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꿈을 꾸지~, 이런 학습모임˝ ♡

제네바에서는 ‘콩그레가시옹‘이라 불리는 ‘성경연구모임‘이 있었다.

˝각 개혁 도시에 목사들의 모임이 있었고, 일정 부분은 평신도의 참석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ᆢ의사 신분이었던 평신도와, 여성들의 참석은 물론 출판 관계자들도 참석했고, 심지어 목사들의 숫자보다 평신도의 숫자가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47)

성경연구모임에는 매주 50명에서 6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고, 사역자가 아닌 구성원들이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

#나는ㅡ매일ㅡ꿈꾸지ㅡ이런학습모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배는 언약적이기에 하나님을 향한 상향운동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향운동을 함께 가져야 합니다. 일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보다는 ‘예배한다‘는 표현이 낫습니다. 예배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는 신에게 나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종교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받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24)



상식이 때론 전혀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혹자는 주일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공적으로 만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 보다 활동(봉사)으로만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도 하는 것 같다.

#예배ㅡ언약갱신예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ᆢ카르타고에 갔던 아우구스티누스보다 철이 없었다. 지켜보는 이도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6-7)

아마도 저자가 글을 쓰게 된 동기거나, 당시의 상황이나 정서가 그랬나보다.

한 인간의 ‘신념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에 알맞게 저자의 질문과 생각을 토대로 끈질기게 사유의 연결고리를 더듬어 탐색해가는 책이다.

자기성찰적 질문들과 신앙의 물음들, 실존의 물음들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의 섭리‘라는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게 되었으며, 다른 종류의 삶을 살기로 시작하는 ‘기독교도‘의 삶의 방식으로 택하는지를 궁금해한다.

-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어떻게 해서 ‘앎‘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던
사람들이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 나는 어떤 존재인가?
-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 나의 삶은 의미있는가?
- 내가 참으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참인가?
- 우리 눈 앞의 사태들, 존재자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내가 신을 어떻게 아는가?
- 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발견하는가?
- 언제부터 시간이 있었는가?
- 어떻게 성서로 마음을 돌려 그것이 어떠한가
알아보기로 하는가?
- 나는 무엇에 근거하여 살고 있는가?
- 내 삶의 근거는 무엇인가?
- 내 삶에서 내가 훼손하고 싶지 않은 원칙이
있는가?

(우리도 스스로 다시 질문하고 점검하면 좋겠다)

앞서 말한대로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과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살펴가면서, 자기정체성과 현전의 사태들, 이미 만들어진 신념의 체계, 창조, 세계의 존재자, 인식, 확신, 신앙고백, 회심, 시간, 영원, 두려움, 소멸,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간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의 차이점을 비교하며, 숨은 신을 찾아가는 경로를 추적하는 내용은 대단히 흥미롭고 즐거웠다.

글을 마무리할 때까지, 아직 저자의 신앙고백은 없었지만, 그가 남긴 일련의 사유하는 과정으로 봐서 저자 스스로의 존재에게 신의 의미를 부여함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것을 엿보았다.

무엇보다 고백록을 꼭 읽으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바라건대 저자 자신도 ‘신앙고백‘의 세계로 성큼 발을 내딪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153)

..

아직 비신자가 ‘숨은 신을 찾아‘ 나선 여정은, 이미 신자로서 무엇을 먼저 인식하고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지를 보게 해주었다.

이런 인식의 과정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욱 지혜로운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강추~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세나 르네상스에 비해 종교개혁 당시의 문화예술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류임이 안타까움으로(17)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로써 ‘어떤 기준으로 문화예술적 현상을 볼 것인가‘ 라는 기준을 고려하여 종교개혁의 문화예술적 공헌과 영향력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여기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문화예술에 대한 고전적 관점과 현대적 관점을 이해하면서 왜 어떤 이유로 종교개혁의 문화예술적 측면이 야박하게 평가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한편 종교개혁의 입장이 어떤 점에서 독특한가를 역사적인 정황과, 종교개혁의 신학적 입장을 루터, 츠빙글리, 칼빈을 중심으로 정리해 주는데, 특별히 칼빈의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셔서 아주 유익했다.

일반 성도들이 칼빈 어르신이 이 말씀하신(62-65) 이 정도의 입장 정리만 정리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일부 칼빈 이후 신학과, 개혁주의나 청교도들과 함께 싹튼 문화예술 과정은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마음에 새기고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창작물이 문화예술 작품과 활동, 그들의 삶 자체가 문화라는 것을 피력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화예술 활동이 그리스도인의 예배에서 실현된다는 설득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인상깊은 내용이었다.

성경을 따라서 하나님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문화예술 활동의 기초라고 생각해 볼 때, 가장 검소하고 절제되고, 소박한 문화예술 활동이 되지 않겠는가 라는.

얼마전 읽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제임스 스미스, IVP)에서 예배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위의 종교개혁 문화예술적 삶과 중세 특유의 사상과 감성, 조각상, 그림, 성유물, 건축물, 장식 등에서 바라 본, 두 시대의 차이점을 구별해주는 것도 일품이었다.

개혁주의 문화예술에 향한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디서부터(성경) 시작되는지 분명히 알고, 오직 성경에 근거해서 세상을 바르게 노래해 주는 작업과 활력이 되찾아졌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첫 번째 책은 성경,
하나님의 두 번째 책은 자연˝(76)

성경은 심장, 자연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광의 거울~

#작고얇지만아주기특한책강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런걸, #대박 #깜놀이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ㅋ
와 진짜 많이 놀랬다. 그리고 반가웠다.

저자가 말하는 ‘말씀으로 기도하기‘, 그 ‘말씀으로 묵상하기‘가 내가 활용(?)하는 방법과 매우 흡사해서다.

내가 처음 독학(?기도를 배울 때)할 때도 그랬고, 그 방법이 유익했던터라 일대일양육을 할 때에도 기도연습과 묵상연습을 노트에 말씀을 적어가면서 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저자보다는 덜 구체적이지만 기본 의도나 방법은 꽤 동일하다.

시편을 집중적으로 시작한다는 것도 유사하다.

결국 좋은 의도와 방법은 무엇이든 비슷하게 결을 같이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원칙과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는 기도의 자리, 결코 소홀할 수 없음을 새겨보며 다시 도전을 받고 확인한다.

우리의 말과 마음은 연약하기 짝이 없으니, 성경을 지니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며,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하며,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함이 마땅하다.

기록된 말씀을 주심이 날마다 감사하다.

성령께서 말씀하심에 귀기울이는 ‘말씀기도‘와 ‘말씀묵상‘의 방편이 가장 좋은 것이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벧후1: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