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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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은 뭔가 더 말을 할 듯 하다가 입을 다문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아뇨, 아무것도' 에서 끝이 났지만 진심은 '아닌게 아닌거 아는데 말하면 뭔 일 날거 같아서 말 못하겠어요' 라는 듯 입안에서 맴도는 이야기가 더 많을 듯하다. 채 말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15편의 단편으로 담아두었다.

짧은 소설이라 부담이 없지만, 어딘가 찜찜하고, 씁쓸하기도하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했다.

저자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불투명한 틈새에서 이야기를 당겨왔음을 시사했다. 겉으로 보면 별거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그렇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은 기분은 아닌 감각들. 거기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기시감이 드는건 기분탓으로 치부해야할까? 아닌거 알지만 들춰보면 어딘가 있을법한. 그래서 마냥 없던 이야기는 아닌듯 하며, 그래도 굳이 이런 일이 있겠냐는 듯한 애매한 감정을 쥐게 만든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기묘하다 할 수 있고, 석연치 않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흔적이 남는다. 뭐랄까 요즘처럼 덥고 습한날 마시다 놓아둔 컵 아래 남은 물자국 같은 잔상이라 하면 표현이 적절할까? 평범한 세상으로 보여지는데 후미진곳 어느 지점, 허투루 보았던 멀쩡하던 표면의 어딘가. 거기서부터 시작될 이야기가 딱 저자의 단편들이었다. 청탁 없이 마감 없이 분량 제한 없이, 그냥 쓰고싶어 쓴 글이라 했고, 순수한 창작의 욕구가 빚어낸 작품들. 오롯이 쓰고 싶어 쓰여진 글이니 훌렁훌렁 날개를 달고 제 맘대로 흘러가는게 더 기묘했던 듯 하다. 인물의 말 한마디, 이야기가 꾸려지는 상황에서 공포도 아닌것이, 스릴러도 아닌 것이 생활밀착형 스산한 씁쓸함이 있다. 허탈함에서 오는 것, 공허함에서 오는 것, 재미나게 이야기를 끌고 가다 딱 끊어버려 오는 것. 묘한 감각의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단편. 이 책이 여름 소설의 따끔한 맛이 된 듯 하다.

📖아뇨, 아무것도_ 제가 보는 장면이 아주 먼 미래는 아니거든요.

친하지 않은 동료와 회식 후 함께 탄 택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디자인팀 신입. 어떻게 반응하라는거지? 호기심을 갖고 케물으며 이야기의 물꼬를 틔워야하는건지 헷갈린다. 적막이 흐르는 택시안의 기운이 싫어 아무말이나 한 느낌은 아니다. 늘 보이는게 아닌, 가끔씩이라는 말이 더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신입과 제대로 말하는건 처음인데 주제가 이런거라고? 그런데 그게 맞다면? 진짜 본거였다면? 아주 먼 미래가 아니었다면 좀 더 정확하게 말해주면 안되는거였어? 라고 성질부리고 싶어지는 상황에 놓인다.

예상했던 상황과 달리 의외의 순간에 저 말을 하게된다. 그래서 폴이 그렇게 신분을 감추듯 외형을 숨기고 살았던 이유가 뭔지, 그걸 왜 보면 안되는건지에 대한건? 그래서 선미씨가 봤을지도 모르는 그 이후의 장면은 무엇일지 집요하게 묻고싶어진다. 먼 미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상황을 알려주며 조심하라던가 무지 행복할 것이라는 정도의 분위기 파악이라도 일러주었다면 선미씨의 예언같은 스포가 고마워질텐데, 원망만 커지게한다. 아무것도 아닌걸 보고 아무것도 아니라 말해야하는 찜찜함. 타인의 앞날을 보고도 아무것도 못 본척 살아야하는 선미씨는 매번 이러한 감정으로 살텐데, 이 찜찜함을 갖고 매일을 어떻게 사나.

📖작가의 말_ '그냥' 읽고 있을 당신께도 반가운 마음을 건넨다.

이 배열을 하고도 무사히 원고를 넘길 수 있다는 대단한 능력. 어떠한 원고 청탁도 없이 내가 쓰고 싶어서 썼고, 내가 내고 싶어서 낸 책이라는게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본건 아니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기도했다. 작가의 말이 맨 앞이나 뒤가 되는게 대부분인 룰을 어기면서 꿍꿍이라도 있는듯 적었을 저자를 생각하면 하고픈게 많고, 말하고픈것 또한 많은 사람인게 느껴졌다.


📖초능력_ 전 실없는 사람이라고 타박하며 혀를 찰 테고. 그렇게 저는 초등력을 가진 남편과 함께 늙어갈 겁니다. 아주 지겨워 죽겠어요.

지겨워죽겠다 하지만 전혀 지겹지 않아서 일부러 싫은 티를 내는 일종의 어설픈 푸념. 사는게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는데, 이런거 너무 좋아하면 팔불출될까봐 하는 입에 발린 말.



📖친구의 연인의 친구들_ 처음부터 그게 솔직한 심경이었는데, 그 간사한 마음을 인정하기 힘들었나 봐요. 그래서 더 화가 났던것 같고.

장미의 진심을, 정식씨의 본심을 서로에게 알리지 않은 채 상황이 종료되었고, 그 둘의 속내를 제 3자만 알고있어야할까. 일기를 통해 둘의 뭉그러진 관계를 대강 그려본다. 서로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했으니 한 사람은 펜으로 허상의 무엇을 적어두고, 또 한 사람은 뒤늦게 그 흔적으로 삼류소설로 살을 덧붙인다. 의중은 중요하지 않지. 오로지 보고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걸로만 믿어내는게 수월하다는 걸 장미와 정식을 통해 느낀다.

인정하기 힘든게 아니라 그렇게 인정해야 본인이 편하니 좋게좋게 포장하는 거겠지.


📖테니스를 쳐야 하는 이유_ 당신이 테니스를 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아름다움도 이 세상에 꼭 존재할 이유는 없는 것이지요.

결국 이유가 있던 찰나였고, 꼭 필요로 했던 만남들 뿐이었음을 알려준다. 테니스를 칠 수 밖에 없던 과정, 그 라켓을 건네받는 것이 우연도 아니었다는 것. 이유를 모르고 그러려니 살아도 되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살아온 모든 순간엔 특별함과 가미되었던 삶이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돌아가야하는 이유가 있고, 다시 쳐야만 하는 확고한 운명임을 인지하는 과정. 모든 사람들이 티미같은 삶을 산다고 봐야할까, 티미였기에 이러한 운명같은 우연이 있었던 걸까. 이유 없는 이유는 없다했다. 그러니 존재할 이유는 없다하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말장난 같고, 놀려먹는 것 같아도, 그게 그럴 수 밖에 없고, 다 그런거라고 또 한번 말장난을 얹는 듯하다. 저자는 또 이렇게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도 제일 확실한 답으로 쌀보리게임 하듯 독자와 문장놀이를 하고있었다.

