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 - 빨래골 여자아이가 동대문 옷가게 알바에서 뉴스룸 앵커가 되기까지
한민용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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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티비를 보지 않았다. 원래도 라디오나 오디오가 익숙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티비를 틀어도 시선을 가게 하는 것들이 없었다. 부모님과 살 적에는 안방과 거실의 티비가 각각의 다른 방송을 송출했고 각자 떠드느라 바빴다. 내 가정을 꾸리고 거실 티비를 두었지만 일주일에 티비 트는 날이 한번 일때도 있었고, 그마저도 거르는 날이 있어 매번 켤 때마다 셋톱 업데이트로 긴 시간을 잡아먹기도했다. 뉴스야 SNS나 포털 메인에 있고, 유튜브로도 봐지니 굳이 찾아서 보지 않게되더라는 점. 그리고 학창시절과 대학때 질리도록 시사 스크랩을 했고, 방과 후 토론이 일상이었던 시절이 있어 질린 것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 트랜드인건지, 이슈몰이를 위해서인지 자극적인 멘트나 호통치는 듯한 어조의 엥커가 싫었던 이유도 있었다. 그러니 일체의 감정이 섞이지 않은 기사를 보는게 더 받아들이기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행동이 되려 익숙하게 젖어들어 갈 때즘 클립 영상을 본게 있다. 한민용 앵커가 전하는 '오픈마이크'라는 4분 남짓의 코너였다. 이런 뉴스의 클립이라면 찾아 볼만 하겠구나 싶은 내용들.

당장에 안본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보고 난 후에는 일렁임이 있어서 어떻게든 나도 변하고 싶게 만드는 세상의 이야기였다. 앵커가 직접 준비했다는 이 이야기에 시선이 쏠리게했다. 그래서 찾아봤고, 그게 이 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책은 최초의 여성 메인앵커라는 수식어를 가진 한민용 아나운서의 일대기를 다룬 것으로 비춰지지만,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해온 과정이 아닌 하고싶은 것을 하고 잘 하려 애쓴 사람의 부지런한 삶의 틈을 들여다 보는 성공한 내 친구의 자랑스러운 세상살이라 할 수 있겠다.(나보다 한 살 어려서 동년배라 해도 될만한 나이의 명사에세이라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좇는 것. 하고싶은 걸 하는 것. 이왕이면 잘 하는 것. 할 수 있을 때까지 무던히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진득함을 배우면서 어떻게 해야만 잘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눠 보며 무던히도 애썼을 날들에 대한 격려의 박수와 다가올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응원의 박수를 겹쳐서 보내게된다.


📖나는 지금도 넘어지며 배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이런 유의 말은 하지 않는다. 넘어지면 무릎만 까진다. 무릎만 까지면 다행이지, 다리가 부러지면? 뼈다 가 붙고 난 뒤에도 두려움 때문에 다시는 뛸 엄두를 못 낼 수도 있다. 더 크게 넘어져 영구적인 장애를 얻게 된다면? 영영 뛰지 못할 것이다. 실패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 결국 다시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넘어짐, 다시 시도할 힘까지 몽땅 앗아가지 않을 정도의 인자한 실패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

내 삶의 흥망성쇠는 결국 누구 탓이다? 탓이라 할 것도 없지. 결국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일인 것을. 저자는 여기에 괜한 연민을 부여하지 않았다. 뭐랄까, 우리 식으로 말한다 하면 박명수 어록처럼 일침을 놓으며 정확한 지점을 뚫고있었다. 그래서 속이 시원했다. 어떠한 대상을 탓하거나, 현상을 거론하며 나를 대변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럴수록 나만 비참해진다. 현실 직시하려 하지 않고 회피하는게 잘 보여서 그 꼴을 하며 위로하지 않는게 딱 저자다운 방식이었다.

꼭, 무조건이라 단언할 건 없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더라도 결국 대성할 마음을 먹고 용을 쓰고 있는 사람이면 되는 것이라는걸 보여줬다.

뭔가, 요즘 청년들의 취업 포기에 이유에 정신이 번뜩 드는 저자만의 삶의 방식이었다. 인구는 줄고,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경쟁 비율은 이전보다 덜하겠지만 여전히 좋은 곳에는 몰리기 마련이고, 다들 비슷한 목표에 목을 메곤 한다. 하나같이 스펙이 대단하다. 그러니 그 바늘구멍을 어떻게 통과해 합격 목걸이를 받을 것이냐에 대한 이야길 한다. 그래서 몇번이고 물을 먹고, 취업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심심찮게 보게된다. 다들 그곳이 아니면 살 가치조차 상실한 사람처럼 군다. 차선책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들의 시작점엔 그 차선책이 인생 실패의 선택지로 지정해버리니 주저앉아버리는게 부지기수였다.

저자도 저 이야길 한 문단 끝에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나란 사람은 이렇게 계속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라고 솔직하게 말 해 주었다. 그러니 일어나지 못할 바엔 한쪽 무릎을 꿇더라도 안정되게 세상을 딛고있는 상태에서 그 시선의 세상을 보면 되는 것 이었다. 한쪽 무릎 꿇고 있다고 영영 그 자세로 있을 사람은 아니니까. 힘 좀 끌어모아 그 무릎을 딛고 일어나 서면 되는거니까. 그건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는 것 보다 쉬운 방법이라는 걸 알려줬다. 몸소 실천, 나도 해보니 되더라, 안될거 같은데 되네? 에세이 인데, 계속 나도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하는 자기계발서의 기운을 갖고있어 읽으면서도 얻어갈 단락이 더 많이 보인다.


📖잘 모르면 욕하기는 쉬워도, 제대로 비판하긴 어려운 법이지. 아 물론, 가까워지면 비판하기 어려울 때도 있어.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해. 그거 못 하는 순간 기자 아니고 업자 되는거야.

비평가의 시선. 다른 이가 느낄 의문점에 대한 팩트전달. 그리고 그걸 자신의 펜과 자신의 입으로 다수의 사람에게 전달하게될 파급력에 대해. 저자의 선배는 이 당연한 진실을 잊고 놓치고 있을 후배에게 한 번 더 언급하며 어떠한 기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알지만 놓칠 수 있는 것, 알지만 외면 할 수도 있는 이 직업의 진짜 이유. 요즘 말하는 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선배가 순화해서 말한 업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당연한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곧은 진실이 왜곡되지 않도록 한번 더 잡아보는 직업으로서의 이유였다. 직업이 곧 자신이라 여길만큼 아끼는 저자에겐 그 것이 삶의 목표와도 같아보였다.



