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윈 - 대체 가능
단요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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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을거라 기대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독립적인 존재들. 자신은 절대 닮지 않았다며 외형적 동일함마저 부정하면서, 자식에게서 보여지는 면에서는 동일함을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 결코 민호와 같은 선상에 놓지 않으려하는 성정을 통해서 주인공의 대략적인 캐릭터를 가늠 할 수 있었다. 혈연지간이라는 가장 사적인 존재의 교류는 항상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점에서 민형과 민호는 갈렸고, 그 뿌리를 쥐고 태어난 우연과 지연 마저도 아버지와 삼촌을 빼닮아있음을 느꼈다. 민형이 치를 떨던 혈연, 허나 부정 할 수 없는 성향. 결국 죽음을 바라는 존재는 동생이 아니라 그만큼 닮아있는 자신을 향해 있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많이 들어봤던 저자의 필명. 2020년대에 알려진 작가 단요. 저자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으나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야기꾼처첨 느껴졌다. 알려진 '다이브'의 청소년 소설 갈래는 물론이고, 스릴러 분야의 '피와 기름', SF소설로 문윤성 SF문학상까지 수상했던 '개의 설계사'만 봐도 우리에게 해줄 말이 많은 사람인듯하다.

모친의 장례식장에서 쌍둥이 딸 중 한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시점은 모든 죽음들과 엮여있는 아들이자 아빠인 민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모친의 장례를 정리한 후 이제 딸의 장례를 준비해야하는 상황. 그런데 생각보다 민형은 담담하다. 이미 예견했던 사망이 아님에도 상주로서의 자세가 내가 아는 보통이들과는 확연히 다름을 느끼게 만든다. 형제들에겐 퍼다주기 바빴던 부모이지만 자신은 어떠한 것도 지원받지 못한 채 저 혼자 장성했고, 노모의 병원비를 담당하며 이른바 아들노릇을 도맡아왔다. 자신의 총명한 머리를 닮았다면 쭉 잘해도 모자랄 판국에 이녀석들은 재수에 재수를 거듭했고, 한놈은 어렵사리 민형의 모교 치대에 입학, 또 한놈은 이번에도 고배를 마신다. 닮아도 너무 닮은 두 딸 중 한명의 사망. 그 당황스러운 순간 민형은 저 아이가 지연인지 우연인지 알아차리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 쓸모있는 놈이 살아야하고 인정받아야함이 마땅하다 여기는 자에게 딸의 구분보다 의사의 딸에 걸맞는 실효성을 먼저 떠올려 죽은자와 산자의 역할을 바꾸려 산 자에게 도모하길 원한다. 이 정신없는 감정과 역할의 변화 속에서 민형은 어떻게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원하는 바를 유지할지에만 집중한다. ... 역시 제 정신 아니다.



📖민형은 자신의 꼬락서니가 오래전의 그 노인들 같지 않은가 생각했다.

현실을 붙잡는 대신 무한히 이연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 수술을 감내할 바에는 죽고 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이 차라리 나았다.

초라하게 살지 않으려 아등바등했고, 인정받기위해 간절하게 애써왔다. 아플 때 수술받고, 적절한 처치를 받으며 덜 고된 삶을 기대하며 여기까지 온 민형이었다. 닮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길을 걷게된 민호와는 확연히 다르며 이 곳처럼 의료가 열악한 곳에서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하고 단순히 오늘의 고통을 버틸 진통제만 바라는 삶은 더더욱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속으로 하찮아하는 민형이었다. 자신의 모친만 봐도 그러하다. 밑빠진 독에 물 부어 민호를 갱생시키려 애썼으나 금전적인 지원은 의사라는 이유로 중간에 끼인 둘째인 자신이 감당하고 있었다. 사회성이 결여된것 처럼 여기더라도 능력이 있고, 재력이 있다면 어느정도 커버가 되는 세상이다. 직업이 의사이니 능력이 좋아 환자가 끊이지 않는다면 병원에서든 수술방에서든 존경을 받게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돈으로 대변된다. 그걸로 때때로 최저점의 인성만 무마시킨다면 사는데에 큰 지장이 없다는걸 온몸으로 느껴왔다. 시골 페이닥터이며 주말부부가 된다한들 아내와 자식들은 모든 인프라가 꾸려진 곳에서 생활패턴에서부터 상위버전이 기초적인 것으로 살 수 있다면 모든걸 감내할 수 있다 생각했다. 영끌이라 할 만큼 알아주는 동네에 집을사고 그 학군에서 기반을 닦는다면 쌍둥이 딸들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높은 클래스의 삶을 누릴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삶의 행복 척도가 돈과 명예인 사람의 아주 전형적인 자세였다.




