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근현대사의 과목이 더 익숙한 7차교육과정의 세대. 교과서를 보면서 그 시절을 가늠하기보단 외우는 것에 급급했고 배울 당시에는 더더욱 감정없이 보며 '그랬다더라' 라는 식의 시니컬한 반응으로 바라봤던 시절의 사건들. 역사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순간에 이입해야만 더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임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되었다. 그들은 교과서에 나올만한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한 시대를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좀 더 확고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주저하기보다 나아가려 했던 존재들이었다. 어찌 그리도 다들 빨리 사그러들어 소멸했나 싶어하며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일으키고 있다.


저자도 그러했고, 저자의 동생, 그리고 주변 학우와 동료들까지. 그들이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달리 자신이 더 목소리를 높이고, 선동하려 했던 이유를 찾아보면 특출난 활동가여서, 더 많이 배운 성인으로서, 생계를 꾸려야하는 가장이 아니어서도 있겠지만 '나라도-'라는 마음으로 이유를 가지고 시대의 폭력과 옳지 못한 사상에 반기를 들어 어떻게든 자신의 세대에서 부조리함을 끊어내려고 각자의 청춘을 받쳤다고 볼 수 있다.

박래군이 그러했고, 그의 동생 박래전도 그러했으며, 의문사와 자살을 빙자한 그 시절 운동권 학우들이 그러했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편하게 책이나 각종 영상을 통해 학생들의 투쟁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강압적인 시절을 보는 것으로서 지금과는 사뭇다른 세태를 학습만 하게된다.

박래군이 운동가가 될 수 밖에 없던 청년 시절,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벌어진다. 분신 투쟁한 형제를 둔 유가족이 된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개인으로서 조용히 살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시절임에도 동생 래전은 시만 쓸 수 없어 학생운동 조직에 가입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다. 청년 래군의 시간은 그렇게 약자의 편에서 고문피해자, 시설 수용자, 불심검문, 장애인 인권유린,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 폭력과 차별이 선연했던 곳에 한발 앞에서 약자들을 지키려 했다.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래군이 래전을 지키지 못했다는 마음과 함께 어떻게든 그들을 대변하게된다.

4장에서는 말한다. '질 줄 알면서도 싸운다'며 설령 지더라도 인간의 존엄성마저 포기하지 않고자 애를 쓴다. 질거 같으면 시도조차 안하는 나같은 놈이랑 정말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더욱이나 저자를 통해 '연대'의 힘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컸다. 결국 집단책임의 의미이며 부당한 선례를 떠올리게 했으나 저자의 연대는 같이 살자는 의미가 더 컸다. 비정규직문제, 하청 노동자들에게 부과된 손배가압류 문제 등을 풀기 위해 지금도 연대하고있다. 매 순간마다 현장에 있는 저자를 보면서 생각한다. 그러한 일을 하는게 내 가족, 내 배우자라면 어떨까 라는 가정. 물론 내가 박래군과 같은 인사가 될 수 있을거라는 가정은 애초에 접어두었다. 옳은 일을 하는게 맞지만 매 순간 불안과 같이 살아야된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자랑스러움보다 더 큰 걱정이 지배하리라 그의 행보에 걱정어린 시선을 늘어놓게된다.


모든 사건을 멀찍이 제 3자로 바라 볼 때와 그렇지 못할 때. 마음가짐이야 달라지겠으나 결국 나 조차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차별과 혐오, 증오 범죄로 이어진다는 시선. 직접 차별, 간접 차별, 괴롭힘, 성희롱 등과 같은 것. 결국 우리가 다 한번쯤은 겪어봤고 알지만 쉬쉬했던 일들을 저자는 수면의로 끌어올렸으며 사회 대개혁의 1순위 과제가 될 것이라 했다. 병력, 출신 국가, 언어,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사항, 학력까지. 차별 금지 사유가 삭제 된다 한들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대로 남아있음을 느낀다. 차별이 커지면 혐오가 되며 사회적 편견 또함 혐오의 근간이 되고만다. 다들 그리 느낄텐데 지금의 세상은 혐오 표현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다. 알지만 쉬쉬한다. 바뀌지 않을거라는 확고한 확신이 있기 때문. 나 역시도 바꿀 생각조차 않는 이 사상을 저자는 오랜 시간동안 변화하길 바라고 있다.