명쾌함은 없다. 그렇다고 답이 없냐? 또 그건 아니거든. 그런데 머뭇거리고 긴가민가한 상황을 곳곳에 찔러두었다. 머뭇거림, 주저함, 놓침, 외면. 일상에서 심심찮게 마주했던 감정과 상황인데 거진 다 불편하고 불투명한 걸로 치부하다보니 기억에서 배제한 채 살고있음을 느꼈다. 저자는 이 틈의 감정을 긁어모아 이야기를 꾸렸다. 불편한걸 마주하는 순간 당신의 표정은? 당신이 그린 이후의 이야기는 뭘로 정리하면될지를 물어보지만 답을 기다리진 않은 듯 하다. 모호한 감정을 자극시키며 독자의 세상에 이러한 날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는 듯 꾹꾹 눌러두고 사라지는 듯 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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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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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사람들의 다정한 글이 좋다. 달디단 시선으로 자신 곁의 것들에 눈맞춤을 하는 사람의 선함이 좋다. 사사로운 것에도 애틋함을 담아내는 마음의 결이 참 예쁘게 보인다. 눈에 힘을 주기보다 시선의 온도를 높여 따숩게 바라보는 사람의 상냥함을 흐뭇하게 보게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결을 지닌 사람이다. 입에 욕을 달고 살거나 장난이라해도 험한 말이 오고가는, 그게 친근함의 표현이라 생각하는 사람보다 눈 맞춤, 말 한마디에 진심이 한껏 뭉쳐있는 사람이 더 좋다. 나 또한 그러고 살고싶어 성질머리가 뻗치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말캉한 에세이를 찾게된다.

하태완 저자의 책을 마주한게 2023년이니까 2년만이구나. 2년동안 또 성질머리가 꼬일대로 꼬여버렸을 테니 하태완의 글로서 마음의 결을 쓰다듬어 볼까 싶어 꼭꼭 씹어먹듯 에세이를 읽어내려갔다.


저자는 여전히 사랑스러움을 도처에 심어두고있었다. 환경이라는게 무섭다고 이러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로 인해 번지는 선함과 따스함은 생각보다 빨리 번지고 깊게 스민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의 글을 주기적으로 읽어가며 내 안에 모자란 애틋함을 채우게된다. 그리고 여전히 잘한 선택임을 느낀다.

사랑의 언어들은 언제 보아도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이게 연애를 갈망하든, 연애 초반이든, 신혼초이든. 그리고 나처럼 긴 연애를 끝낸 후 결혼을 하고, 10년이 넘는 무탈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한들 이러한 진득한 애정지수는 넘치더라도 가득히 채워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삶에 대한 의심이 들고 내가 나를 지켜내는 일이 버거워지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해코지하듯 할퀴는 마음을 먹게되니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며, 함께 사랑하며 살자'는 마음을 계속 주입시켜놔야됨을 느낀다.

저자는 말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픈 마음을 놓지 않는 당신, 그 모든 흔들림은 의미 있다'라고했고, 나를 지켜내는 사랑과 관계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 용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이라 했으니 나도 그 응원을 받아보려한다.


저자가 남겨놓는 글들은 보통 SNS에서 많이 보게되는데, 사랑스러운 사진, 애틋한 찰나와 함께 적어놓는 기록인데 이는 80년대생들은 알만한 싸이월드의 기록에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글을 에세이라는 부류로 분류하지 않고, 사사로운 글이라 치부하듯 책으로 나오는걸 탐탁치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다. SNS에서 퍼다 나르는 글로도 충분한데 책으로 나오냐는 식의 문장을 하대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겐 이러한 글이 소비하기 아까운 문장이라도, 나같은 사람들에겐 곱씹어보고 다시금 마음을 다 잡게되는 글이라는 걸 말해주고싶다. 그러니 날이 선 사람들의 글로 위축되기보단 저자의 글을 좋아하고 아끼는 독자들을 위해 꾸준하고 더욱 진득하게 함께해주었으면 하며 프롤로그부터 밑줄을 그어본다.

착함과 선함은 때때로 타인들에게 바보같이 보이고, 미련한짓으로 보여지기도한다. 상대에게 위협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찌르는듯한 말로 그 마음을 찢으려할까. 나는 여전히 그대들의 타고난 착함과 책임감, 천진하지만 야무진 마음이 좋다. 굳이 내비치지 않으려하는 본인의 우울과 슬픔도 익히 알고있기에 감추려하는 그 마음도 내가 먼저 알아채어 내가 받은만큼 행복을 주고싶다.

그러니 나나 너나 우리 주눅 들지 않고 떳떳하게 행복을 만끽하면 좋겠다.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 안 올거라 여겨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그러지 말자. 내 몫의, 그리고 네 몫의 행복을 야무지게 끌어오자.

📖삶 하나_ 이왕이면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지나치게 미워하지 않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에 일인 분의 행복이라도 우리의 몫으로 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간에 주름만들고, 세모눈을 뜨고, 짜증섞인 깊은 숨을 내쉬면 뭐가 달라질까? 그렇게 뜨거운 숨을 뱉어내었을 때 상황이 달라진다면 어쩔 수 없겠다만 바뀌는건 없더라. 그러니 미운 마음과 뜨거운 화를 토해내기보단 오늘 나에게 주어진 내 것의 행복을 팡팡 터뜨려 나를 감싸주고싶어진다.

찌푸리고, 후회하고, 증오하고, 자책하는거 그거 스스로를 더 아프게 할퀴기만 하더라구. 그러니 삶 하나, 그거 딱 하나뿐인 유일한 내 몫이니 사랑에 겨워하며 무너질 찰나마다 든든하게 버틸 재간을 마련해주는 사랑스러운 단단함을 곳곳에 박아놓고 싶다.


📖슬픔이 가난했으면_ 금전적 가난을 반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 또한 다를 바 없지만, 슬픔과 어둠에 있어서만큼은 찢어지게 가난해지고 싶다. 호주머니를 아무리 헤집어도 작은 슬픔 하나 발견되지 않는 삶이고 싶다.

우리는 행복이나 기쁨이 풍족하길 바라지 슬픔이 가난하길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이든 차고 넘치는 부유함을 기대하지 가난을 기대하진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틈을 노려 가난을 바란다. 요행을 바라며 유형의 무언가를 늘려대는 게 아닌, 줄어들길 바라는 마음. 허상의 것이지만 슬픔이 가난하길 원하는 것 정도는 들어줄만 하지 않을까?


📖우린 너무 청춘이니까_ 지금껏 나를 무척 슬프게 했던 건 대다수가 나의 시절을 바쳐 사랑한 것들이지만, 지레 겁먹고 다름 날의 마중을 머뭇거리기엔 남은 기쁨이 아직 많다. 가볍게, 가끔 힘차게 매일을 살자. 낭비하기엔 우린 너무 청춘이니까.

그 당시에는 너무 애틋했고, 유일한 것이기도 했으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한들 그 모든 찰나와 인연들이 영원불멸하진 않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했다. 그건 진실이었다. 죽고 못살듯 붙어다니던 대학시절 동기들. 학창시절 만큼 절절한 사이도 없다 했으나 졸업, 각자 다른 분야의 취업, 다른 지역 거주, 각자의 가정을 꾸림으로 뜨문뜨문 연락이 멀어지고, 가끔 SNS에 의무적인 하트만 눌러주는 사이가 된다. 먹고 살기 바쁘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가족들의 조사에만 찾아보고, 또 그런 날이 안 오는게 더 나은 사이. 그 시절이 아까운 것도 아니고,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것도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나이가 먹어가며 자연스레 이뤄지는 수순임을 알기에 억지로 부여잡지 않았으면 싶다.