📖무언가를 잘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어쩌면 뻔하고 당연한 가르침을 경찰서를 뺑뺑 돌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우친 뒤, 나는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 잘해내고 싶은 일에 시간을 쓰기로 했다.

핑계를 대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쪼개고, 그 틈을 만들어 다시 메꾸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여건을 탓해도 될만큼 빠듯한 삶으로 채워져있는게 맞으니 한 두번 정도는 투덜거리며 순간을 모면해도 되겠다만 그렇다면 자신을 향한 신뢰의 게이지는 줄어들 것임을 알았다. 저자는 늘 그랬다.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큰 사람이다. 이왕 제 몫의 것으로 온 것이라면 탓을 하지 않고 쥐고 있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낸 것. 주변을 환기시킬만한 타이밍을 찾았고, 그로인해 얻어질 시선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리기보단 올곧게 서서 나를 다른 곳에도 놓아 볼 줄 아는 마음. 그리고 무리속에서 떨어져나왔다거나 집단활동에서 튀는 것이라 여기지 않도록 제 앞가림도 야무지게 할 수 있는자의 야무진 자기 관리의 방식. 이게 덜 지치고, 더 길게 볼 수 있는 밥벌이의 방식이라는걸 나도 공감하는 바다.


📖나보다 월등히 잘난 인간도, 못난 인간도 없다. 그러니 나는 모두에게 친절하되, 누구에게도 움츠러들지 않으려 한다.

기자이며 앵커의 시간을 보내며 일반인인 나보다 훨씬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나봤을 것이다. 다들 성공한 삶이라 말해주는 이를 무조건적으로 동경하지 않는 저자의 태도. 이른바 '니나 내나'의 시선으로 보지만 그러함에 있어 예외를 두지 않았기에 사람들을 마주 할 수 있었고, 알아서 거르고, 또 알아서 얻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껍데기는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다. 뭐, 비단 휴대폰 케이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반질거리는 새 보호필름을 붙이고, 흠 하나 없는 탄탄한 케이스를 갈아 끼우면 액정화면을 켜 보지 않는 한 이게 새건지 헌건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 그 허울에 속지 않으려하는 저자의 사람 대하는 방식이 이 '니나 내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겉 껍데기가 잘나면 혜택도 이득도 있긴 하겠지. 그런데 그게 천년만년 가진 않을거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챕터를 읽는 그대도 움츠러들지 않으라는 말을 하고파 '니나 내나'정신을 독자들에게도 옮겨심어주고 있었다.

'그래... 사람 별거 없더라. 니나내나 소위 계급장 까고 보면 똑같은 기라.' (왜 이런 말 하면 구수한 사투리가 나오나 몰라)

개천에서 용? 빨래골에서 인재났다? 에이, 요새 그런 말을 왜 쓰겠어. 지 잘난 놈은 어디서든 빛을 보게 되어있고, 노력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내어주기 마련인 것을. 그게 저자가 무던히도 애쓰고 노력해온 시간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 꼼수가 없었다. 그건 유학생과 알바생의 과정을 쉴새없이 겹쳐둔 것 부터 시작하여, 하리꼬미 하던 꾀죄죄한 한기자의 시절이 모든걸 대변하고있었다. 처음부터 앵커가 꿈이 아니었던 사람. 그렇지만 얻어진 기회는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주어진 것을 척척 해내니 뭐라도 더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믿음직스러운데 일복도 많고, 징징거리긴 보단 무던히 쳐내는게 뭘 해도 될 놈 같은 인재상으로 보였다. 그래서 이 기운이 에세이로만 남기보단 자기계발서의 다른 갈래로 놓아두며, 가끔 무얼 할지 고민이고 쉬운길만 찾고싶은데 내 몫의 선택지는 없어 사는게 해이해짐이 느껴질 사람에게 일단 이거 읽고 말하라고 무심하게 툭 던져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이제는 매일 뉴스로 출근이 아니라, 육아터로 출근이 되겠지만, 한민용 앵커의 뉴스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바뀐 환경, 새롭게 불려진 다른 호칭으로 마주하게될 세상을 시사해주길 기대해본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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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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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포터11기로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여름은 모든 것을 실제보다도 부풀리고 없는 것을 상상하며 현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진 것이 내 곁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정의내린다. 여름은 저자에게 그런 것이다. 따끔거리는 햇살마냥 회피하고 싶으며, 나를 찌들게 만들기도 하여 한없이 예민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그것을 '여름'때문이라 탓하기 좋도록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지나간 사랑도, 돌이킬 수 없는 날의 어떠한 한 때를, 그리워하기 딱 좋은 시절의 단상도, 유난히 반짝이고 화사하며 선명했던 여름이라는 카테고리안에 넣어두어 그 당시에는 외면하고 싶어했으나, 이제와 돌이켜보면 하염없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생의 한 시절로 포장해두었다. 그게 매혹적인 여름이라는 계절이고, 그만큼 눈부신 삶의 어떤 순간이라는 걸로 '여름=청춘=그리움의 시절=돌이키고 싶은 순간=반짝였던 과거' 이러한 장면들로 엮어내어 주었다. 나는 여기에 인생의 순간을 쪼개어 내 여름은 어디에 머무는지를 생각해본다. 나이로 봐도, 삶의 형태를 봐도 뜨겁게 타오르던 여름은 지난 사람인 듯 하다. 그래서 저자의 순간들이 부럽다. 여전히 여름에 머물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남아있는 여름을 미리 맛 본 사람처럼 괜스레 알은척 해 보고 싶기도하며, 슬쩍슬쩍 스포 날리며 부러움의 표현을 잔뜩 해 주고 싶어진다.



📖선배_ 나는 그때 선배를 정말 좋아했다. 그가 타야 하는 버스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나 그가 먹으면 좋아할 간식에 대해 생각하는 걸 좋아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싱그러움을 가득 안고 있는 '1부 연인들'이 가장 탐이 났다. 여리기만하던 연녹색의 이파리들이 짙어지고 무성해지는 기운을 받았고, 그게 내 20대 초반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 나는 저자의 청춘을 핑계삼아 내 푸르르던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던 페이지였다. 앞 뒤 잴 것 없이 심경을 표현하기에 주저함이 없었고, 내 사랑과 내 행복이 가장 우선시 되어지던 날들이었다. 그래서 선배를 좋아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애틋했으며 그러한 생각을 품는 내가 스스로도 예뻐보였으니까. 그게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 단지 그 뿐인지. 아니면 다 커서 이렇게 좋아하는 감정도 생기고 누굴 향해 애틋함도 부릴 수 있는 어른같아보여 거울보며 '넌 멋진 녀석이야!'라고 하며 우쭐거리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선명해서 좋았고, 뚜렷하게 남겨있는 시작의 여름을 닮아있는 이 대목. 누구나 한번즈음 겪어 넘어갔을 시절. 저자 당신도 나도 이런 시절이 있었음에 이번 생의 여름은 허투루 보내지 않았단게 분명해 보여 조금은 만족스러워지는 순간이다.



