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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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게 없고,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교차하는 동네. 모든 것들이 있어서 여기 뤼미에르 빌딩의 거주자들 또한 어느하나 겹치는 캐릭터 없이 모든 존재들이 촘촘히 들어앉아있다. 그래서 더욱이 핍진하지만 이것이 저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환상은 아닐지를 가늠하게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살고 있지만 다각화의 시선이 때로는 착각과 오만이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하니 있지만 없을 수도 있고, 없는데 있을거라 생각을 하게되는 존재들이 하필이면 800번대 호수에 기거하는거라 여기며 보게된다.

그렇거 있잖아. '하필이면...' 시리즈 같은 것. 이렇게 모아 놓기도 어려울 조합. 그런데 내가 모를 뿐이지 내 주변에도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의혹과 생각들. 저자는 그 생각에 이야기를 입혀두었다. 어느 하나 짠하지 않은 존재들이 없다. 하필이라는 말에 또 하나의 자극적인 양념인 '어떻게 하다가...' 로 이어지는 우려섞인 걱정의 마음. 그래서인지 전부 짠내가 풍긴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입주민을 지칭하는 평범한 단어들이 없다. 이 조합에 낀다면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바뀌어 한 자리 꿰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로 각자의 짠함과 고단함이 묻어있겠지만 유독 이들에게는 퀘퀘한 어둠의 냄새가 유독 짙다.

슬픔을 먹고 사는 박쥐인간. 타인의 슬픔을 관망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영위하는 것. 가출 소년에서 흡연 임산부로 이어지고 다시 거울장난하는 장애인으로 옮겨가는 슬픔의 시선. 모든 것이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약한 존재와 대접받지 못하는 것들로 위안을 삼는 것을 보면서 우리 또한 박쥐인간의 유전자를 품고 있으나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임을 느낀다. 801호부터 강하게 느껴지는 익숙함. 티나지 않는 나의 다면성과 숨기고픈 성질머리들이 하나씩 까발려지게 될 수도 있겠다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청에서도 비둘기 밥을 준다는거 그거 진짜야? 여기 책에서만 그러는게 아니고?(허구의 이야기 일 것이라 단정 짓지만 어느샌가 진짜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저자의 사실감 넘치는 문장 덕분에 난 또 홀랑 속는 기분이야) 일단 이야기를 이끄는 존재들은 세상이 만들어 둔 평범함의 기준과 사뭇 다른 특혜 받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청각장애인이며 다른 감각으로 소통을 하는 남자, 왜소증이며 이 남자를 사랑은 하지만 이게 맞는지 계속 의심을 하는 여자.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분류로 인해 채용된 조직에서 이 둘의 만남과 친분마저 시선을 받게 될까 우려하는 여자의 앞선 걱정도 한몫한다. 특히나 공기업이 더욱 그러한 갈래를 반영하여 채용하지만 말이 채용이지 별개의 존재로 선긋기하는 꼴을 심심찮게 봐왔다. 그러니 왜소증 여자 또한 이 시선을 의식 하는 것일테고, 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청각장애인 남자가 의아할 뿐이고, 이 조합을 가십거리인냥 짝짝 씹어댈 멀끔해보이지만 입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인간들의 온상이 명확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다들 아는 그 꼴이라 예상이 가능했다.

805호는 신박한 내용 전달 구조였다. 두 단으로 나뉜 이야기. 학창시절 암기할 때 쓰던 2단 기록인데 그걸 책에서 보니 생소한데 또 뤼미에르 피플들의 이야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문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순환 구도의 이야기. 빚 - 매품 - 돈으로 때리는 게임 - 사고사 무언가 허술한데 그게 또 다들 그렇게 살듯 완벽함 없는 생의 허점 같아 이 순환 구도가 결국 돈과 돈에 휘둘리는 사람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비단 여기 뤼미에르 피플들에게만 적용 될까? 이 이야기가 10년도 더 된 원작이 있는 개정판인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또한 10년 후에나 똑같은 화두가 될 듯한 소재. 자신들의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키우고, 병이 들었다고 외관상 보기 싫다고 버리고를 반복하는 인간과 버려지는 존재가 마주하는 세상. 온전히 생과 사를 책임지지 못할 거라면 키우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티에게 이입하기보다 마티를 버린 주인에게 화가 나고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자체 또한 현실과 동일한 결과 처럼 보여 짜증을 유발한다 .(내용이 싫은게 아니라 너무 현실성 짙어서 그러함) 버려지는 것들이 맨땅에 헤딩하듯 겪어내는 세상은 동물이 아니라 자립청소년이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딛거나 옳지 못한 방향으로 남을 해하고 기득권을 취하는 것과 같은 씁쓸한 결말을 염두해두고 이야기가 흘러간다. 보호자에게 버려진 존재는 온전한 세상에 도킹 못 하는 요소를 모두 습득하여 삶을 이어가는 마티가 마냥 고양이로만 보이지 않는다는게 씁쓸한 이유가 된다.