후반부에 저자는 대놓고 이 실상을 알린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인권활동가. 그래서 가족이 이러한 활동을 말리려하는데 당연한 세상이라는 것 마저도. 기업들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감시자의 역할이니 기부금은 거의 기대 할 수 없으며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아주는 기금으로 활동 하는 것으로 이어가지만 가치를 위한 후원으로 달라질 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들의 행보에 힘을 싣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 밥벌이를 하는 순간부터 아픈 아이들을 후원하는 것에는 선뜻 마음이 움직이는데 이러한 인권운동의 후원은 주저하게된다. 재단에 대한 활동 내역 인지 부족도 있을테고, 믿음의 결여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나는 그러한 입장에서 다양한 재단 중 인권운동 재단에만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음을 실토해본다.

저자는 시민사회 후원은 좋은 세상을 위한 투자라고 했다. 결국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밑거름이라 하니 부정적인 과거의 이력들을 지워낸 후 다시금 알아보고 학습하는 과정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권은 거창한 명목보다는 당연히 가져야할 기본적인 권리에 입각한 목소리였다. 욕심을 내기보단 당연한 것을 찾고자 했으나 사회상이 막아서고 권력으로 들이미는 세상을 살다보니 현대사의 인권들은 많은 이들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듯 그렇게 어렵게 이어져왔음을 학생의 눈이 아니라 어른의 눈으로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인생 2막은 자랑할 것은 없다고.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했냐는 경이롭게 보기도 하지만 그 일은 혼자서 해 낸게 아님을 매번 언급하며 뜻을 이해해준 사람들을 눈앞에 그려낸다. 자신의 육신과 시간을 할애하는 자원봉사는 물론이고, 여건상 그러지 못한다면 후원금을 통해 현장 한켠을 지켜준 시민들과 동료들이 있음 전하고있다. 각각의 일들을 겪어내었고 현장에 있던 저자는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외면하지않고 그들의 곁을 지키려 했고, 그걸 기억하며 현장에 없던 독자들에게 그 온기를 전할 뿐임을 겸손하게 말한다.

10대의 학생시절엔 연도와 열사들의 이름을 외는 단순 기억으로 남았다면 30대의 어른이 된 독자로 보니 결국 사회는 영화 속 히어로들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꾸려낸 세상임을 확신하게한다. 윤리적 삶에 대한 정의를 고쳐보고싶어지며 내가 모르고 살던 사회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교과서가 가진 딱딱함보다 현장감이 있고, 그 시절을 살아낸 어른의 생생한 실제의 시간들을 듣고싶다면 이 겨울 방학을 핑계삼아 아이와 어른 같이 읽어도 될 만한 도서라는 생각에 나의 어린 친구들에게도 한권씩 나눠보고 싶어진다.

📖하니포터11기로서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다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알게 된 이유, 그리고 구입을 하게 된 이유는 조카의 연락 때문이다. 서점에서 이 책을 찾고 있는데 보이질 않는다며 앤솔러지의 작품 중 '유령 개 산책하기'를 읽어보고 싶은데 찾을 수 없다는 톡. 초등6학년이 고른 소설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품고 있길래 직접 서점에 가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이모랑 같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분야의 소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10대의 아이와 30대의 이모가 같은 소재의 소설을 읽고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를 기대하며 총 5편의 단편에 마음을 기울여보았다.


📖없는 셈 치고_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쉬이 사랑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나는 고모를 사랑했다.

관계 속 약자는 뭐든 더 쏟아내어야 본전치기라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고모와 고모부의 친딸이 아니니까, 이 집의 진짜 가족이 아니니까 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키워준 것. 돈이든 시간이든 들여가며 자신을 키워냈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단 나중엔 그 값어치를 다 해야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을 것이다. 고모의 딸이 학창시절 방황부터 시작하여 망나니처럼 살아도, 성인이 된 후에도 알 수 없는 다단계인지 종교인지 빠져들어 몇년간 연락도 없다가 뜬금없이 돈을 해달라는 연락만 달랑 오더라도 언제든 부르면 달려가는 5분 대기조의 상황같은 자신과는 확인히 다른 역할극이었다. 어쩌면 고모는 병수발 드는 조카는 당연하고, 망나니 짓 하더라도 가뭄에 콩나듯 연락하는 딸 또한 한없이 기다리는 존재인 것 마저도 다 당연한 것이었다. 각자가 당연한 사연이 있지만 동등한 배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작점이 다르니 결국 무얼 향하든 다르게 여기고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 할 수 없는 그러한 당연함들이다.

📖유월이니까_ 다. 살려고. 기를 쓰고. 걷고. 뛰는 거예요. 죽으려고. 아니고. 살려고. 죽겠으니까. 살려고.

우린 각자가 품고있는 유월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4월이, 누군가에겐 12월의 마지막날이, 누군가에겐 이젠 까마득하고 흐릿해진 어떤 날들이. 세상엔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다. 각자의 어떤 날들이 있으며 그 시간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살고 있는 중이다. 못잊어서가 아니라, 정말 말처럼 살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의 마음으로 찾아다니고, 걷고, 뛰고, 버티는 중임을 이젠 어렴풋이 알겠다.