📖펀치드렁크러브_ 사랑은 물리적인 일이다. 얻어맞은 것처럼 주저앉고, 어금니가 흔들리고, 몸은 붕 뜨고 시야가 흐려진다. 머릿속에는 내 맥박 소리로 둥둥거리고,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말하는대로, 원하는대로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만 세상만사 모두 뜻하는대로 이뤄지진 않았다. 고뇌하는 순간마다 어떤 할머니가 등장해서 '비비디 바비디 부!'를 외쳐줄 일도 없으니 매번 도파민 터지는 행복회로로 이어지진 않더라는 점. 그게 사랑이고 삶이었다. 세상 맛있게 먹던 자두맛 알사탕도 처음엔 향기롭고 달콤하지만 먹다보면 알사탕에 혀가 베이기도해서 비릿한 쇠맛이 느껴지기도해서 좋은데 싫은, 행복한데 두려운 일들이 항상 공존함을 느낀다. 양가감정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도해 보는 것, 오묘한 긴장의 순간들에 생각이 많아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면을 걸어줄 수도 있다_ 봄밤은 그런 식으로 어렵다.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좋은 것이 한 번에 펼쳐질 때, 그리고 머지않아 사라진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좋은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더 마음을 쓰게 된다.

너무 좋지만, 마냥 좋아 할 수 없는 어른의 우려. 이건 영원 할 수 없는 것이니 유한한 행복 속 어디쯤 도달해있는지 매번 확인해야 하는 과정. 설령 다 누리고 무(無)의 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우린 같은 것을 보고 또 같은 마음으로 애틋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생각을 하게된다. 매번 벚꽃을 보며 그 사람을 상상할지, 매번 싱그러운 잔디밭 위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에서 그의 환한 미소를 떠올릴지, 함박눈이 내릴 때마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내 주머니로 들어와 손 잡아주던 따뜻하고 말캉한 손을 영영 기억해도 될런지. 그렇게 최면처럼 매 순간의 기억에 그 사람의 모습을 빗대어 두어도 상관없을런지. 그게 기억에 대한 최면이고 추억에 대한 환각 같아 이 좋음을 내 평생 좋음으로 명명해도 될런지 계속 의문을 갖게 만든다.


📖고등학교의 여름_ 밥을 먹은 뒤 학교 건물을 한 바퀴 천천히 걷는 애들, 빌려준 교과서나 체육복을 받으러 다른 반 교실에 가는 애들, 한쪽에서 춤연습을 하는 애들 사이에서 가슴 설레는 나.

확실히 1부의 연인들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이 될 초록(抄錄)의 기록일지, 2부와 3부의 감각과 장소에 대한 잔상이 주는 흔적의 기록이 될 지는 각자가 유념하는 바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어느 한 지점만 크게 부풀려 키울 순 없었다. 내가 떠올리는 감각의 흐름을 보면 미세하게 돋아나던 감각들이 커져 각 장소마다 잔상들이 남았고, 그곳에는 연접되어있던 이들에 대한 순간이 사진처럼 모든게 정지된 상태로 내 몸 어딘가에 박혀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움트기 시작하던 순간에서 확장되어 매 회차마다 새롭게 받아들이던 순간으로 넓게 퍼짐을 느낀다.


📖가짜여도 좋은 것_ 나는 지나간 여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돌아갈 수 없는 여름을 좋아하고, 그런 여름을 노래한 음악이나 영화를 좋아한다. 여름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때 그와 더워하면서 돌아다닌 나무 아래 느티나무 밑에서 쉬는 사람을 한동안 바라봤던 것을 생각한다.

그게 하필 여름이었던 탓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자는 다른 계절을 사모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간 여름의 사랑이라기보다 때마침, 하필이면, 우연찮게 라는 말들로 그 모든 순간이 여름이었음에 비식비식 웃게 된다. 앞으로 총 몇 번의 여름이 올 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기쁨의 순간은 이때 누렸던 여름과 비교하게 될 테고, 이 계절의 싱그러움과 나의 생글거리던 젊음을 떠올리게 되겠지. 그래서 한바퀴를 돌아 다시금 찾아올 계절을 기대하며 살게 될 테고, 그럼으로 살아가는 이유 한가지가 추가됨에 살 맛나는 시절을 보내리라 가늠해본다.



어떤 지점은 짝사랑만 하던 아이가 상대와 눈맞춤을 했던 짜릿함처럼 여름은 그렇게 느껴질 것이고, 또 어떤 순간에서는 회전초밥 레일 위를 하염없이 돌던 석식 쉬는시간의 체육복 차림의 우리가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추워서 옹송그리지않았고, 흩날리는 꽃가루에 연신 코를 만지며 다른 데에 신경이 더 쓰이는 날들도 아니었다. 적잖히 덥지만 또 적잖히 살만한 뜨듯한 공기 속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좋아 우린 그러한 모든 날의 시절을 여름이라 명명하고있는지도 모르겠다.

괜시리 마음이 왈랑거리게 하는 에세이. 여름이 이래서 무섭다고 하는거야!!! 저자 덕분에 올 해 늦여름은 이렇게 몽글거리게 마무리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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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이야기
조예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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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여름이다. 그럼, 조예은 월드가 피어오르기 딱 좋은 시기라는거지. 조예은 월드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이 여름에 신작 발표는 눅눅한 세상을 티나지 않지만 서늘하게 만들어주는 무풍 에어컨 같은 존재. 뜬금없이 펼쳐지는 SF판타지형 소설이 아닌, 어딘가 한번쯤은 이러한 이야기가 휩쓸고 갔을지도 모를 세상의 소리라서 관심이가고, 저자가 이 이야기속에 숨겨둔 진짜 하고픈 말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희열을 느끼고 싶어진다. 세상이 물에 잠긴거나 다름없어 보이는 습도에 어디든 시원한 곳만 찾게되는 요즘. 그리고 머리도 쉬고, 눈도 쉬고싶은 휴가. 집중하지 않으려 했으나 신간 출간이다. 그럼 어쩌겠어. 읽어야지.