그때도 청춘이고, 지금도 청춘이다. 오늘은 또 오늘로서 엮일 사람들과 일상이 있을테니 우린 그저 오늘의 몫으로 남겨진 것에만 집중하면 좋겠다.

... 어차피 닿을 인연이면 몇년에 한번 가뭄에 콩나듯 연락이 와도 반갑고 기쁘다. 상대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으로만 가득히 행복해하자.


📖순간을 기억하는 것_ 누군가는 사탕 주고 빼빼로 주는 날들이 상술에 불과하다지만, 상술에 일부러 당하고 싶은 사랑도 있음을 알려주는 사람. 낭만이 밥 먹여주고 우리를 배불리는 건 아니지만, 잊지 않은 만큼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깜박하지 않은 낭만 덕에 사랑하는 사람이 찰나인들 환하게 웃어준다면, 그것만으로 너무 커다란 행복일 테니까.

나는 이런 상술적인 날을 좋아한다. 이 하루를 빌려서 내 마음을 슬쩍 내밀기 좋은 구실이 되니까. 그래서 이런 날이면 작게나마 간식과 소소한 이벤트를 통해 나에게 상대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차리도록 티를 내어본다. 뜻밖이라 생각할테지만 남들 다 챙기는 그런날이니 나도 해봤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좋다. 낭만이 밥 먹여주지도 않고, 내 돈과 시간을 할애해서 만드는 이벤트이지만 상대가 고마워해주는 말 한마디 놀랐다는 표정, 잘 먹었다며 건네는 인사가 나를 더 나은사람처럼 띄워주니 돈 쓴 보람이 이런거라며 이럴라고 돈번다고 농을 건넨다.

낭만 덕에 우리는 오늘 그 어떤 사람보다 행복할테니 이런 구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상술에 훌렁 넘어가는 사람으로 쭈욱 살지 모.


📖한 줌만큼의 정성_ 사랑만큼 비효율적인 것도 없지만, 사랑이라서 가능해지는 것들.

효율성은 떨어질지라도 효용가치는 항상 상위에 머무는 것. 그게 사랑이라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시간을 쪼개어 순간을 공유하는 것. 바빠도 연락 한번 해보고, 이동시간이 길어도 1분 얼굴 보는 것에도 만족하는 과정. 참아내는 마음보다 다다르는 마음이 더 크니까 가능한 가성비 떨어지는 방식들. 그게 사랑이라 가성비를 운운하지 않게 됨을 느낀다. 효율이 떨어지니 쉴때 보면 되지 라는 빈말도 하지만, 보고싶을 떄 봐야하고 듣고 싶을 때 들어야하고, 만지고 싶을 때 손을 잡아 체온을 느껴야했다. 그러니 나에게 사랑은 어제와 오늘 별다를 것 없이 흔해빠진 일상에 '너'라는 존재를 곳곳에 심어두는 방식이다. 내 삶은 삶대로 살되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 처럼 틈틈이 그 틈을 메워보는 것. 그게 나를 더 촘촘하게 만들고 상대를 불안하지 않게 만드는 사랑의 방식이고 한줌의 정성이다. 내 찰나는 늘 당신의 것이라는 안정감을 주고픈 것. 타인이 보면 비효율, 우리가 보면 효용최대가치. 결국 우리만 좋으면 모든 등식은 성립된다.


📖비밀 언덕_ 네 위로 어떤 눅눅함이 왕창 쏟아져 퍽 우스운 꼴이 된대도 아무렴 괜찮아. 젖은 몸인들 아유 예뻐라, 하며 가득 안아 품어줄게. 도처에 흐드러진 사랑을 몰래 꺾어 모두 네게만 줄게. 주변이 온통 가시덤불이라면 그사이에 아늑한 집이라도 지어줄게.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든 내가 알아채 줄게. 자그마한 나를 쉼 없이 보듬느라 조금씩 투영됐을 가냘픔까지 좋아할게. 그러니까 우리 자주 웃고 가끔 울자. 여태 잘해왔듯 서로의 가장 웃기고 좋은 사람이 되자.

비밀 언덕이며,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서로. 유일한 나의 대나무 밭이며, 오롯한 나의 등받이같은 사람. 몸이든 마음이든 돌아갈 집같은 든든함 존재. 가끔 생각을 한다. 내가 전생에 어떤 업을 살았길래 이러한 복을 얻었나 싶은 것. 날카롭기만하고, 휘어지지 못하고 매번 부러지는게 익숙한 사람인데 나에 비해 말캉하고 폭닥한 사람이 내 곁을 지켜주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날이 선 마음을 자신의 푸근함으로 다 뭉개어두는 사람을 보면 천성이 이런가 싶은 생각을 하다가도, 본업에서는 한껏 예민하고 정확한 걸 보았을 때 이 사람은 나에게 특화된 능력이 있음을 깨닳게했다.

어린시절 나를 화초처럼 키워낸게 부모라면, 다큰 어른을 온실 속 여린 꽃나무로 이리저리 살피는건 남편의 몫으로 위임된게 분명해보였다. 말못하고 표현못하는 식물에게도 다정한 말을 건네고 애틋한 마음을 다해 키우면 예쁘게 자란다 했던 그런 뜬구름 없는 이야기도 이 사람에겐 그게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실감하게된다. 부족하지 않을 표현과 진득한 진심은 역시나 내가 꾸준히 사용하고픈 유일무일한 대나무밭이며 몸에 힘을 빼고 기대고픈 사람이다. 이게 사랑이지 뭐 별거겠어 라는 말로 떳떳하게 기쁘고 행복해 하고 싶다.


📖관계와 권태_ 그리고 애를 태우기보다 애를 쓰는 데에 시간을 들였으면 좋겠다. 본디 사랑은 주저하기보다 먼저 발으리 구르는 마음의 편을 들어주기 마련이니까. 부디 그 모습 그대로 근사한 사랑이 되기를.

마지막 한마디. '부디 그 모습 그대로 근사한 사랑이 되기를'바라는 간절함. 근사함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본다. 거의 같다 할지, 그럴듯하게 괜찮다고 해야할지 망설였다. 생각보다 그럴듯한 괜찮음을 넘어선 것이 내가 바라보게되는 당신의 근사함이다. 내 상항선보다 우위에 있어 매번 그득한 마음을 얻어내는 사랑. 그래서 매번 느끼는 이 관계의 벅참이 내가 바라는 낙원이라는 세상임을 다시한번 느낀다.


