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에서 나는, 이름하여 수필집이라는 것을 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필집을 엮게 된 것은 책세상 출판사와 나와의 어떤 관계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책세상에 대한 나의 채무감(번역 불이행에서 비롯된)을 덜어버려야겠다는 -그것도 단시일 내에, 그리고 시간과 수고를 새로이 들일 필요 없이- 나의 얌체 같은 속셈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다."  수필집을 내게 된 이유를 밝히는 부분. 솔직을 넘어 내팽개치는 듯한 어투. 그래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건 시인에 대한 근본적인 호감 때문이겠다.

 

내 책꽂이를 보니 최승자 시인의 시집이 세 권 있다. 문지에서 나온 초기 시집이다.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표지에는 시인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이책을 읽기 전까지는 시인의 사진을 본 적이 없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게 여긴 기억도 없다. 수필집 책날개에 흑백으로 박힌 사진을 보니 오히려 낯설다. 그 아래에 적힌 약력 또한 낯설다. 문지 시인선에 적힌 건 데뷔, 번역한 책, 시집 정도였는데 이 수필집에는 그 이외 직장경력이 있어서다. 특히 "1985년부터 1987년 2월까지 대한건설협회에서 <건설협회 40년사> 편찬작업을 했던 직업 경력" 부분. 시인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할 건 없지만서도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아서 오히려 직장인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라는 글은 일부가 뚝 떼어져 시집<기억의 집> 뒷표지에 실려있다. 문지시인선의 특징이기도 한 뒷표지 시인의 말. 최승자 시인의 시집 뒷표지도 시만큼이나 좋았더랬다. 어떻게 해서 쓰게 되었나 하면 이렇단다. "실은, 편집자의 요청은 체험적 시론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최소한 십 년 이상은 시를 썼으니, 보잘것 없으나마 그래도 분명 나름대로의 시론을 갖고 있기는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글로 짜고 꿰매기가 힘들고 귀찮을 것 같아서, 너무도 게으른 시인인 나는 그냥 퍼질러 앉아서 수다만 떨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 구제불능의 게으름은 나의 비관주의 혹은 패배주의와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겠지만."

 

그리고 한 구절만 더.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꼭지에서 나온 것이다. "어쩌면 내 시를 읽는 독자들 중에서, "무슨 시가 이래? 맛있는 살코기는 하나도 달려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뼉다귀만 남았잖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영양분이 담뿍 들어있는 맛있는 살코기를 제공하지 못하는 시인. 살점 하나 붙어있지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불모의 딱딱한 뼈다귀만을 내놓은 시인." 생각해 보라.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살코기가 씹힌다면 어떨 것 같은가. 그건 최승자 시의 맛이 아니다. 딱딱한 뼈다귀만으로 되어있어 먹다가 이빨과 부딪쳐 통증을 느끼기도 해야 하리라. 그리고 "혹시나 그 뼈다귀를 푹푹 고면 맛있는 국물이라도 우러나온다면. 제발 그럴 수라도 있다면" 이라 말하는 시인의 바람대로 충분히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다. 바라건대<물 위에 씌어진>이 마지막 시집이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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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정쌀롱이라는 프로가 있다. 저 사람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라는 말이 툭 튀어나오는 일을 두고, 도대체 왜?에 해당하는 심리를 까발려보는 건데, 아주 재미나다. 이런 토크쇼는 MC의 입담이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하는 법. 내 입맛에는 괜찮아서 낄낄거리면서 본다. 이런 얘기로 시작하니 이책 <화가 난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사소한 일이라서 말하기 뭣하고, 입다물고 있으려니 더 화나는 일들에 대해 늘어놓은 책인데 속사정쌀롱과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한바탕 수다라는 점일까. 해결책은 아니지만 다다다다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속이 좀 시원해지는. 책에 실린 화나는 일들은 대개는 공감이 가고 어떤 건 그 정도인가 싶지만, "자기만의 화나는 지점들이 각자 있기 마련"이므로 "웃자고 한 얘기" 정도로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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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반강제로가 아니라 순전히 강제로 교회에 다니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자율적으로 다니게 했더니 단 한번도 가지 않았다. 큰아들은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국가니까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엄마의 강요 때문에 교회에서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서 아직도 화가 난다고 하고 나는 네가 행복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도 훨씬 넘는데 우리 모자는 이 대화를 벌써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의 수필집에서 인용했다. 강요로 교회에 다닌 게 억울하다는 말을 엄마에게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순전히 강제로 다니게 했고 아직도 아들에게 선교를 멈추지 않지만 대학에 들어간 후부터는 가라고 강요하진 않는 것 또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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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능바우 여인들의 지혜는 그들의 남편에게도 슬기롭게 적용되었다. 젊은 여자와 도시 여자에게 주책없이 마음을 빼앗긴 남편이, '알고도 모른 체'하는 그들의 지혜 속에서 젊음이 힘을 잃고 돈이 떨어지면 가장의 품위를 잃지 않고 가정으로 돌아오게 해주었다."   

