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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장면들
오수영 지음 / 고어라운드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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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맺음말의 제목으로 적어두었던 '사랑의 참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랑의 장면들은 참으로 다양했고, 어느하나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애틋하고 귀하다. 나의 시절들을 더듬어가며 내가 살아낸 시간과 비슷한 온도를 하는 글을 볼때마다 혼자 추억팔이 하게 만드는 단락때문에 몽글거리는 마음과 함께 '맞아, 그땐 그랬지!'라는 듯 나의 청춘을 다시 데려다 놓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으나 이게 사랑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 이들보다는 나처럼 제법 여러 시절을 겪은 후에 사랑의 안정기에 접어든 사람.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도에 심취해 있기보단 잔잔함 속에 평온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 많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많은 순간을 접해본 후에 느끼는 안도감과 회상의 기운이 더 많이 스며있어 그런지 내 또래가 읽었을 때 같이 끄덕일 수 있을 장면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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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사람들_ 모든 것은 서서히 순환하며, 뒤돌아서면 지워지는 발자국처럼 순간적이다. 사랑과 삶에 대해 지금보다 더 무지했던 시절에는 단순한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았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모두 말할 수 없는 인생의 내밀한 사연처럼 느껴진다.
노을지는 바다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곤 했던가?
사랑하던 이와 손잡고 지는 해를 봤던 계절의 촉감? 두손 꼭 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애틋함? 익숙함과 진득함으로 가득 채워 또 우린 비슷한 시절을 겪고 있고 내년 이맘때에도 같이 오자고 약속하는 안도감? 같은 장면에 두 남녀를 놓아보더라도 자신이 겪고있는 상황에 따라 그들에게 투영하는 마음의 온도와 감정의 깊이는 다르다. 사랑에 서툰 시절이라면 붉은 노을이 꼭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부끄러운 마음과 불타는 애정의 온기를 닮았다면, 사랑이 진득해지는 시절엔 이 온기를 꺼트리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확고함이 될 수도 있겠다. 해변 하나를 바라보는데도 수만가지의 생각이 가득하고 수만가지의 이야기를 품어내는게 신기하고 우스운게 당신과 나의 관계이지 않을까. 바다가 품고 노을이 쥐고 있던 진짜 이야기와는 다르게 각자 제 멋대로 이야기해보는 사랑이겠다만 이 파도처럼 이 노을처럼 때론 이 순간을 닮아 계속 함께 하고싶은 마음의 끝은 다 똑같으리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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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보호자_ 어항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에게는 어항이 세상의 크기인 것처럼, 정해진 마음의 크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랑에게도 마음은 온 세상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넓이와 깊이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당사자인 우리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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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호도 자발적으로 이뤄져야만 그것이 노동과 강요가 아닌 순전한 의미의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완독 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랑, 어항, 물고기, 그리고 그 마음.
어항이 내가 안을 수 있는 사랑의 품이었고, 물고기는 내가 어여삐 키우고 지킬 사랑이라 명명하여 사랑의 보호자라는 이야길 풀어내었다.
내가 잘 기르고 보살펴야하는 존재. 그래야 내 품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오래 함께 있어 줄 이유가 생기는 생명. 티가 나지 않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눈길과 손길을 전해보며 허투루 하지 않아야하는 관심과 애정의 기운. 이 유일한 존재의 생명을 꺼트린다면 어항 속 물고기를 보는 낙으로 사는 나 조차도 생이 다할 것이라는 생각을하며 서로의 삶에 보호자로 여기게된다. 일상의 틈에 바지런함을 더해 건강해진 나의 사람과 나의 사랑.
