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절벽의 신자들
조예은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출간 전에 초입부분을 먼저 맛보았던 올초. 그 때엔 언제 출간 될 지도 몰라 다음 이야기가 언제 나올지를 오매불망 기다리게 했던 날들. 완결이 되고 지류로 출간되었으니 무조건 내 손에 쥐어보겠노라 다짐했던 그 마음을 실현하게 했다.

​

밀리의서재 사전연재 압도적 1위와 함께 에피소드 조회수 8만 6천건의 기록. 2026 서울국제도서전 화제작의 그 마침표의 결과물이다.

1부의 제언을 보았던 그 기억을 떠올려가며 다시 읽게 만드는 초반. 그리고 더 깊어지며 이게 진짜인지 허상인지를 몇번이고 의심하게 했던 환영과 오연을 거쳐 현실로 받아들이는 8월. 그리고 그들로 이어지기까지의 총 5부작과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문장.

현실과 허상의 경계를 이어주는 조예은만의 문장으로 보게되는 녹색 절벽, 그리고 그것을 믿고있는 이들을 마주하기까지. 내가 멸종 할 것인지, 네가 소멸될 것인지는 너희가 그토록 바라던 8월 8일을 기점으로 결판이 나겠지. 그러고나면 누구의 말이 맞고, 누구의 말이 허구인지 결정지어지는 것임을 기대하며 진실과 허상, 바람과 현실. 그 중 남게될 하나만을 기대하며 오연과 제언의 시선을 따라가본다. 보고싶은 것과 보게될 것의 갭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아가면서.

​

📖그래도 그냥 살아가는거지. 무뎌지기를 바라면서, 무뎌진 채로. 그걸 못 견뎌서 망상으로 도망치는 거야, 당신도 그렇지? 말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잖아.

뭐라도 붙들고 싶은 마음. 그게 믿음이고 선을 넘어버리면 망상으로 이어지더라는 걸 알려줬다. 내가 하고팠던 말, 그리고 내가 이들을 붙들고 정신차리라고 날이 선 단어들로 물러터진 이들을 긁어내려던 그 말이 여기 담겨있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 여전히 무서운 기분이 들어.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으나 스치던 순간의 어떠한 단상의 조각들이 기운을 붙들여 놓아 계속 그 감정에 머물게 하는 것. 보았던 또렷함보다는 그 순간의 감정에 더 동요되는 것. 명확하게 보았다는 것보다는 뭔지 모를 그 기운과 자기안에 남아있는 단편적 장면에 집착하게되고 자신이 믿고싶어했던 방향으로 현실을 짜맞추고 있음을 이 문장 속에서 느끼게 했다. 결국 너는 확실하게 본 것이 아닌 머릿속에 그려낸 것에 더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랬으니 이러한 세상을 꾸렸겠지. 그게 지금은 꿈이라 다행일테고.

​

비단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 뿐일까. 대중이 이해하는 현실보다 스스로가 믿고자 하는 방향이 곧 진실이라 여기는 과정. 이들은 믿음의 우선 순위가 이야기 밖에 있는 나와는 조금 다른 범주의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눈 앞의 세상을 의심하며 시작되는 첫 문장을 통해 미리 독자에게 언질을 해 두었던 것 이다. 제 엄마와 아빠를 못 알아보는 오연을 통해 얘는 자신도 믿지 못하는 아이임을 미리 알렸다. 목도하는 것보다 제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을 믿고, 현재보다는 과거를 믿으며, 나중에는 환영이라는 자가 꾸린 세상을 믿으며 스스로를 가두는 과정. 불신의 잣대가 일반적인 경로를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이들이 본 것 처럼 어그러져있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자신이 틀렸었음을 시간이 흘러 온 몸으로 느끼지만 받아들이는 것 마저도 시원하지 않다. 대중이 그렇다 하니 불편한 믿음으로 그걸 받아들인 척 한다. 그 끝엔 자신과 보여진 세상의 문을 닫아버린다. 보고픈 세상만 보고싶은데 다들 그게 아니라하니 단절을 택한 것으로 해석하게 했다.

