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처럼 여행하기
전규태 지음 / 열림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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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사망 통계를 보면 3명 중 1명은 암으로 사망한다고 한다. 상당한 수치이다. 의학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고는 하나, 일반적으로는 여전히 암은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미완치의 질병이다. 그만큼 완치가 어렵고 암을 제어하고 관리하기가 까다롭다는 뜻이다. 암 발생의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 불시의 이주 통지서를 받게 되는 격이다. 통상 암이 발병하면 심리적 5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써 중간 과정을 생략하면 "부정과 수용"이라는 것으로 집약되는 시작과 끝이다. 최초에는 발생 사실을 부정하고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분노하게 된다. 그리고 암과 타협하려 들며 다스리려 하지만 끝끝내 치료의 각종 한계치에 다다르면 죽어야 하는 사실에 우울적 장애를 나타내고 서서히 마지막의 단계인 죽음의 인식을 실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이 책 "단테처럼 여행하기"의 저자 전태규는 사뭇 다르다. 자신이 직장암이 발생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부정, 분노, 타협, 수용이라는 암 환자의 심리상태에서 벗어나서 불쑥 여행이라는 강렬한 키워드를 자신의 마지막 종지부에 들이 밀어 넣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신의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을 통한 자신의 수양과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여행이라는 주제가 여행의 당위성으로 연결 지웠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여행을 줄기차게 강조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여행하기를 적극적으로 강권한다.

 

이 세상에 나온 모든 사람은 한 번의 탄생과 한 번의 필연적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대전제 하에서 흔히 요즘 하는 말로 웰 빙, 좋은 삶이 웰 다잉 즉 좋은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논리를 따로 생각하지 않는 방식이다. 잘 살아야 만이 잘 죽는다는 의미.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하여 여행으로 삶에 대한 고찰적 인식으로써 잘 산다는 개념과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반대로 어떻게 하면 잘 살 것인가라는 역설적으로 정조준하게 된다.

 

요즘 잘 살기는커녕, 그저 살기도 벅차다. 아니 삶을 견뎌야 할 정도로 견디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지 못해 견디기라는 이 "견디기"에서 생의 비애가 여름철 장맛비처럼 쏟아진다. 한 기업을 이룬 일가이든, 오늘 당장의 먹거리가 떨어진 사람이 노숙을 하든 견딤이 지독하리 만치, 삶이 순탄하지 못하고 격랑에 휩쓸리고 여기저기 부딪히며 생체기를 내며 흐르는 시간이라는 것이 견디기였다. 왜 견디며 살아야 할 당위성, 필연성은 굳이 생각한 바도 없이 말이다. 저자는 이런 삶에서 여행으로써 자기 자문자답의 암덩어리를 끌어안고 떠나려 했다.

 

자신의 암은 인체가 가진 자기 스스로의 모순이다. 환경과 먹거리 또는 내부적인 인자에 의한 생존적인 강력한 본능이 자기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암이다. 바이러스 또는 세균은 외부에서 침투하여 질병에 걸리지만 암은 자기 스스로 세포의 이상 분열에서 시작된다. 무엇이 되었던지 간에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모순에 빠지지 않는 방향성이 그래서 유념하게 지켜봐야 할 대목은 아닌가 싶었다. 저자는 대장암이라고 했다. 유전적인 문제나 혹은 살면서 항상 먹어야 하는 음식의 요인과 원인자는 내 몸을 내 스스로 모순 덩어리로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여행을 통하여 자신의 내부를 만나려 했던 것은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스스로의 모순에 관한 자기 심연으로 한 발짝 다가서고 그럼으로써 내려놓음이 삶의 결말에 대한 의연함을 만나려 했다고 본다.

 

어느 철학자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 했다. 내일 죽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일을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의 사람들과 양보 없는 다툼이 지난하다. 자본이 그렇고 정치가 그렇고 사회가 그렇다. 업무차 간혹 법원 법정에 참관할 일이 있으면 대부분의 민사 사건이 자과에 관련된 양보 없는 다툼으로 법정대에서 판사에게 주장하기 바쁘다. 속였느냐, 선의였냐는 것이 과연 내일 죽을 사람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영원히 살아서 남보다 더 빼앗거나 양보 없는 이익의 도출적에 사활을 건다. 심지어 시장통에서 가격으로 전부를 걸듯이 그야말로 생사를 내기하듯 걸기 바쁘다. 따라서 그런 이해의 상충이라는 기본적인 전제는 내일이 또 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전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막상 닥쳐서야 "아뿔싸"라고 하는 회복조차 불가능한 후회의 미련을 사자후처럼 날리는 것도 비일비재한 현상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에게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혹은 던졌더라도 표현도 못하고 산다. 당신 왜 살아요라는 자기 당위적인 단순 강력한 질문 앞에서 마냥 머뭇거리며 딱히 꼭 집어 낼만한 거리조차 만들지 못한다. 그저 먹기 위한 삶인지 살기 위한 먹기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들러붙어 재판에서 이기고 지고하는 투쟁의 이유가 딱히 변변하게 내어 놓지 못하고 설명하지 못한다. 일상의 흔한 모든 것들이 타성에 젖었고 자동적이며 관성적인 삶에 저자의 암은 삶에 대한 파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암에 걸렸고 말기적 증상에 의사 선생님이 당신은 몇 달 못 갈 거라는 사형선고 앞에서 의연하고 담담하게 의사 선생님이 권하는 치료를 뿌리치고 일상에 젖은 나를 여행으로 돌리고자 하는 저자의 내적인 힘 앞에서는 나는 모종의 감동을 느낀다.

 

한 평생을 살면서 구경하기 위한 관광이야 한두 번쯤 가지만 다 버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종지부의 여행을 떠난 다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어렵다. 당장 직장을 버려야 하고 일상의 내 주변을 정리하고 하다못해 은행 계좌에서 발급받은 카드조차 가족에게 알리고 정리를 해야 하고 친구들과 작별 인사까지 곁들이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나 이제 가면 혹시 못 돌아올지도 몰라. 배낭에는 여행의 필수품 몇 가지가 전부겠지만 내 배속에는 나날이 자라는 암덩어리가 내 친구가 되어 줄 거야. 나 말기 암 환자야. 이 암덩어리가 인도하는 곳으로 난 마지막 여행을 떠날 거라는 의연함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의 자리에서 요지 부동으로 아무런 일이 없이 지낼 용기도 없고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여행조차 떠나지 못하는 이 현실의 막막함이라는 안개를 걷어 내는 것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일까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대면서 나는 책을 읽었다.

 

언젠가는 나도 마지막을 나 혼자서 이루어 내어야 한다는 사실은 불변이다. 악착같음에 지쳐 버린 육신을 놓아야 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하루라도 잊어버릴 수는 없다. 아무리 대비한다 한들, 마지막이라는 허허롭고 허무했던 시간이라 할지라도 난 눈물 자락을 가락국수처럼 뽑아 내지는 않을까라는 부끄러움조차 잊을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말이다. 우리가 살아 있음이라는 시간은 생명의 암덩어리인지도 모른다. 존재는 존재할 때부터 간여된 시간의 암은 서서히 우리를 늙고 병들고 노쇠하게 하는 절대적인 인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의 덩어리를 안고 더 철저히 끌어안으며 시간이 내린 눈밭을 아무도 걷지 않는 첫발자국을 남기듯이 걸어가는 것. 이것이 삶과 시간의 상관관계의 존재의 족적 같다. 여행은 자신의 첫 발자국을 뒤돌아 보게 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아, 여행 가고 싶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남긴 발자국을 뒤돌아 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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