밤섬이 어떤 곳이었더라? 노래로 섬을 재건하는 무당이라 봐야하나 종교인이라 봐야하나?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 앞서 나온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미래따위 없고 현실이 버겁고 하루하루 허덕이는 이야기들이었다. 읽는 과정에서 지치고 암울해진이 우려되었는지 8층 존재들 중 '그나마' 희망의 싹을 틔울 마지막을 남겨 둔 듯 했다. 틀림없는 사실은 빛은 다시 돌아오고 희망이 있다면 절망은 저물기 마련이라는 느낌에서 마지막을 '되살아 나는 섬'으로 미리 못박아둔게 아닐까를 생각하게했다.



연민의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 본 다는 것에서 오는 모멸감의 감정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시작은 연민이고 결말은 안타까움으로 마무리하도록 설계되어있다. 뤼미에르 8층의 기운이 유달리 스산하고 기묘한게 아니라 그냥 이 도시 전체가 그러한데 8층의 입주민들이 조금 더 도드라질 뿐이고, 저자의 눈에 띄였을 뿐이겠지.

우리도 가끔 지인들과 이야기 할 때 희안하게 불행 배틀하며 자신의 고단한 생의 역사를 읊을 때가 있다. 결국 그거였다. 그러한 고단함 속에서도 '나는 지금 이렇게 잘 살아오고 있지 않냐?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대단해! 그러니 나 좀 기특하게 여겨줘!' 라는 의중이 숨겨져있다.

그러니 이들에게도 각자의 숨구멍을 찾고 있는 중일테니 마냥 짠하게만 보지 말고, 잘 하고 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나중엔 괜찮아 질 거라며 허망한 희망의 말이라도 더 얹어주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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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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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이나 그룹형 글쓰기 교실, 자신의 책을 내기 위한 강좌들도 많던데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다. 꾸준히 해 볼 자신도 없거니와 막상 내 앞에 놓여진 깨끗한 노트북 화면 보면 말문이 턱 막히고, 글들도 갈피를 못 잡을게 빤해서 이렇게 혼자 글쓰기 안내서와 독대하며 나를 더 까 내려가 볼 요량으로 명절 연휴 긴 시간동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싸워볼까 싶다.

1부 당신에게는 어떤 문장이 있나요 / 2부 좋은 글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3부 말해지지 않은 것을 써볼까요 / 4부 쓰는 듯 살고, 사는 듯 읽으세요

에필로그: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총 4부로 나누어 글과 글을 쓰는 나를 이야기하는데, 결국 나는 4부의 문장으로 살고싶고, 에필로그의 문장이 곧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차피 소설도 아니니까, 자신감이 하락하고 의욕마저 상실하기 전에 에필로그부터 읽어가며 뒷북치듯 뒤에서부터 읽어간 후 다시 앞에서 당당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독서 해작질을 감행했다.

저자는 말한다. 사는 게 그렇듯이 글쓰기에도 '판타지'란 건 없습니다. 그냥 한번 썼는데 멋진 글이 나왔다는 식의 '아름다운 드라마'같은 건 없습니다. 한 만큼 늡니다. 거기에 저자는 내 행색을 다 보았다는 듯 이 문장을 덧붙인다. 십수년 동안 뼈 빠지게 일만 하던 노동자가 가끔 책이나 잡지를 읽으며 글쓰기의 꿈을 키웠다고 이 글을 '잘'쓸 수 없습니다. 모질게 들리겠지만, 그게 현실(진실)입니다.

