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리커버)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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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혼모노', 그리고 짦은 숨으로 읽어낸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의 시간. 저자의 세상은 결국 사람으로 결부된다. 사람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는 걸 아는거지.위픽의 장점은 딱 집중하기 좋은 구간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각각의 인물들이 그간 살아온 패턴이라던가 성향, 사건이 벌어진 후 변화될 심상은 독자에게 맡겨놓았기에 얇은 책 + 긴 여운 + 각자의 각색 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쇼츠와 릴스로 중독 되어있는 사람과 카페가서 커피마시며 너는 영상 보고 놀아라, 나는 위픽 읽을란다! 로 각자 플레이가 가능한 시간이기도 하다.

대학생. 건축과 4학년. 교수의 과제. 나와 다른 성향 동기와 협업. 타지에서의 시간. 과제로 주어진 고택, 고택 거주자의 히스토리 이해.

나와 닮아있는 성향의 재서, 나와 다른 성향이 부러우면서 질투가 나고 궁금하기도 한 이본의 시선들. 이러한 감정들이 딱 이 나이 때에 이뤄지는 것임을 느낀다. 이 시절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나 역시도 나를 잘 모르지만,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궁금한 시기이니까.

세상에 뒤쳐진듯한 문교수의 수업 방식은 나와 맞지 않다 생각하지만 그대로 따를 수 밖에 없고, 서머스쿨에 선정되는 것도 의아한 점들이지만 다른 이들처럼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게 재서다운 삶의 방식이다. 매사 조심스럽고 확인을 해야하고, 그러다보니 스스로가 긴장을 안고 사는 인물. 남들에겐 우등생이겠지만 자신에게는 자기검열과 확신을 요구하는 피곤한 인간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에 반하는 인물 이본. 2학년 1학기 응용수학과에서 건축학과로 전과. 과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는데 건축과에서 타과 이동은 심심찮지만 이본처럼 역행하는 인물은 또 없었으니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2년 동안 공부한 자신보다 시선이 잽싸고 날카로운 상대라 궁금증이 차고 넘치지만 선뜻 손내미는게 어려운 재서. 비슷한 듯 다르게 놓여있는 인물이 하나의 주제를 두고 다르게 보는 관점은 이야기가 시작 될 즈음 부터 나란히 놓여지고 있다.

스캐치업을 하는 과정에서 수작업과 캐드와 3D 프로그램의 대립. 이는 속도전의 차이로도 보여진다. 어딘가 모르게 준비 과정부터 복잡할 수 있는 답답함을 가진 재서와 빠르고 명확한 이본의 차이. 마주한 관점은 그대로 고택으로 시선이 옮겨진다. 고택의 보수와 재건의 차이. 구조적과 비효율과 안전상의 문제를 제시하며 재건을 이야기하지만, 처음 이 작업이 주어 질 때 클라이언트 요구사항과 복원과 보존에 중점을 두라는 교수의 권고를 무시 할 수 없는 재서에겐 현실은 맞지만 실정은 그러지 못하는 심상의 대립도 함께 보여준다.

'짓다'는 의미에 우린 여러가지를 덧붙일 수 있다. 대표적인 동사의 개념으로 재료를 들여 지어낼 수 있겠지만, 작고한 정연씨의 부친이 만든 공간을 '깁다'의 방언적 의미인 짓다로 의미를 추가하여 떨어지거나 해어진 곳을 꿰매는 식으로 해석 할 수도 있겠다. 후자가 문 교수가 두 학생에게 바라는 짓다의 속뜻이라 생각을 해봤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 오기가 애정의 동의어 같기도 하더라. 나 뭐든 빨리 질려하거든.

지레 짐작이 아니라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신과 상대에 대한 다름의 이해.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화도 나는데 그래도 될때까지 해보면 언젠가 뭐라도 되어 있는게 좋은 이와 아직까지 근본적인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이마저도 주저하게되는 이의 시선.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어야 비로소 천 년이 흐른다는데 둘이 마주한 탑은 그보다 더 긴 세월을 버텨주었으니 흔들리기도 하고 기울어지는 것의 당연함과 대견함을 이야기하는 해설사님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묵직하게 한 곳에 박혀있는 석축도 갖은 시련이 오기 마련인데 사람이라고 그러한 휘둘림이 없겠냐는 숨겨진 말을 찾아내며 건물을 짓는 일 만큼이나 한 사람의 세상을 지어내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공이 들었는지 감히 가늠해보게된다.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비로소 그 공수에 대한 노고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겠지.(하루아침에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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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도시락 편지 - 매일 혼자 점심 먹는 왕따 딸을 살린 기적의 편지
크리스 얀들 지음, 최지영 옮김 / 이야기장수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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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꽃무늬의 책표지. 그리고 아빠, 도시락, 편지. 자식들이라면 울컥하는 포인트를 다 갖춘 제목. 스르륵 책을 넘겨보려다 프롤로그의 '매일 아침 눈뜨는 것이 왈칵 두려워지는 날에'라는 문장에 나는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외부의 공격에 무디고 덤덤하게 살고자 마음을 먹더라도 처음 겪게되는 감정은 매번 어렵고 받아들이기 두려워진다. 저자의 딸도 오죽했을까 하는 마음을 얹어보며 어린시절의 나를 회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책이 다르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혼자 점심을 먹어야 했던 열 살 소녀. 도시락 가방 안에는 다정하고 익숙한 손글씨의 메모가 들어있다. 아빠의 메세지. 평소와 다른 딸이 걱정되어 꼬치꼬치 케 묻지 않는다. 아빠는 여전히 여기 서 있겠다는 듯의 든든한 문장들이 종이에 서려있다.

잘잘못을 따질 요량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짧은 문장 몇줄로 하루를 다독이고 남은 시간을 어찌 지낼지 생각하게 만든다. 사춘기의 딸의 세상을 존중하며 먼저 문을 열고 나올 여지를 준다. 훈계의 느낌이 아니라 마음이 덜 주눅들었다. 한없이 작고 쪼그라들었을 딸 옆에 내려다 보는게 아니라 같이 쪼그려 앉아 '아빠는 - 그랬었어.'라는 듯 당신의 어린시절의 마음을 옆에 툭 놓아준다. 그래서 고마웠다. 유효기한이 없는 내 편 같아서.

