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주의자의 감각 -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소한 기적들에 대하여
김이나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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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로서 사람을 다독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말보다는 글로 전하는 온도가 더 오래 유지됨을 느껴서인지 에세이를 쓰는 사람, 노랫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애정이 간다. 그래서 저자의 문장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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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주가 소멸해갈 때_ 우리가 한 시절을 쏟아 만든 무언가가 허물어지고 사라진다 해도, 우리가 쏟은 시간과 경험치, 기억 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별로 남겨진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갉아 먹히다보면 내가 없어 질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 온전히 껍데기는 존재하겠지만 심연의 나는 모조리 휘발되고 진짜 나는 없는, 의무감으로 생을 이어가는건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된다. 이게 다 잡념같다 생각 하겠지만 고민이 많고, 잘 하려고 애쓰다보면 존재의 이유가 없어지곤 하더라. 무엇때문에 열심히 살았는지, 어떠한 목표가 있어서 아등바등했던건지, 이 순간이 끝나면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어떠한 이도 명확한 답을 내어주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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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_ 지금도 불완전한 나라서 불안한데 더 불완전했던 나를 잘 아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반갑게 대해주는 사람.

처음 만났을 때의 나를 또렷하게 기억 해 주는 사람. 시간이 흘렀고 모든게 변했음에도 여전한 그 장면을 꺼내어 주는 사람. 과거의 호칭을 듣고있노라면 여전히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 막내노릇을 해야 할 것 같으며 괜한 투정을 부려도 모든게 허용이 될 법한 기운을 얻는다. 든든한 믿을 구석이 있던 그 시절로 말이다. 저자를 아직도 '이나 대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는 것 처럼, 나를 여전히 'OO 매니저님', 'OO실장님'으로 불러주던 그 때. 이름은 하나여도 별명이 서너개인 동요 '내 동생' 처럼, 나를 불러주는 이름 아닌 호칭들에게서 잊고 지냈던 나의 시절들을 만날 수 있어 고마울뿐이다.

나도 잊고 있던 나의 시절을 기억 해 주는 사람, 나는 그 사람에게 여전히 그런 존재라는게 뭉클해진다.


📖지금 내 자리가 무겁게 느껴질 때_ '나 이 자리 너무 부담스러운데?' 싶을 땐 자꾸만 작아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힌 큰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려라. 내가 작아 보이는 건 내 생각일 따름이고, 나보다 오래 일한 큰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를 앉힌 타당한 근거와 이유는 분명히 있다.

어릴때엔 어떻게 해서든 위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거리고 닿지 않는 높이의 것을 움켜쥐고자 손에 쥐가 날 정도로 뻗게된다. 헌데 어느정도 나이를 먹고 연차가 쌓이고, 그 분야의 고인물이 되다보면 뚜렷하게 두각을 드러내기보단 안주하려하고 튀기보단 숨기 바쁘다. 길고 얇게 가자는 얕은 숨으로 연명하는 삶을 고수하게된다. 이제는 아는 것이다. 직급이 높아지면 책임을 져야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윗 사람들보다 아랫사람들이 많아지면 방패가 되어야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것. 내 몫의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목숨줄까지 쥐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건 아무래도 무겁고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나이만 먹는 어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어른은 그게 어렵고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내 몫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까지 책임지기엔 스스로의 그릇이 작다 여기게되고, 한 순간의 결정이나 한 마디의 말로 타인의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상황이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은 늘 무섭고 회피를 반복하게된다. 나를 둘러 싼 주변인들의 생의 순간까지 역량을 끼치는 존재가 되니 매일매일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늘 느낀다. 내 그늘이 되어주는 사수나 부서장이나 든든한 어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의 바람으로 나는 오늘도 내 깜냥보다 높은 듯한 위치에서 까치발로 서서 종종거리는 삶을 살게된다.


📖상사님들에게_ "수고했어요. 잘했어요."라는 말이 꼭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이런 말이 필요한 날, 이런 말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날, 그 밑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과 마음이 깔려 있을까.

어릴 때엔 밥만 먹고 똥만 싸도 잘했다고 칭찬받고 기특하다 여겨주는 시절이 있지만, 나이가 들고 이것저것 아는게 많아 질 수록 그러한 말을 듣는 횟수가 줄어든다. 뭔가 칭찬의 역치가 된 것 마냥 내가 어릴 때 받아온 칭찬과 격려의 말을 고스란히 타인에게 갚아주어야 하는건가 싶은 상황이 계속된다. 그 횟수가 0이 되면 그나마 중간의 삶인거 같고, 받아 온 것보다 뱉어내는 고운 말이 더 많아져 마이너스 수치가 되면 그래도 괜찮은 삶과 그럴듯한 어른으로 가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도 사람이다.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 더 잘 하고싶고, 고맙다 소릴 들으면 배로 갚아주고픈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게된다. 별거 아닌 말 같아도 이 한마디가 고함량 비타민이라도 된 것 처럼 나를 다시 쌩쌩하게 만드는거 보니 여전히 나는 칭찬이 고프고, 인정이 그리운 사람임을 느낀다. 나도 이런데 내 앞에 있는 댁들은 오죽할까. 입 밖으로 내뱉는 아부와 아첨처럼 보여도 우리 이거 흔하게 써먹자. 내가 듣고 싶은 만큼 말해보면 돌고돌아 나도 그런 소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나 그런 말 디게디게 듣고 싶은 엄청 허술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게 나인걸 어쩌겠어.