혼자 맞이하는 휴가를 빌미삼아(=남편과 휴가가 달리 잡힘) 카페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빵, 그리고 조예은 월드가 응축되어있는 신작 치즈이야기로 온전한 내몫의 행복을 찾아보게된다.

저자는 '무덥고 습한 계절에, 차가운 바닥을 뒹굴며 먹는 주전부리 같은 이야기들이 되기를'바란다고 전했다. '짜고, 달고, 역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의 이야기인데, 이 단어들은 쉽사리 멀리 할 수 없는 마력의 무언가들이다. 그래서 나 역시도 별도의 추천사나 줄거리 서치 없이, 저자 이름 하나 믿고 고른거겠지. 2020년 봄의 '칵테일, 러브, 좀비', 2022년 여름의 '트로피컬나이트'. 그리고 2025년 7월의 '치즈 이야기' 조예은표 습기어린 3부작의 완결형 이야기. 서점 소설 MD는 이렇게 세 번째 여름 테마파트 개장을 표현했지만, 3부작으로 끝나기 아쉬우니 일단 이거 완독 후 다음 여름을 미리 기대하게만든다.


📖치즈 이야기_ 엄마에게 오랫동안 궁금했던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그때, 집을 나간 후에 단 한 번이라도 방안에 두고 온 저를 떠올린 적 있느냐고요. 엄마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깜박햇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냄새. '나'의 유년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당신'의 현재를 대변하는 썩어가는 과정.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의 무게는 상당히 가뿟하다. 무게를 잡지 않는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한없이 축축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화자는 이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길 해주니 당황스럽다. 분명한 원망이 서려있는데, 그놈의 블루치즈라는 것으로 환상을 만들고 사랑의 대상을 그것으로 옮겨버린다. 자신을 측은하게 만들지 않으려 하는 상상이 더 저릿하게 만든다. 어린시절의 그는 슬프고 무서웠을텐데, 지금의 그는 여전히 응어리져있는게 분명해보이는데 썩어가는 엄마를 마주하며 '잘 숙성된 치즈의 냄새'로 이 상황을 묘사해내어 흥미로운 순간이 다가왔다는 듯 경쾌한 어조를 내비친다. 그래서 화자가 얼마나 고대한 날인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한 두번 놓친 상황이 아니었다. 깜박했다 하기엔 그 횟수가 잦아졌고, 그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남겨진 이에 대한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당신의 쾌락만을 찾았다. 모정이 숨겨진게 아니라 애초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당신의 돌봄이 필요한 작은 생명에 대한 외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 외소하고 몸이 쭈그러든 늙어버린 당신이 되려 돌봄이 필요 한 상황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다 큰 자식에게 기생하는 과정. 똑같이 당하고, 똑같이 '깜박햇서'라는 말로 깊은 고립의 시간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면 과거의 행실에 반성을 하게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생각보다 사람은 바뀌지 않더라.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라 했다.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그런가 이야기 밖의 내가 화자를 뜯어 말리며, 그래도 자식된 도리를 운운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면 안되지 않겠냐며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지 않게된다.

그리도 동경에 마지 않던 치즈를 마주하고 먹었을 때 허무했던 상황.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냈던 맛의 확장성이 아니었던 일종의 배신감. 그건 그대로 엄마에게로 대상이 옮겨진 것이기도 했다. 사랑을 갈구했고, 자신을 향한 몽글거리는 시선을 기대했던 이전, 꼼짝없이 자신의 앞에 누워 고분고분해진 늙은 엄마를 대하는 기대치가 확 떨어진 식어버린 관심까지. 사랑하려 했으나 미워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부스러기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보증금 돌려받기_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요...... 제가 눌러드려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만든건 다 당신이 자처한게 아니냐며 어금니를 꽉꽉 눌러가며 또박또박 말하게된다. 당신에겐 한낱 노후자금이거나 당장 필요하지 않는 여윳돈의 일부일텐데 나에겐 당장의 내일을 좌지우지할 삶이었다는 걸 알면서 그걸 쥐고 흔드는 꼴. 헌데 이게 책 속의 이야기 뿐일까? 당장 죽고 사는게 뚜렷하게 갈리는 상황이 아닌 것 처럼 보여도 당사자에게는 죽을 듯한 고통의 감각을 온몸으로 얻어맞는다.

집이 잘 팔리길 바라며 둘러보러 온 사람에게 한없이 상냥하고 친절하게 포장하며 집주인과 한통속이 되기도하며, 집이 안 팔리는게 왜 내 탓이냐며 성질을 내다가도 나도 이사갈 집에 돈을 내야하지 않겠냐고 읍소하게된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돈을 돌려주는게 당연하지 않냐며 몰아세우기도 하다가 그간의 전적을 살피며 단념하기도하며 매 순간마다 악인이 되었다 인간으로 돌아오는 무한 반복을 거듭한다. 꿈을 꾸고 환영을 마주하는건 어쩌면 본성의 자아가 악마를 끄집어내어 지금 네가 하는 모습이 딱 이 꼴이지 않냐며 비춰주지만 결국 본인의 또다른 자아임을 깨닫지 못한다. 악에 악으로 치닫게 만든건 결국 당신들이지 않냐는 식으로 나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들지 않았냐는 것으로 사람이 악마가 되는 과정을 조근조근하게 일러준다.


📖수선화에 스치는 바람_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는 걸, 그애의 다른 선택지를 막고 의사를 조종하며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얻는다는 건 모를 터였다.

나를 갈아 넣는다는 말. 내가 못하는 건 너라도 해야 되지 않겠냐는 연민어린 시선. 이건 단지 나 처럼 살지 말라는 뜻의 애틋함이 아닌 듯 하다. 나는 도저히 이 상황에서 꽃을 피워 낼 자신이 없으니 너는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으로 응축된 세뇌와 질척거리는 강요를 끼얹어주었다. 고맙지만 부담되는 과한 챙김.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지 않으니 받아들이는 현실. 희생은 대물림되고, 온전치 못한 애정도 엄마를 통해 딸들로 휘어져 흘러간다.

치즈 이야기의 모친이나 수선화에 스치는 바람의 모친이나. 그들도 그들의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온전치 못했던건 아닐까를 생각한다.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잘 하는 걸테고, 학습된 효과는 무시 할 수 없을테니 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이들의 부모가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않았고, 두 이야기의 모친들 역시 사랑을 그렇게 받아 누린 적이 없었기에 이 사달이 난게 아닌지로 잘잘못의 영역을 확장하게된다.

