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라서 좋겠다, 라는 생각은 없다. 누구와 사는냐가 결정되어 있는 경우엔 어디냐가 중요할 테지만 누구와 어디가 동시에 미지수라면 누구와가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제주의 삶이라기보다 어떤 사람의 삶이라 생각하고 읽게 된다.
그랬는데 누구와 살더라도 사는 곳이 이렇다면 악!!!
"벌레가 많다. 세스코의 가호 아래서도 여전히 각종 개미, 물려서 스파이더맨이 돼도 이상할 게 없는 왕거미,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지네 등등과 실내에서 근접 조우하고 있다. 멋모르고 개들을 오름에 데려갔다가 진드기 수백 마리에 물려 한밤중에 동물병원에서 수십만 원을 탕진했다."
이런 표현들은 입맛을 다시게 한다.
"시간의 원근감이 휘발해버려 일 년 전과 한 달 전과 어제가 납작하게 달라붙는다."
"여기서 한 대답을 저기서도 하고 거기서도 하고 저어어어기서도 반복하고 있노라면 손바닥만 한 밭뙈기를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팔아치운 부동산 사기꾼이 된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주인공은 대체로 자신에게 닥친 크고 작은 고난을 나름 심각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한다. 이런 정서가 멋지긴 해도 혹시 가짜는 아닐까 의심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수하물로 싣기 위해 케이지째 개의 무게를 달고, 추가요금을 지불하고, 그걸 들고 뒤뚱거리며 멀어지는 항공사 직원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웬만한 고난은 반드시 담담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건 내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이번엔 내 차례가 된 것뿐이다. 게다가 내 손에 있을 땐 아픔이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진 순간 킬로그램당 이천 원짜리 수하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 걸로 호들갑을 떨면 자신의 고통을 특수화하는 짓, 전문용어로 '징징거림'이 된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짐짓 담담한 태도를 취해야 한드는 게 아니라, 맥락이 이렇다 보니 저절로 담담해진다는 의미다."
"만약 내가 그 나이 때(11살) 누군가 나를 차에 태워 한 시간을 달려간 다음 보여주는 게 고작 나무와 바위와 물이라면, 밥이라고 주는 게 구운 채소 따위라면 속이 몹시 메슥거리고 온몸이 근질거렸을 것이었다."
인터넷만 된다면 어디서 살아도 밥벌이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 부럽다. 대부분의 경우, 영구 붙박이란 물론 없지만, 그래도 훌쩍 떠나기 위해서는 준비가 제법 많이 필요하다. 쉽지 않은 걸 감당하기엔 나는 너무 길들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