생각해보면 나는 바라는것 이상의 벅찬 마음과 진득한 사랑을 받고 있는 듯 하다. 타인과 비교 할 수록, 다른 경우의 사건들을 나란히 두어도 내 선에서 최고의 행복임을 자부하게된다. 대단한 부를 축적하지 않아도, 매사 부지런한 사람이라 다행이다. 요행을 바라지만 또 한 켠에서는 그만큼의 성실함을 쌓아가는 사람. 올곧은 애정으로 표현함에 있어 주저하지 않아 받는 사람이 조갈나지 않도록하는 풍성함. 그래서 나는 매번 저자의 책을 읽으며 내 곁의 배우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더해본다. 다음 생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번 생에서는 나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났구나 떠벌려도 될 만큼의 애틋한 사람이 곁에 있어 든든하다.

저자가 말하는 낙원은 딱 그정도의 폭닥함이라 정의내려본다.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 없이 안락한 공간이 사랑하는 사람의 곁 이라는 점. 가수 싸이가 낙원이라는 가사에 녹여낸 말 처럼, '비와 바람도 세상과 사람도 우릴 막지 말라'는 것 처럼 어떠한 시련이 있다 한들 두 팔 벌려 나를 향해 오는 사람의 품에 쏘옥 들어 간 후라면 세상 두려울 것 없다는 점. 그게 우리가 바라는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는 낙원임을 실감한다.

그러니 사랑에 불안한 사람들과 사랑에 확신 없는 사람들이라면 저자의 말들에 나를 녹여두어 각자만의 낙원을 찾았으면 좋겠다. 별거 아닌거 같아도 별거 이상으로 행복한 공간임을 내가 증명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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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로 마음먹은 당신에게 - 나를 활자에 옮기는 가장 사적인 글방
양다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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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서간문을 발견했다. 에세이라 해야할지, 서간문이라 해야할지 모호하지만 한없이 적극적이고 스스럼없는 대문자E의 글방지기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다만 글을 적고,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며 쪼잘쪼잘 이야기를 해주는 듯한 문장들이다.

저자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철학과 그간의 경험, 많은 에세이들을 읽고 느꼈던 문장 다스리기를 담아두었다. 편지 같아도 그 사이사이 끼워진 팁과 영감을 돋우는 키워드를 찾는 방식들은 참고서의 형태로 베여있다. 일주일에 한 편씩 따라 읽으며 독자가 글을 쓰게 만드는 애틋함이 담긴 편지글이다. 그래서 달콤한 구슬림과 때때로 둠뿍 담아둔 귀여운 문장 독촉들은 내가 꼭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가진 사람처럼 만들어둔다. 이미 오랜시간동안 일상을 글로 옮기고, 사진으로 남기며 블로그에 기록해두는 습관을 갖고있다. 처음엔 내 기억력을 믿지 못했던 것이고, 또 한편으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씩 다른 무언가를 찾고 흔적을 남겨놓기 위함이기도했다. 하루를 살아내고 그 틈에서 잔잔한 행복을 한 줌씩 만들어두다보면 줌치에 넣어도 헐겁던 일상이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차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나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정말 저자처럼 나는 어쩌면, 쓰기로 마음먹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잘 쓰고픈 마음과 더 멋지게 표현해두고픈 마음을 얹어 제대로된 에세이로 써보고싶게 만들어낸다.


쓰기는 언어에서 가장 단단하고 구조적인 영역이라 했다.구성과 구조, 앞뒤 문장의 연결성, 이야기의 방향성, 맥락과 논리적 구조의 관계. 의심하지 않는 문장의 단단함. 대단한 교훈이 아니더라도 잘 맺어진 아귀가 들어맞는 밀도. 그걸 바라며 쓰게된다. 저자가 말해주는 쓰기의 뼈대는 이러한데 내가 잘 하고 있는게 맞는지, 이러한 단단한 심지에 적절한 살을 덧붙이는 과정이 허술하지 않는지. 그래서 쓰고, 보고, 고치기를 반복하게된다.

잘 하려고 몸에 힘을 주고 글을 쓰고 있는걸 어찌그리도 잘 아는지 빈 문서는 우리의 친구이지만 저자는 빈문서에서도 코박고 가라앉을 수 있음에 주의하라했다. 일상의 말투로 문장을 시작하고, 편하게 문장을 흘리라했다. 나는 매번 손에 힘을 주고 글을 썼고, 어깨를 한껏 웅크려 적는게 당연했던 사람인데 힘빼기의 기술부터 연마하며 새로 걸음마를 하듯, 새로 글을 배우듯, 그렇게 새로 시작하게 만들었다.

📖가장 구체적인 삶의 증거_ 나만 보는 일기도 좋지만, 누군가 훗날 읽게 되더라도 그날을 그려볼 수 있도록 써보세요. 같은 하루를 살았더라도 지금 그것에 주목한 사람은 나뿐일 테니까요.

어린시절의 일기만 봐도 그렇다. 쓰고 지우고, 또 때로는 뜯어내며 진심이 담긴 유일한 공간이지만 가족이든 친구든 허술한 자물쇠로 잠겨진 비밀 일기장을 들춰보는 아찔한 상상. 그만큼 내 이야기가 궁금했을 타인들의 관심. 어린녀석이 글빨이 좋아 훔쳐보는 맛이 있다는 듯 흥미진진해보이는 눈짓. 결국 내가 겪는 세계를 증언 할 수 있는 유일한 화자이며 역사를 기록할 독점 기회라는 것. 그래서 생생하게 남기고픈 욕망이 글을 적게 한다. 원동력이란게 이런건가 싶을 정도의 손가락 들썩거림에 신이 나게 만든다.



📖이토록 훌륭한 조력자_ 분명 중요한 얘기가 될 것 같았는데 막상 쓰고 보면 이게 뭔가 싶은 얘기고요. 별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꺼내본 이야기가 알고 보니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얘기입니다. 어쨋든 과거의 나는 정말 수고했어요.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이번에는 그 글을 넘겨받은 지금의 내가 일해야 할 차례입니다.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쓰는 것.

너무 잘 쓰려 하기보다 쓰는 이가 신나길 바란다는 저자. 이야기의 길을 꺾고 싶으면 꺾어보라는 방목형 글선생. 현생에서 해보지 못했던 것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과감히 시도하고, 솔직해져 보기도 하라며 글 속에서라도 자유를 찾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초고니까! 초고는 얼마든지 주워 담았다가 다시 쏟아 볼 수 있으니 하고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문장적 허용. 그러게, 초고인데, 일단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서 시작인데 뭐가 무섭고 쪼글리나 몰라. 이런들 저런들 우린 초고 위에 수많은 퇴고를 반복할 각오로 시작한건데 겁먹었던 내가 아까워지그래.



📖삶의 표식_ 남들 신경쓰지 말고, 훗날 나를 위해 남기는 시절의 표석을 세워보세요. 너무나 진짜인 내용을 쓰고, 문장을 다듬으며 멀어져봅시다. 문장들 위에 오래 머무를수록 어쩐지 더이상 내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 거예요.