📖DAY27_ 누군가가 날 싫어한다고 내 탓을 해선 안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누군가가 날 싫어한다면, 그건 '그들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것이 부럽긴하다. 헌데, 살면서 소수의 미움도 안 받는 삶이 부러워 지기도 하더라. 사람이 하나 둘 모이면 마음이 맞는 집단이 생기고 그 무리가 많아지면 서로를 배척하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만만한 미움의 대상이 추려지기도하고, 질투가 뭉쳐져 칼을 숨긴 입 속 가시들이 사람을 찌르고 할퀴기도 한다. 타인의 말과 시선이다. 이건 인격이 완벽히 채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의 상황에서 그치지 않고, 다큰 어른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삐딱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매번 자신의 입장에서 답을 찾는다. 모든 결론이 '나 때문에'로 결부되며 존재 가치의 부정까지 이르게된다. 그건 아마 애디는 물론이며 저자도 똑같이 겪어봤을 것이다. 독자인 나도 그러했으니까.

애디의 맛있는 점심 위에 놓여진 이 문장이 진짜 답이었다. '모든 사람이 널 좋아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 탓이 나라는 것에 마침표를 찍지 않길 바랬다. 왈가왈부한건 그들이니까. 그들이 도출 해낸 답인거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답은 아님을 먼저 살아낸 사람의 생생한 후기같아 믿고싶어졌다.


📖DAY43_ 우리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그건 그냥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뒤집어보면, 타코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 타코였다면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이 가는가? 갑자기 배고파지네.

먹는 행복 만큼 관계로 얻어기는 기쁨이 애디에게도 생기기를.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 타코를 먹는 순간 얻어지는 행복 만큼이나 발치에 채이는 모든 순간이 행복일 수도 있다는 삶의 가정법을 기억하길 바라고 있었다. 별 거아닌 것에도 분명 행복은 존재하고, 우린 그 행복으로 슬픔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려줬다. 아마 애디는 화요일의 타코 만큼이나 목요일의 타코론도 존재하다고 믿게 되겠지.


📖DAY47_ 나에게 상처를 준 말들도 있었지만, 또 나에게 도움이 된 말들도 있었다. 내 말로 누군가를 다치게도 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생각이 담기지 않은 공허한 말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는 언제나 어떤 생각이 담겨 있다.

말에는 '힘'이 실린다 했고, 그 힘은 '진심'을 동반한다고 알려줬다. 여기에는 어떤 위트의 문장을 이어 붙이지도 않았다. 애디에게 의미를 전달 할 때엔 명확한 팩트만을 전달하고 싶은 짧고 굵은 한 방이라 여겨졌다. 사람들의 시선과 입술 끝에 달려있던 가벼운 말들로 상처를 받았기에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에 연연하게되고 마음 쓰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겪어냈던 아빠와 딸이었다. 네가 상처 받은 만큼, 너의 말로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음을 늘 인지하고, 반대로 너의 말로 힘을 얻기도 할 수 있는 양면성을 잊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받은 대로 되갚으라는 말이 아니다. 겪어 낸 만큼 그 아픔을 알기에 똑같은 사람이 되진 말자고 이 편지를 쓰는 저자가 스스로 되뇌이고, 딸에게도 건네게 되는 삶의 방식이었다.


📖DAY78_ 그 거짓말이 가치가 있을까? 겨우 몇 초, 당신을 곤경에서 구해줄 뿐인 그 거짓말이 정말 가치가 있는 걸까?

거짓말은 결국 언제고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언제나.

청렴결백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나 어릴 때엔 더더욱.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얄미운 친구를 골탕먹이기 위해, 속한 집단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주목받기 위해 뱉어낸 순간의 달콤한 처세술. 다들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 거짓말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진득하게 밀어 붙일 진심이 될 수 없다는 것. 에둘러 표현하던 마음의 전달 중 저자는 이러한 당연한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선 확실하게 언급하며 꼭 지켜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DAY97_ 영원히 함께할 친구들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높이 치솟으며 왔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들은 때때로 오갈 것이고, 나도 다시 연락하며 지내게 되겠지만, 결국 또다시 사라질 것이다.

대학 동기였으나 무리를 지어가며 친하게 지내진 않았던 친구와 오랫만에 연락을 하게 될 즈음 그녀가 건넨 말이 있었다. '시절 인연' 이라는 걸로 우리는 멀어지기도 했고, 다시 가까워지기도 하는거 아니겠냐며 현재 비슷한 처지의 우리를 이야기 했었다. 모든 것에는 영원이라는 게 없고, 또 그게 당연한 것이 인생이지 않겠냐는 불교 용어였다. 그러니 이 관계를 욕심내어 붙들여 메어두지 않길 바라며, 자신을 스쳐가는 수많은 인연들을 욕심내며 움켜쥐려고도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보였다. 그 말을 타국의 저자가 딸에게 적어둔 편지로 보니 새로웠다. 인연을 바다의 파도로 비유 한 것 또한 이해하기 쉽고 눈 앞에 그려질 만한 문장이라 구구절절 설명해 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딸보다 곱절의 세월을 살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살아냈을 것이고, 또 뜻하지 않은 인간관계에서 고생하는 날도 숱하게 있었을 것이다. 이직에 관해 살짝 언급 한 걸 보면 이러한 관계의 고민은 나이가 들어도 사그러들지 않는 난제라는 것이겠지. 호호할머니가 되더라도 너는 그 일들로 마음을 쓰게 될 테니 지금부터 골머리 앓진 말자, 아빠도 아직 그 문제에 대한 답을 푸는 중이잖아? 라는 듯 제출 기한이 없는 문제에 조급해하지 말자는 사담이 숨겨져있는 듯 했다.


📖DAY104_ 지금은 내가 널 잠시 맘에 안 들어할지 몰라도, 나는 늘 네 곁에 있을 거고, 언제나 널 사랑할 거야.

비빌언덕 이라는 말이 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인데 의지할 곳이 있어야 시작하고 이룰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는 애디에게 이렇게 적어두었다. '네가 날 증오하고, 싫어하고, 소리를 질러도 난 늘 네 곁에 있을 거야. 언제나.'라는 짧은 메모. 헌데 나이들어 보면 세상 힘이 되는 편지라는 점이다. 10대 시절엔 가족, 부모가 당연히 내 곁에 머무르고 나의 미운짓 고운짓 다 받아내주는 사람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하지만 애디가 저자의 나이 즈음에 다다르면 절대 당연하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여건상 떨어져 지낼 수도 있을 것이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랑하는 떠나 보낸 후 곁에 없어 그리워 할 수도 있다는 걸 늘 염두해 두고 살아야 하는 시절이 온다. 그래서 '늘'과 '언제나'라는 단어에 마음이 기운다.