이 말에 정신차리라면 뒷통수를 얻어 맞은 후에야 눈에 힘이 들어가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감을 느낀다. 우리가 밥벌이의 수단인 일을 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라는 점. 그냥 일을 한다고 자동으로 늘어서 잘 하게 되는 법이 없는 것 처럼, 뭔가를 해야 일이 늘듯 거저 글쓰기는 없었다.

'허투루'대해서 실력이 길러지지 않는 점. 그리고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어야 '글을 잘 쓰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나란히 뛰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나는 뒤쳐진 채로 방관만 했음을 느낀다. 나를 앞서서 힘차게 발을 구르고, 열심히 팔을 휘젓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연신 감탄만 하고 있었던게지.

1부 당신에게는 어떤 문장이 있나요의 끝엔 내가 진실로 묻고 싶었던 한마디가 부록처럼 이어져있다.

글감을 잘 풀어내기 위하여에 해당하는 답변이었다. 글을 잘 빚어내는 것도 좋지만 몇개의 핵심 단어와 문장을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떻게 풀어내어 잘 떠먹여 줄 것인가가 어렵다. 육하원칙의 '어떻게'와 '왜'의 경계이기도 한데 속시원히 내 마음을 다 꺼내어 풀어내고 싶은데 매번 엉키거나 한쪽만 과하게 뭉쳐지는 기분이다. 글의 시작은 담백하게, 윤라적 주제를 씌우려 하지 않으며 유일성에 더 큰 힘을 싣어주길 바라고있다. 보편타당한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며 그걸 기대하며 읽는 이들은 없다는 점.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주길 원하는 그것에 집중하라는 듯 ai가 빚어내고 gpt가 반듯하게 재단한 글에 속박당하지 말길 바라는 말들이었다.


3부 말해지지 않는 것을 써볼까요의 단락 중 많이 공감하며 읽었던 감정은 피부 밖에 있다는 이야기.

두달 전 즈음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온 일이 있었다. 그때 격양되어있던 기분과 이른바 욱하는 마음이 겹쳐서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이 와르르 쏟아지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럴 때엔 격동보다는 평정심이 필요했다. 감정 자체는 글이 아니니 감정을 잘 구슬려서 감흥을 일으켜야했는데 그걸 다룰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절제'는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겁니다. 넘치는 걸 '과잉'이라 하듯 나만 붕 떠있고 독자만 무덤덤한 전달이 아니라 그 반대의 액션이 취해 지도록 감정의 매개체를 끌어오는 연습이 필요함을 느꼈다. 감정과 감정의 직거래 대신(이 때엔 매번 욱하고 왁하는 다급함이 양념처럼 뿌려진 상태) 거간꾼 같은 매개물에게 한번 거르고 옮겨져 말갛게 남겨진 기운을 전하는 연습이 필요했다.

저자는 말한다. 여전히 직업으로 하지 않을테지만 그럼에도 '잘'쓰고 싶다는 것. 강요하지 않고, 마감에 쫓기지 않고 한가로이 글을 쓰는 과정으로 얻어내는 글들의 진짜 힘을 기대하게된다.

습관같은, 그런데 이제 습관인지도 모르는 것들의 행동들의 틈에 습관같은 문장 기록, 일상같은 단어의 정확한 해석, 당연하게 여기는 독서의 찰나까지도. 그러면 '잘'쓰고 '적어도 나잇값 하는 어른'이 될 거라 했으니 당장은 어렵겠으나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즈음엔 나잇값도 하는데 잘 쓰고 잘 하는 좀 괜찮은 어른으로 바꿔 살아도 좋지 않을까를 기대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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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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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단 저자 이름으로서 주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세히 살펴 보지도 않고 덜컥 구입 한 것도 있었다. 지금것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 영화나 영상화 되는 이후 출간물을 염두하고 이야기를 꾸린게 아닐까 싶어지는 소재였다. 이야기의 중반부에는 조금 버겁다 싶은 문장의 장황함이 있었다.

