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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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일어날 리가 없으며 일어 날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며, SF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쓰는 것이라고 sf작가 새뮤엘 딜레이니는 정의 내렸다 .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렇다면 나는 수 많은 SF 작가들의 세계 중 캔 리우의 세상을 택하고 싶다.

미래이며 현실을 담아내는, 과거의 고찰과 지혜로움으로 빚어낸 그들의 세상들 중,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과 가치를 아는 켄 리우의 세상을 택하고 싶다.



<호>에서는 죽음을 정복했으나 죽음을 선택하는 레나가 주인공이다. 삶은 둥근 호를 그리며 처음과 끝을 맺는다. 예전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싸움을 붙이는 이유는 질투해서란 글을 본 적 있다. 신들의 질투는 결국 끝이 있는 삶, 영원하다면 지금 현재도 그 무엇도 어떤 의미가 있으며 소중하겠는가. 권태와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삶에서 부유하던 신들은 유한한 인간에게 허락된 진정한 삶이란 걸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매 순간이 지나가도 또 다른 매 순간이 영원히 돌아오기에 찰나의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모르기에 소중함도 모른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매듭묶기>

하늘마을 난족의 촌장 소에보,그는 매듭문자에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 눈이 어두운 대신 매듭을 지으며 앞으로 어떤 모양이 될지도 미리 아는, 그런 그의 능력을 이용해 미국인 토무는 아미노산이 묶여 기다란 사슬같은 단백질의 비밀을 풀려 한다. 아미노산 서열의 자연상태를 예측하여 접는 알고리즘을 소에보덕에 발견하고, 미국인 토무가 속한 제약회사는 돈방석에 안겠지. 소에보는? 그는 약속된 가뭄에 강한 볍씨를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빠진 씨앗. 그렇게 하늘마을 난족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점점 흩어진다.

생명을 구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돈벌이가 우선일 뿐, 아직 일어나진 않았지만 이미 씨앗이 될 수 없는 씨앗들은 수많은 농부들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 씁쓸하다.



미국 아이다호의 중국인 남성공동체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실제의 역사에 관우의 이야기와 관우를 닮은 로건, 과거와 과거의 역사가 만나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싱귤레리티>

싱귤레리티의 시작과 원년, 그 후의 이야기다.

육체를 버리고 뇌스캔을 통해 정신의 영생을 얻은 인류와 그에 반해 육체와 정신 모두를 부여잡고 기술의 퇴화 속에서 목숨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정신으로 남기를 원하는 그들의 아이들. 지구는 이제 인간이 존재하나 물질이 아닌 커다란 데이터 센터로 남아 있다.

지구의 오염도, 사라졌던 수 많은 동물들, 곰들과 순록떼들, 초록의 향연. 인간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는 지구, 그리고 데이터 센터속의 지구인들. 그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며 가족을 이룬다.

육체를 초월하고 시공간을 초월한체, 클라인대롱 모양의 방을 가진 아이들



새로운 역사, 기원설화를 말하는 이야기는 뫼비우스의 띠같다. 나날이 SF를 닮아가는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랄까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켄 리우의 이야기들은 엄청난 기술과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듣던 이야기처럼 따스하고 동화같고 아스라하다.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이든 일어날 일이든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이든, 그 속에서 소중한 것은 가족과 인간다움, 사랑이다.

데이터로 남은 이들도 서로를 사랑하고 가족을 만들며, 육체와 정신의 온전함을 원하며 야만들과 기술의 퇴보 속에 남는 이들도 바로 옆 사랑하는 이가 있어 그래도 견딜만하다.

켄 리우의 소설들은 읽는 다기 보단, 어느 사이 조곤조곤 누군가가 읽어주는 듯한, 과거의 구술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먼 옛날 그리고 지금도 모닥불 앞에서 둥그러니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서로를 더 알게 되고, 더 사람답게 해 주는 힘, 켄 리우의 소설들은 그런 모닥불 같은 존재? 힘이 있는 말, 주술과 마법같은 이야기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이 아닌 마음으로 전해지는 책.

<켄 리우의 종이동물원도 강추!

종이동물원을 읽으면서, 어린 해리포터를 살린 모성애의 마법이 떠올랐다
파자점술사를 통해선 대만의 역사를 조금 더 알게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태변화란 단편이다.
담뱃갑과 얼음, 소금이 내 영혼이라면? 나는 어떤 영혼을 가지고 있는걸까. 쓸수록 낡아가고 비어가고 줄어들며 사라져가는 영혼에 조바심내다가도, 어느 순간 용기를 내어 일탈을 하다보니 상태가 변화된 영혼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기발하면서 의미있는단편. 얼음에서 물이 된 주인공은 어떤 변화된 삶을 살게 될까. 소금을 녹여 담게될까.

( 우주와 미래 그러면서 731부대에 대한 과거사까지 많은 것이 담겨 있는데도 깔끔하고 부산스럽지 않고 오히려 정적으로 느껴지는 단편집이다.>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예요. 나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두려운 일에 도전해요.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숨이 거칠어지게 하는 일들 말이에요. 그날 당신한테 다가갔던 것도 내가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되새겼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에요."
그 얘기를 하는 동안 데이비드의 손은 허공에서 거침없이, 시원시원하게 움직였다. 결코 멈추지 않고, 쉬지도 않고,
나는 존과 함께 보냈던 길고 긴 나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런데 기억에 남은 날들은 너무도 적었다. 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나는 일찍이 선택의 기회를 빼앗겼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인간답게 죽을 기회를 박탈당한 어머니, 망자들에게 삼켜지고 만 어머니,
망자들의 쉬지 않고 반복되는, 정신이 아닌 기록의 일부가 되어 버린 어머니를, 그 어머니의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딸의 얼굴에 겹쳐진다. 내 귀엽고 천진하고 어리석은 딸, 루시의 얼굴에.
나는 총손잡이를 바짝 고쳐 쥔다.
"아빠."
루시가 말한다, 차분하게, 오래전 내 어머니가 그랬듯이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이건 내가 해야 할 선택이에요. 아빠가 아니라."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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