꼰대 같아도, 얄미워도 매 순간마다 찾게되는 존재라는 것의 든든함. 당연하다 여기지만 당연할 수 없는 관계에 애틋해짐을 느낀다.

📖DAY123_ 당장은 그 사람들을 다시는 안 볼 것 같고, 다시는 함꼐 일하지도 않을 것 같지만, 세상은 넓은 만큼 좁기도 하다. 내 이득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해도 괜찮은가? 당장은 기분좋을지 몰라도 결국엔 그 일로 스스로 상처 입게 될 것이다.

사람이 어려웠다. 금새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금새 저 만치 멀어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붙들여 메어두고 싶어도 안 되는 마음들이다. 저자는 딸에게 그러한 관계의 찰나를 등반하며 마주치는 사람들로 비유했다. 그 잠깐이겠지만 다정하길. 그래서 다시 또 만난다면 반가워하며 또 다정함을 얹어주길. 사람의 인연은 알다가도 모를 접점들이 즐비하니 먼저 건냈던 해사한 잔상으로 오래도록 밝고 선함을 얻어내길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어린시절 아빠에게 도시락 위에 얹어진 편지나 메모를 받아 본 적이 있던가를 생각해봤다. 일단 초등학교 때 부터 급식을 했고, 아빠는 늘 바빴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여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말과 살가운 기운은 없더라도 존재가 주는 든든함은 있었다. 그럼 사람의 바운더리를 넘어가게되는 시점, 결혼 할 때 장문의 편지를 받았던게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폐백이라는 관례. 신랑신부가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에게 큰절 올리면 받는 절값 봉투에 부모님 두분은 각자의 이야기를 빼곡하게 적어두셨다. 집에 있던 노트를 찢어 스프링 부분을 가위로 자른 흔적. 꾹꾹 눌러 쓴 단어들. 어딘가 엉성한 맞춤법. '장하다, 애썼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당신들의 입이 아닌 손 끝에서 느껴보는 온도는 남달랐다. 그렇게 받아둔 편지는 10년이 넘은 지금도 소중한 물건 중 하나가 되었고, 두고두고 꺼내 봐도 눈물 찍어내는 눈물 버튼이 되어버렸다.

말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게 되지만 손으로 눌러 쓴 메모들은 흔적이 되고 손에 쥘 수 있는 힘이 된다. 저자의 딸이 차곡차곡 모아두었을 믿을 구석에 대해 생각한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펼쳐 볼 만한 문장들이 수두룩 하다는 것. 답이 보이 지 않을 때, 그리고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곁에 없을 때에 힘이 되어 줄 응원의 조각이 많다는 것 만으로도 득 본 삶이라는 걸 깨닿게 되겠지. 부럽다 애디!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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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용궁장의 고백
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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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자가 에세이만 잘 쓸 거라 생각했는데, 2년 만에 장르를 달리하여 서늘한 이야기를 건네준다. 문장들은 늘어짐이 없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허상을 꾸리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숨 쉴 법한 인물과 케이블 채널이나 유튜버들이 일련의 사건들을 르포처럼 기획하고 보도할 각을 재고있는걸 가로채 쓴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살아있다. 모든 인물들이 밋밋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만든다. 날 선 눈빛을 숨기고 각자가 원하는 바로 무탈히 모든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운이 용궁장 주변으로 낮게 드리워져있다. 선한 말만 뱉어내는 입꼬리 끝엔 무엇이 달려있는지 알 수가 없다. 각자가 기대하는 것들이 다르지만 결국 용궁장이 눈앞에 사라져야만 다음으로 넘어 갈 수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

책소개를 보면 이 이야기는 '가족미스터리 소설'이라 알려두고있다. '천륜'과 '인륜'이 지옥이 되는 순간과 그 지옥에 대항하는 평범한 사람들. 끊어내지 못하는 관계. 각자가 짊어진 지옥의 갈래를 보여주고있다. 그곳이 지옥탕이라 해도 무관할 용궁장을 앞에 두고 개인 인터뷰를 딴 듯한 'OOO의 고백'으로 이뤄진 5부작의 단편. 고백인지 회개인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내며 대나무 밭에서 울화를 뱉어내는 복두장이의 마음과도 같은 후련함이 깔려있다. 적어도 이렇게 고백한 이들이라면 오늘 밤 잠은 푸욱 잘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 해 본다. 발 좀 뻣고 한숨 푸욱 자고, 다음날 담 걸리는 일 없이 팔에 쥐나는 일도 없이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 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을 보태본다.


📖피해자의 고백_툭. 가슴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연결되고 싶었던 나의 미련이었다.

가족이라는게 모두 다복하고 아끼는 집단은 아니다. 가까우니까 더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고, 그걸 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깎아내리고 뜯어발기는 육신과 정신의 생채기는 폭력의 범주를 꽉 채우고도 남는 인간의 낯짝들을 마주하게된다. 그럼에도 가족이니까, 엄마니까로 선을 그어버린다. 내 가족이니 품으려 마음먹고 노쇠한 육신을 거두고자 생각을 고쳐먹지만 가시를 품고 무엇 하나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이를 눈 앞에 둘 때 우리는 포기라는 단어를 온 몸으로 얻어내게된다. 포기와 미련이 얽혀있던 마지막 실타래가 늘어지다못해 끊긴 소리였다.

타인은 학대라 했다. 하지만 천륜이었다. 그래서 잡고 있었다. 최소한의 사람의 도리를 아는 이 였으니까. 한 쪽에서만 퍼다주는 관계는 결국 독이 구멍이 나고 깨져도 염치를 모르고 닥달하게된다. 사람? 고쳐쓰는 것 아니랬다. 그건 손 위든 손 아래든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다. 결국 그냥 사람 자체의 문제였다.


📖가해자의 고백_"자식 된 도리? 이제 와서?"

역시나 한 쪽의 말만 들어서는 안된다. 중립 기어 박고 양쪽의 입장을 다 들어봐야 알 수 있다. 이야기 초입부터 얘만 해맑다. 그리고 얘만 특혜를 얻는걸 당연하게 여긴다. 그 때부터 이상했다. 모든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기본으로 삼는 놈이라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하게 이뤄지는 것이 없는데 제 핏줄이라 무조건 품어두고 지원하며 조력자의 역할을 해 주길 바라고 있다. 모르는게 약이 아니라 몰라서 바보되가 되어가는 꼴을 보여주었다. 학문에 대한 시야가 넓다고 난 사람이 아니다. 고마워 할 줄 알고 미안함이라는 걸 기저에 깔고 살아내어야 했는데 이걸 가르치지 않은 아버지를 탓해야 할까, 알려고 하지 않고 자란 막내를 탓해야 할까. 피장파장이다만 노인은 죽어서도 제대로 깨우치며 생을 마감하지 못했을 것이고, 막내는 살아온 세월 동안 모르고 산 시절을 다시 되감아서라도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외국 물 먹으면 뭐하겠어 헛 공부한 인생 수업 다시 재수강이 절실해 보인다.