절창이라는 제목 답게, 베인 상처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게되는 여성이 이야기를 끌고가고 있으며, 사랑인지 소유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기도한다. 이 여인을 소유하고 있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능력을 필요로 한건지, 능력을 가진 여자를 사랑하기에 더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 여인을 위해 했던 행위로 인해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소실한 채 살아야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다. 글로서 그 공간을 다 표현하지 못할까봐 세세하게 기록했으며, 때론 장황하기도 했다. 촘촘한 설명은 눈 앞에 확실히 현상을 그려내고 있긴 하나 한편으론 더디고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새장 속 어여삐 여기는 애완 동물같은 그녀를 위해 독서 담당 상주 선생님으로 들어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은 단지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확고했던 목표. 남편을 죽이려 한건 아니라는 말은 그녀를 더 자극시킨다. 죽일 의도는 없었던 이, 상처로 모든걸 말하는 이, 그들의 능력으로 남편을 잃은 이. 모든 패는 다 공개되었다. 이로서 상황을 후반부에 황급히 마무리 지으려는 듯함을 느꼈다. 페이지는 얼마 안 남았는데 이야기는 끝맺어야하고, 그러니 갑자기 빨라지는 속도. 중반부의 느슨함이 우려스러웠는지 후반부에 빨라지는 서사들 주워담기.

이번 소설은 나에겐 미감이 뛰어난 영화나 넷플릭스 단편물 제작을 위해 쓰여진 시나리오처럼 와닿았고, 그래서 조금은 아쉬운 저자의 작품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이건 뭐, 전적으로 내 생각이니 다른 독자들의 의견이랑은 다를 수 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대화들 속에서 고전을 인용하는 보스. 읽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던 아가씨. 그리고 새장처럼 그 집에 갖혀살며 서재의 책들과 이야기 하며 지낼 수 밖에 없던 조건. 책이라는 매개체 덕에 교사로 들어 올 수 있었고, 책 속에서 그것을 찾아 낼 수 있었던 이 집의 특성. 보스와 아가씨의 사랑은 애절하다거나 측은함의 느낌은 받지 못했고, 그저 책으로 흥미를 끌어내려했던 좀 알던 보스와 어떠한 매체와 접근할 수 없도록 갖혀진 공간에서 유일한 책을 통해 숨구멍을 트여보려했던 아가씨, 이들간의 흔한 작업으로 죽은 남편에 대한 애닳음과 복수만이 그득했던 선생만 다급했고, 조마조마했던 시간들 뿐만 기억에 남을 듯 하다.



📖독서 같은 걸 왜 배우나 생각했으면 내가 여기 올 일은 없었겠지? 시험이 아닌 한 그게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생각하라고 내버려두면 돼.

행위의 목적 자체가 세상에 만연한 쓸모없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데에 있다는 것. 결국 인간의 살아 있음 자체가 쓸모없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책을 읽고 반드시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정관념과 강박의 소산에 대한 방향까지 뻗어나가기엔 선생은 다급했고, 아가씨는 이 생활에 적응한듯 무뎌져있었음을 느끼게된다. 효용에 올인하다보면 결국 아가씨도 보스의 효용가치의 수단 일 뿐이고, 선생에게 아가씨 역시 남편의 사인을 알 수 있는 실마리의 끄나풀 그뿐이었다.


예쁘게 꾸며지고 가꿔지는 새장 속의 애완동물같아 측은하긴 하지만, 결국 또 한번의 일탈이나 탈출에 목숨까지 걸 여력을 두지 않는 그저그런 보스의 예쁜 소유물로만 보게된다. 이 사랑이 특별하다 하기엔 소유의 목적이 더 컸고, 유일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의 비중이 컸기에 이 사랑이 유독 귀하게 여겨지진 않는다. 모두가 멀리하지만 아가씨만 곁에 있으니까, 그저 시야에 걸리는 상대였기에 시간이 흐르며 같이 흘러가던 사랑의 감정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겠다. 운명을 믿는다거나 위험한 상황 속에서 싹트는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는 그런 낭만주의는 아니라 그런지 특별함으로 포장 할 수 없었다. 시야에 얻어걸린, 주변에 있어서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결국 어그러질 존재의 사랑일 뿐이라 말하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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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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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두 아이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상황과 그럴 수 밖에 없던 그간의 시간들을 보여준다. 역시나 떠오르는 순간들을 긁어보면 불행이 더 크게 존재한다. 벽돌집에서의 기억에 행복과 기쁨은 없다. 비, 물, 숲, 산 어느 하나 순조로울 것 없는 자연은 벽돌집을 나서면 아이들을 막아줄 것 없는 세상에 내몰린 것 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해수와 유림이 이야기해주는 벽돌집에서의 생활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그들만의 왕국을 보여준다. 벽돌집은 나라가 지정한 법이든 규율이든 보호받을 권리든 모든게 통용되지 않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군림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며 아이들을 굽어살피는 척 하는 어른들. 꼴을 보면 각이 나온다. 날로 먹는 어른들의 더러운 짓거리. 해수와 유림의 일련의 과거들은 모두 주목받지 못하고 소외되며 여린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자비함을 내비친다. 죄책감은 없다. 먹이고 재우는데 뭘 더 해줘야겠냐는 듯 되려 큰소리를 내새울듯한 잘못된 방식의 포용이다. 보호받는 듯 보이지만, 방관보다 더한 착취의 과정 속에서 이 아이들이 '파사주'가 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굳이 얻급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알 것이다. 스스로 개척해가는 생의 여로는 불행을 극복하기 이전에 살고자하는 어쩌면 당연한 삶의 안간힘일지 모른다. 자신의 곁에 있던 모든 아이가 주어진 틀과 한계를 깨부수며 나올 수 없음을 알기에 유림의 손에 쥐어진 R을 통해 사후의 흔적이라도 그 벽돌집을 나와 유유히 흘러가도록 하는 과정에서 나는 또 한번 사람이 제일 무섭고 사람이 제일 추악하다는 그 말을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도 알았고 어른들도 알았다. 누군가는 알지만 모른척 했다.