생각해보면 어린시절 글쓰기의 순간부터 남들을 의식해왔다. 지금 학생들은 어찌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일기는 나의 일과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과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였다. 평범한 순간속에서도 재미난 무언가를 발견해야했고, 두루뭉술한 하루에서도 반짝이는 무언가를 굳이 드러내며 내 일기가 재밌음을 알려야만 했다. 그래야 선생님의 색깔 볼펜이 긴 코멘트를 남기게 만들었고, 잘했다는 도장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꾸며진 문장으로 내 삶을 허왕되게 부풀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상은 지루한 날도 있고, 고요한 순간도 있으며, 번뜩이는 찰나도 있고, 다시금 잔잔한 시간의 흐름도 있을텐데 그시절의 나는 왜 그리도 시트콤 같은 세상이 되길 바란건지 생각해본다. 잘 보이고 싶고, 잘 쓴다 칭찬 받고 싶고, 그렇게 또래들 속에서도 표본이 되어 박수받는 글쟁이고픈 마음이 나를 부풀렸나보다. 이제는 글 속의 내가 다른 사람이 되기보단 데칼코마니처럼 나를 닮은 또 다른 나로 꾹꾹 눌러보게된다. 타인들의 관심은 한때이며, 주구장창 읽고, 또 살펴볼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렇게 치장 없는 글을 써야겠다는 걸로 마음의 방향을 틀어둔다.

설령 이게 흥행도 덜하고, 시선을 덜 받는 심심하기 그지없는 글이라도, 일단 나는 그러고 싶어진다. 저자도 그러라했으니까 내 길이 맞겠지!


기록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헌데 이 방향이 맞는건지 헷갈리는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궁금했다. 제대로 된 쓰기의 능력이.

그렇다고 내가 에세이를 낼 것도 아니고, 고작 일상을 기록하는 일상블로거인데 수업을 듣고, 피드백을 받는게 타산이 맞는가에 대한 물음이 컸다. 물론 배운다고 그게 공중분해 되는건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기록하는데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컸던게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저자의 연서와도 같은 문장은 무얼 해라 마라 하는게 아니라 이게 괜찮은데? 한번 해볼래? 라며 에둘러 이야길 한다.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길 하다가도 '오늘 해야하는 쓰기 비법은 이거야! 이거 딱 하나만 기억해!' 라는 듯 마지막해 해야할 것들을 툭 하고 흘리고 사라진다. 다그침은 없고, 일단 해보라며 했고, 할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은 듣지 않고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강요없는 조언에 순순히 따르게됨을 느낀다. 언제까지 해오라, 어디까지 해봐라 라는 식의 제한선을 두지 않지만 한번은 해보고싶게 만드는 묘한 능력. 그래서 삶을 단어와 문장에 녹혀보고, 그 일상속 관계에서 오는 감정들을 기록하고, 순간과 순간을 덧붙여 시절의 나를 옮겨심어두게 만든다. 이리저리 써보고, 또 만지작거려보면 이게 맞다고. 이런게 진짜 글이라고 호들갑떨며 잘했다 해줄 저자의 들뜬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내가 뭐라도 된냥 으쓱해지게 한다.

그래서 쓰는 일에 더욱 적극적이고 싶어지고, 마음을 덧붙이는 단어를 더 신중히써보고싶은 마음을 쥐게된다. 쓰는 것이 두려운 사람, 쓰는 것이 일이 되지 않길 바라는 사람. 그리고, 쓰는 것을 내 삶과 나란히 두어 긴 호흡으로 이어가픈 사람, 강의실 일대일 수업을 주저하는 그냥 나같은 사람에게 부담없이 읽고 시작하자는 말로 툭 내밀고 싶게 만든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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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기분은 어때요? - 불안장애를 겪은 심리치료사의 상담 일지
조슈아 플레처 지음, 정지인 옮김 / 김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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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한 기록입니다.


장애라고 하면 뭔가 온전치 못한거 같아 입 밖으로 뱉는게 어려워지는 단어다. 거기다 불안장애? 과거에 비해 이러한 심리 상태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있다 한들 심리치료사에게 자문을 구하고, 센터를 방문한다 하면 걱정 반 우려 반으로 측은한 시선을 받게된다. 그래서 숨긴다. 숨기는게 일종의 자기방어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나의 상태를 확실히 알고 치료를 받는건 옳은 것인데도 말이지. 누군가에게 말 하기 주저하게되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 것도 망설여진다면 일단 이러한 업을 삼고 있는 자의 상담일지 책으로 나를 다싀려보고, 책 속의 상담 세션에 나를 숨겨 청강하듯 들어본 후 방향성을 잡아가는 것도 좋은 갈래라 본다.

한 때 불안장애를 겪고, 이제는 저명한 불안 전문 심리치료사가 된 조슈아 플레처의 심리 에세이. 겪어 봤으니 더 잘 아는 사람의 진짜 조언. 논문이니 전문 서적이니 하는 글로 배운 것이 아니라 겪어 봤다는 것 만으로도, 앓아 봤다는 것 만으로도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는 사람의 내담자 상담세션. 벽돌 책 같아도 그 속에 들어가면 진짜 짧게만 느껴지는 상담 시간들이다.

심리치료사 한 명과 이야기하는 것 같아도, 13가지 내면의 목소리들이 너무도 나 같아서, 나랑 별반 다르지 않는 사람의 다양한 마음들이 한데 뭉쳐있는거 같아 어려움 없이 읽어가게된다. 걱정 좀 덜고, 경계도 좀 덜고, 가면 좀 벗고, 편안하게 시작해본다. 그는 내 이야길 들어 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불안의 기원들_ 성취에 대한 걱정, 자신이 부족하다는 염려, 남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 자신이 사회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상태인지 확인하는 일 등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이 갖고있는 각각의 감정들. 그 중 불안은 그러한 요소 중 일부인데 우리는 이 분야에 취약했다. 불안이 커지면 다른 감각들도 예민해지게되고, 모든 과정의 결과에 불안 탓을 돌린다. 잘 된 것 보다 잘못된 것에 이 감정의 핑계를 대며 과한 질타를 얹는다. 공황이나 강박, 내면불안과 사회불안, 극단적인 예측의 시발점은 불안이었다. 인과관계 속 전후 상황에 호 보다 불호의 상황엔 늘 이 녀석이 들러붙어 썩은 미소를 짓는달까? 갈래도 다양하고, 주기도 짧아 반복성이 짙다. 그러니 불안은 불안을 낳았고, 불안은 더 큰 불안을 땡겨왔다. 이 위협의 메커니즘에 대한 대비와 자기방어가 자존감을 무너뜨리다보니 얘를 어찌 살피고 구슬려야 할 지를 계속 질문에 질문을 얻어가며 네 명의 심리치료과정에서 나와 닮은 구석, 또 내가 외면했다가 새삼 알게되는 면면을 얹어보며 이야기 너머의 나도 같이 상담을 요청하게된다.


📖리바이1_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자기 얼굴에서 흘러내리게 두었고, 나도 가만히 있었다. 그에겐 이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았고, 나는 그에게 그 공간을 내어주었다.

타인에게 눈물을 보이는 순간은 나이가 들면 들 수록 어렵다. 괜스레 내 치부를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 가장 큰 문제라 여기게된다. 그의 다양한 감정 중 다정이나, 구원이는 눈 속에 있는건지 눈빛으로 이 마음을 드러내어준다. '맺힌게 많은가보다, 안쓰럽다, 뭐가 그리 괴로운지 알아내서 해결 해줄게.' 라는 상담자의 시선. 내담자의 어려운 걸음이 헛되지 않게 시작하는 상담자의 자세.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고, 들어줄 마음과 기다려줄 여력을 마련하는 것이 어찌보면 상담자가 하는 일이고, 벌이의 수단이겠다만 이 과정을 살뜰히 준비하여 마주하는 것에 쓸데없는 걱정을 덜어본다.