녹색 절벽이 환영이 꾸린 집단과 대중을 구분하는 벽이라는 것인데 이게 누군가에겐 보이고 누군가에겐 보여지지 않는 환시라고 봐야 할지 관점을 바꾸어 보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의심할 거리가 없던 것에 의심을 가둔다. 다수가 그렇다 하니 나 또한 그게 맞다 여기는 것. 의심을 하지 않았다. 헌데 환영은 그 믿음에 딴지를 건다. 그래서 거기에 관심이 쏠리고 또 그 가설에 동조하게 된다. 그들이 환영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던 이유와 환영의 목소리에 힘을 싣어 줬던 것. 환영만의 잘못일까, 환영만을 믿은 그들이 잘못한 것일까.

​

허구라 믿으며 읽어왔는데 어느 시점부턴 현실을 반영했고, 허상인데 어딘가 내가 알지 못하는 집단과 그들이 꾸린 세계가 존재 할 듯한 묘한 기운. 그래서 나는 여전히 조예은의 세상이 무서워진다. 내가 모르고 살던 세상을 슬쩍슬쩍 보이며 '거짓일거 같지? 근데 여기 그런 세상도 존재하는데? 너만 모르고 있었을껄?' 하며 조소띈 입꼬리로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머리가 복잡하다. 난 또 조예은의 문장에 홀린 거겠지.

(여담, 그래서 나는 미트볼이 딱 3알만 올라간 스파게티를 무서워 하게 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랬다고 적었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떠한 클립도 보지 않고 냉큼 주문했고, 내가 생각했던 에세이와는 조금 달라 당황하기도했다. 많은 독자들이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은 이번 산문집. 그간 출간된 작품들보다 더욱 더디게 읽혀졌던 에세이. 익숙한 일상이야기와 함께 문인으로서의 삶을 살며 글을 적어야하는 순간들. 과거 축사나 다른 간행물에 기고했던 문장을 옮겨두었다. 총 3부작으로 나누어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들을 모아두었는데 수상소감이나 인연이 닿아있던 곳에 축사를 옮겨둔 것 보다 '1부 사람의 얼굴'로 모아둔 글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공감가는 부분들이 많았다. 나는 작가로서의 삶도, 축사를 하는 일도 없어 2부와 3부로 얻는 공감은 확실히 적었다.

하나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지만 누군가의 딸이자 노부모의 보호자, 자신의 일을 하고있는 사회인,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챙겨야하는 세대주로서 다방면으로 살펴야하고 계속 주시해야하는 역할이 많은 사람의 순간들이 기록되어있다. 결국 저자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이야기꾼으로 불려지기 전에 나를 키워준 가정을 살피고 내가 꾸려둔 가정을 돌봐야하는 1인 다역의 사람이 느끼는 고단함이 더욱 진하게 기억된다.

​

물론 창작자로서 인공지능 챗봇 챗지피티의 활용과 인간으로서 모든걸 수용 할 것인가에 대한 단상은 나의 편협한 시각을 넘어선 문인으로서의 소견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하게 여겨졌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을 겪어낸 세대이자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긴 애도의 과정을 거쳐 여전히 각자의 마음속에 그들을 묻어둔 사람으로서의 심상까지. 같은 현상을 마주함에 있어 내가 느끼고 받아 삼켰던 것과 살피고 이해하려 애쓰는 저자의 생각을 얻어가는 과정.

저자의 소설만큼 저자의 에세이는 단순히 글을 읽어삼키는 것을 넘어 곱씹어보고 이따금씩 꺼내어 나도 그리 써먹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다만, 후반부의 축사보다 저자의 사사로웠던 일상이 더 특별하게 읽혔던 것 뿐임을 기록해본다.

​

📖우리가 지켜보는 인간다움의 형태가 바뀌는 겁니다. 죄책감. 그것도 사랑의 방식입니다. 죄책감은 때때로 '살아있는 자'가 '사라져가는 자'를 품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에요. 인간의 존엄은 말할 수 있을 때, 움직일 수 있을 때, 일 할 수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나를 아껴서 슬퍼하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 시간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사랑의 형태 또한 다를 것이다. 기억하고 슬퍼하고 애틋해하는 마음. 존재는 없어지더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머물고 있음을 나도 알고 너도 안다면 그 대상이 무정형(無定形)의 것이라 한들 여전한 마음인 것이다.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 내가 손을 잡아주어야 했던 사람,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이라 한들 변형되어질뿐 변질되지 않는 다는 것 확실하다 단언하고 싶어진다.