📖유령 개 산책하기_ 나도 알아. 그렇지만 하지가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 내가 대답했다. 준은 내가 하지를 사랑하게 되어서 그런 거라고 말해 주었다. 왜 사랑하면 억지를 부리고 싶어질까. 그렇지만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무엇보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

하지가 나타난건 하지가 나를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지를 그리워했고, 그 시간을 은연중에 바라고 있음에 주변에 잔상으로 남아있겠지. 아닌 것 같아도 존재의 상실은 항상 남겨진 자의 몫이니까. 하지가 선명해졌다 흐릿해지는 과정은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보내주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있는 인지과정이라 여겼다. 곁에는 없지만 그럼에도 흔적은 어젼히 남아있을테니 사무치게 보고싶고, 서러움이 북받쳐 위로가 고플 때엔 이렇게 해보라는 듯 상실은 했지만 너에게 소멸되진 않았음을 안심시켜주는 글 처럼 느껴졌다.


총 다섯 편의 앤솔러지 중 마음이 가는 것은 이 세 편이었다. 각각의 단편 사이에 있던 성해나 저자의 작품이나 임현 저자의 작품은 눈으로는 읽혀지긴 하나 머리로는 제대로 도출되는 게 없더라구. 그래서 왜 앞머리에 김유담 저자의 글을 놓아둔건지도 대충 감이 오기도했다.

나의 픽은 '없는 셈 치고'이며, 조카의 픽은 '유령 개 산책하기'로 결론지어본다.

'걷다'의 의미를 놓고 보면 앞으로 나아가며 더 나은 무언가로의 행보라 여겼다. '없는 셈 치고'를 통해 하지만 이 걸음이 함께 나아갈 수도 있고 홀로 걷게되는 상황이 있음을 느꼈다. '후보'에서는 뒤로 걸으라는 의사의 조언이 뭐랄까 이제는 뒤를 돌아보며 그간의 세월을 한번 돌이켜보고 추억 할 만한 시기가 되지 않았냐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과거를 안주삼아 씹을 거리 많은 당신의 세월을 뜯어보는 시간. 그러면서 그간의 순간은 마냥 허상이 아니었다는 뉘앙스를 내비친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걸음이 제법 괜찮았던 날들임을 생각하게 했다. 세 번째의 작품은 함께 자분자분 걷던 존재의 상실을 떠올려본다. '유월이니까'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당신 이상을 애틋하게 여기던 존재를 상실한 상태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삶을 살아가는게 맞냐는 질문을 산책로에서 둘로 나뉜 구역의 사람들과 비교하며 당신들에게 답을 구하고있다. 걷는 트랙과 뛰는 트랙. 그리고 그들을 쫒아 비슷한 보폭으로 걷듣 뛰든 해야 사고가 나지 않음을 사람이 아닌 눈 앞에 보이는 안내판들을 통해 자각하게만든다. 무덤을 서성이는 그들. 무덤의 사진을 찍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하진 않으나 유월이라는 특정 일자를 언급하는 것이 둘 사이를 이어주던 무언가가 소실됨을 가늠케 했다.미친놈 소릴 들으면서까지 너를 버리고 왔다는 그와 연이 된 아내를 가냘픈 실로 붙잡고 있는 어떤 남자를 통해 붙들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각해보면 계속 머무르며 바닥을 파고 혼자 심해에 이르고 있는게 아닐까 우려했던 존재들이 어떻게든 살려고 살 방도를 찾는게 무덤이었고 능이라는 장소는 아니었는지 지레 짐작을 해본다. 구구절절 말을 하진 못했지만 각자의 살 방식, 기를 쓰고 늪처럼 빠져들고있던 심연의 어둠에서 나올 안간힘을 쓰는 또 다른 갈래의 트랙이었는데 몰라주고 있었다는 생각에 뒤늦은 미안함이 몰려온다. '유령 개 산책하기'에서는 언니가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와 다시 나에게로 유기한 개의 상실과 이후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있었을 때엔 당연했고, 없어지니 그 자리가 너무 커진 남겨진 이가 살아내는 방식. 자신의 바운더리에서 개는 그리 큰 존재가 아니었다고 여겼으나 있었다가 없어진 상황에서는 그 자국이 너무 크게 와닿는다.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산책, 덕분에 할 수 있었던 타인과의 대화, 덕분에 이루어내던 일상들까지. 아마 유령 개의 허상은 자신이 다시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가 짜낸 허상의 페이스메이커가 아닐까. 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나마 해봄직한 것들이 늘어나니까. 그래서 조금씩 자신이 혼자 해 나갈 수 있을거라 여길 즈음 하지의 존재도 흐릿해지는거지. 그렇게 미처 마무리 짓지 못했던 작별을 하는 과정이었다. 앞의 단편처럼 어떻게는 기를 쓰고 살려고 걷는 그런 뉘앙스로 말이다.