📖노아2_ 여기 와서 비참한 기분을 느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신발에 스프링이 달려 있으면, 흙탕물을 헤치고 갈 때 좀 더 쉽게 지나갈 수 있죠.

생각보다 불안이 뻗어낸 갈래는 다양하고 또 복잡하다. 얽히고 얽힌 관계들 속을 비집고 다양한 방법으로 거슬리고 거북하게 만든다. 특히나 사회적 불안은 상호작용을 이루고 살아야하는 관계 속에서 더욱 날이 선 채로 다가온다. 혼자 사는 세상도 아니고, 혼자 성과를 이뤄야하는 방식이 아닌 생(인생)이다보니 내가 나를 평가하는 시선보다 남들이 나를 대하는 눈빛에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괜찮은 사람이 되고자 연기하는 삶을 이어간다. 비판의 입장을 얻어서도 안되고, 거부반응을 일으킬 액션을 취해서도 안되며, 호감으로 대중의 인식을 사야만 옳은 삶이라 여기니 이 얼마나 피곤하고 긴장되는 과정인가를 생각해본다. 자신이 안전하고자 거부에 대한 공포를 지우기 위해 겹겹이 선한 사람으로 감아두는게 편한데 그게 자신을 얼마나 옥죄는지도 알아주었음 싶다.

혼자 였을 때 마음이 편한가? 또 그렇지도 않다. 무리속에 섞여있지 못하다는 불안감, 소속되어있을 때엔 이 무리에서 튀지 않고 자연스레 스며들어야 한다는 강박감. 압박과 강박. 그리고 이 온전치 못한 감정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게 맞는건지에 대한 의심. 이 물음에 대한 끝맺음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답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내담자. 알지만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이 얽힌 고리.

사춘기에 가장 많이 겪었던 마음의 소리였다. 나 또한 겪었고, 아마 모든 이들이 한 번 쯤은 겪어낸 마음의 소리였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옅어지느냐 더 진득해지느냐의 차이겠지. 사회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은 계속 쥐고 살아야하는 요소인데 얘를 어떻게 데리고 사느냐의 문제겠지.


불안, 공황 다음으로 가장 많이 갖고있는요소인 우울. 우울감의 또 다른 이름은 고립감이 아닐까. 갖혀있다가 와르르 쏟아질거 같은 감정. 무감정의 고요가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울컥 터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

상담을 하면서도 그가 가진 내면의 목소리는 다양한 말들로 자기만의 위로 방식을 찾는다. 공허한 말로 안심시키려 하지 말라고도 하며, 힘들어 하고 있는데 어찌 그러냐고 반박을 하는 구원이의 소리. 좀 더 크게 보며 이후에 일어 날 수도 있는 상황을 미리 인짛하고있는 탐정의 생각. 그리고 상담자 본인이 갖고있는 불안이의 마음 역시 무서워 한다는 점. 상담자도 불안이를 지니고 있으며, 걱정에 걱정을 얹어 마음을 쓰고 있음을 비춰낸다. 결국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불안을 지니고 있음을 한번 더 상기시킨다. 없지 않아, 그저 얘를 어떻게 다스릴지 아는 것 뿐임을 상담자는 한번 더 인지하고 내담자를 어떠한 방향으로 당겨올지, 당겨오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같이 걸음을 맞춰줄지를 고민해준다.


📖불안에게 보내는 편지_ 인생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에 대해서도 고마워. 네가 없다면 난 롤러코스터와 공포영화의 스릴을 결코 온전히 즐기지 못할 것야.

불안에게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의 과정을 거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눈물과 망설임이 있었을지를 생각해본다. 소리내어 말하는 걸 듣지 못할 감정이니 편지를 쓰면서 손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꾹꾹 눌러 감정을 표현한다. 이 진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여기는 마음에서 어떻게든 불안에게 마음이 닿길 바라는 심정을 가늠해본다.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이 감정을 용서해주길 바란다니! 어떻게든 구슬리고 달래서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지 않길 원하는 상담자.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조시는 상담자이며 장기적인 내담자의 역할을 겸하고 있음을 느낀다. 계속 자신을 들여다보며 안위를 살펴야만 자신에게 방문한 내담자를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알기때문. 감정의 트랙을 한바퀴 다 돌게 될 즈음 결승점, 곧 끝이라 여기는 것은 없다는걸 알기때문에 지칠 타이밍 마다 이렇게 부탁하고 노력해주길 간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중히 부탁한다며 전후 과정을 상세히 일러준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 점을 유념해달라며 구슬리기도 한다. 불안에게 '너'라고 지칭하며 너로서 해야 하는 일임을 알지만, 그래도 노력이라는 걸 해달라는 어조는 이겨먹을 생각이 없다는걸 어필한다. 그러니 서로 존경하고 존중하며 더 좋아지길 바란다며 항시 고마운 것을 상기시킨다.

다들 한번씩 해봤을 어린시절 인형놀이가 떠올랐다. 각각의 개성이 도드라진 허상의 무엇에게 다같이 재밌게 놀자며 다가가던 상냥한 말들이 허공에 피어오른다. 조시는 그렇게 해할 의도가 없음을 강력히 어필하며 소외될법한 마음을 살폈다. 불안 전문 심리치료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다스리고 들여다보는 것에는 소흘하지 않기에 이 모든것들이 가능했음을 짐작한다.

심리치료사에겐 내담자의 이야기들로도 머릿속이 가득 찰 것이다. 이 어지러운 문장들 속에서 답을 찾고, 그 답을 찾는 것에 예시가 되어줄 자신의 이력까지도 돌봐야만 우리가 말하는 좋은 상담과 올바른 치료가 이뤄지겠지. 멈추지 않아야했고, 머물지 않아야 했음 알렸다.