📖노예병 말기_ 다정과 사랑은 디테일에서 온다. 그런데 그 디테일을 챙기기 위해서는 체력도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파하려면 내 몸이 건강해야 하고, 아주 좋은 컨디션일수록 양질의 사랑을 전달해줄 수가 있다. 체력에서 태도가 나온다는 걸 나이먹을수록 느낀다.

하긴, 다정도 체력이더라. 베풀고자 하는 마음도 내 그릇이 넘치거나 쏟아지지 않았을 때에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걸 수시로 느낀다. 내가 행복해야만 그 기운을 온전히 타인에게 밀어 넣어 줄 수 있음을 실감하게된다. 내가 즐거워야 시선과 말투, 말의 온도가 부드러울 수 있다는걸 아는 나이가 되어서인지 나란 놈의 배터리를 늘 완충모드로 유지한 채로 살려고 애쓰게된다. 내 에너지를 급속 충전기 삼아 타인에게 나누게 될 지라도 일단 내가 완충 상태여야 뭐든 가능하다는 것. 이 또한 노예병 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는 심산으로 보일지라도 다정의 순간이 나는 너무 좋더라는거지.

그렇네, 다정도 병이네. 쉽게 고칠 수 없는 중병.


📖덕질의 쓸모_ 걱정과 달리 그들은 남들보다 더 행복하고 따뜻한 온도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무언가에 깊이 빠지고 한참을 좋아하고 후회없이 즐기고 가득 행복해 하는 것.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러한 과정 하나만으로도 사는게 재밌어지고 내일이 기대되는 삶으로 바뀌더라. 음악을 좋아하는 삶도 나고, 책을 사랑하는 삶도 나이며, 커피를 즐기는 시간도 나의 일부이고, 사색과 산책을 즐기는 것 또한 다양한 각도의 나라는 것을 안다. 회사-집-회사-집만 오가는 것 같아도 틈틈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은 긁어 모으는 것. 더 잘 살려고 가장 나약한 부분의 숨구멍을 뚫어 놓는 방식. 누군가는 그게 쓸모 없는 일 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생존방식이라는 걸 느낀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장 빠르고 깊이있게 누릴 수 있는 행복 회로. 내 돈 벌어 내가 쓰고, 내가 즐긴다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이야. 덕질에 이만큼 쓰고, 저만큼 돈 벌면 삶의 본전치기 정도는 될테니까 무엇이 되었든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 덕질 하는 삶에 나를 푹 절여놓고 사는 순간도 있길 바란다. 해보니까 겁나 행복하더라는 후기를 전해본다.


📖우리의 엔딩은_ 인생은 눈감을 때까지 끊이지 않는 이야기이다.

누구도 함부로 결말을 말할 수 없다. 그 주인인 당신조차도.

어떻게 엔딩이 날지 몰라 재미있고, 떄로는 두렵고, 그럼에도 다시 설렐 수 있는 게 삶이다.

계속 연재되는 작품이며, 때로는 휴재도 하지만 절판 될 일 없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나 또한 내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으며 독자가 한명이라도, 아니 조회수가 0이 된다 할 지라도 꿋꿋하고 담담하게 계속 써야하는 이유가 있는 숙제이기도 하다. 시키진 않았으나 자발적으로 해야만 할 것 같은 생의 기록물이기도하며 이게 있어야만 이놈 잘 살았구나 싶은 증거자료가 되지 싶다.



내가 미처 챙겨 듣지 못한 라디오같은 느낌을 받는다. 매주 매주 게스트가 나오는 데일리 코너 말고, 주말 밤에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그런 시간 같은 순간을 마련해 주는 게 이 책이었다. 나완 다른 세계에서 살 법한 방송인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일과를 공유했을법한 출퇴근도 해본 직장인의 동질감?

인간관계에 고민도 많았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동료이자 선임이었지만 지금은 퇴사한 상태라 동네 언니로 남은 그런 사람과 늦은 밤 위스키와 커피를 같이 파는 곳에서 테이블에 얹어진 작은 스텐드 불빛을 멍하니 보며 그간 있었던 설움을 쏟아내는 동생이 되어버린 느낌(너무 구체적인가?)