고단하지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만 유독 아버지에 대해서는 측은함과 애잔함이 깊게 드리워진다. 딸자식보다 배움의 깊이도 얇고 하고자 했던 꿈의 높이도 낮은 사람. 그럼에도 모든걸 굽히고 한참을 숙인 채 저자세로 세상에게 맞춰주던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처럼 저자에겐 전집들 사이 비어버린 책들처럼 허전한 구석을 만들어 놓았다. 당연하진 않겠다만 그렇다고 빈자리를 미리 예상하며 사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저자는 전집 속 비어버린 그 좁은 틈새 처럼 삶의 순간마다 구석구석 작은 공간에서 아버지를 그리워 할 것이고 또 그 만큼 애틋함을 밀어넣을 듯 하다. 애 썼다고 잘 가시라고 잘 쉬라고 하지만 또 한 켠으로는 잠깐 들렸다 가라며 그리움으로 당신을 당겨와 내 옆자리에 두고 싶은 그러한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움의 구멍, 상실의 틈, 애틋함의 빈자리. 평안을 바라는 그리움. 모순된 마음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감정으로 여기게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낙하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
이희영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사의 말이 이 이야기의 사랑 또한 망한것이겠구나를 가늠하게 했다. 김혜진 작가의 추천 한 마디 "사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지만 항상 축복받는 건 아니다"는 말로 축하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해 숨기기 급급한 사랑의 이야기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하게 했다.

책 제목을 더욱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표지이기도 했다. 오리지널 도서의 표지(지금의 전자책 표지)와 알라딘 리커버 특별판의 표지는 컬러와 무드 모두 상반된 느낌이다. 출간 당시의 표지는 떨어지는 무언가의 낙하라면, 리커버 특별판의 표지는 떨어지는 화사하고 탐스러운 꽃으로 보여지기도한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마음의 낙하인지, 꽃같은 마음이 아깝게도 떨어지는 낙화의 마음일지 그건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도록 언어유희를 기대한 느낌을 받게한다.(오로지 나의 견해일 뿐)

​

이야기가 끝난 후 맨 뒤에 이어진 작가의 말을 살펴본다. 나란 존재를 너무 당연시했던 이들에게 서운했고, 나 역시 그들의 헌신과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미안했다. 몸과 마음의 가까움이 깊은 애정의 척도도 되지만 때로는 너무 큰 상처도 된다. 이 말에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것 자체 만으로도 미움을 살 수 있고 이기적이라 보여질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인지 인물의 구성이나 인물의 관계도 그리고 이어지는 마음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정대건 저자의 <급류>와 매우 닮아있음을 느낀다. 급류의 관계도에 대해 불호의 감정을 가진 이라면 이 책 또한 그리 맛있게 읽혀지진 않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얘네 진짜 왜 이러는 거야?'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기 때문이다.

​

오랫만에 보여지는 액자식 구성이다. 뭔가 학교에서 수업 듣고 이러한 소설의 방식을 띤 단편을 수행평가로 제출 할 법한 청춘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했다. 청춘의 사랑은 망해야만 더욱 잘 읽혀지고 이뤄지지 못하는 것으로 더욱 비싸게 값을 치르게 되는 느낌이기에 소설을 써낸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적어둔 소설 속 인물이나 하나같이 쉽게 위로하거나 위로받지 못하는 생채기를 갖고 있다. 액자식 구성의 인물이 비슷한 감정을 갖고 비슷한 아픔을 띈 이유는 소설의 스포가 될 테니 그건 후반부에 직접 확인 해 보길.

​

주인공은 어딘가에 후련히 뱉어내지 못하던 슬픔을 글로 옮겨두었던 것. 이른바 대나무 숲을 거기에 꾸렸고, 그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잎새에게 원고를 내밀었던게 아닐지.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까. 그럼에도 비밀로 지켜두어야하는 이유는 분명하니까 합법적인 룰이라며 나에게서 떼어낸 제 3자에게 옮겨심어 마음을 쏟아낸 것. '나'일 수도 있긴 하나 진실로 '나'는 아닌 또 다른 '나'같은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소설 속 '나'같은 존재에게 마음이 가서 애썼다며 보듬어 주길 바라는 마음. '나'는 아니지만 '나'같은 인물이 그렇게라도 위로 받았음 싶은 오지랖 가득한 소설 말이다.


📖그거 알아? 인간은 말이야. 가장 가까운 존재의 희생을 가장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든.

