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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유언
구민정.오효정 지음 / 스위밍꿀 / 2025년 2월
평점 :

삶의 끝을 말하는 책이 반드시 무겁고 슬플 필요는 없다. <명랑한 유언>은 방송국 PD인 민정과 효정, 두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간 이야기다. 민정은 원래 정해진 길을 따라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연극 무대에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던 짧은 순간을 통해 자신이 ‘무엇에 가슴 뛰는 사람인지’를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육사를 포기하고 PD의 길로 들어선다. 효정은 ‘조용히 효도하라’는 이름의 뜻에서 벗어나고자 한 사람이다. 누군가의 기대보다 자기 뜻대로 살아보고자 그녀는 이른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같은 프로젝트에서 만나, 인생의 가장 강렬한 계절을 함께 보낸다.
어느 날, 효정의 삶은 예상치 못한 진단으로 흔들린다. 위암 4기. 그 순간부터 더 이상 방송인이 아닌, 단지 ‘한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효정은 그렇게 속도를 늦추고 삶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고, 새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어.” 이전에는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 감각 속에서 다시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되찾는다.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견디고 베트남과 미국 여행도 다녀오기도 한다. 민정은 효정 옆에서 동료이자 친구로, 때론 보호자의 마음으로 함께 동고동락한다. 진심으로 연결된 사람과 함께 살아낸 날들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게 그전과 같지는 않았다. 오래 서 있기 힘든 효정의 체력을 고려해 우리가 좋아하는 전시회에는 차마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감염의 위험 때문에 인파가 몰린 몰리는 곳은 의식적으로 피했다. 삼 주에 한 번은 항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야 했고, 그 후 삼 일간 효정은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효정은 본인이 환자임을 자각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어 했다. 그러니 나는 효정을 그저 효정으로 대하면 되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친구이자, 일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동료이며, 끼니를 함께 해결하는 식구로." (p.154-155)
"나는 더 이상 효정을 말리지 못했다. 효정은 무언가 꿈꾸고 생산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일이 있다는 믿음으로, 효정은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고 싶어 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감각이 효정의 시간을 계속해서 흐르도록 만들었다. 결국 연보라색 최신형 아이맥이 집으로 들어왔다." (p.156)
"난 행복과 불행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암 환자들 사이에선 호전 증세가 있고 부작용이 덜해 행복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일반인들 사이에선 젊은 나이에 위암 4기 판정을 받아 불행한 사람이 된다. 비로 지금은 나의 봄을 애써 찾아 헤매며 무력함으로 무릎 꿇고 있지만, 구차해질지라도 미약한 봄을 찾아내고야 말아서 그 작은 행복을 사치스럽게 누릴 수 있는 인간으로 남겠다." (p.164)
책의 후반부는 효정이 서서히 삶의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읽는 내내 민정과 함께 울어야 했다. 효정을 떠나보내고 민정은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만큼 우울감에 힘겨워 한다. "상실은 이겨내고 견뎌내는 게 아니라, 그냥 안고 겪어내는 것"(p.205)는 의사의 말에 민정은 효정과 같이 살았던 집에서 반려견 태양이와 계속 살아간다. 그리고 효정이 생전에 썼던 글을 기반으로 자신의 글을 덧붙여 쓰기 시작한다.
<명랑한 유언>은 이별을 다루면서도 끝내,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묻는 책이다. 미루지 말고 사랑하고, 말하고, 웃고, 때론 울어도 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아도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우리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우리는 다시 조금씩 명랑해질 수 있다고.
*출판사제공도서, 솔직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