암튼, 저자는 나에게 그런 언니미 낭낭한 사람이며 몇번이고 똑같은 내용을 듣더라도 지루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딱 그정도의 과하지 않은 다독임으로 알아서 바닥을 짚고 일어 날 수 있도록 진득한 시선으로 봐주는 듯한 사람. 그래서 '나, 언니가 손 잡아주지 않아서 알아서 일어났다? 나 기특하지? 멋지지?' 라고 으시 댈 수 있도록 응원과 위로를 요리조리 찔러주는 이야기로 나는 그리 유별나지 않은 놈임을 확정지어주는 느낌이다. 그래서 고맙다. 손에 쥘 수 있는 에세이 하나로 내가 일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니 바닥에 주저앉아버려 축축해진 엉덩이 탈탈 털고 일어나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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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나르 주식회사 - 김동식 AI 초단편선
김동식 지음 / 요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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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를 주제로 한 초단편선 모음집. 역시나 분량 채우기 식의 늘어지는 것 없이 굵고 짧고 선명하게 적혀있다. 열여덟 편의 초단편선은 AI 관련 제품과 기술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먼 미래라 단정 짓지 못할 만큼 근간까지 다다른 현상과 그걸 내다보는 저자의 안목까지. 집중 못할 거 같은 상황에서도 그가 내어놓은 이야기라면 자동 노이즈캔슬링 상태로 만들어버림에 감탄하며 단숨에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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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리플레이_ 라이프 리플레이가 우리에게서 발산을 앗아갔습니다. 표출과 저항, 그리고 중요한 '썸띵'을 앗아갔습니다. 화를 참고, 욕망을 참고, 부조리를 참죠. 집에 가서 리플레이로 해소하면 되니까. 이게 정상입니까? 역사상 인류가 이토록 심하게 거세당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눈 앞에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는 꾹꾹 눌러 둔 채 집에 가서 리플레이하듯 하루를 되감기하여 제멋대로 스토리를 다시 구성하는 능력. 자기전 이불킥 하는 과거와 달리 안되면 집에가서 '라이프 리플레이'해버리면 되지 싶어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는 하루.

몇번이고 곱씹고 뱉어내는 조심스러운 말은 사라지고, 몇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린 후 행동하는 몸짓도 사라진 상태. 표정없는 고마움과 감정없는 미안함. 진심의 존경도, 울분의 한탄도 없다. 고요한 호수보다 더 무서운 잠잠한 심연의 물속같은 사람들의 심상. 감정의 거세.

개개인이 원하는대로 리플레이 시켜 수정과 삭제를 반복하는 제뜻대로 고쳐먹는 일상의 짜깁기. 가장 완벽한 하루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잡아먹은 반듯한 일상. 이럴거면 그냥 AI보고 내 하루를 살아내라 해도 될법한 시간들이다. 뭐랄까, 반듯한 것이 모난 것도 없고, 별다를 것 없는, 넙적하고 튀어나온 선 하나 없이 가지런하게 찍혀나오는 판 초콜릿같은 삶이 보였다. 똑똑 떼어내어보면 그게 그거같은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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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키우기_ 회사는 고객들에게 '나'를 팔도록 유도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본떠 만든 AI는 수요가 많았다. 게임 회사나 영화사 등의 기업들이 원했고, 부유한 개인도 개인적인 목적으로 원했다. 그러자 많은 이가 가볍게 '나'를 팔아댔다. 공공재나 다름없는 '나'를 파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런 시대였다.

내 또래, 80년대생 여학생들이라면 CD하나로 반 전체가 엄마로 빙의되어 엘리트 딸래미 한명씩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프린세스메이커라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인데 이번 단편 작품이 딱 그걸 떠오르게 했다. 게임은 하나인데 친구들끼리 똑같은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 것도 신기했고, 다 키워놓고 보면 진짜 제각각의 신분과 직업을 갖게된다는 것. 뭔가 자신을 닮아있는 분신과도 같으며 성향은 동일한 게임이긴하나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복제작 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리만족의 표본과도 같은 것. 욕망은 천장에 달려있고,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마련. 고로 현질이 답이라는 결론으로 역시나 '고객 = 돈' 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에 익숙해진다면 쉽사리 놓지 못할 것이고, 한계를 봐야하는 이들은 부를 맞대어 자아 투영과 자아 실현을 하게 될 것임이 당연했다. 역시 AI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한다기 보단 더 빠른 부를 긁어 모으는 것에 구체화 되어있음을 잊고 있었다. AI또한 욕망 가득한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 인 것을 또 간과하고 말았다.


📖AI 상속법_ 사람이 죽은 뒤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AI 로봇만 한 적임자가 없긴 했다.

나의 순간을 유한이 아니라 무한으로 기억하고 기록 해 둘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영원을 바라던 사람이 꾸려낸 진짜 영생의 기억 유지 기능.

나를 알던 이들도 죽음에 이르렀을테고, 나를 둘러싼 세상이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나만 기억하는 AI만 멀쩡하게 있다면 그걸 행복이라 봐야할까 행운이라 여겨야 할까. 기억의 영생 마저도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맞이할 듯 해 애잔해지기도 한다. 뭐가 맞고 뭐가 틀린건 없겠다. 오로지 자기 결정일테니까. 근데, 나는 이거 별로인거 같아.


📖드라마 성공 공식_ 캐릭터의 저런 행동은 좀 비합리적이지 않아? 근데 또 비합리적이라서 오히려 합리적인 것 같기도 해. 그게 인간이잖아. 인간이니까 쓸 수 있는 전개지.

현생에서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드라마틱한 상황. 극적인 전개. 그 로밍이 우리를 영상 앞으로 모이게 했다. 그 또한 AI의 영향을 받는다면? 수많은 작품을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시청자들이 좋아할 요소들, 뻔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기도 한 콘텐츠를 구현해 낼 수 있다면 마다 할 수 없지.(AI가 내어놓은 작품을 창작이라 봐야할까? 나는 끝까지 창작 대신 구현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싶어진다.)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니까 좋아하고 동경하게 만든다. 현실 도피가 가능 한 곳이니 말이다.

