관계는 …… 수직적이기만 하다. 수직적 관계만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근거 없이 깔보기 일쑤다." - 노명우, 위의 책 p57.
  4. "인류사에 없던 새로운 대륙이 유럽의 한 항해자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고, 인류는 그때를 기점으로 새로운 곳에 '진출'하게 된 것일까요? 이런 생각은 상당히 유럽 중심적인 사고입니다. 그 땅에서 계속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도 그곳이 '신대륙'일까요? 그들 처지에서 1492년의 그 사건을 기술하자면 한 무리의 유럽인들의 '방문'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p37)
  5.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내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p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