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 길 위의 사진가 김진석의 걷는 여행
김진석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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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보기는 각기 다른 행동이지만 이 두 개가 합쳐지게 되면 특별한 하나가 된다.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걷기와 보기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쩌면 덤인지도 모른다. 걸으면서 보고, 보는 것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는 뭐랄까 일종의 구도와도 같은 것. 나도 한때 일 년에 900km 넘는 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매 주말마다 산길을 그렇게 걸었고 사진을 찍었다. 평지 길이 아니고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르는 길은 일종의 무념에게로의 집착과도 같은 것이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우게 되는 놀라운 효과에는 온몸이 문드러질 만큼 악전고투의 통증을 후유증으로 남긴다. 다리는 지치고 무릎은 시큰거리고 가슴은 숨쉬기도 벅차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가끔 가다가 발바닥에 물집이라도 생기면 쓰린 고통은 걷는 내내 괴롭다. 그렇게 걸었던 길을 기억하는데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가 주는 위압감은 오랜 시간 동안 걷기를 해본 적이 없다면 실감도 나지 않는 거리일 테다. 


산다는 것은 시간 길의 걷기와도 같다. 시간 길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연명하듯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그렇게 욕망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는 늘 부산물처럼 따라 나오는 지저분한 분비물처럼 찔끔찔끔 세어 나오는 갈등과 탐욕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부대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걷는다는 것은 두발로 비움에 대한 구도의 과정이다. 육신의 피로와 통증. 그리고 당장에 피하고 싶지만 스스로 포기가 안되는, 그래서 끝가지 고집스럽게 나가며 고집을 어느 순간 걷다 보면 이것마저도 자연스럽게 내려놓는 것이 바로 걷기라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당장에 하루 열 시간 동안 걷고 나면 가장 큰 행복의 순서가 깨끗이 샤워를 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보는 피로감이 무엇보다 고맙게 생각되는 것은 육신의 무리가 따르는 행동의 벗어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발을 기계적으로 내딛고 눈동자를 반쯤 풀리고 고개는 적당히 숙이게 되며 무슨 말이라도 전혀 생각나지 않고 이미 머릿속은 무중력 상태로 앞으로 나가게 된다. 다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인생의 무게처럼 지긋하게 눌러 오는 통증에 날선 감각만이 나의 전부를 사로잡아 버리는 것. 이것이 걷기의 인내가 주는 선물이다.


이런 무중력의 상태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담는 것이 어쩌면 가장 진솔하고 경건하고 비움의 철학을 철저히 몸으로 채화된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주제로써 가 아니라 그저 눈으로 보고 손가락이 눌러지는 본능적인 그런 사진은 걷기에서만 가능한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몇 해전, 크리스마스 날 새벽부터 산길 25킬로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겨울철이라 산바람이 몰아지고 눈발이 자오선을 그리듯 휘날리며 산길은 미끄럽고 산이 우는 소리를 걷는 내내 들으면서 카메라를 들고 그렇게 걸었다. 산길이라 경사가 심할 때는 한 여름 비지땀처럼 땀을 흘렸고 내리막 길에는 다리가 풀리며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버티기도 했다. 그저 아득한 삶의 길이 그렇게 순간순간 눈물겹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까지 이 고생하며 걸어야 하는 것인지, 왜 이렇게까지 고행 같은 길을 숨 막히도록 걸어가야 하는 것인지, 그저 태어난 자의 인생의 지독한 모순 같은 걷기가 아니었을까. 누군들 편한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그 편한 것을 굳이 마다하고 스스로 길을 걸어야 할 만큼 몸을 혹사시키는 자학적인 개념을 무엇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이란 삶은 다 그런 거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이루고자 함이 자신의 생의 전부라 할지라도 오늘 이 순간에는 빨리 고통을 벗어나는 길. 결국 해탈하고 싶은 강한 욕망 마져도 다 버리고 아무런 생각까지도 나지 않는 진공의 상태를 비로소 만나려 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하루에 20km 정도 걷다 보면 카메라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물건으로 전락한다. 이미 사진을 찍어야 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내동댕이 치고 싶은 카메라. 그런데 던저 버리고 싶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게 되었을 때는 사진은 가장 순수한 결정체로 남는다. 그 어떤 사심도 생길 여지가 없이 그저 본능적인 시선의 스케치 같은 사진이 될 수밖에 없다. 쉽게 오고 가며 뽀로로 달려가서 찍어대는 사진은 욕심이 가득할 테다. 잘 찍어야지. 공명심 내보여야지.라는 등등의 미련 같은 부스러기가 부대적으로 달라붙기 마련이지만 정말 카메라의 무게 때문에 팔이 빠질 것처럼 아프고 카메라 때문에 목덜미가 끊길 것처럼 고통스럽게 다가올 때 찍는 사진이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사진에 달라붙어 있는 온갖 사심들이 사라지는 놀라운 효과가 기포 방울이 터지듯 비워냄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앙금같이 휙 저어 낼 수가 있게 된다.


