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 번역자로 산 최승자. 산문집은 딱 두 권이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와 <어떤 나무들은>. 작가의 일상적인 모습을 알고 싶다면 <어떤 나무들은>을 읽는 것이 좋다. 1994년 8월 말경부터 95년 1월 중순경까지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주최하는 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머무는 동안 쓴 글. 말 그대로 일기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주체할 수 없이 풀어진 글.
작가이기 때문에 말하게 되는 내용도 있고,
"오늘의 국제문학 시간의 주제는 '나는 왜 쓰는가, 나는 무엇을 쓰는가'라는 거였는데, 나는 정말로 이런 유의 질문을 싫어한다. 나는 왜 쓰지도 않고 나는 무엇을 쓰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쓸 뿐이다. 그게 왜가 되고 그게 무엇이 된다면 좋고 안돼도 할 수 없다. 아무튼 이런 질문들은 나를 귀찮게 만든다. 내가 원고에서 쓴 요지는 나는 이런 질문을 이미 살아넘긴(survive)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런 질문을 넌더리나게 들어왔는데 왜 여기서도 내가 이런 질문에 마주쳐야 하는가로 시작해서, 나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어서 쓸 때 거기에 이미 왜와 무엇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얘기를 했다."
개인적인 성향 얘기도 있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하이, 헬로우 하고 돌아다니려니 얼굴에 탈바가지를 쓰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인사하는 습관이 붙질 않아서 인사를 할 때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때는 상대방이 저만큼 가버린 후에서야 아참 내 쪽에서는 인사를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무튼 이 미소 탈바가지가 내게는 무지무지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이 여자가 너무나 애기처럼 재재거리고 무슨 투정하는 것처럼 말하고 항상 남에게 뭘 해 달라고 하기 때문에 싫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상대방의 얼굴 표정이랄까 말투에서 그런 걸 못 느낄 수 있는지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도 약 3천불의 여행 경비가 할당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나는 한번도 여행을 하지 않았다. 한번도 아이오와를 뜨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움직이는 걸 싫어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다. 돌아다니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니까. 방에 틀어박혀 누워서 공상인지 망상인지 온갖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일 편안하고 또 제일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구경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고 돌아다니는 일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꽉차 있어서 나 외부의 것에는 흥미를 느낄 여유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꽉채우고 있는 그 나 자신은 죽음처럼 송장처럼 내 내부에 누워있기만 한다. 이 내 내부의 송장을 어서 치워버리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일어나 문을 열고 나로부터 나가 다오."
"쇼핑에서 내가 제일 먼저 산 것은 인스턴트 커피였다. 여기 사람들은 대개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지 않고 브류드 커피를 마시는데, 나는 그 커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다. 너무도 밍밍해서 커피가 아니라 숭늉 같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내가 너무도 심하게 커피를 마신다고 핀잔을 주기 때문에 나는 늘 커피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정말로 나처럼 커피를 진하게 (머그 한 잔에 여섯일곱 스푼의 커피를 넣는 것을 보고 쇼나는 질색을 해댔다), 많이 마시는 사람은 드물 것이고, 나 자신도 나보다 더 진하게 더 많이 마시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일기라는 특성상 정제된 글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