이게 누구를 위한 희생과 평화인지는 주인공이 꺼내는 이야기보다 주인공의 소설속에 더 깊고 애잔하게 박혀있다. 정과 현, 그리고 진까지. 한데 뭉쳐지지 못하고 어딘가 벌어진 틈, 그래서 영영 합쳐지지 못할 듯한 조합. 겉으로 보기엔 문제될 것 없는 울타리 속 아이들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세상이 원하는 조합으로 뭉쳐지지 못할 청춘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진의 시선. 심증은 가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으며 명확하게 명시되지도 않았다. 정과 현, 그리고 진이 소설속에 그리 녹아들었듯 소설 밖의 찬희와 잎새, 그리고 주인공 또한 그렇다. 우린 그들의 이야기 속에 한발 떨어진 채로 상황을 주시하며 그들이 던져놓은 이야기들로 추측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이 흐릿한 추측과 관계에 서로가 괜한 짐작으로 더 아파하는게 아닐까 생각도 하며 추측이 사실인냥 받아들이는 인물이 갑갑하기도하고 먹먹하기도 했다.

​

K가 말한 4층에서 정을 닮아있는 여자를 봤던 것, 과 동기들에게서 찬희의 이름이 나왔던 것. 이야기의 흐름상 이게 자극적인 요소로서 충분했고 진위여부를 묻기보단 진이나 주인공이 멋대로 해석하며 그게 진실인냥 받아들이는 과정은 깊은 갈등을 바라는 못된 심보이기도 했다. 서로 덮어두기만 하는 것. 짐작만 하는 것. 진실을 알려하기보단 각자가 그리는 그림이 맞을거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로 서로를 주시하는 것. 사랑이 못된게 아니라 들어주려 하지 않았던 마음이 서로를 떨궈버리듯 낙하시킨 낙화같은 마음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한다.

독자는 액자식 구성 속 총 6인의 인물 중 누구를 가여워 해야하고 누구를 보듬어야 할까. 그리고 누구를 질타하며 누구의 마음이 잘못되었다 꾸짖어야 할까. 망한 사랑? 가여운 사랑? 위로받지 못할 사랑? 축복해 주진 못하더라도 미워는 말아야했다. 나 마저도 그 사랑에 날을 세워선 안되는 거였다. 그래야 그 사랑이 덜 불쌍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 이야기는 소설 속 망한 사랑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고, 귀하게 두 손으로 떠받들어지지 못한 떨궈진 사랑이라 하겠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르고스
이승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익숙한 단어들이 많았다. 김해, 물류센터, 외국인노동자, 가야 고분군. 내가 거주하는 지역의 명칭과 그 곳을 나타내는 단어들. 그 익숙함에 젖어들어 더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친근한 단어와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나보다. 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누운 배'의 경우는 조선업 종사자인 나의 시선을 붙들어 놓더니, 이번 31회 당선작 또한 실거주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책을 읽으면서도 문장속에 녹아있던 공간이 눈 앞에 그려져 더 빨리 몰입하게했고, 더 깊이 집중하게 만들었다.

​

경남 김해에 있는 물류센터와 고대 가야 고분군을 배경으로 현대와 과거를 한 공간에 배치시켜두었다. 그리고 잠을 잊고 살아야 돈이 되는 노동자와 잠을 자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의 자동화 시스템. 거기에 손발이 붙들린 노동자들. 결국 잠과 감정이 소실되고 사는 의미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면서 인간또한 스마트 물류센터의 시스템 일부가 되어버리는 과정을 목도하며 이게 옳은 것인지 매 문장마다 자문하게 만든다. 기업과 고용의 측면에서는 효율과 이윤 추구에 목적을 두는 것, 근로자의 측면에서는 자신을 자동화 시스템에 얹어두며 모든 작업과정과 업무시간이 수익으로 환산되는 당연한 노동의 원칙을 일러둔다. 근로자의 입장에선 더 많은 부를 필요로 한다면 잠을 줄여야했고 먹는 시간도 아깝게 여기며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아낌없이 내어드리겠다는 생각에만 몰두하고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국적에 구분을 두는 이유는 빨리 돈을 모아 자국으로 갈 생각뿐인 이들을 한발짝 떨어진 채로 삶의 패턴과 타국의 주거환경까지 주시하게 만든다.