📖설계자의 고백_사람이 죽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해졌다. 나는 이 부조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영원히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용궁장이 염라대왕 문턱 언저리쯤이 되는걸까. 하나같이 다들 죽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고약함을 뿜어냈고, 그 덕에 용궁장으로 들어온 듯 하다. 어떤 이의 생이 마감된 것을 사력을 다해 기뻐하는 사람들. 날뛰듯 신나서 춤을 추진 않지만(남겨진 이들은 일말의 양심이라는 걸 소유한 자들이라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져있다) 서류상으로서의 모든 절차 이후 후련해질 자신의 삶을 기대하며 빠른 절차를 이어간다.

인과연이 달랐다. 그러니 그간의 시간을 통해 사람의 감정이 변질되었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를 보여주고있다. 도리와 인륜이 닿아있는 관계에서 그 근처도 닿지 못한 마음들이 이제사 숨통을 틔는 시작점이 되었다. 용궁장은 누군가의 생의 끝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의 시작인 것이다.


📖조력자의 고백_ 계획이 머릿속에 있을 때는 죄책감과 망설임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화마에 잡아먹힌 용궁장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기회가 내게 주어졌음을 알았다.

나 부터 살고 봐야했다. 이건 욕심을 이겨먹은 생존의 욕구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기반이 된 욕심, 복수, 희열로 켜켜이 쌓아올린 생존 욕망이다. 이 상황까지 오도록 설계했고 실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의 딸에게 자신도 거룩교회의 신자가 되려하고 하나님은 이런 나를 용서해 줄지를 묻는다. 고해성사를 하는 상대가 장로의 딸이라는 점. 이 상황을 이미 알지만 용서 해주실까요를 되묻는 걸 보면 너도 하느님이 용서한 딸인데 나라고 못하겠느냐는 식의 공범이자 가담자로서 엮으려는 뉘앙스을 안겨온다. 악함의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어떤 것도 마냥 선함과 베푸는 마음으로 채워진 집단은 없었던걸로 꾸려져있다. 거룩교회라고, 용궁장 같은 검은 마음이 없는 집단이라 단언 할 수 없는 것 처럼.

주님께 거두어진 것이라는 말이, 결국 거룩교회의 장로 집단으로 소속됨으로서 이 지역, 이 집단의 최상위 계층에 앉아버렸다는 걸 표현했다.

자신의 불운을 태워버리고, 타인의 불운을 먹이삼아 세력을 키우는 것. 보고 자란 관계의 악이 결국 악을 키워낸 것이지 모.



당연한 희생도 없고, 당연한 불행도 없다. 하지만 꾸준하게 이어지는 강요와 독선은 사람을 주눅들게 했고, 자기연민마저 소멸시켰다. 으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라 여기며 희생이라는 단어의 정의로 명명하지도 않았다. 자신은 모른다. 그렇게 커왔고 그렇게 살아야되는 줄만 알다가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아는 순간 쌓여있던 감정은 폭발의 상태로 터져나온다. 그간 참아왔는데 왜 더 못 참을까 싶지? 숨이 턱턱 막히고, 온 몸이 쪼그라 들 것 같은데 살아야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인 것이다. 가족이라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로 사람을 죄어낸 결과였다. 읽는 나도 목 끝까지 육두문자가 부글거리고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이러한 삶을 진실로 버텨냈을 인물을 생각하면 용궁장이 그들의 성능좋은 대나무밭이지 않았을까. 복두장이의 답답함을 해결 하듯 묵혀있어서 내 것인줄 알고 살던 울화를 토해 낼 수 있는 장소의 마련이라 씁쓸함보단 후련함이 크다. 눈물 안나오는 장례식장이라는 말을 이제 완벽히 이해 할 수 있게되었다.

죽기 직전까지 피말리게 사람을 쥐어 짜는 이를 가해자라 봐야할까, 그간 해온 악행에 맞는 결론을 짓도록 방임의 끝이 생의 끝으로 이어지도록 놓아만 두는게 가해자일까. 모든 것이 귀하다는데, 그 귀함을 모르고 하대를 일삼았기에 나는 전자를 가해자로 보고싶다. 후자는 잠정적 가해자가 될 수 있으나 그러한 상황에 이르게 만든 것의 원흉 또한 결국 전자로 인해 빚어진 것. 콩 심은 데에 콩 나고, 팥 심은 데에 팥 난다고 하잖아. 악을 뿌려 놓은 곳에 악이 자란 상황이니 결국 제가 뿌린 씨를 제가 거둬들이고 그 업을 받아들이는 걸이라 용궁장에서 타들어간 이는 어느 누구를 탓해선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고 싶다.

나의 희생이 당연하지 않으며, 당신의 희생 또한 당연한 것은 없다는 걸 확실히 못 박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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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이젠 5월의 첫날 출간될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게되는 앤솔러지.

2023년만 해도 9월 1일에 출간되었지만, 이후부터는 진짜 근로자들이 작정하고 쉴 수 있도록 판 깔아 놓은 그날, 근로자의 날에 맞춰 출간이 되고 있다. 나도 이구역 고인물에 닳고 닳아 약아빠진 대감님집 노비라 근로자의 날 휴무에 맞춰 이 때 읽어줘야 맛이 더 산다는 듯 아주 잘근잘근 씹어먹는 이야기들 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매년 알아서 구입해 읽고있는 아주 착실한 독자라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아도 손 안 닿는 등짝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기분이 들어서 보게된다.