걷는 다는 것의 의미.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서 발을 번갈아 떼어 옮기는 것.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게 누군가에겐 무의식중에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 순간마다 자각하며 걸어야한다는 자극을 받아들어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게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리는 어떠한 감각이든 어느 한 지점을 일깨워서 해야하는 삶의 방향성이기도했다. 무언가를 해 나가는 과정이 걸어간다고 비유 할 수도 있겠으며 단순히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도 이르기도 함에 모든 생의 연장은 걷고 있는 과정임을 한번 더 인지하게된다.

'마냥 주저 앉을 수도 없다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안주하기보단 뻗어나가며 웅크리기보단 큰 동작을으로 걷고 뜀으로서 고여있지않으려 하는 것들. 무의식이 더 크게 지배하던 20대를 지나 30대에서는 때때로 자각하고 스스로를 상기시키는 구간이 생겼다. 40대와 50대엔 안드레아처럼 시절을 뒤돌아보며 때때로 역행하는 구간도 추가가 되겠지.

이 책은 독자에게 당신이 걷고있는 그 구간이 어디쯤일지 명확하게 묻진 않았다. 다만 같은 트랙이지만 다른 속도로 걷거나 뛰는 이들과 부딪혀 자신이 옳은 걸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굳이 몸으로 알아먹던 그 둘의 처지가 되진 않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 그럴 수 있으니까, 평생 그러한 과정 없이 올곧은 걸음만 걷기엔 변곡점도 만나고 장애물도 만나며 수렁도 존재하는게 삶의 트랙인걸 모두가 인지하고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말이다, 이 걸음이 평생 유지 될 수 있는 무한의 동력이 아님을 알아먹고 반듯한 발자국을 남겨보고싶어진다.

내가 걸어낸 흔적과 걸어가야하는 모든 것들에는 내가 뭍어나 있을 것이니 내가 나를 제일 애틋해하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 아버지의 상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이지만 엄마와 동생의 동반 자살로 위태로운 삶을 살다가 그들의 10주기에 절벽에서 몸을 던지게된다. 형우가 눈을 감고 있을 적에 마주하는 아홉살의 형우, 열하옵 살의 형우, 스물 아홉 살의 형우를 차례로 만나며 가장 행복했지만 가장 되돌리고 싶었던 그날을 찾아가 삶의 구실을 끄집어낸다. 형우는 가족의 죽음과 그 고통을 쥐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서 쉽지많은 살아냄 과정을 담아두고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압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거지.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욕조에서 이불 빨래를 하고, 누군가는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면서. ... ... 우리는, 숨을 참는 거고.

생을 등진 이의 등을 맞대며 그 틈을 메꾸며 사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배로 힘겹다. 근근히 살아내고 있는데, 세상을 천년만년 슬퍼해야하는게 당연한것 아니냐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평생 안고 살 것이냐고, 이젠 좀 잊으라며 채근하기도한다. 당신들의 가벼운 입으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보다 당사자의 삶은 더 고된데 그럼에도 살려고하는데 그러한 말들은 가시가 되어 쉽사리 뽑아 낼 수 도 없을 만큼 박힌다.

울컥울컥 몰아 터지는 그리움의 응어리가 명치를 눌러도 참고 참아내는 중인 생을 보면 의식하지 않고 살아야하는 숨쉬기가 저리도 버거워서 어쩌나 하는 애닳는 마음이 커진다.

📖엄마가 이름 탓을 하면서도 그걸 바꾸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꿨는데도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엄마에겐 더 이상 탓할 게 없어질 테니까. 누구 탓도 할 수 없으니 엄마는 이름 탓이라도 해야 했는지 몰랐다.

탓이라도 해야했고, 그렇게 푸념이라도 입 밖으로 뱉어내야했다. 안 그러면 그 모든게 여기 없는 사람에게 돌아갈까봐 그 것이 너무 싫었던 엄마였다. 처가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떳떳하게 죽음의 사유마저 밝히지 못한 사람에게까지 그 미움을 지고 가게 할 수 없었던 아내로서의 최선의 도리였다. 당신 탓 할 사람들 앞에서 더 큰소리로 자신의 이름 팔자를 논하는거지. 그러면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테니까.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이름을 미워하며 자신의 삶에 미운털을 스스로 박아두었다. 아무도 남편의 죽음에 감나라 배나라 못하도록. 그 속이 오죽할까 싶은건 자식들이 엄마 나이 즈음 되어서, 결국 다 커서야 알게되지.