예전엔 분명 기계화 시대라 했고, 어느 시점부터는 자동화 시대라 일컫었으며, 이제는 AI 시대라고 말하는 세상에 우리는 기계 아닌 사람으로서 존재하고있다. 언제까지 이 입지가 유지될지 알 수 없다. AI도 사람이 구현했다 한들 사람의 영역을 넘어난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 이놈들은 사람 없이도 입력값에 생명을 얻어 무한한 작업성을 영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이제 확신의 단계로 넘어 선 듯 하다.

​

김해라는 이 동네는 참 많은 단면성을 보유하고있다. 여전히 농업이 주된 생업인 구역도 있지만 산업단지도 신도시 주거단지 못지 않게 크게 이뤄져있다. 늦은밤 산업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흰 불빛을 뿜어내는 물류센터들. 그 초입엔 또아리 틀듯 돌고돌며 올라가는 트럭 행렬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쿠팡이든 컬리든 없는게 없다. 생업 물류뿐만 아니라 인근의 항만으로 연결된 곳으로 이동하는 컨테이너, 윙바디, 대형트럭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출근을 하고 있으면 노란 통근버스와 고속버스들이 끝차선에 쪼롬히 줄지어 '동네이름-쿠팡센터', '동네이름-컬리센터', '동네이름-산업단지'를 오가며 근로자를 싣어 나르는 사람들.(나는 자차 운전일 뿐 똑같이 산업단지로 출근을 하는 근로자이다) 하나같이 지친 낯빛과 축 늘어진 육신. 통근버스는 구역마다 모여있는 사람이 아니라 한데 모아둔 부품을 싣어 옮기는 듯 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주간근로라면 양반이지. 야간 근로는 수당도 세고 각각의 센터의 특성에 따라 온도나 무게, 부피에 따라 작업의 강도 또한 다르니 알바 어플이나 당근 어플의 고용 후기를 보면 유네스코로 지정된 가야 고분군을 덮어둔 푸르른 들판과 사뭇 다른 무색의 세상이 바로 길 건너에 자리잡고 있는 이질감을 저자 또한 느끼고 있었기에 이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지 않았을까를 가늠하게 한다.

​

여기에 도망치듯 오게 되었던 재일은, 강남에서 피부클리닉을 운영하다 실패 후 빚을 져서 여기 이곳, 김해로 숨어든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물류센터 야간 구급대원으로 취직. 거기서 마주한 낯설고도 취약한 주거와 근로 환경. 교대 없이 근무하는 노동자들. 잠과 휴식을 돈으로 맞바꾸며 스스로를 갉아먹어 벌이에 자신을 태워내는 행태. 의사인 재일은 인간이라면 자의로 긴 시간동안 유지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감염과 전파 과정을 쫓으며 인간으로서의 안쓰러움과 함께 이렇게 변해가는 인체의 과정을 기반한 혈청 개발 수익 증진에 눈을 돌린다. 육안으로도 구별이 가능한 감염상태와 신체의 변화를 보이는 물류센터 구역 근로자와 달리 같은 구역에 있으면서도 이들과 다른 패턴을 보이는 로봇 수리공 수아와 함께 공조와 대립을 겪으면서 AI 관제 시스템 아르고스를 멈추어야 근로자들이 살 수 있을거라는 목표를 가지고 AI를 이겨먹을 것인지, AI에 영원히 휘둘려 시스템 일부가 될 것인지에 대한 작업에 가담여부는 문장을 따라 밤낮 가리지 않고 작업할 그들을 따라 다니며 그들의 최종 선택을 가늠해본다.

​

📖아니, 좋아서 하는 것이었다. 몸이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뇌가 잠을 요구하지 않으니, 일이 즐거운 것이다. 일만 남은 인간. 일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간.

일 하는 것, 돈을 버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지 싶다. 그들은 전부 타국에서 왔기에 돈 벌이라는 뚜렷한 목적만 가지고 왔으니 다른 여가 활동이나 생계 이외의 수단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손에 쥐어지는 돈이 늘어나는 것을 보니 도파민 터지듯 더 빠른 목표치 도달에 정신이 팔려 다른 자극을 모두 무시한 결과로 보였다. 이는 아르고스의 영향과 함께 육신이 스스로 잠을 쫓았다고 해야 더 정확하리라 보여졌다. 생각해보면 외국인 노동자여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로서 빠른 부의 축적이 수반된다면 다 같이 눈꺼풀 없이 사는 사람처럼 잠을 잊고 살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했다. 우린 다 그렇게 성공과 목표 도달에 목이 마른 자들이니까.