먹고 사니즘, 드러워도 어쩌겠어. 나를 고용해준 고용주님이 계신 곳이니 아침 댓바람부터, 아니 어제 자기 전부터 내일 출근 하기 싫다는 건 기본옵션이요 가다가 차 사고라도 나면, 갑자기 회사 서버가 먹통되면, 회사에 불이라도 나면이라는 오만 가설을 다 세우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기대와 달리 너무 무탈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정신줄 잡고 살지, 나만 이딴 진흙탕에서 짱뚱어마냥 파닥거리며 죽을동 살동 하는건 아닌지 묻고 싶을 즈음 읽게되니 타이밍이 기깔나다는 말 말고는 다른 표현법이 없다. 오늘의 나는 뻘짓하고 있는게 아니라 살아내고 있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순간임을 마주하게된다. 역시 거울치료가 답이다. 남이 잘 되는 꼴보다 남이 나랑 똑같은 걸 당하고 사는 꼴을 보는게 더 편하달까.(내가 생각해도 놀부심보가 따로 없군)

이번엔 특수성을 띠고 있는 직업군들의 이야기였다. 기자, 예능 PD, 방송과 교육 현장 경험을 토대로 꾸려진 이야기들. 그리고 공모를 통해 선발된 작품까지. 헌데 내가 겪어낸 이야기들이 눈에 밟혀 이 바닥은 1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구나로 종결 짓게 만들었다. 과거 일이 스믈스믈 떠오르는 것이 아주 단단히 얹힌 기분으로 이야길 마주하게 했다. 웨딩 헬퍼, 현직자와 퇴사자, 승진 심사. 올해도 딴 사람 이야기처럼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공감하긴 글렀다. 겪어낸 얘기들이 책 속에 박혀 있어서 과거를 떠올리기 충분했고, 사람이 바뀌고 장소가 바뀐들 이노무 집구석(회사 구석이라 해야하나?) 바뀔 생각이 없는 집단임을 확실하게 직시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의 투어_ 적은 그토록 분명한데 왜 나는 이들에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게 되는 걸까......

위치가 애마하면 방패막이 해 줄 윗선도 없고(있다 한들 오너 일가가 대부분), 총알받이 노릇을 톡톡히 하게되는 위치. 위아래, 앞뒤 골고루 욕먹는 욕받이의 실정이 딱 이 자리가 아닐까 싶다. 사측을 대표하는 실무자 이다보니 거래처에서는 미안하지만으로 시작하는 각종 요구사항. 내가 해 주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나도 까보면 똑같은 실정임에도 나는 그들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사측 대표와 거래처 간의 확성기 노릇이지만 온전히 그 내용을 전달하는 소리통이 아니라 간쓸개 다 빼어주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대변해야하는 드럽고 치사한 세치혀도 필요한 상황. 돈 달라고 미안해하고, 돈 못준다는 말을 미안하다고 전해야하고(오너는 미안함을 모른다는게 학계의 정설이지), 미안해야 할 사람만 미안해 하지 않는 그런 어정쩡한 관계들. 돈으로 얽혔지만 돈 만 없는 의미 상실의 관계.


📖우리의 투어_ 가난은 가난을 알아보는 법이었다. 근로자를 대표해 목소리 내줄 사람이 없는 개인기업 혹은 가족기업. 솔직히 말해서 쉽게 자를 수 없는 조건을 갖춘 기업, 잃을 게 많아서 여론을 무서워하고 직원들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엄청나게 대단한 환경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총무과와 인사과가 따로 있는 정도. 파티션으로 자리가 나뉘어 있고, 식대 카드 한 장을 여럿이 돌려쓰지 않는 곳.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청소 노동자가 있어 직원들이 직접 휴지통을 비우지 않아도 되고, 컴퓨터에 워드나 어도비 같은 오피스 프로그램이 정품으로 깔려 있는 회사.

현실 자각의 시점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착각과 현실 직시의 흐름은 아마 고등학교 때 일 것이다. 고1땐 이름난 대학을 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고2땐 서울에 있는 대학이면 감지덕지라 했다. 고3땐 일단 4년제라도 가보자 라는 마음. 그렇게 시야 축소 기능이 철모르는 학창시절에서 끝나리라 생각하지만 사회물 먹다보면 직군 고르기 방식또한 깃발 꽂은 모래성에 이것저것 가르고 뺀 후 남아있는 의미마저 소실한 모래성을 만나게된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최악의 조건이며 가,족같은 회사이기도 하더라.

나도 몇번의 입사와 퇴사를 하며 이 생활 후 정착을 한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럼에도 책속에서 열거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아니다. 청소 노동자는 개뿔, 법적으로 쉴 수 있는 휴게 공간마저 없어 각자의 개인 차량으로 가서 쉬는 실정이며, 쉽게 자를 수 없는 조건을 갖춘 척 하며 근로 규칙을 공증받았다 하지만 그게 사측을 위한 공증이지 근로자를 위한 배려는 아니라는 걸 안다. 오죽하면 퇴사 할 때 다시는 이 판에 들어서지 않으리라 말하며 나간 직원이 모든 행태를 고발해서 과태료 보다 직원들 밀린 연차수당 일부 지급으로 퉁치는 통수 부리는 곳이다. 정말 가,족같은 회사 같지만 진짜 몇대째 가족이 운영 할 회사이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수순은 여전하며 대접이 얼마나 크느냐에 따라 갈릴 뿐 그나물에 그밥이다.

오늘도 나는 고대하며 하루를 산다. 아무런 이슈 없는 날로 하루가 마무리되길. 출근 할 때 오너의 차가 미리 주차되어있지 않길. 퇴근 할 때 전화기를 돌려 놓지 않아도 되는, 일과 이후 상시대기 상태로 대기전력을 쏟을 일이 없기를. 그렇게 나는 별거 아닌 것 같은 일에 별거 이상의 기대를 하며 살고 있다.


📖방송 사고 경위서_ 그건 부끄러움이었다.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대단하다고 믿었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으려애썼다.

방송국이 배경이 된 직장의 에피소드겠지만 이건 어디든 심심찮게 보는 사건발생-경위서작성-담당자 라인 정직,감봉등의 징계 마무리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가 직접 호작질 벌여서 판친 것이 아님에도 수습을 해야하는 아주 성가신 상황. 정작 깽판친 놈은 해당 소속 아니니 열외 상태이고, 남아있는 그 집안 식구끼리 니탓내탓하며 결국 아랫것들이 죄송합니다로 조아리는 흐름을 보여주고있다. 거기에 곁다리 껴 있는 궁현도 제작 담당 탄도 연관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적잖히 타격을 입는 불똥 튀어버린 존재들. 탄이 경위서를 바로 송부하지 못한 것, 계속 주저하며 경위서에서 정당한 잘잘못과 현상 직시의 시선은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경위서 초안과 발송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 후 기록물을 보면 모두 팩트에 기반되어 작성되어있다. 다만 어느 지점을 우위에 두어 수습안을 꾸릴지에 대한 것을 보여주고있다. 사건의 현상에 기반을 두었던 초안을 보면 사고 발생의 단면을 보여주고있고, 그로인해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한 제작진의 실수를 인정하고 있다. 송부된 작성안에는 그 일이 일어 날 수 밖에 없던 이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로인해 사건이 이뤄질 수 밖에 없음을 먼저 알리며 사고낸 놈들로 인해 대응 못한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그 너머의 관계정리에 포커스를 둔 후 사고 이전의 상황에 대한 진짜 미안해야 하는 이유를 수면위로 올려두었다. 자, 그러면 이 사안은 누구 하나 모가지가 잘려 나가는게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사고에 대한 징계를 찾아보겠지. 탄이 이놈 쓸개 빠진 놈 같더니 뒷 줌치에 쓸게 한무더기를 숨겨놓은게 분명해 보였다.(멋지다는 말!)