 

홍상화가 쓴 <우리들의 두 여인>에 수록된 단편<능바우 여인>에서 인용했다. 이 부분이 작가의 생각과도 일치한다는 걸 알게 해주는 작가의 말이 있다. 

 

"이 여성들이 택한 삶의 방법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가깝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감싸안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 여성의 역사이고, 동시에 현대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며, 또한 미래 한국의 희망이기도 하다. 이러한 독특한 정신적 영역을 단편소설의 형식을 취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다소 힘든 일일 수도 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노력 또한 문학의 의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노력의 미미한 결과가 바로 이 자그만한 책인 것이다."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외도하는 남편을 모른 체하며 참고 사는 것이 지혜이고, 나이들고 돈 떨어져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 할 때조차 품위있게 돌아오게 해주어야 한다니, 게다가 그런 행위들이 한국을 만든 원동력이고 미래 한국의 희망이란다. 이런 생각을 널리 알리는 것이 문학의 의무라 생각하여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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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의 엄마

 

피터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절 비난해요. 우리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에 피터가 그런 짓을 한 게 아니에요.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키웠는데도 그런 거예요. 변호사님도 아기가 있으시죠? 만약 그애가 변호사님이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된다면 어떻겠어요? 가령 샘이 자기가 게이라고 하면요?

뭐 어때서요?

이슬람교로 개종하겠다고 하면요?

샘의 선택이죠.

자살폭탄 테러범이 된다고 하면요?

그런 건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요. 저도 그랬어요.

 

 

피터의 아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마지막 순간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귀결된 모든 것은 아마도 일련의 사건들에서 비롯되었을 거야. 내가 그애를 사냥에 데려갔어. 녀석이 좋아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하라고 말했어. 수천 가지를 그랬을 거야. 만약 그중 하나가 피터를 그렇게 만든 거라면 어떡하지?

 

아이들은 저 혼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들은 부모가 이끄는 구덩이로 뛰어들 뿐이다. 레이시와 루이스는 아이들이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진실로 믿었지만, 사실은 멈춰 서서 방향을 물어보았어야 했다.

 

 

 

........ 그리고 피터

 

뭔가를 고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도, 불쌍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눈에 띄고 싶지 않을 뿐. 사실 그건 자신이 꽤 잘하는 짓이었다. 12년 동안 연마해왔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악한, 다른 사람들도 쏘아 쓰러뜨리고 싶어 할 악한임을 피터는 깨달았다. 비디오 게임의 묘미가 그런 것이었다. 벌 받아야 할 사람이 천벌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는 <바보들의 복수>라는 게임을 만들어 21세기에 맞게 갱신할 생각이었다. 힘의 균형이 방향을 틀어 낙오자들이 마침내 가해자들을 이기는 기회를 가지는 가상 세계를 말이다.

 

피터는, 그 악한을,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바로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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