​

📖잠을 못 자니까 꿈도 못 꾸잖아요. 꿈이 없으면 안에 있는 것들이 갈 곳이 없어요. 감정이든 기억이든 뭐든. 통로가 막혀버린 거예요.

잠과 꿈. 이는 낭만의 상징처럼 표현되기도 했고, 여유와 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계와 인간이 다른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둘 수 있는 항목. 한 템포 쉬어가는 의미인 잠. 그래서 내일을 위한 에너지 비축이자 일과를 마치고 하루가 끝나는 의미로 보여지는 잠과 꿈의 연계. 쉼 없이 돌아가는 AI와 기기들 사이에서 쉼표가 필요한 존재인 인간이 생산성 중심의 성과에서는 불필요한 요소를 가졌다는 핸디캡. 그럼에도 너는 자야겠니? 라는 압박이기도 한 잠과 꿈. 역시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 건 늘 약자의 몫이다.


📖AI가 스스로 학습한 것이다. 수면을 억제하면 노동 시간이 늘고, 물동량이 증가한다는 상관관계를 관찰하고, 강화하고, 자동화한 것이다. AI에게 의도는 없었다. 악의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그리고 그게 최대의 효율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결과 도출이 우선시되는 지표에서 노동자는 그저 이 작업을 수행하는 도구일뿐이라는 것인데 이 또한 인간이 구현해냈고, 인간이 최대치의 성과만을 기대하고 있기에 만들어진 구조였다. 사람이 없었다면 AI 구현 또한 없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래선 안된다고 볼멘소리를 하게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격차가 더 커질 결과물을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고 자동화에 손을 들게 될 것이다.

의도와 악의가 없는 그저 도출된 결과로 보여지는 성과. 그러하다보니 배제하고픈 항목이 되어지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인간인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제 인간은 모든 면에서 우위가 아니며, 사회 필요 충분의 요소 순위에서 하락하고 있음음 보인다.


효율성을 따지는 삶. 최대치의 목표값 달성이 최고의 실적이라 여기는 것. 인간답게 사는 것 이상으로 중요시 여기게되는 결과물. 어느 시점부터 당연하게 내재화된 자본주의의 괴물성이라 일컫지만 이래야만 도태되지 않으니 유난함이 아니라 익숙함으로 세상의 변화됨을 받아들이게된다.

퇴근이 없는 삶. 매 순간마다 목표치를 달성해야만 다음을 기약 할 수 있는 입지까지. 저자는 만성화된 자기 착취적 노동이라 말했다. 강요는 없었으나 세상이 그걸 바랬고, 으레 그리 살아야된다 여기게 만들었다. 이 또한 AI가 기대한 삶의 구조였을까? 인간은 안할 뿐 못하지 않는다는 성향을 기저에 깔아두고 있다보니 사람답게 사는 방식 빼곤 다 해내는 존재로 발전 해 온 듯 하다. 소위 말하는 의식주. 입고,먹고,자고. 사람답게 라는 말의 의미를 챙겨보자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우린 그걸 제일 못하는 사람이다. 어차피 내가 필요로 하다면 우리 서로 타협이라는 걸 하며 길게 보자는 거다. D구역 아르고스를 잠재웠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 처럼, 우리는 또 다른 구역으로 눈을 돌려 일자리를 찾고, 나를 필요로 하는 데를 기웃거리는 수아처럼 살아낼 것이다. 우린 죽을 때 까지 일할 생각이니 먼 곳을 주시하며 서로를 살펴주길 바라게된다. 기계 너도 그렇고 인간 나도 그렇고 우리 그렇게 각자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지내보자며 어르고 달래고싶어진다.

​

📖한겨레 출판을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윗집 부부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파민은 없더라도 무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꾸리는 황보름 저자의 책이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즐겁게 읽었던 독자라면 분명 '윗집 부부'또한 훌렁훌렁 잘 넘어갈 페이지로 이야기를 담아두었다. 대신 추리나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거나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갈등과 서사를 찾아내며 이야기를 가늠하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심심하거나 맹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추리, 미스터리 소설에 푸욱 빠져있다가 머리 쥐어짜며 읽지 않아도 되는 담백함을 찾던 나로서는 맛있게 읽어 삼킨 이야기들이었다.