📖이모라는 직업_ 순백색의 신부 옆에 선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블랙이어야 한다. 이상하게 가장 진한 색인데도 검은 옷을 입는 순간, 투명해진다. 신부의 뒤에서 베일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도, 신부의 옆에 붙어서 화장을 고치고 있어도 사람들 눈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정혜씨는 투명 인간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정혜씨같은 분들에게 일을 배정하는 업무를 2년 동안 했다. 웨딩홀 매니저였다. 그 직군도 정혜씨랑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 화려한 곳에서 일하지만 색이 없는 사람으로 존재해야했고, 듣는 귀는 많아도 뱉어내는 입은 예쁘고 좋은 것만 빚어내야했다. 단숨에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 누가 신부 가족인지, 돈줄을 쥔 사람은 누구인지, 이 집구석 미친자가 누군지 살피고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기분에 따라 지폐 한장이 더 얹어지기도 했고, 다 괜찮다 하지만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 순간도 심심찮게 봐왔다. 내 엄마 아빠도 아닌데 어머님 아버님을 입에 달고 살아야했고, 퇴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전생에 나는 간신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삶. 그걸로 내 밥줄을 이어가는 과정. 그날의 기분과 순간의 기운이 누군가에겐 고단한 종아리와 빨갛게 눌린 어깨죽지. 그리고 끼니를 잊은 허한 속내를 보상받기 위한 애쓴 노력의 결과물이라는걸 알아주길 바랄 뿐이다.(알아 주다=군말없이 돈을 주다)

📖경희와 경희 아닌 것_ 작은 회사라도 너를 써주는 데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월급을 따박따박 받는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무서운 거다, 고정적으로 돈이 들어온다는 거. 무조건 성실히 일하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거라.

고미숙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경희. 그러나 고미숙의 말이 너무 현실이라 부정할 수 없는 독자. 일하고 월급 받는게 당연하다 여기는 경희이지만 일하고 월급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 곳도 더러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것 같아 세상 물정 더 익혀야겠구나 라며 속앳말을 하게 했다. 세상 이치라고 말하는 도리와 질서 같은 으레 당연한 일들. 하지만 그 기대를 꺾어버리듯 당연하지 않도록 꾸려내는 꼼수는 늘 존재하고있기에 고미숙은 경희에게 알려준 건데, 생각해보면 이 이치를 잊고 살 만큼 당연한 집단에서 일하는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대기업에 갈 순 없고, 모두가 인정할만한 복지가 우선시되는 직장에 출근 할 수 없음이 씁쓸해진다. 일하는 것도 열심히였고, 늙는 것에도 열심히가 옵션인 미숙을 보는 경희. 그 열심히의 기본값이 멈추지 않아야 미숙은 덜 늙을 수 있을 듯 보였다. 나의 어머니나 고미숙은 이러한 '열심히'와 '이 한몸 받쳐'의 개념이 기본 전제가 되어있는 근로자의 삶으로 세상을 버텨냈다. 나 역시 그녀들의 삶이 정답이라 보고 살아왔기에 이게 정확한 답으로 살았다. 고미숙과 경희의 세상이 다른데 경희와 경희의 아랫연차는 또 오죽할까 싶은 생각(헌데 경희같은 막내 레벨은 이런거 저런거 비교할 여력이 없다. 내가 제일 힘들다는 것만은 명확하게 인식이 되니 자괴감과 회의감이 모든걸 덮어버린다). 필요하다는 말을 피로하다는 걸로 들어먹는 지우와 경희 사이만 봐도 누군가에겐 이 과정이 필요한 것이고, 일련의 부단함이 피로함으로 먼저 닿아버린다는걸 생각하면 쉬운 건 어디에도 없음을 느끼게 만든다.

📖퇴직금 돌려받기_ 오늘 처음 보았지만 어떻게 살아왔을지 짐작되는 자기 또래의 이 여자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아서.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잘못되어간다. 받아들여야 하니까. 우리가 삶을 바쳐서 돈을 버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증오하게 된다. 우리를 남김없이 발라먹으려는 상사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일을 너무 잘해서, 일을 너무 못해서,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말을 너무 안 해서. 이문은 그랬다. 언제나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죽이고 있었다. 상사든, 동료든, 후배든, 선배든, 누군가는 항상 죽여야 했다. 그들은 이문을 위해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안 망가질 수 있나, 사람이.

진해정이 말하는 우옥현.진해정을 바라보는 송이문. 뭔가 낌새가 묘했다. 남을 떠올리는 것에 이토록 정확하고 세세할 수가 있는게 이상했다. 직장인 나부랭이의 삶이 길어 질 수록 눈치만 빨라지는 것. 역시나 그랬다. 진해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회사에서 시들어갔던건지 눈에 그려졌다.

어쩌면 송이문의 훗날 모습도 이런건 아닐지, 업무 오류를 알지만 다들 쉬쉬하고 폭탄 돌려막기 하다 줄행랑 친 건데 너무 FM대로 살아온 이문이 괜히 벌집 건드린건 아닐지에 대한 우려까지도. 잘 하면 본전, 못하면 쪽박이라는 그런 룰. '칭찬은 바라지도 않아요, 현상유지만 하게 해주세요.' 바라지만 중간도 못 되는 어딘가 붕 떠있는 자신의 위치. 포상은 없고, 감봉만 있을 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훈계는 사람을 주눅들다 못해 지하로 끌어 내리는 아주 신박한 기술이 있다는 걸 또 한번 실감하게 했다. 이제 궁금하지 않다고.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어떤 사람이 될지. 그런 게 궁금하면 사람이 제정신으로 살 수 없다고. 느낀다. 이 사정 저 사정 봐주다간 내 사정을 못 들여보는 꼴을 아주 호되게 경험했다. 역시나 회사 생활은 흐린 눈에 경주마 눈가리개 장착하고 보고싶은 것만 보며 살아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아무도 내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걸 항시 명심하며!