밤중의 야구. 그것도 실내에서 이뤄지며 게임이 아니라 가학의 경기. 어느 하나 말리는 이도 없고, 안되는 것이라며 소리치는 이도 없다. 그들의 행동을 막을 시 다음 타자는 본인이 될 테니까. 침묵이 당연했고, 외면이 어쩌면 더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여겼을 터. 왜 말리지 않았냐고 악을 써댈 사람은 없었다. 내가 죽을듯 맞든, 니가 죽을듯 맞든 크게 변하는건 없을 테니. 그러니 알아도 모르는척, 모르면 더 외면하는 척을 하며 흐린눈을 했을 그 방 아이들이 측은하고, 그 건물 어른들이 야속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했거늘 이러한 상황이라면 사람 자체가 미워지는 걸 겪을 수 있다. 쉽사리 고쳐 쓸 수 없을 인간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이 빠져나온 건 무덤이 아니라 벽돌집이었으니까. 죽지 않고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죽을 각오를 하고 나와야하는 벽돌집. 평생 죽은 듯 살 것인가, 나오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몇번이고 다시 찾아와 벽돌집으로 박아둘 상황을 항시 고려해며 숨어 살 것인가의 선택지. 무덤은 죽어 마음이라도 편히 쉴 수 있을지라도 벽돌집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원망하고 명치를 사정없이 쳐 댈 만큼 원통한 상황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 문장 앞에 나열된 사건들만 봐도 이러한데, 후반까지 다 읽고나서는 어떻게든 빠져나오려했던 아이들의 행동에 이해가 갔고, 비슷한 여건의 영화들도 떠올랐다. 그것들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영화였는데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실화라고 언급을 하진 않았으나 우리가 모르는 구석지고 사람의 시선이 덜 가는 곳에서 심심찮게 이뤄질 만한 인간의 잔상이라 문장들을 쉽게쉽게 넘길 수 없었다.


📖식당에 놓고 온 우산처럼 잊어버리고 다시 찾으러 오지 않았다. 벽돌집 아이들은 자신을 버린 엄마아빠가 없는 고아로 여기며 자랐다. 하나의말씀에 따르자면 육신으로 낳은 자식은 가인이었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야 아벨이 될 수 있었다.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찾아봤다. 대학을 기독재단에서 졸업했고 채플 수업으로 들어봤으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던지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기에 정확한 의미를 알고 책을 봐야 이해 할 것 같았다. 르포 채널이나 꼬꼬무를 통해 봐왔던 사이비 교주와 그들을 떠받드는 신실한 사람들. 그리고 신의 믿음 아래 소외받은 자들을 보살핀다며 아이들을 보육하는데 이는 내가 아는 보육의 의미가 아니었다. 마치 농경 사회에 자식을 많이 낳아 일손을 추가하기 위해 몸집을 키우던 시절처럼 아이 한명은 곧 집단의 수족을 하나 더 늘리는 구실로밖에 여기지 않음을 드러냈다. 뭣모르는 어릴 때 데리고 와야 포섭이 잘 되고, 순종적인 행실을 보여 줄 것이 확보된 작업과도 같았다. 너를 낳아준 이들도 버렸고, 세상이 너를 외면했으나 신께서는 너를 부르시고 품었다는데 다른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원장과 주지는 각자의 파트너와 앞으로 나가 연인처럼 블루스를 추고, 친구처럼 어깨동무한 채 노래를 부르고, 대여섯 살 먹은 아이처럼 손뼉을 쳤다. 그들은 술을 우유처럼 꿀꺽꿀꺽 마시고, 안주를 과자처럼 아삭아삭 씹어 먹었다. 할렐루야 아미타불 만세! 이 땅에 크게 외쳐라.