이들와 관계가 어그러진 이유. 어떻게든 멱살잡아 옳게 만들고 싶어 언니가 엄마의 탈을 쓴 채 동생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줄 것 처럼 하다가 인형놀이하는 주인으로 역할을 바꿔 꿰차기까지. 선희라는 아바타 게임에 목숨이 다 소진되어야 끝나는 게임일까? 누가 하나 죽어야 허탈하게 반성하며 닭똥같은 눈물 흘려야 제대로 된 반성을 할 듯 하다. 그전엔 이거 쉽게 안 끝날 꼴이야.



📖두번째 해연_ 축적한 지식과 기억이 한순간에 납작해지리라는 예감이. 보이지 않는 저만의 서랍에 늘 존재하던 애증의 순간들이 언젠가는 부옇게 뭉개질 거라는 사실이. 백연에게 기억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고유의 암호였다.

정체성의 변화. 관계의 재정립. 외형적 동일함, 기존의 축적된 데이터가 주는 동일성의 영역. 그렇다고 해연A와 해연B가 완벽히 동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었던 시절 해연A, 기억을 물려받고 데이터화 된 외형을 구축해낸 사이보그 해연B. 현실의 상실, 환각처럼 구현된 허상의 존재. 그것으로 우리는 상실에 대한 감정과 그리움에 대한 애틋함을 완벽히 충족 해 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소설속 인물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진지하게 답을 찾게 만든다. 어디부터가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과정을 얹은 변질된 모습인지. 두번째 해연처럼 두번째의 내가 이 세상에 나인척 살아간다면 이미 죽어버릴 순간의 나는 마음이 편할까, 되려 미안함이 커질까?(각각의 단편들이 하나같이 나를 물음표 살인마로 만든다. 되묻게 만드는 지점이 너무 많네) 이로인해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고어로 분류가 되며 모든 인간들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기억의 굴레로 가둬두는 또하나의 감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괜한 걱정이겠다만 당장의 나의 노후에 해연B 만큼의 꽤나 정교한 남편B가 구축된다면 행복의 연장선이라면서 반길 자신이 없어진다. 적어도 나는 알잖아. 진짜 같지 않은, 진짜 인척 하는 진짜 같은 가짜라는 걸.



📖안락의 섬_ 저는...... 그냥 안 태어날래요.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는 걸 보는 일은 너무 슬퍼요. 더군다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게 하필 나라면.

안락의 섬에서 어딘가 모르게, 며칠 전 먼저 읽었던 손원평의 '젊음의 나라'가 떠오르기도했다. 손원평은 유닛A~F로 구분하여 젊음이 지난 이들의 남겨진 생의 분류를 보여주었다. 젊지 못한 이들이 젊었을 때 얻어낸 부로 살아가는 노년의 세상 분류를 보여줬다면, 안락의 섬에서는 안락을 제공하며, 이른바 자신이 선택하는 생의 끝을 제공한다. 이건 올 초 읽었던 '죽은 다음'이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의 이야기의 소재들을 기반으로 한 행복의 끝을 찾으려는 인간의 결정을 보여주는 듯 하다. 반려견이 생의 끝이 보이니 생을 마감하고나면 자신의 끝도 이어 붙이려는 모습이 담긴다. 이는 반려견이 있는 이들에게 비슷한 양상을 보이던 견주의 마음이기도했다. 이게 비단 견주의 마음 뿐일까. 사랑하는 이률 보낼 준비하는 사람들이 갖게되는 심적 고통과 결정이기도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을 실행에 옮기려 안락의 섬으로 찾아 간 것이다.

소중한 것들 덕에 행복했지만, 그 소중한 것이 소멸되면 모른척 외면했던 슬픔이나 고통이 한번에 밀려올까봐 두려워한다. 그게 무서워 다시 태어나길 거부한다면 현재의 행복이 얼마나 꽉채워져있길래 그러나 싶어하며 이 관계의 애틋함을 세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어느정도 가늠하게 만든다.

반려견이 눈을 감았고, 이제 안락을 준비해야하는 후 작업. 사흘 뒤로 정해진 생의 끝. 안락에 드는걸 반려견이 반길까? 자신을 따라온다는걸 반가워하며 꼬리흔들고 달려올까? 한여름밤의 꿈같은 상황이었다. 변한건 없다. 아니, 변한게 있다. 반려견은 작은 유골함에 있고, 그는 죽지 않았다는 것.

혼자 감당하는 몫을 택했고, 반려견을 유일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아 행복했던 순간이 소멸되지 않도록 번복하며 떠올리는 역할을 자처하기로했다. 둘이 안락에 들며 무(無)것으로 지우지 않고, 적어도 자신만이라도 반려견을 기억하는 방법을 택했으니 적어도 반려견만은 온전한 안락에 닿아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단순한 책 표지. '치즈 이야기'라며 전혀 가늠 할 수 없도록 만들어낸 제목. 치즈 구멍 마다 쿰쿰하게 묵히고 방치하며 쉽사리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곰팡이마냥 들러붙어있다. 그래서 이 덩어리들을 쉽사리 손대며 긁어내기어렵다. 휴지로 쓰윽 닦아내며 흔적을 지우고싶지만 야무지게 스며들어있어 결국 자국이 남는다. 그게 이 단편들이 가진 마음의 딱지였다. 역시나 여름의 기운처럼 습하고 눅눅하고, 개운치 못해 미련을 섞어가며 이 존재들이 멀끔히 살아내길 바라게되지만 어느하나 마음대로 될 수 없음을 안다. 하루 이틀 만에 이뤄진 일들도 아니다. 오랜시간동안 꾸준하고 진득하게 인물들을 쥐어짰으니 이건 두고두고 흔적이 남을 것이다. 옷으로 가릴지언정 적어도 나는 알고있는 표식이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하나 고민이 많다. 정말 발치에 닿은 죽음은 아니지만 그 기운에 버금가는 다양한 형태의 자극들.