상담, 심리치료, 치유, 마음돌봄을 이야기 할 때엔 마음이 무겁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보여야만 가능한지 가늠하기 어렵다. 현자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함이지만 좁은 바늘 구멍에 대고 외치는 힘겨운 외침같기 때문이다.(와르르 쏟아낸들 상담하는 사람은 환자로 온 흔한 케이스 중 하니일테니 크게 와 닿지 않겠지 싶은 우려가득한 마음) 우리는 이들이 내담자와의 상담을 통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만 들어왔을 뿐 상담자이며 치료사라는 자의 의중은 매번 배제되었다. 다만 이 책은 이러한 치료사도 결국 사람라는게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면의 목소리가 다양한 사람인 것을 다시금 느낀다. 특히나 심리치료사이지만 13가지의 내면의 목소리가 짤막하게 뱉어내는 문장에는 익숙한 투덜거림도 있었고, 때론 과한 걱정, 또 한편으로는 의심 가득한 목소리의 물음도 있었다. 이걸 표정이나 목소리로 드러내어 내담자가 알아채도록 할 것이냐, 억겹의 필터링을 통해 최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 할 것이냐로 갈래가 나뉨을 느꼈다. 내담자들은 느낄 것이다. 속앓이 하는 것 보다 이렇게 목소리를 내어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 만으로도 치료가 되고, 내가 머무는 세계와 고민하고 있는 상황의 갈래에서 어디를 더 유념히 들여다 봐야하는지 방향성만 툭툭 놓아 주는 것 만으로도 그들은 알아서 제 갈길을 찾아간다. 구조적인 흐름을 펼쳐보며 올바른 위치만 조정해주는 몫. 그 몫에 대한 이야기가 의중을 묻고 궁금해하는 조시의 상담 방식임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 내 기분은 어떻냐고? 말하면 들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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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 대체 가능
단요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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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을거라 기대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들. 자신은 절대 닮지 않았다며 외형적 동일함마저 부정하면서, 자식에게서 보여지는 면에서는 동일함을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 결코 민호와 같은 선상에 놓지 않으려하는 성정을 통해서 주인공의 대략적인 캐릭터를 가늠 할 수 있었다. 혈연지간이라는 가장 사적인 존재의 교류는 항상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점에서 민형과 민호는 갈렸고, 그 뿌리를 쥐고 태어난 우연과 지연 마저도 아버지와 삼촌을 빼닮아있음을 느꼈다. 민형이 치를 떨던 혈연, 허나 부정 할 수 없는 성향. 결국 죽음을 바라는 존재는 동생이 아니라 그만큼 닮아있는 자신을 향해 있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많이 들어봤던 저자의 필명. 2020년대에 알려진 작가 단요. 저자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으나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야기꾼처첨 느껴졌다. 알려진 '다이브'의 청소년 소설 갈래는 물론이고, 스릴러 분야의 '피와 기름', SF소설로 문윤성 SF문학상까지 수상했던 '개의 설계사'만 봐도 우리에게 해줄 말이 많은 사람인듯하다.

모친의 장례식장에서 쌍둥이 딸 중 한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시점은 모든 죽음들과 엮여있는 아들이자 아빠인 민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모친의 장례를 정리한 후 이제 딸의 장례를 준비해야하는 상황. 그런데 생각보다 민형은 담담하다. 이미 예견했던 사망이 아님에도 상주로서의 자세가 내가 아는 보통이들과는 확연히 다름을 느끼게 만든다. 형제들에겐 퍼다주기 바빴던 부모이지만 자신은 어떠한 것도 지원받지 못한 채 저 혼자 장성했고, 노모의 병원비를 담당하며 이른바 아들노릇을 도맡아왔다. 자신의 총명한 머리를 닮았다면 쭉 잘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녀석들은 재수에 재수를 거듭했고, 한놈은 어렵사리 민형의 모교 치대에 입학, 또 한놈은 이번에도 고배를 마신다. 닮아도 너무 닮은 두 딸 중 한명의 사망. 그 당황스러운 순간 민형은 저 아이가 지연인지 우연인지 알아차리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쓸모있는 놈이 살아야하고 인정받아야함이 마땅하다 여기는 자에게 딸의 구분보다 의사의 딸에 걸맞는 실효성을 먼저 떠올려 죽은자와 산자의 역할을 바꾸려 산 자에게 도모하길 원한다. 이 정신없는 감정과 역할의 변화 속에서 민형은 어떻게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원하는 바를 유지할지에만 집중한다. ... 역시 제 정신 아니다.



📖민형은 자신의 꼬락서니가 오래전의 그 노인들 같지 않은가 생각했다.

현실을 붙잡는 대신 무한히 이연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 수술을 감내할 바에는 죽고 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

초라하게 살지 않으려 아등바등했고, 인정받기위해 간절하게 애써왔다. 아플 때 수술받고, 적절한 처치를 받으며 덜 고된 삶을 기대하며 여기까지 온 민형이었다. 닮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길을 걷게된 민호와는 확연히 다르며 이 곳처럼 의료가 열악한 곳에서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하고 단순히 오늘의 고통을 버틸 진통제만 바라는 삶은 더더욱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속으로 하찮아하는 민형이었다. 자신의 모친만 봐도 그러하다. 밑빠진 독에 물 부어 민호를 갱생시키려 애썼으나 금전적인 지원은 의사라는 이유로 중간에 끼인 둘째인 자신이 감당하고 있었다. 사회성이 결여된것 처럼 여기더라도 능력이 있고, 재력이 있다면 어느정도 커버가 되는 세상이다. 직업이 의사이니 능력이 좋아 환자가 끊이지 않는다면 병원에서든 수술방에서든 존경을 받게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돈으로 대변된다. 그걸로 때때로 최저점의 인성만 무마시킨다면 사는데에 큰 지장이 없다는걸 온몸으로 느껴왔다. 시골 페이닥터이며 주말부부가 된다한들 아내와 자식들은 모든 인프라가 꾸려진 곳에서 생활패턴에서부터 상위버전이 기초적인 것으로 살 수 있다면 모든걸 감내할 수 있다 생각했다. 영끌이라 할 만큼 알아주는 동네에 집을사고 그 학군에서 기반을 닦는다면 쌍둥이 딸들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높은 클래스의 삶을 누릴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삶의 행복 척도가 돈과 명예인 사람의 아주 전형적인 자세였다.




📖당신은 그 기질이 심해. 좀 극심해. 특히 자기 성에 안 차면 사람으로도 안 보는 게 느껴져. 상대 사정을 봐주면서 좋게 좋게 넘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기어코 어느 때건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려고 해. 그러니까 안 잘린 사람들도 옆에서 보면서 질려 하지. 그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아. 내가 한 번만 삐끗하면 저 인간 태도가 어떻겠구나 하고......

못하면 욕을 먹어야지. 못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놈이 잘하는 사람들처럼 살려는건 잘못이고. 교만이든 탐욕이든, 일종의 죄야

죄가 있으면 용서도 있어야지. 세상 사람들이 꼭 당신처럼만 생각하는 건 아니라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한다 생각하며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는 중인데, 이른바 남편 잘 만다 어려운거 없이 사는 아내가 고마워 할 줄 모르며 한탄한다 여긴다. 쌍둥이 독박육아가, 주말부부로서 도움을 못 받는 형편이, 모든게 능력과 세상이 만든 삶의 레벨에 민형보다 훨씬 뒤쳐져있지만 결혼 잘 해 잘 누리고 살면 이정도는 감내해야하는게 아니냐는 듯 채린을 보는 민형의 시선. 민형의 편에서 보면 채린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기도했다. 둘이 처음 만난 시점에는 민호가 있었고, 외도의 과정에도 민호가 있었으니 괜한 트집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으며, 이렇게 기질 비교와 사람의 성향에 대한 훈계는 곧 민호가 더 나은사람인냥 삐딱하게 받아들이기 딱 좋은 꼴로 민형을 쑤셔댔다.




