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경의 자서전 <회상과 모험>을 읽으면서 아서가 불편하게 여겼던 것들. 사실과 다른 것들, 아니, 거짓은 아니지만 온전한 사실이라 볼 수 없는 것들.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듯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들. 의도적 거짓은 아니지만 상대방 입장을 충분히 배려한 건 아닌 글들. 이야기의 모서리가 깎여나가면서 실제로 있었던 일보다는 화자 자신에게 중요한 일들이 더 부각되는 서술.
1906년에 아내가 오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둠의 시기였고, 나는 일을 손에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들지 사건이 나타났고,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 에너지를 쏟게 되었다.
조지는 항상 이 서두를 불편하게 여겼다. 이 사건이 아서 경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끌어내는 데 딱 필요한 만큼만 특이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로서는 그 목사가 자신을 파르시로 여겼는지, 혹은 파르시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유주의적 사고를 지닌 누군가가 영국국교회의 보편성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라건대 이 실험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목사는 정감있고 헌신적인 인물이었지만, 유색인종 성직자와 혼혈아들의 출현은 거칠고 투박한 교구에서 유감스러운 상황이 벌어진 계기가 되었다.
조지는 이 말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사실상 그의 아버지에게 사제직을 주어 그 교구를 담당하게 했던 어머니 쪽 가족을 비난하는 셈이었다. 그는 '혼혈아들'이라는 표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식으로 말할 순 없었던 것일까?
그 사건으로 나는 격분했고, 온 힘을 다해 천박한 사람들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처한 유색인종 성직자와 푸른 눈과 잿빛 머리를 지닌 용감한 어머니, 그리고 어린 딸로 이루어진 무기력하고 고통받는 한 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무기력했다니? 아서 경이 개입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스스로 사건을 분석한 기사를 신문에 실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와 모드 역시 지속적을 편지를 쓰며 지지자들에게 호소하고 증인들을 모았다. 아서 경은 물론 상당한 신뢰와 감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지만, 조지에게 그는 무한한 신뢰와 감사를 요구하고 있는 듯 보였다.
1906년 가을, 나는 우연히 <엄파이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문을 집어들었고, 어떤 사람이 자기 사건을 직접 쓴 기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아서 경이 처음 이 사건을 접하게 된 계기에 대한 언급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서 경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신문'을 '우연히' '집어들' 수 있었던 까닭은 조지가 그에게 기사 전문과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서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조지와의 일을 쓴다면 저렇게 쓸 수밖에 없으리라.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에 비추어보면 거짓말 아닌 게 어딘가 말이다. 조지처럼 문장을 파고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조지도 아서가 쓴 글이 자신과 관계되어 있으니 그렇게 정확하게 알지 그렇지 않다면 어찌 알겠는가 말이다. 눌러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관점이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