​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야기 이지만 인물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볼법한 사람들로 꾸려져있어 정말 윗집 부부 같고 아랫집 아저씨 아줌마 같았다. 때로는 나의 아버지가 오경직을 닮아있는 듯 보였고, 봄&가을 부부가 우리부부는 아닐까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정말 생활 밀착형 소설로 내 세상을 옮겨 놓은 듯 해서 더욱 공감하게 만들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 옛말은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한 어르신의 편견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마을 안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한 세상을 꾸리기 위해 온 마을과 이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나만 힘든게 아니었고, 나만 유난스러운게 아니었음을 서로 알아주며 맞춰가는 방식. 그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세계가 분명 존재했음을. 그래서 그 세상이 잘 돌아가기 위해 우린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며 살아가는 방식을 매번 깨우쳐야함을 보여주는 글이니 책 바깥의 세상을 사는 독자들이여 우리 그렇게 서로 이해라는걸 해 봅시다를 다정하게 알려줬다.


📖턱걸이와 철봉 매달리기 모두 결국엔 추락이란 결과를 맞는 일이었다. 봄은 구조조정 대상자가 됐을 때 자신은 철봉에 매달리자마자 몇 초 버티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전부터 다리와 겨드랑이까지 걸고 버티다 떨어진 것이라고. 그렇게 살고 있던 것이라고.

청소년 시절의 나는 무조건 정규직으로 드라마에서 볼 법한 출근룩에 팔짱끼고 사선으로 서서 찍은 프로필사진이 들어간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일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러한 사람보다 더 많은 수고로움을 겪어내는 사람들이 꾸린 사회였다. 계약만료와 재계약, 기존 직무 연장과 정규직 전환. 매 분기마다 파리목숨이라 봐야할지 하루살이같은 삶이라 여겨야 하나 싶은 세상도 있었으나 몰랐을 뿐이었다. 봄 또한 그랬고, 가을 또한 그런 삶을 살아내는 일반인이었다. 그들은 이게 턱걸이의 삶이라 말했다. 매번 끝자락에 어딘가에 소속은 될 지라도, 떨어져 나갈 때에는 일등이 되어버리는 순위 역행자. 그러니 자신의 삶의 행운 여부까지 운운하게 만든다. 옛날엔 평생 직장도 있었다지? 그런데 그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 사람도 힘들었을꺼라며, 우리 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고단했을거라고 생각을 달리하게 만드는 말들. 무조건적인 위로 보단, 봄의 세상만 유독 힘든게 아닐거라며 동경하는 세상도 결국 사람 사는 동네 이야기라며 자기만의 동굴을 파고들지 않길 바라는 가을의 말에 나도 힘을 얻게 했다.

난 사람보단 든 사람이 더 귀하다는 말. 그동안 더 열심히 하지 않고 뭐했냐는 채근보다 이러한 공감이 힘이 되는 순간도 있다.

​

📖삶은 거창한 대의나 신념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작은 필요에도 삶은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손이 필요할 때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선지는 정말 모를까.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분명 잘 알고 있을 선지가 말했다.

가족이라고, 부모와 자식 관계라고 모든걸 터 놓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정이 딸과 아들에게 소소한 것을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딸도 아닌 어린 잎새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의 카테고리가 따로 있다. 당신의 삶이 그러했다고 당신의 자식 또한 그러길 바라며 아들에게 둘째 출산을 종용하거나 딸에게 결혼은 무조건적인 삶의 관례라고 하지만 그 시대의 의무가 지금의 시대엔 선택이 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자식에겐 허용이 안 되지만 한 발짝 떨어져보니 대해가 자신의 아버지와 겪는 갈등 봄&가을 부부가 생각하는 미래가 유난이 아닐수도 있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경직은 벽보고 말하듯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외골수까지는 아니라서 말이다. 여전히 이해 안된다는 생각은 존재하지만 받아들여야 할 수 밖에 없음을 인지는하고 있으시니 감사하게 느껴졌다.(끼인 세대라 할 수 있는 내 또래는 알꺼다. 내 윗세대를 이해시키는 것과 내 아랫세대들 공감해야 살 수 있는데 매번 반복 주입식 설명을 해도 도돌이표인 경우가 허다하거든)