알고서 받아들이는 것, 모르고서 느끼는 것. 삶이 AI에게 잠식 당한 상태이니 AI인지 인간의 창작물인지도 점점 모호해지는 감각. 덮어놓고 보면 결국 그게 그거라는 것인데 우리는 그 결과물을 철저히 무시하고 싶어진다. AI가 인간보다 더 나을 거라는 확고한 편견에 갖혀진 상태다. 이런데도 사람을 배제 시킬 것인가, AI를 우월시 할 것인가는 각자의 선택에 달린거겠지. 이젠 그밥에 그나물이 된 겪인데 어떠한 감각으로 가타부타 정할 수 있을까. 난 백날 골라봐도 틀릴거 같아. 사람의 작업물인지 AI의 결과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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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솔 유튜버의 합방_ 누가 누굴 이용했는지는 영원한 비밀로 남겨질 것이었다.

누가 누굴 이용했는지, 누가 이용 당했는지. 비상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AI였고, 그 비상한 머리가 이러한 꼼수를 부렸다. 사건이 흘러가는 꼴을 보자니 이놈의 자작극이겠구나 싶었다. 욕받이를 허상으로 둔 채 자기는 피해자인냥 거적을 뒤집어쓰고 더 그럴듯한 단계로 올라가는 방식. 역시나 피해를 보거나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지. AI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약아빠진 인간을 당해낼 재간은 없을테니 말이다.


📖가장 공평한 복지_ 그 답은 '무작위 복지'였다. 사람들은 운명에 맡겼을 때에야 공평하다고 받아들였던 거다. ... ... 어떤 등급을 받게 되더라도 공평하다고 순응하면서 말이다.

내가 더 가지지 못한다면 남들도 더 가지지 못한다. 랜덤, 아무거나, 결정장애에 빠져버린 사람들. 무엇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에 망설임도 있지만 내 결정에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는 차라리 타인에게 맡겨버리며 책임전가의 뉘앙스도 풍기는 이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너도 그러한 것. 그러하니 나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내 옆에 있는 쟤도 조만간 똑같은걸 겪을거라는 기대와 확신을 갖고 사는 공평한 복지사회. 이게 일상을 살면서 비교하는 것에서 오는 피곤을 해소하는 방식일까 피로도를 높이는 방식일까. 어차피 원산지가 다른 삶이잖아. 나는 그냥 공평한 복지고 나발이고 격차있는 삶을 고수할거 같다. 신분 상승이 아니라 삶의 질 상승을 기대하는 삶을 사는게 다 나을듯 싶다.

알고보면 이러한 기대감마저도 피곤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 복지를 만들었겠지? AI 발전에 따라 인간은 점점 생각하고 고민하며 노력하는 것에는 일체 에너지를 쓰지 않는 사람으로 진화 할 거라는 암시같은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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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통 보안 콘서트_ 우리는 행운아죠. 이 콘서트는 고유해요. 시간이 지나면 현장에 있던 우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다신 경험할 수 없는, 간접 경험조차도 불가능한 고유한 순간이라고요. 이걸 렌즈가 아닌 제 맨눈으로 머리와 가슴에 담았다는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저자는 요즘 콘서트 관람 실태를 본거겠지? 저자가 꾸린 세상을 좀 더 빨리 당겨서 구현해 낸 아티스트가 있다. 소란의 고영배. 얼마전에 했던 고슴도치 콘서트인데, 이 뜻이 특별하더라. 고,영배의 슴,슴한 도,파민 치,료 콘서트를 줄여서 고슴도치 콘서트라는 것. 박수,함성,웃음,촬영 안됨, 영상,필기,감상 가능한 좀 남다른 컨셉으로 꾸린 공연이었는데, 스마트워치, 카메라, 웬만한거 다 걷어가는게 처음엔 이상했지만 자발적으로 착하게 제출하는 관객들. 그래서 모든 사진은 입장 전과 공연 후 오피셜에서 제공하는 공식 이미지뿐이었다. 요즘은 대포까지는 아니더라도 개인 폰으로 공연을 풀로 촬영해서 3시간 넘는 영상을 올리는 계정도 있고, 실시간으로 고화질 직캠을 올리는 이른바 홈마의 계정으로 직접 가지 않아도 스텐딩에서 바로 즐기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기도한다. 일부 아티스트들은 어느정도 허용을 하는바. 이러한 영상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머글을 덕후로 끌어들이는 입덕의 계기로 삼기도하니 마냥 거부 할 수도 없더라는 거지.

