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1 : 홍길동전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1
김창회 글, 이도현 그림, 손영운 기획, 허균 원작 / 채우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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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홍길동전은 조선 중기의 이름이 난 도적이었다. 거리낌 없이 고위 관리와 결탁하고 관직을 사칭하는 등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홍길동 때문에 세금을 걷기가 힘들었다는 상소까지 올라간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는 우리가 아는 의적 홍길동은 아닌 모양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허균은 이런 홍길동을 새로운 인물로 탄생시켰다. 허균의 붓끝에서 다시 태어난 홍길동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활빈당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하는가 하면 세상을 조롱하고 홀연 조선을 떠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

 

상세 이미지 1

 

 허균의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행동은 관직 생활이 시작된 이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허균은 유교가 중심인 조선 시대에 불교에 심취했고 부임지에서 기녀들과 어울려 놀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그 결과 세 번의 유배와 여섯 번의 파직이라는 화려한 전력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홍길동은 21세기형 캐릭터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홍길동의 출생지가 전라남도 장성군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곳에 홍길동을 소재로 하는 축제가 열리거나 테마파크 등이 만들어져 중요한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비록 역사에서는 나라에 근심을 주었던 도둑으로 되어있지만 소설 속에서 보여 준 홍길동의 활빈당 행적에다가 지금까지 만화 영화, 드라마, 영화 등에서 보여 준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 등이 합쳐져 21세기형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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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0 : 보바리 부인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30
박성문 글, 박수로 그림, 황의조 감수, 손영운 기획, 귀스타브 플로베르 원작 / 채우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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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1821년 12월 12일에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19세기의 유럽은 그 이전의 시대와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르네상스와 산업 혁명의 성공으로 인간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돈키호테]를 대표작으로 하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소설이 프랑스에 전해지면서 고전주의나 낭만주의와 다른 '사실주의'가 탄생했다. 이 사실주의를 완성한 작가가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였다.

 

 플로베르는 정신 질환으로 평생을 홀로 살며 은둔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 플로베르에게는 두 명의 연인이 있었다. 엘리자 쉴레젱제르는 그가 열다섯에 만난 연상의 유부녀로 정신적 흠모의 대상이었고, 여류 시인 루이즈 콜레는 8년 정도 사귀었는데 주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실제 만남은 아주 드물었다고 한다.

 

 또한 플로베르는 작가로서의 명성은 얻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든 생활을 했다. [보바리 부인]은 사람들의 도덕성을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법원에 기소까지 되었다. 물론 재판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살람보] [감정 교육] 등의 몇몇 작품을 발표했지만 조카딸의 파산을 막기 위해 재산을 정리하였고 건강도 좋지 않아 말년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나이 60세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상세 이미지 1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보바리 부인의 개인적 타락은 개인의 도덕적 방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분명히 개인이 지탄받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바리 부인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어떤 행태로든 보바리 부인이 자신의 과오를 책임지는 것으로 보인다.

 

 보바리 부인을 둘러싼 세계에서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은 네 명의 남자이다. 보바리 부인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 보바리 부인의 마음속 불씨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남편 샤를르, 자신의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는 어설픈 레옹, 철저히 그녀를 이용하는 로돌프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그들이 그녀에게서 본 것은 자신들의 욕망일 뿐이었다. 깨끗한 옷감일수록 다른 색에 쉬 물이 드는 것처럼 어쩌면 보바리 부인은 너무나 순수했기에 더 빨리 타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를 물들인 빨강, 파랑, 검정의 물감들도 따지고 보면 모순 덩어리인 인간 사회의 한 문제적 개인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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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같은 귀막힘병 스스로 치료한다 - 이명 난청 이관개방증 치유 비법
하기노 히토시 지음, 이주관 외 옮김 / 청홍(지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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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귓속으로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고막이 있다. 고막 안쪽이 중이라고 불리는 공간이다. 중이에는 코로 통하는 가느다란 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관이다. 이관은 열리거나 닫히면서 중이의 공기압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이관이 개방되어 있는 상태가 지속되면 생기는 증상이 이관개방증이다.

 

 이관개방증에 걸리면 귀가 먹먹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귀에 귀마개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도 있으며,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외부 기압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할 때 귀가 멍한 느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수영을 하고 난 후 귀에서 물이 빠지지 않았을 때의 느낌이라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이관이 열려 있는데도 귀가 먹먹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병을 구별할 때는 보통 기질적인 질환과 기능적인 질환으로 나눈다. 기질적인 질환은 내장, 기관, 신경, 근육과 같은 조직에 해부학적, 병리학적인 변화나 변형, 이상이 생겨서 발생하는 질환이다.

 

 한편, 기능적인 질환은 조직에 해부학적, 병리학적인 변화나 이상이 보이지 않는데도 장기나 기관의 기능이 저하되거나 항진되며,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질환이다.

 

 이관개방증은 일부 환자의 경우 이관이 얇아지는 등, 모양의 변화, 즉 기질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하지만 모양의 변화가 증상을 유발하는 전체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관개방증은 이관을 열고 닫는 기능이 어떤 이유로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기능적인 장애이며, 기능 부전 즉 기능적인 질환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관개방증과 이관협착증은 이관의 기능 장애라고 하는 한 가지 질병의 두 얼굴과도 같은 것이다.

