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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원은, 나였다
곽세라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2월
평점 :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평범하고 익숙하고 뻔한 것은 소원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소원이 자기 자신이라니! 제목부터 눈에 띈다. 앞표지에 적힌 "인생의 절벽" "말기암 진단"이라는 말에 멈칫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야할까. 별명이 수도꼭지인 나는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작가는 고통의 과정을 겪었고 어쨌든 살아났고 이 책을 출간할 정도로 건강하다는 사실, 그 잠정적 결말이 해피앤딩이라는 안도감에 읽기도 전부터 감격하고 있다.
"당신이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요즘 나는 강단 있고 굳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내가 아직 겨울을 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함께 울어줄 마음 약한 사람에게 끌린다."
프롤로그 첫 문장을 읽자마자 작은 눈에 가득 맺혔던 눈물이 주루룩 흘렸다. 나는 충분히 같이 울어줄 사람이고, 그런 나에게 끌린다니?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런데 아직 겨울을 나는 중이라고 하니 또 마음이 쓰였다. 완쾌되지 못했다는 말일까. 기대반 걱정반 책을 읽었다. 요동치는 이야기와 수려한 문장에 빨려들 듯 읽다가, 자주 책을 내려놓고 얼굴을 감싸며 꺼억꺼억 울었다. 한 손에는 눈물을 닦으며 다른 한 손에 있는 플래그를 떼서 끝도 없이 책에 붙여댔다. 순간, 내가 조금 잔인하게 느껴졌다. 격하게 반응하면서 동시에 이건 너무 주옥같아 라며 수거하듯 문장을 낚아채는 나.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낸 작가가 내밀하게 쏟아놓은, 삶을 빛내는 문장들 앞에 나는 좀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그만둘 수가 없다. 저를 부디 용서해주세요.
"고통은 비처럼 주룩주룩 내렸다. 고통은 안개처럼 스멀스멀 차올랐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번개처럼 번쩍이며 내 몸을 태웠다. 아니, 말을 잘못했다. 고통은 그렇게 시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다. 가장 악의적이고 무례한 방식으로 날 허물어뜨렸다. 내가 아직 집 안에 있는데 벽에 쇠망치질을 해대는 철거반 깡패처럼. 책 해머로 콘크리트를 부수는 소음 같은 아픔이 끊임없이 내 뼈를 울었다. (...) 고통이 넘실대는 걸 멈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가를 깨닫는다.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고통받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고통이란 없다."(p.76)
곽세라 작가는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세계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와 울림을 선사하는 힐링라이터로서 살고 있다. 2021년 어느 날초거대 말기암 환자가 되었고 곧바로 21센티미터 (간)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깨어났지만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다른 장기로 퍼진 암을 제거하기 위해 항암치료도 받으며 또 다른 결의 아픔을 겪는다.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섬" 과 같은 자신을 견디고, "죽어간다고 하기엔 이렇게 멀쩡하고, 살아있다고 하기엔 너무 허술"(p.147)한 상태를 마주해야했다. 엄청난 수술을 이겨내고 깨어난 것만으로도 고통이 큰데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겪어내는 일은 뭐라고 설명하기도 부족할만큼 어려움의 연속이다.
"의료진들은 거의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왜 그 큰 종양이 생겼을까'보다 '그 큰 종양을 가진 사람이 왜 아직 살아있을까'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왜? 왜 이런 게 생겼지? 왜 내가 죽게 된 걸까?' 하고 온몸으로 부르짖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런데 왜 내가 살아있지?'라고 묻게 된 것이다. 살아남은 김에 나는 거대한 실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살아있어 보기' 실험이었다. 몸속이 갈가리 찢긴 채로 살아있어 보기."(p.119)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의 '살아있어 보기 실험'은 성공적이다. 사는 게 낯설고 두려웠던 저자는 말기암 생존자 모임에 만난 친구와 상담사의 도움으로 하나의 선택을 한다. "죽음을 부르는 유일한 병은 삶이다. 살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이미 그 병이 깊었으니 나는 '더' 사는 것을 택했다"(p.202)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며 삶과 죽음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삶과 죽음을 양 극단에 놓고 행복과 불행을 따지는 생각부터 다시 돌아보게 된다.
"정말 항구를 떠나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는 걸 알게 되면 버킷리스트는 의미를 잃는다.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오면, 마음은 가보지 못한 길을 가려 들지 않는다. 대신 추억 속 그 길을 다시 걷고 싶어 하고 내가 알던 이들을 한 번 더 보고파 한다. 만약 마지막 한끼 식사를 하고 삶을 떠나야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비오는 날이면 먹었던 엄마의 감자 수제비를 택할 것이다. 그렇게 버킷리스트가 사라지고 앙코르 리스트가 떠오른다. ICU에서 실날같이 위태위태하게 이어지는 마지막 하루들 속에서 나는 목이 메도록 앙코르를 불렀다.(...) 나는 그런 소소하고 하찮은 것들을 한 번 더 누리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앙코르, 너무나 내 식으로 엉망진창인 그날을 한 번만 다시 살게 해줘!" p.221
그래, 앙코르 리스트를 만들고 오늘 당장 해봐야겠다. 죽기 전에 가져 갈 좋은 추억과 기억을 많이 만들기 위해, 충분히 많이 즐기고 자주 만났으니 이제 나는 떠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문득, 작가가 죽음의 문턱에서 겪어낸 이야기와 통찰을 이렇게 나의 다짐으로 가져오는 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또한 이 책 덕분에, 주어진 삶 그대로 충분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작가한테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고 싶다. 역동적이고 강렬한 독서체험을 통해 수면위에 떠오르는 삶에 대한 진실을 두 손 가득 움켜쥔 기분이다.
*도서제공, 솔직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