헌데, 나는 이 철통 보안 콘서트를 응원하는 바다. 거진 분기별로 한번씩 콘서트를 가게되는 공연 광인으로서 그때의 여운을 되새기고 또 그리워할 무언가가 있다는건 참 좋은 거지만 그 순간을 오로지 누릴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완벽했다고 단언하진 못할 듯 하다. 그래서 남들 다 폰 들고 바삐 움직일때 3시간 중 딱 한곡만 풀촬영하고, 나머지는 다른 능력자의 손을 빌어 올아오길 바라게되는 듯 하다. 그때의 온도와 습도, 그 분위기와 나의 두근거리는 마음과 되려 긴장되는 듯한 내 손끝. 공연장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와 제작진들이 이날을 떠올리기 쉽게 뿌려두는 향수, 특별하게 제작된 컨페티들까지.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몇번이고 되새기면 되니까 머리와 가슴에 그리고 온 감각에 젖어든 나를 떠올리는 방식을 더 애정하게된다. 기억이란 모름지기 일부가 소실되고 미화 될 때 더 애틋하고 귀하게 여겨지는 법이라는 것도 알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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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김동식 스러웠다. 김동식이라 쓸 수 있는 AI 초단편선이었고, 어딘가 모르게 껄끄럽고 까끌거리며 후련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남긴다. 그래서 생각해야했고, 그 생각이 매끄럽게 정돈이 될 수 있도록 몇번이고 다시 살펴봐야했다.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하며 작가의 허상을 들여다 보는게 아니라 진짜 있을 법한, 머지않아 내 발치에 도래할 세상 이야기 같아서 일단 그 일이 닥치기 전에 나는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바빴다. 저자 또한 AI 자체보다 AI로 인해 펼쳐질 현상을 상상하는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상상력으로 끝나지 않을 법한 장면들이 수두룩하다보니 미리 그 세상을 맛보는 이른바 시제품 테스트 평가단이 된듯한 느낌으로 이야기를 삼키게 만들었다.

AI라는게 편하기도하지만 두렵기도 한 것이라는걸 쓸 때마다 느낀다. 무형의 것이라 생각했지만 AI를 탑재한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들이 생성되고,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확장된 세상을 구현하는데엔 거리낌이 없다. 습관처럼 말하길 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말하고 다녔는데, 이제는 AI가 우선시되어지는 세상이 더 무섭다고 말을 고쳐야 할 것 같다. 고유한 것이라고 여긴 인간의 유일무이함이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저자는 짦은 글을 남기고, 독자는 구구절절 여담을 늘여놓게 만든다. 역시 또 나만 수다쟁이 인거지. 김동식 저자의 글만 읽으면 나는 말 못해 안달난 사람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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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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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떻게 읽어야되는거지? 제로제로제로제로? 영영영영? 영 네개? 그냥 책 표지에 있는 다음에 또 만나자고 전해주세요로 부르는게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의도한 또다른 이름 일수도 있잖아?

책 제목 만큼이나 소재도 신박하다. 길고양이들의 안전한 삶을 위해 활동하는 특수요원 고양이 '오후'가 존재감 없는 이에게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대에서 제안을 한다. 너만큼이나 존재감 없는 인간은 없었기에 어떻게 하면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지를 배우고 싶어한다. 고양이로서는 그게 최선의 안전함이니 말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무존재의 무의미의 인간이 되어버린것인지를 생각한다. 있었으나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삶이 무엇으로 인해 시작된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다시 생이 시작되어도 똑같이 살 것인지에 자문도하지 않는다. 멀찍이 지켜보는 독자의 바람으로 존재감 없는 인간이 스스로 깨고 나오길 빌게된다. 그가 먼저 말해준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인사가 꼭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면, 이전의 삶은 아는 두려움이었다.

둘 다 고르지 않고 사라지는 방법은 없을까?

누군가는 다시 태어날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 해서든 손에 쥐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것도 죽어서 내세로 가는 것도 그저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는 이전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기에 그러나 싶은 걱정이 앞선다. 환생 이후의 시간들에 대한 기대감이라던가 확신에 찬 생의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이전의 삶이 완벽한 실패로 확정짓고 있기에 자신이 유일하게 잘 할 수 있었다고 여기던 것 마저 주저하는 생각이 안쓰러워진다.

연재했던 '0000' 만화는 곧 자신이었고, 미래의 자신이기도 했다. 통장 잔고 0, 인간관계 0, 행동반경 0킬로미터, 메신저 알림 0의 일상. 여기에 갖혀서 바삭하고 건조한 0이 된거 같아 존재감 마저 0이 됨에 헤어나오질 못했다. 조회수 0, 별점 0, 댓글 0, 추천 수 0 으로 수치회되는 것들에서 0이라는 결과값을 맛본 상태이니 의욕 0, 의지 0, 기대치 0, 희망 0도 같이 따라오는 상황이다. 0이라는 수치가 영영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니 진이 빠져보이게 어쩌면 당연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의욕이라는 것도 지금과 달라질거라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생기는 것이니 이 값에 대한 상태에 대해 이 사람 자체를 질타하지 않길 바란다. 제일 위험한게 어설픈 위로와 어설픈 응원이더라구.


저랑 비슷해서 잘 봤어요. 라고 말하는 독자가 이 사람의 껍질을 깨는 힘이었다. 헌데 그런 사람을 만난 장소가 이곳이라니, 이 사람도 나 만큼이나 팍팍했었구나를 생각하게된다. 독자라고 말해준 사람도 고양이의 힘을 빌어 다시 살 기회를 마련하길 바라면서 나도 다시 살고자하는데, 당신도 살아봐도 되지 않겠냐는 무언의 눈빛을 전달한다.