📖선한 사람들이 떨어진 꽃잎 하나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어갈 때, 악한 사람들은 꽃밭을 마주 짓밟으며 무조건 직진하는데, 그걸 무슨 수로 이겨......

아빠가 생을 마감한 이유. 가족관계 때문도 금전적인 이유도 아니었다. 축복받지 못한 결혼이라서, 벌이가 마땅치 않아서, 부부사이가 좋지 않아서, 아이와 유대감이 없어서. 그 어떤것도 이 애틋한 가족들에게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형우의 아빠는 잘라내고자 한 것이었다. 자신의 우울과 삶의 무력함이 예쁜 아이와 사랑스러운 아내에게 옮겨갈까봐. 혹여라도 그 마음이 번져서 소중한 사람들마저 슬퍼할까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몰아서 채워 준 후 생의 마침표를 찍으려 했던 것 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다. 선한 사람들에겐 기회보다 희생을 바라는 세상이었고, 욕심보다 당연함을 앞에 두고 사는 사람인데 결국 악한 사람으로 인해 죄책감과 상실, 슬픔, 자책은 약자에게만 몰아붙이는 겪이니 어떠한 치료나 센터의 교육, 돌봄마저도 없었던 상황이 야속해질 뿐이다.

📖힘들 땐 잠깐 마음을 끄고 살아야 해요. 몸은 어차피 우리가 살게끔 설계돼 있으니까 잠깐씩 마음을 끄고 살아야 해요.

어떻게든 살아는 진다는 말. 눈물나고 그리움에 사무치더라도 배는 고프고, 잠은 올 테고, 그리고 어김없이 해는 뜰 것이고, 푸른밤은 여전히 당신에게 찾아가 이제 쉬라며 고요함을 당겨 올 것이다.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함을 안기겠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주변인들의 말처럼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 이었다. 그게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가장 단순하고도 가장 어려운 시간의 소비였다.

아마 남겨진 형우는 특히나 스물아홉 살의 형우는 자신을 매번 자책하고 원망 할 지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에는 어떻게 막아낼 방도가 없는 상태였으나 스물아홉 살의 형우는 심연에 빠져있는 동생이나 그를 외롭게 할 수 없어 같이 가기로한 엄마를 구할 수도 있었을거라는 그 만에하나 때문에 마음이 쓰리다. 걱정만 하지 말고, 신경만 쓰지 말고, 그냥 고민 없이 바로 집에 가서 들여다보고 괜한 헛짓거리 말이라도 해보며 외롭다는 생각이나 고립되어있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해야했다는 생각들만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당장에 자신이 겪어낼 슬픔보다 더 큰 그리움과 자책의 짓눌림. 그게 남겨진 자의 몫이고 남았기에 얹어진 슬픔이다.

나는 어린 구와 그 여린 아이를 챙기는 일구, 마음은 쓰이지만 행동하지 못했고 주저하기만 했던 이구, 모든걸 다 알고있는 삼구까지 다 애련하다. 어른들은 모자라서 미안하다 할지 모르겠으나 부모의 사랑을 담뿍 받던 어린 구. 그 시절 다들 그리 겪어낸 사춘기와 함께 가족보다 친구가 더 소중했던 덜 영근 일구. 잘 하고 싶었고, 그렇지만 마음이 쓰이는 동생과 어머니가 눈에 밟혔던 이구. 부친의 상실과 함께 유일한 가족이라 여기던 동생과 모친을 동시에 잃고 방황과 공허함만 갖고 살던 텅빈 삼구까지. 매 시절의 어린 형우를 한 곳에 다 모아 서로를 챙기는 걸 보니 다들 많이 애썼고, 보듬어주고 싶었던 존재의 분신들임을 느꼈다. 삼구가 살아내주어야 우리는 사구를 만날 수 있으니 살아내 달라고 그렇게 같은 슬리퍼와 같은 반바지차림으로 만나게 해 주었나보다. 결국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닌 당연한 순간었다.

소설은 형우 너만 그러고 사는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꼬치꼬치 케 묻지도 않으며, 각자의 슬픔을 경쟁하듯 늘여놓지도 않는다. 때로는 긴 침묵과 정적이 오히려 서로를 붙들고 있음을 보여주기도했다. 진사장, 시은, 구표, 재이. 그들도 형우만큼이나 상실을 겪었고, 그 겪어낸 마음으로 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살아내자. 해 뜨면 눈뜨고, 달뜨면 잠에 드는 그런 당연한 이치 처럼 거기에만 집중에서 살아봐도 괜찮지 않겠냐는 조심스런 그 조언을 삼켜보기로 한다.

