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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ㅣ 위픽
박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평점 :
박지영 소설가의 〈찰스 부코스키의 타자기>는 생의 전환기에 선 한 여성의 내면적 사유를 타자기라는 은유를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작품 속 사회는 40세와 66세에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받으면 다음 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주인공 승혜는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감내하며 살아온 평범한 인물이다. 그녀는 66세 생애전환기 일 때 '타자기' 삶을 선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몸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승혜는 자신의 몸을 통해 기록된 다양한 이야기를 겪으며 인생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낀다. 타자기 인생의 마지막 즈음에 친구 '인애'를 떠올린다. 평생 애틋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던 승혜는 인애와의 마지막 만남과 아쉬운 이별을 기억한다.
창세기를 반복해서 써 내려가는 해변의 타자기. 생명의 최초 순간을 반복하며 몸으로 기록하는 타자기라니, 작가를 꿈꾸거나 생애 의지가 가득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상상할 만한 자기 모습이다. 작가의 바람이 투명된 작품 속 이야기는 노인의 삶에 대해 여러 사유를 하게 만든다. 나이가 늘어 죽음 앞에 섰을 때 다른 생을 살아갈 기회가 된다는 건 희망으로 읽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식으로 노령 인구가 인간으로서 순리대로 늙어갈 기본 권리와 사회적 효용 가치가 없어도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 인권을 말소당하는 사이 인권이니 자유니 하는 말은 점점 그 가치를 잃게 될 거라며 선주 언니는 개탄했다. 그러나 그건 아쉬울 것 없는 선주 언니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승혜는 생각했다. 아프면 치료할 돈이 있고 돌봐줄 가족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라고. 그런 말은 인간의 삶이 가장 낫다는 오만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 알고 보면 전환기에 무생물의 생을 선택하는 건 빈곤하고 연고 없는 노인들뿐이라는데, 그것은 그러므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 당사자와 사회 모두를 위해 나은 선택이라면 뭐가 문제인 걸까 승혜는 되묻고 싶었다.' p.40-41
작가는 인권 중심적 사고가 중요하지만 그것만 생각했을 때 놓치게 되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권을 운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위치는 그것을 지켜낼 만큼 권력을 있는 자리라는 것,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누군가에게는 더 큰 절망과 좌절을 안겨 줄 수 있는 냉정한 말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된다.
타자기가 된 승혜는 여러 인생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받아안는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로 여기지 않고 온전히 경청하고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타자기 자체가 그런 무게감을 안기도록 설계된 기계여서 그런 듯하다. 한 글자 한 문장 하나하나가 그저 가볍게 쓰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승혜는 고통과 슬픔, 버거운 인생의 과제 등 공포와 비명에 가까운 인생을 고스란히 겪는다. 지극히 평범했던 그녀의 인생은 타자기가 되고 나서야 격동의 세월을 통과한다. 놀랍게도 그녀는 타자기였기에 글쓰기의 효능을 금세 체득했고 고통 너머 해소와 치유의 영역까지 사유할 수 있게 된다.
"허공중에 다 부서지고 기화되어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런 말들이 지나간 자리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부서지고 망가지고 폐허가 되었지만, 그럼으로써 비로소 다시 재건될 수 있는 사랑의 말과 글이 있다는 걸 승혜는 알고 있었다. 치욕에 대한 말은 실은 아름다움에 대한 말이었다. 수치에 대한 말은 실은 곱고 다정한 것에 대한 말이었다." p.56
타자기 앞에 있는 나는 타자기의 이런 응원에 힘입어 뭐든 쓸 수 있다. 모든 글쓰기는 아마도 이런 소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비로소 다시 재건될 수 있는 사랑의 말과 글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를 갉아먹는 아픔과 쓰라림을 대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말은 여러 번의 생애가 주어지길 바란다기 보다 이렇게 글쓰기를 통해서 지금의 삶을 조금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다른 문장이 아닐까.
"왜. 승혜는 두 번의 생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특히 바라는 것 없이 위해주고 내주는 마음에 대해서는 영영 알 수 없을 거였다." p.89
사랑, 환대! 그것만이 인생을 여러 번 산 것 같은 통찰과 의미를 부여하는가 보다. 한 번을 살더라도 사랑하고 환대하며 산다면, 다른 생을 굳이 바라고 욕망하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나는 바라는 것 없이 위하는 마음을 그, 그녀에게 전해주고 싶다.
*출판사 제공 도서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