현생판 고양이의 보은이라 봐야할까. 그저 깊은 꿈을 꿨고, 그 곳에서 고양이는 나를 다시 살도록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 다시 살아봐야되지 않겠냐는 말을 그들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오후'가 환생을 기대하는 만큼 당신도 환생, 아니 이어지는 현생의 삶을 기대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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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었던 위픽 중에 가장 가벼웠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집사라면 더욱 예뻐할 책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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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이동원 지음 / 라곰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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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고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되지만, 잘못 고르면 이런것도 책으로 나올 수 있는거구나를 감탄(?)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추리 미스터리 소설은 호불호가 센 영역이라는 것. 계절탓이라 봐야할지 요즘 출판업게 흐름이라 봐야할지 추미스 소설이 마니아의 영역에서 나와 인기가 있다고 전해들었다. 그러고보니, '오렌지와 빵칼',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용궁장의 고백', '영수와 0수'까지. 근래에 읽은 것들도 제법 되는게 나 역시도 추리와 미스터리 이야기에 익숙하게 빠져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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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선인의 가면을 쓴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악인을 그려내었다. 프롤로그를 시작하여 총 3부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한국에서의 마지막 사형수가 어떤 인물이었고, 그는 왜 어떠한 일들로 사형장으로 오게되었는지에 대한 시간의 되감기와 함께, 현재의 시간을 사는 이들 속엔 사형수 한바로로 인해 사건에 연류 된 자, 유일한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과거의 일로 인해 경찰이 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살아남은 자이자 이제는 그러한 인물들을 쫓는자로 시선이 옮겨저 어떠한 상태로 사람들을 마주해야하는건지를 생각하게했다.


📖제 생각엔 사람을 버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요.

광심이 생각하는 '사람이 사람을 버린다'는 문장은 사람다움을 버리는 것 자체는 곧 옳은 것을 포기하는 범죄자로 단정지어버린다. 어릴적 깊게 각인된 어떠한 기억은 사람을 다양한 갈래로 보기보다 선인과 악인으로만 나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했다. 백날천날 가르친다 한들 온몸으로 겪어낸 것들은 모든게 허풍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음을 보인다. 내가 그 일을 겪은 장본인인데 당신을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며 사람의 다면적인 부분은 결코 회수와 회개되지 않음을 어필하는 속앳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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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판단하는 순간, 사람은 대부분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누구나 진실을 털어놓고 싶어 한다. 거짓말 위에 세워진 삶이란 그 자체가 형벌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만 쉬쉬하게 만들면 온 세상이 모르게 될거라는 눈가리고 아웅의 현실화. 고보경과 천현숙 그들만 알고자 했던 일들. 홍은호가 홍기창의 입을 막으면 세상이 모를거라 여기던 행동. 고영혜가 전형수와의 관계를 이야기 말미까지 사실화 하지 못하던 이유. 옥호가 관내 사람이 아닌 해환에게 사건을 공유하는 상황. 그 둘의 관계는 진실이라 할 지라고 그 둘을 제외한 이가 둘을 마주하는 것에는 거짓이 선연하다. 각각의 집단과 소속이 정해둔 규칙을 어긴 상태였다. 헌데 그들은 각자의 원하는 바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해 거짓을 숨기고 거짓을 현실로 포장한다. 그러니 세상 모두가 청렴하지도, 결백하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오늘 하루 마주할 얼굴들에서도 완벽한 내 편이 없고 확고한 적군도 없는 것 처럼.


📖지켜온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죄책감만 덜어주면 사람은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고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한다는 말이에요. 일단 버튼을 누르기 시작한 사람이 스스로 멈출 수 있을까요? 이미 저질러버렸어요. 두 번 못할 이유는 뭡니까? 버튼을 누르면 얻게 될 이득은 분명해요.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 보면 나중엔 버튼을 누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게 될 겁니다.

홍은호의 집에 있던 유리상자를 생각한다. '누르지 마시오' 없던 호기심도 생기게 하는 빨간버튼과 글귀. 버튼을 누르면 쥐가 있는 공간의 바닥이 열린다. 쥐는 아래로 떨어지고, 빠르게 돌아가는 쇠로 된 날개에 갈려서 죽는다. 홍은호는 말한다. 상자 안에서 죽는 쥐는 솔직한 자신의 얼굴과 대면하는 뜻이기도 하다며 설마라며 눌러보는 사람과, 알면서도 누르는 사람들의 묘한 표정들을 그려보게 한다. 두려움과 희열 그 지점에 맞닿아있는 인간의 입꼬리와 미간의 움직임. 태초의 악인은 없다고 에필로그 속 치료감호소장 곽한진은 말했다. 그리고 해환 또한 뼛속부터 의인도 없다고 광심에게 말한다. 어느 시점인지 알 순 없으나 자기 내면의 악이 자라난 순간부터 주시하고 유혹에 맞서 싸우며 올바른 길을 택하느냐 그러지 못한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느냐의 차이 일 뿐. 티 없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그 어떤 것도 무결한 존재는 없다는 걸 보여준다.

다들 그럴꺼잖아. 설마 그러겠냐며 눌러 볼까 하는 뿔 선 마음과, 절대 그래선 안된다며 손사래치는 도의적 마음이 공존한다는 걸 말이다.