저자는 말한다. 슬픔도, 분노도, 우울도 힘이 세다는 것. 한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생명을 꺼트릴 만큼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으니 '우울력 발전소'를 세워 역으로 그 에너지를 당신이 숨 쉬는 데, 당신만의 빛을 발하는데 모조리 쓰길 바라고있다.

명치를 누르고 숨을 죄어내는 그런 날에서 다시 걸음마를 하던 그 때처럼, 글자를 하나씩 읽어내기 시작하던 그 때처럼 다시 배워가길 바란다. 천천히 조급함 없이 몸이 반응하는 대로 회복호흡 함으로서 살아내는 것에도 다시 배우듯 익혀내는 삶에 낯설어하거나 당황해 하지 말고 천천히 배워갔으면 한다. 배우면 되는거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로 살 결심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두번째 선택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시점부터 타인으로부터 불리워 질 때 사람 자체를 논하기보다 직업이 내 이름 앞에 놓일 때가 많아진다. 특수 직업군들이 더욱 그러한데 저자 또한 그러한 삶을 제법 오래 살아왔다. 그러니 판사라는 직업과 사람 문유석이 동일시 되다가 어느 시점엔 판사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해졌을 사람에게 호칭이 뺏긴 기분이 들 수도 있고, 나의 분신을 두고 온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변화된 삶을 책에 옮겨두었다. 평생 직장이라는 것도, 평생 직업이라는 것도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그래도 강산이 몇번이고 바뀔 시간동안 같은 공간에서 때마다 철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 준비를 하는 과정. 첫 걸음마를 시작 하던 순간처럼, 처음 학교 입학을 하던 그 낯선 설레임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감. 지금까지도 나로 잘 살아왔을테지만 또 다시 나로 살아 볼 결심을 해야하는 과정. 법관이 아닌 이야기꾼으로서의 세상살이 방식이 새삼스럽겠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는 전업작가의 삶에 같이 적응해보기로 한다.

📖세상은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현실은 할리우드 법정영화가 아니었다. 원칙은 힘 앞에 무력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저자는 첫번째 삶이라 칭하는 법관으로서의 눈으로 보던 세상을 이야기한다. 나이스하다 생각한 행동이 수뇌부측에선 한없이 나이브하게 보였던 저자의 행동들. 이 천진하다는 말에 숨어있는 무수한 단어들. 나이브한 자를 총알받이 마냥 앞머리에 세워두고 하던 법관들의 세상에 질렸다고 봐야할까. 법이 정직 할 것이라 당연시 여겼던 사람이 이젠 되려 글이 정직할 것이라 단언하는 사람. 그간 첫번째의 삶의 낯짝에 질렸고, 단어가 가진 명확한 뜻처럼 세상이 굴러가길 바람에 있어 더욱 다급히 두번째 삶을 당겨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란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를 제대로 누리려면 스스로를 구속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어려우니까 학교나 직장 같은 조직의 규율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촘촘하게 잘려져있고, 조각조각 맞춰서 살던 사람에게 두번째 삶은 자유 그 자체였다. 프리랜서라는 말 답게 자유가 먼저 튀어나오는 직군이다. 그렇지만 스스로가 조절해야하는 자유였고, 상황에 따라 통제하고 때로는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할애해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자율, 타율, 효율. 효용성의 밸런스를 맞춰야 함은 결국 똑같은 것임을 느낀다. 배짱이로 살다가 개미로 잰걸음으로 살 것인가. 애초부터 뛰진 않으나 그렇다고 멈추진 않는 삶으로 하루를 보낼 것인가는 모두 자신의 몫에 달린 것이다. 다음달의 내가 한량으로 살려면 오늘의 나는 곧죽어도 한량이 되지 못한다는 걸 온몸으로 실감케하는 프리랜서의 매운맛이었다.

📖지금은 읽기도 전에 이미 결말을 아는 소설 같다. 남아 있는 건 최소한의 의무뿐이다. 최소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손해는 보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가족의 생계에 지장을 줘서는 안 된다.

법원을 떠났고, 생의 시계는 꺾이고 저물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세상도 코로나로 꽉 막힌 상황이었으니 안봐도 빤한 비극적인 결말의 수순이었다. 그러니 될 일도 안 되도록 세상이 이른바 억까한다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꾸역꾸역 모드로 살아내고 일을 쳐내게 된다. 당연히 세상이 노잼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다. 일단 주체인 나 조차 즐겁지 못하니 말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없는데 당연하게도 저자는 스스로의 삶이 모든 수순에 맞게 착착착 진행 될 것이라 여기는 세상이 모두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 여기고 있었나보다.

