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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로버트 판타노 지음, 노지양 옮김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평점 :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82꼭지의 길지 않은 글들이 엮인 형식으로 서른다섯, 젊은 소설가의 죽음과 삶에 대한 깊은 사유들을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한편으론 저자가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나서는 여정이기도 했고 한참을 머물게 하는 뼈때리는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

죽음과 삶 외에도 시간, 존재, 불안, 절망, 고독, 행복, 경이, 부조리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풀어내는 생각의 깊이가 남달랐고 실제로 갑작스럽게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저자의 인생과 일상이야기들과 어우러져 아주 색다른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일기 형식이면서 철학적 단상들이 이어진다. 저자는 뇌종양 진단 이후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살면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다양한 이야기를 자기 안에서 하나씩 꺼내놓는다. 그리고 폭넓은 철학적 인식과 수많은 질문을 통해 인간의 의미, 연대, 자연, 혼돈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삶의 실제적인 주제들을 탐구한다.
책 속에는 주옥 같은 문장들이 넘쳐나는데 처음엔 접어두고 메모해보기도 했지만 뒤로 갈수록 인상적인 대목들이 계속 나타나며 그러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살면서 나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수만의 군중 속에 있을 때도 각각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개별적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두뇌마다 다르게, 순간마다 다르게, 한 번이자 영원토록 홀로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희망이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한동안 마음 속에 보관하며 자주 되뇌이고 싶었던 문장이 있는데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으며 진짜로 빛나고 있는 바로 지금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뿐이지 않을까. 나의 자아와 모든 시공간을 딱 한 번만 지나가는 이 시점의 나. 이것이 내가 믿는 전부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우리가 숭배해야 대상은 단지 지금 현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현재이다. 모든 흐름은 각각 다른 시간과 공간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인식될 것이다. 내가 오늘 한 일을 숭배하고 믿어야 한다. 내일 내가 한 일을 믿고 숭배하지 않는 한에서 그래야 한다. 오늘과 내일은 얼마든지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말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경험보다 선행할 수 없고 새로운 대상이 어떤 능력이나 감정을 드러낼지 짐작하지 못한다. 오늘 어떤 사람의 얼굴을 그릴 수 있지만 내일이면 그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 된다.”
또한 요즘 가끔 허무하고 공허하며 의미없다는 생각들로 힘이 빠지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아주 명쾌한 조언이 되는 문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누군가 모든 것이 의미 없다 말한다면 그 발언조차 의미 없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끝없이 퇴보하는 세상 속에서 인생이 의미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유에 중요성을 두고 있기에 무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의미 그 자체이기도 하고 의미를 창조하는 기계이기도 하다는 역설을 피할 수가 없다. 모든 지각 속에서, 낙관적이고 비관적인 모든 사고 행위 안에서, 반항과 복종의 모든 행동 안에서 인간은 인생의 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의미 부여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의미 찾기와 또다시 열렬히 사랑에 빠지는 일 역시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