📖봄은 항구가 퉁명스럽게 해주는 말들이 좋았다.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이전 세대의 아버지들이 딸에게 해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꾸중을 듣는 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항구의 말은 봄의 생각과 맞닿는 부분이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듣고 나면 마음에 새기고 싶곤 했다. 항구와 얘기할 때면 경험에 밀착된 말이 지닌 힘을 느꼈다. 허황되거나 공허하지 않아서, 현실적이어서 좋았다. 사장님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우리가 어르신들을 공경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들이 살아온 세월의 배움은 우리가 겪어내지 못한 생생한 현장의 습득이기에 더욱 귀하고 값지다. 항구는 손아래 사람이라고 무조건 훈계하는 식의 대화가 아니었다. 한참을 주시하고 있다가 필요 할 때 툭툭. 일단 기다려줬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을테니 바라보다가 헤매고 있을 지점에 왔을 때 툭툭, 다음 방향을 갈 수 있도록 그 앞에 표지판을 심어주었다. 무조건 당신의 말에 따라 오라 손목 쥐고 당기는 방식이 아니었다. 가는 길을 알려주었고, 가는 건 또 스스로 해보라고 바라만 봐 주는 것. 그게 경직과 다른 항구만의 방식이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던가. 한 발 두 발 걸음마를 시작 할 때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든 비틀거리다 손바닥을 잘못 짚어 쓸리든 일단 내 딛는 것 부터 해봐야 했고 그 다음 손도 잡아줬고, 저 멀리서 이 쪽으로 오라고 박수 치며 방향을 일러주기까지. 어른들이 가르쳐 주는 것들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봄은 귀한 경험치를 옆집 사장님이자 건물주, 부동산 계약 소장님인 항구에게 귀동냥하게된다.

​

📖'세상에 굽지 않은 사람이 없어.' 굴곡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 같아 위안이 되었다. 자신을 굽은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도움될 것 같았다. 굽은 나무더러 왜 굽었냐고 묻지 않아도 되듯, 자신에게도 왜 어리석은 망므을 지니게 되었냐고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바람이 얼음처럼 찼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리석은 마음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인간적인 마음이라 고쳐 알려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안정을 원하니 그건 당연한 방식이라고. 선지나 가을이 앓는 것은 이른바 마음의 감기였다. 누구나 앓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 대호도 직장을 잃고 육아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왔을 수도 있고, 봄이 계약 연장과 식당 운영, 식당 운영하며 임산부로서 모든걸 담당해야하는 부담감에 슬쩍 몸에 들러붙었다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대해가 아버지와 진로를 두고 갈등하는 과정에서 점점 몸집을 불렸을 수도 있고, 항구도 다시 혼자가 되고 반복되고 특별할 것 없는 세상에 가라앉듯 모든걸 덮어버렸던 때가 있었을 거다. 왔다가 나도 모르게 가버릴 수도 있고, 좀 더 눌러 앉았다가 갈 수도 있는 것. 그래도 언젠가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괜찮아질거라는 건 분명하니 그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에 몸을 맡겨보는 것. 그리고 이해해주고 이해받는 과정 별거 아닌 거 같아도 고마워진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세상이 쉽고 만만하다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애쓰고 살았다. 시간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고, 다 안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배워야했고, 노력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나만 그런거 아니다. 다들 그리 산다. 그런 얘기였다.

어느 하나 애틋하지 않은 인물이 없다. 경직과 화정은 나의 부모. 대호와 주은은 나의 형제들 같았고, 선지는 내 친구들 같았다. 대해는 여전히 진로와 미래에 고민하는 사무실 동생들의 얼굴과 겹쳤다. 봄과 가을 부부는 우리부부 이야기와 결이 비슷해보였다. 다들 그리 살고 그리 고민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이해와 연대의 과정이 더 고맙게 느껴졌다. 안해주면 그만인 감정의 교류인데 세상이 변하는 것에 받아들이고 모두 나와 같지 않음을 인지하는 점과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내는 존재임을 다양한 연령과 직군, 성별에 따라 얽힌 관계로 또 한번 실감을 하게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던 이전 시대에 비해 이제는 한 어른을 보살피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했고, 결국 한 세상을 꾸리기 위해 서로가 존재함을 인식하는 삶의 긍적적인 예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머리통 큰 어른부터 한창 세상을 배우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연령이 읽으며 다양한 울림의 교류도 재밌을 삼삼하고 담백한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