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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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이과생 남편, 그것도 신호위반 한 번 안하고 뭐든 자로 잰 듯 반듯한 남편, 자신이 선택한 일엔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만으로 우등생이 되고 교수가 될 남편과 공상과 현실 사이에서 바둥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감수성 예민한 문과생 아내이야기다.

한나는 모든 일에 암시와 상징을 부여한다. 시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속에 수 많은 메타포를 숨겨 놓듯 한나는 일상과 자신의 꿈에 의미를 부여하고 남편의 변함없는 마음을 혼돈으로 몰아넣어 그도 자신과 다름없음을 알고자 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목적을 묻는 한나에게 그저 태어나서 사는 것이라는 남편 미카엘.

이것이 두 사람의 균열의 이유가 아닐까.

그들은 다르다. 많이 다르다. 둘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보는 시선도 다르다.

어쩌면 미카엘에겐 그의 이름처럼 많은 천사들이 있었다. 그를 인정해 주며 지지해 주었던 아버지와 조금 과한 기대를 걸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며 그를 아끼는 고모들 사이에서, 미카엘은 자신이 가진 성실함과 도덕성으로 살아왔다. 난간에서 떨어질 듯 했던 한나를 붙잡으며 사랑이란걸 시작했고, 그것이 아마 미카엘답지 않은 최초이자 마지막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한나에겐 지켜주는 천사들이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유명인들의 말들을 그대로 받아적고 그들을 동경하는 아버지밑에서 자란 한나지만,한나의 꿈은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학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의 아내가 되어 그의 재떨이를 갈고 차를 타 주며 그림자가 되는 것, 유명한 그림자가 되는 것. 이건 한나의 본심이 아니다. 여자라는 이유와 시대적 상황은 언제나 한나에게 유리하지 않다. 전쟁의 두려움과 전쟁 속에서 겪게 될 여자로서의 끔찍한 상황들이 악몽으로 다가오고, 아이의 임신으로 접어야 했던 자신의 꿈들이 혼란이 된다.

남편으로서의 의무감과 본성인 성실함이 끝없는 인내심과 평정심으로, 한나는 미카엘이 자신을 참아주고 있음을 언젠가는 떠날 것임을, 그리고 자신 또한 죽어 없어질 것임에 근본적인 고독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 아이가 있다. 우울함이나 근본적 고독을 가지고, 여린 감수성으로 주변을 괴롭히는 것같지만 실상 본인을 가장 많이 힘들게 하는 운명, 한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미카엘에게 맞추고 아이를 우선으로 하며 살아간다면 그럭저럭 한나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인정받겠지만, 한나는 한나로서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것이 미카엘을 괴롭히는 일같지만 실상은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다.

솔직히 뭐지 이 여자는? 미카엘 정도면 정말 괜찮은 남편인데란 생각이 들다가, 건조한 이란 단어로 싸우다 결국 자기탓을 하며 잠자리에 드는 그들을 보며 보통의 평범한 부부들도 다 저렇게 살지 않나 했다가, 아 맞아. 한나는 정말 시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삶의 모든 것에서 상징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쪼아 대는 것이 아닐까.

결국 한나가 미카엘을 힘들게 하는 것 같지만, 미카엘은 자신의 일이 있고 성공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조금 아픈 아내지만 아이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러나 한나는 어린 고양이를 버리고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며 낭비벽에 충동적이며 이웃집 남자아이를 타락시키고 싶어하는, 열이 오르고 아픈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는 광기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신경쇠약의 예민한 아내이다. 진정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도 그녀의 자리도 없다. 그녀는 어린 고양이를 죽이지 않았고, 훌륭한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니라 본인이 훌륭하고 강인하고 싶었고 외로웠고 혼자였다. 남자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커서 그녀도 아니고 그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견고한 벽들은 그저 서 있을 뿐이다. 지켜주는 듯 하지만 사실은 가두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뜻하지도 않으며 귀 기울이지도 않은 채 그저 주변을 빙 둘러싼 채 보호해 주는 척하지만 실상은 가둔다, 영혼을. 어쩌면 한나가 처한 상황과 악몽은 그녀를 둘러싸며 그녀를 보호해 주지만 실상은 가두고 있는 또 하나의 예루살렘의 벽이 아닐까.


책 속 글 중에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싶지 않다˝



사실 이 시기에는 우리 사이에 일종의
불편한 타협 같은 것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마치 장거리 기차여행에서
운명적으로 옆자리에 앉게 된 두 명의
여행자들 같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어야 하고,
예절이라는 관습을 지켜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거나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서로 아는 자신들의 사이를
이용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예절바르고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고.
어쩌면 가끔씩은 유쾌하고 피상적인 잡담으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야 하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절제된 동정심을 보이기도 하면서.


˝잘못 알아들었군요. 미카엘.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게 끔찍한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 아버지처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끔찍한 거라구요.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 잘만.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다음에는 야이르. 우리 모두가요. 인간이 계속해서 거부당하는 거잖아요.
계속해서 새로운 초안이 만들어지는데 결국은 다 거부되고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던져지고는 새롭고 약간 발전된 개작으로 대체되는 거죠.
이 모든 게 다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정말 무의미한 농담이죠˝

말해 봐요, 미카엘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당신의 질문은 무의미해.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있지.
그걸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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