무덥고 습한 계절, 눅눅하고 진득한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달라질까? 계절이 바뀌는 것 처럼, 상황이 달라지면 숨 쉬는게 편해질지. 쉽게 변하지 않겠다만 이들이 겪는 이 여름이 지나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그들에게도 닿아지길 바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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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나라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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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났던 작품이 너무 좋았다면, 그 기억을 곱게 넣어두었다가 몇번이고 곱씹어보기도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며 해당 저자의 행보를 따라가게된다. 손원평 저자의 작품이 그러하다. 그래서 단독 작품은 물론이고, 앤솔러지 출간작도 챙겨보면서 저자가 앞서 바라보는 생각들에 나도 생각을 보태어 머리를 굴려본다. 나에게 답변을 바라는 이는 없겠지만 작품을 완독 한 후 내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소설. 그래서 손원평 저자의 작품은 독후감을 제출해야 속이 후련할 듯한 긴 후일담을 남겨두게된다.

역시나 이번 작품도 읽고 난 후 촘촘한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먼 미래도 아닐 듯 하고, 나만 비켜 갈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같은 제목의 청소년판이 따로 출간되었던데, 이 또한 생소하지만 그럴듯한 이유가 된다. 글자 폰트와 크기만 다를 뿐 청소년판과 성인판이 구분되어있는 점이 매력있다. 그래서 말인데 청소년들도 꼭 한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어진다. 젊음에 다다르기 전 어리다 할 만한 축에 속하는 존재들이 보는 책 속의 나라는 어떻게 느껴질지가 궁금하다. 나이들고 늙게되는 과정은 여전히 당연한 시간의 흐름인데 청소년들이 보는 젊음의 무리와 노년의 무리속 각각의 목소리는 어떻게 와닿게 될까.

나는 젊음의 끄트머리라 봐야 할 나이이다. 유나라의 나이는 이미 지난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유나라의 입장도 각각의 유닛 등급에 따른 인물들의 성향도 모두 이해되는 사람이다. 엘리야가 느끼는 혐오의 감정도 알만하고, 유나라의 부모가 걱정스러워했던 아이의 인물 의존도에 대한 우려까지.

젊음의 나라를 이야기하지만 젊음은 영원 할 수 없고, 나 또한 그 순리가 예외로 적용될 수 없음을 알기에 한 때는 젊었고, 이제는 늙음이 당연하게 쥐어질 삶의 인간이라 민아 이모처럼 생의 끝을 내가 정할 수 있을지. 그마저도 두려워하며 회피하는 사람이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유닛을 보면 결국 부에 대한 등급표였음도 알 수 있다. 이건 각자의 젊은 시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지표가 되기도하지만, 열심히 살아낸 것과 상관없이 원하지 않는 세상의 간섭도 적용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한부의 삶이라 선고를 받았지만 오진이었던 상황. 최상위 유닛에서 짧고 굵은 화려한 생의 끝을 생각했으나 오진으로 인해 생각보다 더 길게 봐야했던 자신의 노후. 그렇게 하위 유닛으로 내려가며 삶의 반경이 달라지고 날이 선 상태로 주변을 대해야했던 최근을 떠올리면 내가 원하는데로 흘러가는 삶은 없음을 느낀다.

학교가 요양 보호 시설로 바뀌고, 세금의 대부분이 노인 복지의 자금으로 채워지는 과정. 먼 미래 같았지만 지금의 세상 또한 그렇게 흘러가고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인구 소멸에 대한 걱정과 함께 노령화에 대한 불안감. 저출생과 출산을 하지않는 젊은층에 대한 쓴소리. 인력에 대한 비용보다 AI를 통해 획일화되고 간결화된 일상들까지. 이주민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최근 다양한 서적을 통해 나역시도 한참을 고민했던 존엄사에 대한 결정권 또한 심심찮게 야기되어가는 세상이다.

가까운 미래? 책 속에만 가둬두기엔 너무 현실감 넘치는 요소들이 가득해서 이 소설은 SF소설이라 분류 할 수도 없고, 마냥 허상의 판타지 소설이라 나누어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렵다. 나를 키워낸 세상과 내가 기대할 세상이 섞여있는데 어느지점까지 허상의 것이라 믿고, 어느 단락까지 예견된 미래라 봐야할까. 시카모어 섬까진 가지 않더라도, 지금을 영위하고있는 내 경제상태와 이 시점을 기준으로 10년후, 20년후의 나를 그려보게된다. 유닛 등급에 따른 내 노후까지 점칠해보며 각각의 집단에서 과연 내 몫의 행복을 얻어내며 남은 생을 살아 갈 수 있을지 계산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때는 젊었고, 젊음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늙음만 남았다. 늙음이 기대되기보단 어찌 살아야 할지 머리를 싸메고 젊은 시절보다 더 견고하게 생을 짜맞춰야하는 일이 주어졌음을 느낀다.


나의 청춘은 지금 어느 지점에 머물고 있을까. 청년이라하기엔 너무 나이든? 중년이라 하기엔 또 조금 이른듯한? 그 애매한 지점에서 노년의 그들을 바라보면 생각이 깊어진다. 과거의 노년이 누린 시대와 내가 곧 다다르게될 노년의 세상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하루가 다르게 적응해야하는 삶의 퀘스트들. 저자가 걱정하고 우려했던 모든 갈래가 나를 거치고 있다. 부양해야하는 부모가 있고, 결혼은 했으나 출산을 하지 않고, 외로움을 의지해야하는 반려동물은 없지만 평생 없이 살거라는 보장은 못한다. 사회활동을 하며 매해 연초마다 오르는 복지 관련 세금은 내가 당장 누리는 것이 없음에도 기꺼이 의무적으로 납부해야하는 체계. 소멸되는 인구만큼이나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로 내 몫으로 감당할 지분이 커지는 세상. 나는 노부모를 부양하지만, 나와 남편은? 자식 없는 둘은 각자 서로를 살펴야하고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하는 몫의 무언가를 마련해야한다. 지금 내가 누리는 젊음으로서의 젊음의 나라는 바쁘고 빠듯하다. 현실 아닌 척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 손원평이 꾸려놓은 세상. 그래서 내가 감당해야 할 지점은 어느어느 항목인지 한번 더 인지하며 내 젊음을 어찌 써먹어야될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머리를 굴려봐야겠다. 아.... 오랫만에 마른세수 하게 만드는 소재를 만나 포스트잇 플래그가 가득 붙어있는 책이 되어버렸다. 



📖꿈에 주름이 져 있어도 되는 거야? 그렇게 계속 접고 접으면 꿈이 너무 작아지잖아. 그러다가 못 찾으면, 꿈이 어디로 사라져버리면 어떡해?