맨 마지막 작가의 말에는 이 이야기를 내어둔 목적을 일러두었다. 다만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 '왜'가 더 중요하다고 믿을 뿐이다. 범행의 동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범인의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를 언급하며 사기꾼이나 위선자의 얼굴을 논하는 관상에 대한 지레 짐작과 첫인상 판별이 얼마나 위함한 짓인지도 내비치고있다. 그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문장을 박아두며 수 많은 얼굴들을 곳곳에 숨쉬고있었다. 발로 뛰는 광심이나 추리를 공유받은 해환의 입장이 되어 염탐하듯 사건과 인물을 옅보게된다. 사건의 공익을 앞세운 진범과 공범을 가리며 죄악의 얼굴을 찾는게 중요할까? 나 아닌 사람에겐 호인이지만 나와 엮였을 때 악인이 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의 입장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솎아내는게 중요할까?

단순하게 내가 느끼는 사람의 좋고 싫음에 대한 이분법적 갈래로 편가르기를 하는게 맞을지. 티비예능 '꼬꼬무'의 이야기꾼이 어떠한 편에 서지 않고 제3자로서 내려다보는 방식을 이입하여 사람들을 살펴봐야할런지에 대한 선택지도 독자에게 남겨 둔 듯 하다.

다들 하나같이 어쩔 수 없었음을 강력하게 어필한다. 나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길 바라는 의미에서 옳다고 확신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끄집어 낸다. 그 시선의 높이와 온도, 사회적인 방향성이 어떻게 닿아있느냐에 따라 사형수가되고, 형사가 되며, 범죄 가담자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나 아닌 타인의 낯짝을 대하는 선입견 만큼이나 위험한 선 넘기가 될수도 있겠다.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 눈에 띄는 대단한 사람이 되진 않더라도 우리가 아는 그 상식선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적어도 타인의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잘 사는 사람이자 그러한 낯빛으로 살고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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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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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맨 뒷장에 적힌 작가의 말 때문에 골랐다. '내가 잘 지낸다면 그들도 잘 지낼 것이고, 내가 행복하다면 그들도 행복할 것 같다고.' 라는 말로 소설의 인물들이 어찌 살아갈지 가늠하는 저자의 마음이 좋았다. 특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허상의 세상도 아닌 김혜진표 소설 속 인물들이 꼭 나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컬트와 SF소설에 빠져만 살다가 저자 덕에 현실로 돌아와 쌩눈으로 앞을 보는 느낌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삶이 비단 나만 겪어내는 삶의 오르막길만은 아님을 비친다.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지만, 특이한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사람들 이야기. 하지만 나만 이렇게 살지 않음을 보여준다. 총 7편의 단편에서는 화자든 주변인이든 익숙하게 볼 법한 이들이 이야기를 끌고간다. 희망보다는 체념이 익숙하고, 낙관하기보단 비관적 시선을 기반하여 더이상의 최악은 없을거라는 마음으로 가장 구석과 가장 뒷편에 서서 독자 자신의 삶과 이야기속 타인들의 삶을 보게 만든다. 무표정한 낯짝과 양팔을 팔짱 낀 채로 삐딱하게 보는 듯 해도, 시선에 닿는 이가 한순간이라도 발을 삐끗해서 넘어질라치면 단박에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있는 발끝과 시선의 끝이 그들의 기본 자세임을 이젠 안다. 습관적 도움의 갈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적정거리에서 주시하는 마음이다.

은비까비가 전해주듯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꽉 맏힌 결말은 없지만 이 글들이 전부 밉거나 씁쓸하지만은 않다. 그렇게 주변에서 적극적 개입이 없더라도 너무 세상을 각박하게 여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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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나 한번 살펴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일이분도 안 걸리는 일을.

모든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니 동일한 상황을 두고도 누군가의 눈에는 거슬리기만 할 뿐이고, 또 어떤 이는 짚고 넘어가야하는 공동사회 순리에 어긋난 행동이다. 또 어떤이에게는 떠올릴 구실도 없을만큼 안중에도 없는 장면이 될 수도 있다. 헌데 정해와 영기는 그러지 못한다. 그들의 딸인 호경이 계속 모든 장면에 겹쳐 보이기 때문에 예민해진다. 누군가가 한번 둘러봐 주었더라면, 그 소리에 황급히 달려와주었더라면 이 아이가 술에 취해 인생을 허비하고, 자신을 업신여기진 않을거라는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번진다.

아파트에서 보았던 민아와 민우라는 아이가 나중엔 호경처럼 세상을 원망하는 삶을 살까봐 그게 어른어른 눈앞에 비춰지니 무서웠을수도 있겠다. 다들 제 일이 아니니까, 엮이는게 귀찮으니까, 괜한 오지랖으로 비춰질 수 있으니까. 간섭했다가 얼굴 붉힐 수 있으니까의 핑계로 마음은 있는데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텐데 정해는 몸이 먼저 반응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모르겠다. 사는 게 여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렇게 남들 사는 거에 줄기차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정미의 한 마디는 정혜가 붙들고 살던 사람간에 기대하는 마음같은 마지막 매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주르륵 풀려 버렸다. 겪지 않은 정미였고, 겪어냈고, 이후를 감당해야하는 정해의 조바심이었다. 그러니 정미에겐 멈춰도 된다 싶은 정해의 과한 기대치였고, 정해에겐 당연한 것임에도 안 하는 것이 되려 이상한 사람들의 자기중심적인 미운짓이었다. 다시는 호경같은 아이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자신이 호경같은 애를 구할 수 있다면 호경도 자기만의 굴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세상의 기대감이라 보여졌다. 정해든 정미든 누가 맞고 틀리다는게 아니다. 자신이 겪어온 삶에선 자신들이 정답이고 옳은 생의 방식이니 누구의 편도 들어 줄 수 없는 나도 내가 정답인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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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제가 상처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너무 큰 상처였다고요. 한번은 꼭 그말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잘 지내세요.