 

이 책에는 그렇게 사진의 갖은 양념 같은 스킬이나 은유 따위는 없다. 직관적이고 선이 굵은 사진들이다. 순수하고 사진이 느낌이 확 뺏지만 선이 굵은 감각으로 찍힌 사진이 수평선이 되어 나열되어 있다. 모름지기 사진은 이렇게 찍어야 제대로 진국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사진은 느린 호흡으로 길게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말해 주고 있었던 까닭이다. 특히나 40일 동안 매일 20km를 걸었던 긴 흐름의 사진은 사진 자체에 대한 욕심을 모조리 내려놔야만이 가능하고 결국 사진을 버리고 나니 다시 사진으로 채워지는 역설적인 사진의 진미를 맛볼 수가 있다. 한 달간 매일 20km를 걷다 보면 사진은 이미 벗어나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사진을 버린 풍경에서 다시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되는 것은 사진의 진공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진을 내려놓고 나서 카메라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사진은 시간과의 평행선처럼 함께 가야만이 비로소 사진이 세속적인 욕망과 탐심이 가슴에 쌓인 때가 빡빡 문질러서 없애는 작업은 아니었을까.


 

오늘날, 카메라는 무수하게 팔려도 사진에 조루증에 걸린 사람이 많다. 긴 심호흡으로 느리고 느리게 걷듯이 가야 사진은 근사하게 조립된다. 길고 끈질기게 가야 하는 사진은 그래서 걷기와 보기가 합쳐져야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오래 걸어서 찍은 사진에는 가식이 없다. 온몸의 통증과 피로가 기반이 된 사진에서 솔직함이 묻어나는 것은 오래 걸어 본 사람만이 느끼는 사진의 진리와도 같다. 어쭙잖은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채화되고 발바닥의 감각으로 찍은 사진에서 급격한 감동이 아니라 지긋한 여운의 울렁거림이 사진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질이 어쩌고 구도가 어떻고 사진적인 의미가 어떠해야 하고라는 이런저런 사진 공식이 깡그리 무시하고 땀이 뚝뚝 덜어져 카메라에 땀이 말라 남아 있는 소금의 앙금을 본 적이 있는 카메라는 그래서 더 삶의 경건함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을 펼쳤다 닫았다. 사진을 한번 보고 다시 글을 읽고 또 사진을 읽고 글을 보고 또다시 사진과 글을 여러 번 읽고 봤다. 무슨 삶의 상념을 처절하게 비워 내고서 만나는 순례자들의 엷은 미소가 해맑은 것은 걷기로 인하여 찍은 사진의 백미다. 육체적인 피로감이 극도에 다다라 허허로운 웃음기에 미소 한자락으로 카메라와 마주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2000년 전의 이 길을 걸었던 야고보의 미소와 닮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길을 가면 성현의 미소를 찍는 것처럼 찍게 되는 미묘한 원리가 바로 걷기와 찍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S : 책을 통하여 지긋한 사진을 만나게 해주었고, 이런 책을 보게 되어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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