일단 영원도 없고, 불멸도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 또한 나이듦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방식을 고쳐먹어야했다. 같은 수능도 시간에 따라 출제 변형이 바뀌지 않던가. 나만 예외는 없음을 온몸으로 겪는 과정이었다.

📖삶은 계속된다. 첫번째 삶과 두번째 삶은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내가 몇 번의 새로운 삶에 도전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전의 생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성공이었든, 실패였든.

출근과 퇴근이 있는 삶. 당연스레 다음달 월급이 입금 예정인 삶. 연차가 올라가고 직급이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조언을 구할 동료들이 있고, 같은 고민을 갖고 일하는 이들로 인해 얻게되는 형태 없는 든든함. 끝이 정해진 정년이 있지만 그럼에도 명함과 직함이 주는 안도감. 그걸 다 놓아야 하는 것이 프리랜서의 삶이다. 어쩜 이렇게도 반대되는 삶을 골랐을까 싶지만, 그렇게 정 반대의 세상에 놓아두더라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축복받은 재능이며, 부러움이 가득한 삶의 루트라 하겠다. 그래서 저자의 에세이는 극과 극의 세상을 보여준다. 어차피 발치에 다다른 정년이었으니 조금 이르게 퇴사했다는 생각으로 보더라도 동문의 선후배들과는 확실히 다른 행보이다. 그러니 삶의 전환점을 어떻게 잘 이끌어갈지, 끌려가지 않고 내가 당겨가며 주체가 '나'로 살아 낼 수 있을지을 알려준다. 공상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적인 생각과 고민을 겪어낸 글 속에서 결국 사람들은 똑같은 고민을 하고, 똑같은 후회를 하며, 똑같은 다짐을 하며 살아가고있음을 느낀다. 다만 그 행동하는 시기가 언제가 될지, 변화될 시점의 나는 어떻게 살아 낼 것인지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가장 와닿는 재정적 관리는 물론이고, 체력 관리와 대인관계 관리. 무엇보다 멘탈 관리를 어떻게 하면 될지를 실패 기록 일지들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소속감으로 탄탄했던 판사시절, 오롯이 혼자 돌파구를 찾아하는 프리랜서 작가의 시절. 특별한 직군만의 에피소드도 있지만, 결국 우린 집단 생활과 개인 생활의 양상을 보며 어떻게 살 궁리를 할지, 어떻게 밥 벌어 먹으면서도 하고싶은 걸 하는 낭만을 챙겨 볼지를 배워가는 에세이였다.

답이 정해져있는 판결의 과정이나 답을 만들어야하는 창작자로서의 고됨은 연륜과 연차에 기인하기보단 스스로가 가진 재능과 노력의 깊이에따른다는 걸 한번 더 느끼면서 나도 저자의 나이 즈음에는 직군을 전환한 삶을 살게 될지, 이 생활을 유지하게 될지를 예견해본다. 어떻게 해서든 밥 벌어 먹고 살면서 하고싶은 걸 하며, 돈도 벌고 행복도 벌어보는 얻는거 많은 삶이 주는 단맛을 기대하며 저자는 저자대로 살 결심을, 나는 또 나대로 살 결심을 다져보며 오늘도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진득하게 버티는 삶에 얄팍하지만 감사와 응원을 쑤셔넣어본다.

📖출판사 문학동네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 정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팬덤과 극단의 시대에 꼭 필요한 정치 교양
이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들에는 팬덤이 존재하지. 그러니 정치라고 예외는 아니다. 내가 지지하는 존재들이 다른 집단에서도 비판보다는 존경의 마음으로 불려지길 바라는 마음. 그러하다보니 비판의 소리가 나오면 가시를 세우고 의견에 반박을 하며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게된다. 옳고 그름의 잣대보다는 일편단심 민들레가 되어버린냥 무조건적인 숭배의 방향으로까지 이어진다. 옳은 방향이 아님을 인지하기까지, 그리고 좀 더 냉철한 지지자가 되되록 다양한 견해와 타국들을 비교하며 이해하기 쉽도록 알려주고있다. 정치인 하나를 두고 말하지 않는다. 제도와 그 집단을 운영하는 정당, 파벌없이 좋은 의견을 수렴하고 받아들어야하는 의회의 구조와 거기에 맞게 상승되어야 할 정치의 대해 정치학자 이철희가 내어두는 정치 안내서.

총 3부작으로 구성되어있는 이야기를 보면 아무래도 최근의 정치 상태. 불과 작년 이 맘때 우려하고 근심을 쏟게했던 비상계엄과 윤정부의 사태를 무게있게 담아두었다. '1부 비상계엄과 탄핵 그리고 조기 대선으로의 여정'과 '2부 윤석열 정부와 검찰 공화국은 어떻게 몰락했는가'와 다른 결로 '3부 팬덤,극단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정치의 오늘'을 분류해두어 현 정부가 유념해두어야 할 정치의 현재를 담아두고있다.