어린 유나라가 민아 이모와 나눴던 이야기의 일부이다. 꿈만 꿔도 행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꿈이 있어서 살아갈 이유가 되었고, 꿈 덕에 내일이 기대되는 삶이 분명 존재했다. 민아 이모도 그러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꿈을 고이 접고 또 접어 꾹꾹 눌러 쉽사리 펴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을 해 둔듯한 뉘앙스로 말을 해준다. '이렇게 꿈이 몰래 숨어 있다가 언젠가 활짝 피는 꽃처럼 팡! 터질지 몰라.' 이건 어린 유나라에게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민아 이모 스스로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 같은 것 이었다. 안될 걸 알지만 그래도 될거라는 일말의 기대.



📖그녀의 자식으로 산 고양이와 개들은 행복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열세 명, 혹은 열세 마리의 동물들이 할머니의 삶에 외로움의 방패막이로 차례로 소비되고 갔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나에게 다들 이러한 뉘앙스로 이야길 해왔다. 지금이야 남편도 있고, 맞벌이고 사회활동을 계속 하지만 나이들어서는 그계 게속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적적할텐데 지금이라도 반려 동물을 키워서 애정도 주고 살아보라고 훈수를 뒀다. 애 없으니 애 키우는 보람 대신 동물 기르는데에 쏟아보라는건데, 나는 내 한몸 건사하는건 물론이고 내 사회활동으로 인해 하루 대부분을 혼자 집을 지켜야 할 반려 동물의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단순히 내 단기적 외로움에 투입하고 싶지는 않다. 반려 동물의 생은 인간보다 짧다. 그래서 그것들의 끝을 다 지켜봐야한다. 생사고락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소비하는 감정의 폭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그렇다. 자신 없다면 시작도 안하는게 맞는 답일지도 모르겠다.



📖많이 노력하고 더 애쓴 사람에게 주어져야 할 혜택이, 노력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가정을 이루지 않고, 그저 사회보장제도를 계속 누릴 수 있도록 수 쓴 것밖에 없는 사람에게 오랜 기간 주어졌다니.

어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회가 마련해주는 제도를 활용하기 위해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인력을 사용한 활동으로 소득이 일정부분 늘어나게되면 국가가 지원해주는 비용을 얻지 못하게되어 그럴바엔 아예 사회활동을 중단한다는 무리. 이른바 숨만 쉬어도 세상이 돈을 주는데 뭐하러 고생하냐는 식의 허점을 노린 거저 사는 삶. 애쓰고 살아내려하는 사람들이 바보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약은 인간들. 그래서 때때로 이러한 제도에 환멸감이 느껴지기도하며, 이러한 인간을 고발하여 저자에게 쓰여지는 세금을 모조리 환수하고 싶어지는 날카로운 성질머리를 드러내게된다.




📖강한 법규 아래에서 인간이 얼마나 고분고분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씁쓸했다.

하위 유닛으로 갈 수록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가진사람만이 가능한 발언권이었다. 튀는게 두려운 사람들. 주목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무리였다. 당연한 권리이지만 이름이 거론되고, 관리자들의 시선에 거슬리면 혹여라도 밉보여 이 무리에서 강제 이탈하게 될 까봐 한껏 몸을 움츠리게되는 무리. 책 속에서는 유닛F가 그러했고, 현실에서는 최저생계지원비를 제공받거나 그마저도 지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실감하게하는 유나라가 겪고있던 근무조건이며 유닛체계였다.



📖나는 재희에게 죽음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의 형태가 그 사람의 계급을 드러낸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최근 존엄사 관련 책도 몇권 읽었고, 가족, 지인들의 부고도 많이 접했던 근래의 기억. 죽음의 고인이 된 당사자의 재력의 일부이기도 했고, 남겨진 가족이 일시금으로 처리 할 수 있는 부의 부피이기도했다. 죽어서도 돈이 필요했고, 죽음만큼이나 몫돈이 필요한 적이 또 있었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니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과 마침표를 찍듯 세상에서 무(無) 상태로 전환되는 과정 모두 공평함은 없었다. 지켜보니 그러했다. 그것은 일종의 생전의 능력치 정산내역서와도 같았다.



📖하지만 내 안을 채운 게 논리도 합리도 아닌 혐오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을 때, 멈춰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노인이라는 존재를 그저 '늙어 있는 상태의 사람'으로 인지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차츰 알게 되었어요. 그들도 한때의 나였다는 사실을요.

시간이 흘러 나도 그들의 수순을 밟을 것이고, 내 한시절 처럼 반짝이고 탐스러운 청년의 시선엔 고루하며 꽉 막혀 보일 한낯 노인으로 분류 될 것임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아무리 수술하고 관리하고 세월에 맞선다 한들 결국 늙고 나이듦은 어떠한 것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이치를 받아들이고있다. 다만 내가 노인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는 되지 않아야지 하는 마음은 있다. 유닛의 분류가 삶의 성적표가 될 수 없다고 했던 유나라.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내 맘대로 흘러가는 세월은 아닐 것이니 결과가 유닛A라도 본받아선 안되는 인성의 존재가 있었고, 유닛F인게 의아하게 여겨지는 반듯한 어르신의 기품도 있었으니 제력에서 줄세우기하는 유닛 분류가 아닌 인성과 인격 자체를 아우르는 늙어있지만 단정한 어르신으로 불리워지고 싶은 욕심을 가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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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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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판시장의 핫한 문구가 있지.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이 하나로 모든게 정해지는 성해나 저자의 신간 혼모노가 궁금했다. 판매 순위도 높으며, 제법 재미난 추천사를 써준 박정민과 이기호 저자의 입김이 한 몫 한 듯 한데, 내가 성해나 저자의 글을 읽은 적이 없더라구.


대강의 줄거리는 익히 아는 바 이제 4개의 큰 단락으로 나눠 기하가 외동아들에서 형이 되던 그 때, 어린 재하가 8살 많은 형과 함께 병원 진료를 받으러 다니던 시절로부터 이야기는 교차된다. 이후 혼자의 세상을 꾸리며 자연스레 가족이라는 엉성한 울타리를 벗어나게된 순간과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재하를 때리던 친부도, 새로 꾸린 가정에서 어떻게든 잘 살려고 애쓴 모친도 상실한 채 짙은 어둠만 더해진 어른의 재하는 타국에서 형의 흔적을 찾고 또 한번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뒤늦게 형이었던 존재에게 안부를 전하게된다.