📖빈칸 채우기_ 월급을 받으면서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이유나 차은우는 아니니까요.

회사에서 낭만 찾기는 미련한 짓임을 상기시키는 신입의 한 마디. 회사 생활이 드라마나 웹툰같을거라 생각하는 선임을 한심하게 바라보지만 절대 티를 내어선 안된다는 생각에 수위 조절해서 뱉은 말 처럼 느껴졌다.

꿈과 미래를 쫒아 여기까지 온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실과 재정에 맞춰 온 사람이 더 많다고 보는게 명확한 조합일텐데, 면접관 앞에서 하는 말처럼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자는 듯한 건설적인 무언가를 바란 질문은 아니었겠지. 그저 어색한 공기를 없애고자 던진 말에 현실직시의 가시박힌 매질을 당한 뉘앙스였다. 각기 다른 성장과정과 생활반경이지만 그저 한 달 후 입금되는 금액을 기대하며 모인 이들이다. 누군가는 승진 심사를 위해 에너지를 쥐어짜며 간신배보다 더한 아첨으로 서류의 날인을 요청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저 이러한 직군에 발을 담근 이력만 필요로 하니 무사안일의 날로 하루를 버틸 것이다. 승진 하면 뭐가 달라지냐고? 월급이 오르겠지. 직급 수당이 붙을 테니까. 그거 말고 달라지는거? 글쎄, 딱히 없었다. 드라마틱한 수직 인사 이동이 아니고서야 거기서 거기인 한발 올라서기는 티도 안 나는 발돋움이니까.

마지막 빈칸채우기 단편에서 우희가 말한다. '인간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더라.' 로 입사 동기의 승진을 축하하며 깔깔거리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로 확실히 말하는게 맞겠지. '나도 안 변하지만, 너도 안변하는구나.' 를 정확하게 인지하며 상대를 마주해야한다.

돈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치의 나를 갈아서 납품을 해야 그에 상응하는 댓가가 하달되는 방식. 그게 한 주가 되고 한 달이 되며, 열두 달이 모여 한 해 치의 연봉이 되며 우린 그걸 손에 쥐게 된다. 피같은 돈이라고 하는 이유가 내 분신과도 같은 육신의 일부를 갈아넣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못 받으면 화가나고, 비교하면 고달프고, 내 자리가 없으면 필요충분하지 않는 존재처럼 여겨져 자괴감이 드는 것이겠지. 그래서 항상 피곤하다. 그 나물에 그 밥같은 존재들의 집합이자 하나의 사회와도 같은 회사 속에서도 개중에 내가 낫다며 눈에 튀어야 레벨 상승의 기회라도 주어지니 말이다. 좀 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존재감을 주입시키는 부단한 노력들. 누군가는 임원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며 밥시중, 골프시중, 집안 대소사 시중을 드는 루트를 택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첨에는 젬병이라 실적이라도 올리고자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노고가 든 것으로 이력을 줄세울 것이다. 눈에 띄도록 반질반질하거나 여기저기 쓸모가 있어 손이 잘 가는 공구가 되길 자처하는 눈물겨운 자기 PR의 삶. 당신은 안 그럴거 같지? 아닌 척 해도 다들 각자만의 대응법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무던히 물장구치고 있을게 빤하다.

재미까지 바라는건 욕심인거 안다. 아는데도 일말의 재미라도 맛 봐야 일할 맛이 나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다. 동료와 쿵짝이 맞는 업무 진행 속도라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손에 쥐어진 성과라는 꽉 닫힌 결말, 기대 안 하는척 했지만 기대하게 만들었고 기대에 상응하는 성과금 같은?


씁쓸한 결말은 되도록 멀리하자. 혹시 알아? 이른바 서동요 전법이라 말하듯 입에 달고 사는 재미라는 놈이 한번쯤은 내 책상위에 들렸다 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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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의 언어 - 나의 모어와 바깥의 모국어를 잇는 순간들
유슬기(유손생) 지음 / 티라미수 더북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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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북펀딩에 참여한 도서이다. 에세이이자 자서전과도 같은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 그런데 저자의 생의 배경이 남다르다. 모두 겪어본 자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듣는게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기엔 가장 확실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책이 출간되도록 기대하며 펀딩하기도 했다.


나는 농인의 세계를 모른다. 접한 거라곤 EBS 채널이나 리퀘스트 채널을 통해 도움을 요한다는 것만 봐왔지, 그들의 일상이 담긴 것들은 청인이 직접적으로 느끼도록 공유되지 않았다. 그나마 학창시절에 반에 한명씩 보청기를 끼던 아이를 아는 정도? 그마저도 학교를 꾸준히 나오지도 않았고, 다른 아이들과 교류가 되지 못해 매번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전학가는 걸 봤던게 다였다. 그러니까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틀린게 아니라 다른 삶인건데 제대로 알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제서라도 알아놓고 실수없이 대하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먼저 시작해 본다.


📖통화버튼_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전화 예절은 내가 청인의 세계에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한 일종의 관문이었다. 나는 그런 배움이 암마 아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세상의 많은 일이 예의바른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보다 농인과 청인의 세상은 많이 달랐다. 농인의 부모 손에서 자라지만, 청인의 조부모의 교육도 필요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더 엄했는지도 모르겠다. 행여나 실수하게 될 까봐, 배움의 공백이 티가 날 까봐. 익숙한 농인의 세상보다 더 오랜시간 공유하며 살아야하는 속칭 일반인의 시점에서의 세상이 먼저였던 것. 다행이 잘 따라와 준 저자였고, 기를 쓰고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보였기에 할아버지 또한 뭐 하나라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라 가늠 해 본다. 사사로운 통화예절이라도 처음부터 똑부러지게 가르쳐 놓고 싶은 마음. 어디가서 싫은소리 듣지 않도록 집 안에서부터 채비를 해 두고픈 거였겠지. 이게 할아버지가 갖고 계셨을 마음의 짐이기도 했을거라 간주 해 본다.