앞서 말해두었던 팬덤이라는 무조건적인 믿음과 지지의 집단. 이 과한 애정이 정치 현상에까지 젖어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정치 지도자들이 비전과 소신을 갖고 팬덤을 이끌어 가는 '책임'의 리더십보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그들의 혐오를 부추기고 그 대가로 권한을 늘려 주는 '거래'의 코트십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고 막아야한다.

고 말하고있다. 열광과 적대의 감정은 그들을 결소가시키는 유용한 방식이긴 하겠으나 결국 지들끼리만 신나는 판이 되는거지 시민들이 나설 틈이 없어지니 그냥 시끄러운 소수의 광신도 집단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보통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정권이어야하는데 매번 눈에 불을 켜는 자들만 불나방처럼 모여들어 한마디씩 거드는 정치이니 이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한번 더 실감케 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기대와 부담을 지운다. 이래저래 대통령이 해답이고, 이러쿵저러쿵 대통령이 문제다.

다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자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안주삼아 씹어대는 이야기 이기도한게 바로 대통령에 대한 탓을 돌리는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 질, 국민의 삶이 과도하게 대통령에게 달려있는건 익히 아는 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집행하며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사람이 문제이며 사람으로서 시작되는 것임을 모두가 인지하고있다.

특히나 1부와 2부를 보면 당장 작년 이맘때의 윤정부 시절의 실로 놀라운 일들과 그간의 행보에 저자는 적잖히 뿔이 나 있었던걸로 보인다. 총 3부작임에도 1부와 2부를 나누었음에도 거기에 비판의 힘을 모아두고있다. 윤정부가 잘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래도 좋은 정치에 대해 논한다면 균형이라도 맞춰주지. 라는 아쉬움과 함께 차라리 현 정부에 바라는 것들을 과거 총리나 대통령에 임했던 각국의 이들의 선순환 사례를 모아두면 어땠을까. 그러면 조금 균형이 어설프나마 맞춰지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1년 1개월 동안 쓸 서른개의 칼럼을 손본터라 어쩔 수 없는 비중의 쏠림은 있었겠으나 좋은 정치에 대한 기대를 갖게하는 파트가 적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책 뒷편에 적힌 간결한 문장이 너무 와 닿았다. '함께 까거나 함께 가거나' 이토록 단순하고도 명확한 조합이 또 있을까.

살다살다 책으로 배웠던 비상계엄 소식에 너무나도 생소하고 당황스러워서 남편에게 물었다. 이거 괜찮은거냐고.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임에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상황. 매번 나의 역할은 관전자의 몫이라 생각하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함께 촛불을 쥐거나 발 맞춰 걷질 않았다. 그저 나보다 좀 더 진취적이고 행동이 앞서는 이들이 한 겨울 찬 바닥에 앉아 촛불과 야광봉과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있을 때 몸이라도 녹히시라고 커피값을 대신 결재 해 두는 것으로 내 몫의 소임을 밀어두곤했는데 이러한 나같은 사람 역시 함께 까기도하고 함께 가기도하는 시민의 집단 중 하나이다.

결국 다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의 각자의 생계가 달린 세상이다. 이러한 바람들을 끌어올려 괜찮은 사회로 올려 앉히는 것이 정치라고 본다. 요동치는 경제를 잡아두고 민생의 불안함을 잠재 울 때 우리는 그 정치가 올바른 정치라 여긴다. 결국 너네끼리 싸움도 뵈기 싫고, 너네끼리 돈 더 많이 꿈쳐 둔 것도 뵈기 싫은 것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니네 싸움에 왜 우리가 등터져야 하는 것이 국민을 자극하는 것이고, 아파서 병원가는 것도 정치와 제도적 문제로 인해 제약을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수고로움을 감수하는게 매번 국민이어야 하냐는게 가장 큰 홧병의 모드겠지.


📖여러분에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했던 트럼프를 기억하는가? 뭘 더 뺏으려하나 싶은 무서운 정치놈들의 성향인거지. 이건 어느 정당이든 어느 대통령 아래에 있는 정부든 어느정도 잇속 차리기는 존재함을 알기에 무조건 적인 신뢰를 하지 않게되었다. 나는 이러한 팬덤과 극단적인 정치의 흐름에 감나라 배나라의 욕심도 없다. 줬던거 뺏들지 말고,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다는 듯 없었던 일로 만드는 그런 세상만 아니길 바라게된다.

📖하니포터 11기로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고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