부모의 재혼, 의도하지 않게 형제가 된 둘.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과거와 현재. 이야기들을 보면 교차되는 입장에서 어느 한 지점도 마주치지 않고 겹쳐지지 않으며 한 템포 늦거나 빠르게 스쳐 갈 뿐이다. 마주하는 과정이 없다. 똑똑히 마주보고 대하는 마음의 교류가 없다보니 이렇게 마음대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불편함 심기를 표출하고, 또 한 쪽은 반대로 티내지 않으려 억누르기도한다.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라는게 기하와 재하를 두고 하는 말이지 않을까를 생각하게된다. 어떻게든 닿아보고 마주할 구실을 만드는 기하 아버지와 재하 어머니. 각자의 선에서 무던히 애쓰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 4년에서 끝맺어진 성글었던 가족의 과거와 남겨진 각자의 자식들.


진심은 왜 그리 늦게 받아들여지고, 후회나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되새김질되어 미안함만 쉼없이 밀려오는지. 이제사 모든걸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마음들을 고이 모아두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에 씁쓸하게 그 흔적들에만 애틋한 시선만 주게된다.



📖아버지가 부르는 '네'가 내가 아니라는 배신감.

어제까지는 사진관집 외아들이었고, 이제는 8살어린 동생이 있는 형이되었다. 동시에 사망한 엄마의 자리에 새어머니라는 분이 오셨다. 기하에게 의중을 묻기도 전에 온 이방인이며 가족이었다. 모든게 자신의 위주로 돌아가던 세상에 자리를 뺏긴 상황.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 쇼윈도에 항상 기하의 사진이 있던 영역을 비집고 들어온 작은 아이. 아버지의 시선은 오로지 기하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나누어야 한다는 점. 우선순위가 아니게 되는 것. 친 동생과는 또 다른 애정의 분배. 기하는 그 균형을 잃었고, 이 집에서 지탱하던 존재감도 잃었다는 것을 느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는 온전한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채워진다.


📖일종의 채무와 같다는 것을요. 혈육 사이라면 자연스러울 어떤 책임이나 보살핌이 저와 그들 사이에선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요.

나누는게 낯선 기하였다면, 재하는 받는 것이 낯선 입장이다. 폭력을 쓰는 친부. 그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살려 애썼던 어머니와 재하. 그러니 누군가의 호의와 선의가 낯설고 당혹스럽다. 받아 본 적 없는 손길이며 기대한 적 없는 마음이었기에 이걸 받았을 때 얼마나 더 큰 무언가로 되갚아야하는지에 대한 걱정이 크다. 새아버지는 어머니가 좋아서 가정을 합친거지, 병원비드는 자식놈을 원한건 아니었을테니 어머니의 짐짝이되고, 새아버지의 근심이 되어 가정의 파탄에 자신이 불씨가 될까 조마조마한 여린 마음이 안쓰러워진다.

저 또래의 아이들은 눈치로 큰다는 말을 실감한다.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아도 도르륵 굴러가는 눈망울이 온갖 걱정과 근심을 다 흡수해 버리더라. 그래서 어른의 따뜻한 애정을 채무로 받아들이고 갚아야한다는 고심가득한 눈빛에서 이건 쉽사리 바뀌지 않는 성향이겠구나를 느꼈다.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타인의 호의지만, 행복보다는 근심으로 마음에 쌓아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 녀석 커서도 이러겠구나 싶은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현실로 보여졌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

자신의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이라도 같이 가준 형이 좋아하니까 그 감정을 깨기 싫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여느 형제와는 달랐던 것임을 확신하게된다.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것.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표현이 어떤 이에겐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를 재하를 통해 배운다. 사사로운 것에도 고민을하고 주저하는 것을 보며 당연하지 않은 관계, 이른바 억지로 엮여진 관계에선 어느하나 쉬운 것이 없음에 재하가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 형성에 어려워하고 마음을 열 지 못하겠구나를 느낀다. 태어 날 때 부터 그 마음을 갖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는데, 재하가 가진 삶의 반경이 대부분 이러한 조건에서 재하를 쥐고있었기에 만들어진 어른으로서 미안한 감정이 크게 다가왔다.



📖울퉁불퉁한 감정들을 감추고 덮어가며, 스스로를 속여가며 가족이라는 형태를 견고히 하려고 노력했지요.

어쩔 수 없이 어린 기하와 어른의 기하가 남긴 상념보다 어린 재하와 어른의 재하가 꺼내어 둔 마음에 시선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표현이 과한 비하라 할 순 있겠다만 미워하는 감정을 표출하고, 싫은 마음을 내색했던 기하였다. 재하보다 8살 더 많은 형이 아니라, 그냥 어른이었다. 그럼에도 재하의 마음을 들여볼 여력이 없던 성글던 기하였으니 질타하는게 아니라 얄미워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진료실에 한번이라도 같이 들어가 줬더라면 어땠을까 싶지만 소스가 뭉텅이진 중국냉면의 땅콩소스를 잘 풀어주는 무심했던 표정과 애쓰는 손길에서 둘 다 어쩔 수 없이 서툰 마음었다는게 느껴졌기에 이러한 마음도 그냥 단지 제3자의 뾰족했던 마음쏠림이었음에 잔소리를 멈춰본다.

기하가 이전 직장의 명함 뒷편에 황급히 휘갈기며 현재 연락처를 적어 줬더라면, 지금은 거기 다니는데 조만간 관두려한다 흘리듯 말해줬더라면 재하는 어떤 마음으로 우편을 보냈을지 생각해본다. 그땐 아니었고, 지금은 달라진 마음쓰임이었다면. 결국 그때 기하형도 어렸구나, 어려서 그랬구나로 점칠되었을 텐데. 그래서 아쉽고 마음이 또 한번 정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게 된다.

내가 두고 왔던 마음의 계절. 멀찍이서 보면 단란했던 가족사진. 그 속에 재혼가정이었는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의 어색한 관계가 보이지않는 벽에 가로막혀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쓰는 새어머니와 밀어내는 아이, 치료에 애쓰는 새아버지와 짐짝처럼 여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아이의 맞닿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인화된 사진에서 여느 가정에나 있을법한 두툼한 앨범에 끼워진 그 한장이 소중하고 그리워진다.

최선을 다했고, 되려 친자식보다 타인의 자식에게 시선이 걸려있던 순간인데 그 땐 몰랐다. 그리고 그 때의 부모 나이를 넘어선 기하와 재하는 뒤늦게 마음을 더듬어 본다. 자책을 못하지만 그때의 자신들과 그때의 부모에게 미안함 뒤늦게 들이민다. 이제서야 그리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바뀌진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그 시절을 꺼내먹는다면 두고 왔던 시절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오래 곱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그대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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