📖엄마의 성장통_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글을 썼고 살기 위해 글을 배웠다. 엄마에게는 한국어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저자의 부모는 후천적이다. 하지만 너무 어릴 때 앓았기에 말과 글을 배우기 이전에 나타난 징후임을 감안하더라도 글은 낯설기만 하다. 또 다른 언어이며 표현 하지만 그 것이 다시 자신의 귀로 돌아오지 않는 외침 일 뿐이다. 그래서 어렵다. 할아버지가 마련 해 둔 엄마의 필살기. 무엇 하나라도 잘 해서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 지장이 없도록 길을 터 주고팠을 피나는 노력. 이야기 후반에 보면 저자가 엄마에게 손편지를 요청하는 부분도 나온다. 모녀는 필담보다는 수화로 이야길 나눴다. 그렇지만 그건 허공에서 사라지는 흔적이었다. 그러니 저자는 더더욱 엄마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반짝이는 능력과 표현이며 그간의 노력이 남들보다 곱절의 고단함도 담겨있을 거라는걸 알기에 엄마의 손글씨는 남달랐다.


📖손으로 말하는 사람들_ 수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지만 한국어를 쓰고 소리를 듣는다. 결국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어딘가에서 홀로 서 있는 경계인이었다.

집 안에서는 손으로 말을 했고, 집 밖에서는 입으로 뱉어내는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었다. 문장의 구조 또한 다르다. 존대의 의미 또한 다르며 구구절절한 설명이 짤막한 손짓으로 대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이 표현이 적절한지, 이 손짓이 의미에 부합하는지. 남들은 둘 중 하나만 해도 되는데 저자는 둘 다 해야 기본이 되는 삶 속에 끼여있다.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본인에겐 결코 당연하지 않는 수고로움인데 알아주지 않아 서운한 마음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사춘기보다 더한 심리적 방황과 정체성에 대한 불안함에도 버텨내고 그 기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책임감으로 보여졌다. 자신은 농인 부모와 청인 세상을 연결 해 주는 매개체이며 자신이 무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부모는 존재하나 유리 벽에 갖힌 고립 상태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부모와 조부모가 완벽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어릴 적 부터 봐왔고, 그것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는 것에서 오는 상대에 대한 답답함이 때로는 자기 혐오와 위축되는 마음까지 품고 있기에 내가 살아 내려면 내 주변을 둘러싼 여러 세상이 고립 되지 않도록 다 열어제끼는 역할이 필요했기에 이 마음을 오래 유지 할 겨를도 없어보였다. K-장녀의 스트레스와 책임감의 최상위 버전이라 봐야겠다. 이 마음 어찌 달래며 살았나 싶다. 암튼, 장해.


📖결혼식_ 신랑 측 손님들은 짝짝짝 박수를 쳤고 신부측 손님들은 반짝반짝 수어 박수를 쳤다. 두 박수가 식장을 가득 채웠다. 동규가 귓속말로 말했다. "별빛들이 박수를 치네."

배려와 이해 사이에서 가장 큰 환대를 받았을 거라 보여지는 박수세례. 어느 한 명 서운함 없도록 모두가 이 축하하는 자리에서 들고 즐길 수 있도록 애쓴 신부의 마음이 그대로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나도 결혼식을 치뤄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져 본 이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불안한 마음과 잘 해내고픈 욕심,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원없이 축하받고픈 기대감. 그에 앞서 농인 가족들과 지인들이 쭈뼛거리는 것 없이 함께 식의 진행을 이해하고 축하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신부가 참으로 애 많이 썼구나를 생각하게했다. 이정도의 별빛들의 박수는 받을 만 했다. 글로만 봐도 울컥하는데, 저자가 이 날 결혼식 영상을 공개한다면 나는 아마 꺼이꺼이 울지도 몰라.

📖무례_ 가장 큰 바람은 아이가 그저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었지만, 세상이 말하는 건강은 장애가 없는 '정상'적인 아이였다.

무탈 한 것, 어느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도드라지게 티나는 것 없이 무리에서 잘 적응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 그게 그저 '건강'이 아니라 그저 '정상'이라는 숨은 뜻이 있음을 저자의 문장 해석으로 한번 더 실감하게 했다. 원해서 얻은 아픔도 없고, 누구의 원망으로 얻게되는 상태도 아닌데 가장 소박한 척 하는 가장 어려운 바람을 갖게 되곤 한다.


📖들을 수 있다는 건_ 들을 수 있다는 건 소리의 유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무음의 세계를 가늠 해 본다. 40년 가까이 소리가 일상인 삶으로 살다가 음소거가 된 상태의 삶.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부르는 애칭도 들을 수 없으며, 드라이브하며 듣는 차안 노래소리, 제일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이모한테 달려오며 이름 불러주는 조카들의 까랑까랑한 외침까지. 어디 그 뿐일까 내가 당신을 부르는 과정, 나의 심경을 표현하는 문장이 사라 질 것이며, 다급한 일이 생겨 목 놓아 외치더라도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익히듯 그렇게 다시금 시작되는 언어의 배움과 다른 표현법.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좀 알아봐 달라는 그러한 존재의 확인이며 인식방법이었다. 너무 당연하고 흔해서 익숙함에 등한시 했던 소통의 과정. 비록 음성으로 퍼지는 외침이 아니라 손 끝으로 번져나가는 울림도 있다는 것에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저자는 경계인이라고 했다. 아이와 어른, 지인과 타인, 외부인과 내부자를 오가는, 잠깐이 아니라 한평생을 두 세계의 경계에서 살아가고있는 농인 사회의 청인 자식으로 사는 것. 수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며 통역과 대변을 쉼없이 해온 사람. 모든게 가능한 만능인으로서의 자랑스러움보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라며 스스로를 위축시켰다. 그건 겸손의 미덕으로 표현하는 낮춤이 아니라 그간 받아온 시선과 배려받지 못한 말들로 인해 설 자리를 확보 받지 못한 손님이 된 그간의 시간을 담아두었다.

집에서는 수어가 모어이고, 바깥에서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일상. 각기 다른 언어는 각기 다른 생활 습관을 만들어냈고, 그 언어들 사이에서 자신이 표현하는 언어는 어디에도 닿지 않는 듯 아쉬워했지만 저자의 손 끝에서 피어난 단어들은 다른 이들을 살게 했다. 우리가 숨 쉬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듯 너무나 당연하게 살아내는 숨길 같은 것이라 너무 늦게 고마움을 표현했나보다. 멀찍이 바라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만 보아도 고마운데 저자를 통해 세상을 알게된 사람들은 얼마나 감사해 할까. 존재하는 것을 알아주고 외면받지 않도록 귀담아 듣고, 두손에 받아둔 문장 속에서 이러한 세상의 이야기들도 있다는 걸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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