다들 이렇게 말하겠지.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진 않다고. 그리고, 모든 종교인들이 이러한 행실을 보여주진 않는다고. 하지만 이러한 자극적인 사건에 연류되며 거론 될 때마다 믿음에 대한 의문이 추가될 뿐이다. 일반인으로서의 행각보다 종교인으로서 얻어지는 혜택을 짊어지고 쉽게 가려는 사람들의 검고 찐득한 속내. 이와중에 아이들은 그들의 술시중을 들기도하고, 테이블로 음식과 술을 날으는 일을 해야 했으며, 이 모든 과정들을 알면서도 못본척 해야했다. 이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가 목숨줄을 유지하기 위해 암묵적인 룰 처럼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이며 읽게 만든다. '이게 맞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벽돌집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한 사람의 흔적이 사라져도, 정말 죽어나가도 잔잔하기만한 벽돌집.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에 각자의 파트를 쳐내기 바쁜 사람들마냥 좌우를 살필 여력 없이 내 앞에 닥쳐온 일들만 보고 내 몫의 일에만 집중하려는 듯한 아이들의 멍한 눈빛. 누군가 반박을 하거나 찾아 헤메거나 이건 아니라고 한다해도 변하는건 없다. 뉴스 한 줄도 실종 신고 수사도 없도록 쳐낼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임을 한 번 더 확인하게 만들었다. 보고 들은게 그런 것이라 아버지라는 분이, 선생이라는 작자들이 하는 걸 아이들끼리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왔다. 폭력과 갈취는 삐딱한 방향으로 내리사랑처럼 흘렀다.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렸고, 울음으로 거짓의 회개를 토해내는 과정. 유림이 살아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라 했던 말을 통해 삶의 의욕을 놓기 딱 좋은 상태로 내몰고 있음을 보였다.


📖해수가 짓밟히는 동안 아버지 선생님은 신도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하나의말씀을 안 믿으면 여기가 지옥이야.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돼. 너희가 안 믿어서 걔들이 죽는 거야. 그게 바로 지옥이야.

힘을 잃을까 두려워 아버지 선생이 울부짖고,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 신도들은 눈을 감았다고했다. 뭐랄까, 다음 대사와 다음 표정을 복기하는 듯한 배우들의 열연 과정. 최선을 다해 NG없이 원테이크로 가려는 한 컷의 완벽한 조합처럼 현실이라 하기엔 너무 잘 짜여진 씬을 본 듯 했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믿음을 져 버렸기에 행해지는 죽음은 또 어떠한 영적인 기능을 발휘했길래 가능하다고 여기게 되는걸까. 인간, 가인, 아벨. 각자가 맡은 배역에 심취해 사람 하나 죽이는게 이렇게 쉬운 걸 보며 해수가 처음은 아니었음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해수 이전에 또 다른 아이들도 같은 방식으로 내몰았을 거짓의 눈물이 더럽게만 느껴진다.