 

 

 이관개방증은 단순한 귓병이 아니라 고혈압이나 당뇨병과 마찬가지로 전신병(병징이 생물체 전체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한 이유로 우리 몸 어딘가가 불편하게 되고 그 결과 귀에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관개방증에 걸린 사람은 기압이나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뿐안 아니라 자율신경실조증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으며,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안 좋은 사람도 많다.

 

 이관개방증에 걸린 사람의 대부분은 날씨가 흐려지면 두통, 메스꺼움, 심한 어깨 결림 증상이 나타난다. 이관개방증 환자들은 습도가 높거나 더운 날씨도 힘들어한다. 이런 모든 현상들은 이관개방증이 전신병이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스트레스는 이관개방증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과다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자율신경 중에 교감신경이 우위에 있는 상태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무리를 하게 되므로 자율신경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스트레스 대책은 이관개방증에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모두 스트레스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없는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업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일을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을 몸에 익혀서 가능한 한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즐길만한 취미를 갖는다거나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 수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귀막힘병 스스로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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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길 3
이철환 지음 / 삼진기획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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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는 책이다. 예전에 읽었을때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감동도 많았고, 공감도 많이 되었었는데 이번에는 그때보다는 덜 한 느낌이었다.

 

 연탄하면 그 당시에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물건이었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연탄들을 들여놓았고,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이면 다 타버린 연탄재를 깨서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게 했다.

 

 그러니 연탄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또한 우리들에게 참 고마운 물건이기도 했다. 그때 그시절의 따뜻했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연탄이 자신의 몸을 다 태워가며 우리들에게 따뜻함을 주었고, 자신의 다 탄 몸을 부숴서 사람들의 미끄러 넘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던 그런 희생을 우리들도 배웠으면 한다.

 

 

[거미와 사내]

 

한 사내가 숲길을 거닐고 있었다.

 

싸리나무 가지에서 거미줄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물처럼 펼쳐진 거미줄에 걸려든 배추꽃흰나비....

 

나비는 고통스럽게 날개를 퍼득거렸다.

 

거미는 재빠르게 다가가 나비의 몸통을 덥석 물었다.

 

사내가 거미에게 다가가 가만히 물어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거미줄로 함정을 만들어서

 

너는, 예쁜 나비를 꽁꽁 묶어버렸구나."

 

그러자 거미가 사내에게 되물었다.

 

"당신이 함부로 뱉은 말로

 

당신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묶어놓은 적이 없나요?"

 

- 본문 중에서 -

 

 

연탄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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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은 왕자, 사도 - 소통은 성군을 낳고, 불통은 역적을 낳는다
설민석 지음 / 휴먼큐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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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영조, 사도세자, 정조의 비극 3대에 관해 알게 되었다. 특히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비극은 정말 읽으면서 아타까운 마음이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조금은 관대하게 풀어주어 사도세자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보게 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그랬다면 사도세자가 아버지인 영조를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버지의 기대에도 부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식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부모는 그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면 조금은 자식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부모의 욕심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는 자식들이 있는데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책을 통해 내 자식을 옳바르고 정신이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게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영조와 사도세자를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또한 이런 환경에서도 잘 성장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보면서 자식은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고 실감하게 되었다.

 

 

 궁궐 밖에서 생활하며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영조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유지했습니다. 많은 업적을 남겼던 세종대왕조차도 고기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 말이죠. 또한 영조는 절약 면에서도 솔선수범했습니다.

 

 사도세자는 10세 때부터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세자의 모습은 아버지 영조의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세자가 공부를 멀리하면 할수록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 역시 멀어졌습니다.

 

 조선은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무보다 문을 중시하였습니다. 아버지 영조 역시 문을 숭상한 유학 군주였죠. 하지만 세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자는 유교 경전보다는 소설이나 병서 등의 잡서에 관심이 많았고, 심지어 병석에서도 [삼국지연의]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무인 기질이 있었고, [한중록]에 의하면 기골이 장대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5세에는 무게가 약 40킬로그램에 달하는 청룡언월도를 휘둘렀다고 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중학생이 쇠몽둥이를 바람개비처럼 가볍게 휘두른 셈이니 사도세자의 체격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세자는 1759년에 일종의 특공무술 교본인 [무예신보]를 저술하였고, 이러한 모습은 고조할아버지인 효종과 매우 닮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영조는 이러한 아들의 모습을 결코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 본문 중에서 -

 

 

 연산군은 억울하게 어머니를 잃었고, 정조는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에 처한 두 임금이 한 사람은 폭군으로, 한 사람은 성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연산군은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연산군이 어렸을 때 폐비가 되고 이후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습니다. 연산군에게는 사랑을 줄 어머니가 없었고, 아버지 성종은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 연산군이 어머니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야단을 쳤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또한 일찍이 세상을 떴지만 아버지 사도세자도 어린 이산을 무척이나 아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영조는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아들 사도세자와는 최악의 관계였지만, 손자 이산은 정말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정조는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고,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고 자랐습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준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있었던 거죠. 이 차이가 연산군과 정조가 임금으로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불통은 역적을 낳고 폭군을 낳습니다.

 소통은 충신을 낳고 성군을 낳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 본문 중에서 -  

 

버림받은 왕자,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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