각자가 쏟아낸 말의 더미 속에서 스스로가 고립이 된다. 그러니 타인이 쏟아내는 말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걸로 간주하며 불행을 표출한다. 왜냐고? 내가 하고픈 말을 못했으니까! 내가 하고픈 말을 토해내지 못했으니까 끙끙 앓다 병이들고 곪아버리는 과정이었다. 애실이 그러했다. 이혼 한 부모, 양 쪽 어디에도 사랑받거나 이야길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유년시절은 혼자 말하고 혼자 감당하는 말의 더미에서 갖혀버린다. 그러니 호의를 갖고 다가온 현서에게 보상심리가 작동하듯 자신의 사연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현서는 친구가 되었으니 애실의 이야길 다 들어준게 아니라 사업투자를 빌미로 사기를 치기 위해 들어주어야만 했던 일련의 과정이었음을 밝힌다. 이혼 후에도 자식에게 돈을 요구하려고 연락을 해온 부친에게 애실이 했던 말 만큼이나 현서 또한 애실에게 똑같은 뉘앙스와 말의 온도로 마침표를 찍는다. 잘 지내라는 말,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 결국 똑같은 결말이었다. 너의 말을 들어주느라 지치는 나를 외면하고도 무수히 쏟아내는 너의 말은 가시만큼이나 따가웠음을 알린다. 영영 찾아오지 말라며 애실이 넘어올 통로를 차단해버린다.

📖다 기억나지도 않는, 이제 주워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다시금 말을 간직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매일 밤, 차갑고 딱딱한 마음을 파서 하루치의 말을 묻는 일. 매일 조금씩 더 깊이 파고, 오래 파는 행위에 적응하는 일.

애실이 아버지에게 떠넘긴 문장들도, 현서가 애실을 향해 참다참다 쏟아낸 말들까지. 할 줄 만 알았지, 그 문장을 온 몸으로 받아낸 애실이었다. 그제서야 살아오며 겪어낸 관계에 대한 깔끔하지 못한 관계의 답을 정통으로 후드려맞아버렸다. 다시 이러한 관계가 한 번은 또 생겨나겠지. 그 때의 애실은 어떠한 방향으로 말하고 들어주는 방법을 찾을지 기대는 되지만 또 한편으론 그 기대감을 대폭 낮춰보려한다.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더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 하는 말이다.

​

📖그것이 자기 삶에는 없다고 여겼던, 스스로 감쪽같이 지워버렸던 누군가의 보살핌과 애정 같은 것을 일깨웠다는 사실을 안 건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곳을 떠날 때 동력으로 삼았던 원망과 미움이 옅어지고, 그 아래 자리한 것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였다.

선희가 바라보는 민지는 어린시절 자신과 닮아있음을 깨닿는다. '바꿀 수 없는 자신의 태생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체념에 가까운 감각'을 언급하며 선희는 고향을 떠날 때 미련 없이 내던져버린 것이 겹쳐보였다. 어른의 손이 타지 않은 듯한 아이의 차림새를 통해 이 아이도 제 몫으로 주어진 관심과 애정이 다 채워지지 못한 채 자라고 있음을 확인했다. 유년시절 그리 자라왔던 만큼 그 몰골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는 살아 내려고 제 힘으로 돈벌이를 하는 아이. 어린녀석이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마을 어르신들은 필요치도 않은 청란에 값을 메기며 적선의 개념보단 거래의 방식으로 아이를 돕는다. 고씨 할머니가 청란을 쟁여놓고 살듯, 달걀을 싫어하던 자신의 아버지도 요양원에 가기 전까지 사주는 고객이었듯 이 동네 어르신들이 한마음으로 민지를 키우고 있었다. 타인의 것을 탐하지 않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을, 커서도 노동의 댓가는 응당 받아 마땅한 수고로움임을 알려주고있었다. 더 커서 이 시골을 벗어나더라도 당연하게 얻어지는 것은 없으며 너의 노력은 헐값도 아님을 항상 염두해두고 살길 바라고 있었다. 감나라 배나라 간섭보다 깨우치길 바라는 세상에서 선희도 그렇게 커왔고, 민지도 그리 커갈것임을 보여준다.

이건 아마 정해가 바라는 세상 일 수도 있고, 정미가 일부러 마음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담백한 세상일 수도 있음을 느낀다. 결국 여기든 저기든 사람사는 동네는 다 똑같은데 무엇에 마음을 더 쓰고 있느냐의 차이가 아닐까로 생각을 덮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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