'카지노 베이비'도 그러했지만, 이번 '파사주'역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여전히, 그리고 당연하다는듯 이뤄지는 더러운 인간의 온상이다. 픽션이길 바라지만 세상을 그리 선한 사람들만 존재하는게 아님을 매번 깨우친다. 지켜주고 챙겨줄 든든한 어른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들은 어쩌면 유일하게 먼저 말을 걸어줬을 검은 손이며, 아닌걸 알면서도 잡을 수 밖에 없는 썩은 동아줄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을 낳고 길러낸 생물학적 부모마저 외면한 아이들이니 제 목숨 하나 건사하려면 붙들어야하는 몇 안되는 어른이었겠지. 그래서 더 안쓰럽다. 노동의 착취는 물론이고, 정신적 세뇌와 때때로 이어지는 성적 유해는 어디든 도움을 요청 할 길이 없고, 도망 칠 수 없는 감옥이었을게 눈에 그려져 책 표지 색처럼 아이들의 세상은 늘 회색빛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 지 몰랐고, 이게 나쁜 것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던 세상이라 아이들의 무지가 이상한게 아니라,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했을 어른들이 이상한 것임을 이 이야기로 씁쓸하게 또 한번 배워내는 중이다.

📖하니포터 10기로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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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피버 - 긴 겨울 끝, 내 인생의 열병 같은 봄을 만났다
백민아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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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리디 어워즈 로맨스 E북 신인상을 수상한 백민아 작가의 대표작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통해 치유와 희망을 배우는 이야기로 나도 위로받고싶기도 했다. tvN에서 드라마로 제작되 2026년 01월 방영을 앞두고 있다하니 늘 그러했듯 영상화 되기 전에 원작을 읽어보며 글로서도 눈앞에 영상이 그려지는 신기함을 누려볼까한다.


일단 700페이지의 벽돌책. 얼마전에 500페이지도 근근히 읽었는데, 712페이지? 와... 나 괜찮을까 싶어하며 주말에 깨작깨작 책 앞부분을 넘겨 읽었고, 이후에는 생각보다 후루룩 읽어졌다. 마치 대본집을 읽는 느낌이랄까? 드라마로 제작되어 있지만 아직 방영 전 이니 대본집이 나온건 아니었다. 원작을 가지고 극본을 연출하는 사람도 원작자 백민아 저자가 아니라 김아정 드라마작가님이셨다. 그러니 이건 확실히 드라마를 위해 각색된게 아닌 원래 소설인데도 배역들이 각자의 대사를 갖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니 술술 읽혀들어가게했다.

완독 후 곰곰이 생각해봤다. 다양한 드라마를 챙겨보진 않는데,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들이 몇 개 있더라구.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드라마와 비슷한 결을 띄고 있는 뉘앙스를 얻었다. 이 소설은 이도우 작가님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따뜻함과 폭닥함을 갖고 있다면 이해가 빠르려나? 요즘처럼 자극적인 소재들이 난무한 컨텐츠들 속에서 잔잔하겠지만 그래도 여러번 눈길을 주고 싶은 사람 사는 이야기. 아픈 날도 있고, 더러는 오해로 가득차 있어 서러움으로 움츠러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곁에 있는 사람 덕에 살아낼 용기를 얻고, 더 잘 살아가고픈 욕심이 생기는 이야기. 딱 그런 결을 띄고 있어서 어찌보면 심심할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슴슴하니 목구멍에 걸리는 것 없이 후루룩 넘기며 속을 뜨듯하게 데울 만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나에게 그들은 그렇게 기억이 될 듯 하다.

소설은 트라우마로 인해 상처를 안고 시골 학교로 2년간 근무하고 돌아갈 교환교사 윤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름은 따뜻하고 화사한 봄인데, 얼굴에는 곧 비가 쏟아 질 듯한 흐린 상태이며 교류도 적고 말수도 적은, 어둠이 가득한 봄선생. 그러한 무채색의 봄선생에게 나비처럼 다가오는 남자 선재규.(소설을 읽은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나비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외형은 근육질의 키크고 사투리 짙은 걸쭉하고 장대한 청년이라는 점. 팔랑팔랑 나비가 아니라 저벅저벅 대형 나방이라 해두자( ͡~ ͜ʖ ͡°))

고2담임 윤봄과 학급 학생의 보호자이자 삼촌이며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 없는 윤봄과 정 반대의 결을 지닌 선재규. 윤봄이 아는 선재규의 처음과 선재규가 처음 마주쳤던 윤봄은 다른 시작이었고, 몇몇의 사건으로 인해 윤봄은 제 이름을 찾듯 환해졌고, 밝아졌으며, 과거의 오해들이 해결되지 않은채 딱딱하게 굳어져있던 편견의 꺼풀을 벗어낸 선재규의 뒤 늦은 성장의 시간이기도했다.