생각해보면 누가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내며 감시 한 적은 없다. 내가 좋아서 했던 시작이었고, 내가 기뻐서 하는 행동들이었다. 결국 나 좋자고 시작했던 마음의 부지런함이었으니 비로소 내 어항이라는 품에 안착시킨 후에도 기쁜 마음으로 오래오래 보듬어 주었으면 한다. 노력의 강요, 마음의 갈취 없이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던 어린시절 학습지 CM송과 같은 그런 익숙한 마음의 부지런함을 간곡히 부탁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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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두려움_ 어른의 사랑이 두려운 가장 큰 이유는 과연 이 사랑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과, 그럴만한 단단단 생활력과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정. 그리고 과거처럼 혼자 살아남기 위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운 망설임과, 태연하고 확고한 척 자신을 위장하는 자기기만과 위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하지만, 어른의 사랑은 더더욱 그러한 무게와 이유가 길게 엮여있다. 어른은 책임 질게 많다. 나 하나 건사하는건 기본 옵션이고, 나를 키워냈던 부모를 향한 사랑, 나로인해 태어나고 꽃피울 생명에 대한 사랑, 나 만을 바라보며 생의 순간을 함께할 사랑에 대한 책임은 눈에 보이는 부피의 가늠이나, 수치로서의 무게 환산이 안되는 묵직함이다. 그래서 내 또래가 하는 현재진행형 사랑은 늘 엔딩에 대한 확답을 받고서야 시작하려한다. 어린시절이야 좋아서 함께 있고 싶고 좋으니까 미래를 약속하지만, 중년의 사랑에서는 이따금 찾아올 한계점과 부분적인 장애물에 대한 명시를 먼저 한 후에 그럼에도 가능한지, 그럼에도 함께 할지를 묻는다. 나도 확신이 없는만큼 당신까지 이 불확실한 생에 손을 끌어당길 수 없다는 마음이다. 이걸 누군가는 두려움이라 하겠지만 또 비슷한 순간을 겪어낸 사람에게는 조심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라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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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모습을 바라보다_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평범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일상을 이루고 있는 장면들 중 당연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남들 하는 만큼, 남들속에 있어도 티 안 날 정도로, 그러한 평범함은 비범함 만큼이나 눈물나게 어려운 일상이다. 어찌나 그리 많은 굴곡이 있고 많은 위기가 있는지. 얼마나 행복하려고 지금 이렇게 힘든가를 생각하며 헛웃음 치기도 하는데 생각해보면 이 굴곡을 겪지 않길 바라게되는 사랑이지만, 이걸 겪고도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지 않을까도 생각하게된다.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겠다는 약속 보다는 살면서 소소하게 웃을거리를 만들어줄 사람을 찾게되는 이유도 그에 해당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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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롭고 안정적인_ '똑같은 시기를 건너면서 누군가는 지금을 안정기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지금을 권태기라 부른다. 같은 시기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분명 시기의 문제라기보다 생각과 마음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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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 이 순간을 안정기로 삼을지 혹은 권태기로 삼을지에 관한 모든 결심 또한 연인들의 몫인 셈이다. 자신들의 마음을 아는 건 오직 사랑하는 연인들뿐이므로.
권태기라고 부를 만큼 오래 만나고, 안정기라 여길 만큼 그 사람으로 인해 얻어지는 평온이 있다면 그만큼의 시간이 보장하는 제법 괜찮은 관계라는 증명으로 믿고싶어진다. 싸우기보단 싸울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 상대가 싫어할 일을 이미 알고 있기에 굳이 그러한 다툼거리를 만들지 않는 배려. '내가 그 사람을 제일 잘 아니까!' 할 수 있는 존중의 마음. 그게 긴 호흡으로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 어항 속 물고기의 삶이라 말하고싶다.
우스개소리로 청춘을 다 받칠 만큼 연애를 했고, 연애 하듯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보니 각각의 단상들 속에서 나의 서툰 연애시절도 생각나고, 이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일시정지된 화면처럼 보이기도했다. 함께 웃는 포인트가 같은 것, 둘이 있을 때 가장 편한 마음, 척하면 척이라고 눈빛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차리는 감정의 동요. 그러니 사랑의 장면들은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의 찰나라는 것을 느낀다. 그 순간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여기저기 잘 숨어서 알아봐달라고 하는지.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사랑이란 놈을 통해 이 사람 없었음 얼마나 재미없는 삶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다음 회차의 장면에도 꼭 찾아와 주길 바라게된다.
사랑이 완성된 상태로 지속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문장. 그리고 그 사랑이 잘 지내고 있으며 잠시 방황을 한다 싶어도 곧장 돌아와 내 곁에서 진득히 붙어있어주길 바라게되는 예쁜 찰나를 기대하며 다음 단편은 내가 적어도 될 만큼 괜찮은 사랑을 계속 하고싶어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