📖용서가 믿음의 연장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겁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장래에 바뀌리라는 믿음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행위니까요. 비교할 만한 일로는...... 처벌은 과거에 대한 행위고, 잊는 건 아예 시간을 벗어나려는 시도지요.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옴으로써 계속되기 마련이니까,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용서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민형이 벌려놓은 사건에 한 발짝 떨어져있는 존재. 하지만 각자의 성향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엮여있는 인물들 간의 서사를 대강 아는 조카 우혁의 말들에서도 민형은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님을 자각하면서, 민호 또한 마냥 나쁜 사람이 아님을 전해듣는다. 민형은 그게 더 싫었다. 올바르지 못했던 삶인데 다들 부정하거나 과거를 꾸짖기보다 지금에라도 잘 살려 애쓰는걸 되려 응원하고있는 꼴이 보기 싫었다. 어머니든 형이든, 조카든 하나같이.

이렇게 같은 배에서 찰나의 시간차로 나온 사이인데 너무 다른 삶을 살고, 각각의 기질 추구하는 바가 다른 둘. 그냥 그게 싫은 거였다. 믿는 이유가 뭐지? 그만큼 믿음을 주지 못하는 행실로 살아왔는데도 꾸준히 지지받는 삶이 꼴사나웠고, 민형의 기준에서는 이미 나락에 다다른 놈은 채린이든 쌍둥이 딸이든, 형이든, 조카든 다 이렇게 챙겨주는지. 사람 됨됨이가 어떻든 평판이 어떻든 적어도 민형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정해놓은 기준에는 한참 모자른데 말이다. 이 또한 죽은 채린에게 물어본다면 위에 언급했던 문장과 똑같은 소릴 하지 않을까.




📖뭔가 계속 뺏기는 기분이 들어. 우린 그냥 탁구공인 거야. 탁구대 위에서 왔다 갔다. 그러다가 테이블 너머로 떨어져서 아예 사라지고. 사라지면 잠깐 공을 찾아보다가, 그냥 다른 공 구해서 새 게임 하고. 삼촌이 우릴 좋아하는 건, 공이 있으면 탁구를 칠 수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특히 재미있는 게임이 되는 공이기 때문이야.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난 그렇게 느껴.

쌍둥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빠. 집에 없는 아빠. 돈만 벌어오는 아빠. 엄마를 외롭게 했던 아빠. 엄마를 죽게 만든 아빠. 아빠의 자리를 채우지 못했던 아빠. 능력에 따라 대우했던 아빠. 대학간 사람만 챙기는 아빠. 위로와 응원보다는 도출된 결과를 더 중요시했던 아빠. 삼촌에게 자격지심이 있는 아빠. 의대다니는 딸을 선택했던 아빠. 죽은 딸에 대한 슬픔은 없던 아빠. 딸 장례보다 환자 수술이 더 중요했던 아빠. 완전범죄를 꿈꿨던 아빠.

엄마를 도왔던 삼촌. 엄마를 사랑했던 삼촌. 아빠와 정반대의 삼촌. 쌍둥이를 잘 챙겼던 삼촌. 아빠라 부르고싶었던 삼촌. 쌍둥이를 구별할 줄 알았던 삼촌. 하지만 내 아빠가 될 순 없는 삼촌. 다정하고 한없이 상냥하더라도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삼촌.

쌍둥이들에게는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도, 넘치는 애틋함도 바랄 수 없었다. 각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상황극을 하다보니 엇비슷 하더라도 아귀가 맞는 돌봄은 아니었다는 점. 그러니 쌍둥이는 보여지는 이들에게 애정을 갈구했으나 어디든 제대로 받아 볼 수 없었다. 쌍둥이들은 민형 민호 형제들에게 때때로 필요한 아이템이었고, 제 기능을 다 하면 버려진다고 느끼게된다. 꼭 필요하진 않다는 확신을 받았다. 영영 아빠가 원하는 딸이 될 수 없다는걸 느끼면서 안착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아이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민형을 묘사하는 문장들에서 이혁진의 광인 속 준연을 닮아있었다. 완벽하고자 했으며, 타인에게 인정받는 젠틀함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모든 문장들이 자기방어의 수단처럼 비춰졌다. 아내가 자살하든, 딸을 바꿔치기하여 죽음을 알리든, 쌍둥이 동생을 살해하든 그 모든 악행은 자신이 살려고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뉘앙스를 흘린다.

소설은 당연히 비극으로 달음질친다. 딸도 바꿔치기 한 판에 뭐가 두려울까 싶은 이의 눈은 살기어린 상태로 변질되어간다. 정도를 알았다면 이렇게 선을 넘지 않았겠지. 아내와 어떠한 이유에서 사별한들 자식들을 지키려 했을테고, 오랜시간 함께해오지 않은 공백을 메우려고 애를 썼을거다. 입시가 내맘같지 않은걸 안타까워하며 재수 삼수의 길을 응원하지만 꼭 그게 답일까 하며 하향지원이라던가 다른 길을 찾아보자 구슬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아빠들은 그러했다. 하지만 민형은 손에 쥐는게 남들보다는 많아야하고, 타인의 시선과 속닥거리는 세치 혀에서 빈틈을 주지 않으려한 결말이니 책속이 아니라 책밖의 어딘가에서 엇비슷한 삶을 사는 이가 존재할거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잘나 보여야하고, 그만큼 진짜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 자신이 부모를 통해 얻어내지 못한 처우에 관한건 응어리로 남아있다고 칠 수 있다. 그러하지 않은 유년시절이 어디있던가. 헌데, 지연과 우연을 바꾸는 시점부터 이 사람은 상종하기 어려운 캐릭터임을 느끼게했다. 정말 생물학적 아버지니까 죽고 살고를 지정 할 수 있는 결정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며 최근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미지와 미래를 나란히 두며 나와 닮은, 하지만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헌신의 정도를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고, 나와 같은 존재로서 일생을 비교당하고 곁눈질하는 삶. 합을 맞추어 나아가는 2인 3각의 게임처럼 평생을 어깨동무하며 구령을 맞출 수 없는게 사람의 인생이다. 나 만큼이나 나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의 애틋함을 강조하는게 드라마이고 책속의 쌍둥이들이었다. 그러한 미워죽겠지만 결국 내 반쪽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관계성을 철저하게 무시한 둘의 다른 성장. 주변인의 태도와 받아들이는 이의 다른 해석이벌어진 틈으로 스며들어 이 지경까지 간거라 보지만 악은 악을 키웠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약을 구하는 수단으로 민형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설정을 해 둔 뉘앙스와 함께, 우혁과의 자리를 가지며 삼촌 둘의 평판을 조카의 입장에서 들어보려고 했다는 점(내가 해석한 민형의 캐릭터는 그 시간조차 아깝고, 우혁을 믿고 조언을 들을만큼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은 눈이 돌아간 상태의 민형이 받아들인 상황일까를 생각한다. 악에 받친 민형이라면 에둘러 약을 구하기보단 그냥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약을 얻는게 더 빨랐을텐데 말이지. 그리고 본인의 생각이 곧 법이라 여길만큼 생각하는 자가 이제와서 타인의 평판에 궁금증을 가진다는 것 마저도.

어그러진 인간, 쓸데없이 확고한 신념, 왜 이러한 비뚤어진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쳐있어 하나를 잡아먹어야 성에 차는건지. 사람의 후천적인 악의에 대한 생각과 함께, 이 모든 이야기들이 소설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현실에선 옮겨놓지 않고싶은 인물로 기억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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