깍쟁이같은 서울여자와 투박하지만 내 사람 챙기는 것 하나는 기가막힌 시골 직진남의 조합. 유명한 대학교수 아버지와 수려한 외모의 배우 엄마 아래 부모의 장점만 물려받은 봄과는 상반된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내던져 졌으며, 친 혈육도 아닌 어찌보면 남남이기도한 조카를 데려다 키우는 자수성가형이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곧은 남자. 보여지는 것에 익숙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밀이 많고, 보여지는 것에는 상관없이 내실을 다지고 자기 사람 챙기는 것에만 집중하는 성향마저도 다른 주인공이다. 일단 윤봄과 선재규는 어떠한 성정도 겹치지 않는 극과 극의 사람이다. 그래서 이 조합이 재밌다. 혼자 있으면 세상 단조로운 삶이지만 둘이 맞붙여놓으면 사소한것도 웃게되고 걱정스러운 일들도 별게 아닌 듯 되어버리니 각자가 가진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좋은 조합이기도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에겐 좋은 사람이 끌어주고 나서주기도 한다는 점. 한결을 걱정하는 교사 봄. 반 친구 세진의 예민한 내신관리에 같이 마음쓰고 불안한 마음을 잡아주는 한결. 부모가 없다는 설움이 덜하도록 애쓰는 삼촌 덕에 큰 이탈 없이 잘 자라주고있는 한결. 방관만 할 뿐 직접적인 도움의 손길이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 속에서도 오갈곳 없는 어린 재규를 재워주고 마음써줬던 숙박업소 사장님. 배정된 업무에 대한 예민함보다 같이 으쌰으쌰 잘 해보자며 밥친구도 되어주고 걱정거리도 분담해주는 2학년 1반과 3반 담임 선생님. 첫 만남의 오해는 오해로 끝이나게 했고, 너무 사랑하고 애틋하고 잘하니까 더 잘 하길 바랬던 세진과 세진 부모&오빠와의 관계성. 답사 때 만났던 학생을 기억하고 가출임을 짐작 후 외면하지 않고 세진을 챙기며 낯선 곳에서의 불안함을 경험하지 않도록 챙겼던 필립의 귀한마음. 핑계의 구실을 삼고 싶었고, 저보다 잘난 동생이 얄밉고 그래서 모든 탓을 돌리며 자신의 잘못과 일그러진 행실은 외면하는 강자인척하는 약자 윤청과 다 져주고 큰 소란 안 일으키려하는 윤봄. 자연재해로 불안하던 밤, 자신의 집을 내어주며 동네사람들의 안위를 챙기던 재규.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를 챙기고 병원에 데리고가 검사하고 예방접종 놓아주며 버려진 생명에 대한 마음을 쓰기도하는 봄. 자신의 신변도 보장하기 못하던 낯선 중국땅에서 자기를 챙기기보단 남의 위험을 모른채 하지 않았던 청년 재규와 그 고마움을 알고 지금까지 함께하려는 중국 사장님. 각각의 단상들이 조금 뒤죽박죽 적혀있긴 하지만 어느 하나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엮여있고 설킨 관계이지만 서로가 꽉 붙들고 있기에 살 수 있었고,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못하면 도움을 받아 볼 수도 있었고, 그 고마움을 앉고 살다 내 능력에서 해결이 가능 하다면 기꺼이 마음을 써가는 과정을 만나봤다. 사람 윤봄이 누릴 인생의 봄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깨우는 계절의 봄도, 마음을 다스리며 주변을 바라보는 공기의 흐름의 봄 마저도 선한 누군가로 인해 순풍처럼 밀려 올 수 있고, 밀려 보낼 수도 있음을 알게 했다. 봄이 모르고 살아온 재규의 어린시절을 보듬기도했고, 봄이 이야기 후반부에 겪게되는 마녀사냥과 그 사건의 실마리를 끄집어내는 것도, 내 사람 챙기고픈 애정의 공기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봄의 열병이 아니라, 세상 모든 기운을 끌어오는 따뜻한 세상의 시작과도 같은 그럼 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나도 선한 사람으로 살고싶어지게 만들었고, 이 드라마가 시작되는 2026년 1월부터 종영 후 마주하게될 그 해 봄 역시도 따뜻하고 산뜻하길 바라게된다.

우리에겐 이 봄이 다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봄이니까.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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