📖당신은 그 기질이 심해. 좀 극심해. 특히 자기 성에 안 차면 사람으로도 안 보는 게 느껴져. 상대 사정을 봐주면서 좋게 좋게 넘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기어코 어느 때건 손모가지를 잘라 버리려고 해. 그러니까 안 잘린 사람들도 옆에서 보면서 질려 하지. 그건 누구나 본능적으로 알아. 내가 한 번만 삐끗하면 저 인간 태도가 어떻겠구나 하고......

못하면 욕을 먹어야지. 못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놈이 잘하는 사람들처럼 살려는건 잘못이고. 교만이든 탐욕이든, 일종의 죄야

죄가 있으면 용서도 있어야지. 세상 사람들이 꼭 당신처럼만 생각하는 건 아니라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한다 생각하며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는 중인데, 이른바 남편 잘 만다 어려운거 없이 사는 아내가 고마워 할 줄 모르며 한탄한다 여긴다. 쌍둥이 독박육아가, 주말부부로서 도움을 못 받는 형편이, 모든게 능력과 세상이 만든 삶의 레벨에 민형보다 훨씬 뒤쳐져있지만 결혼 잘 해 잘 누리고 살면 이정도는 감내해야하는게 아니냐는 듯 채린을 보는 민형의 시선. 민형의 편에서 보면 채린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기도했다. 둘이 처음 만난 시점에는 민호가 있었고, 외도의 과정에도 민호가 있었으니 괜한 트집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으며, 이렇게 기질 비교와 사람의 성향에 대한 훈계는 곧 민호가 더 나은사람인냥 삐딱하게 받아들이기 딱 좋은 꼴로 민형을 쑤셔댔다.




📖용서가 믿음의 연장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겁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장래에 바뀌리라는 믿음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행위니까요. 비교할 만한 일로는...... 처벌은 과거에 대한 행위고, 잊는 건 아예 시간을 벗어나려는 시도지요.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미래를 현재로 끌어옴으로써 계속되기 마련이니까,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용서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민형이 벌려놓은 사건에 한 발짝 떨어져있는 존재. 하지만 각자의 성향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엮여있는 인물들 간의 서사를 대강 아는 조카 우혁의 말들에서도 민형은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님을 자각하면서, 민호 또한 마냥 나쁜 사람이 아님을 전해듣는다. 민형은 그게 더 싫었다. 올바르지 못했던 삶인데 다들 부정하거나 과거를 꾸짖기보다 지금에라도 잘 살려 애쓰는걸 되려 응원하고있는 꼴이 보기 싫었다. 어머니든 형이든, 조카든 하나같이.

이렇게 같은 배에서 찰나의 시간차로 나온 사이인데 너무 다른 삶을 살고, 각각의 기질 추구하는 바가 다른 둘. 그냥 그게 싫은 거였다. 믿는 이유가 뭐지? 그만큼 믿음을 주지 못하는 행실로 살아왔는데도 꾸준히 지지받는 삶이 꼴사나웠고, 민형의 기준에서는 이미 나락에 다다른 놈은 채린이든 쌍둥이 딸이든, 형이든, 조카든 다 이렇게 챙겨주는지. 사람 됨됨이가 어떻든 평판이 어떻든 적어도 민형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 정해놓은 기준에는 한참 모자른데 말이다. 이 또한 죽은 채린에게 물어본다면 위에 언급했던 문장과 똑같은 소릴 하지 않을까.




📖뭔가 계속 뺏기는 기분이 들어. 우린 그냥 탁구공인 거야. 탁구대 위에서 왔다 갔다. 그러다가 테이블 너머로 떨어져서 아예 사라지고. 사라지면 잠깐 공을 찾아보다가, 그냥 다른 공 구해서 새 게임 하고. 삼촌이 우릴 좋아하는 건, 공이 있으면 탁구를 칠 수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특히 재미있는 게임이 되는 공이기 때문이야.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난 그렇게 느껴.

쌍둥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빠. 집에 없는 아빠. 돈만 벌어오는 아빠. 엄마를 외롭게 했던 아빠. 엄마를 죽게 만든 아빠. 아빠의 자리를 채우지 못했던 아빠. 능력에 따라 대우했던 아빠. 대학간 사람만 챙기는 아빠. 위로와 응원보다는 도출된 결과를 더 중요시했던 아빠. 삼촌에게 자격지심이 있는 아빠. 의대다니는 딸을 선택했던 아빠. 죽은 딸에 대한 슬픔은 없던 아빠. 딸 장례보다 환자 수술이 더 중요했던 아빠. 완전범죄를 꿈꿨던 아빠.

엄마를 도왔던 삼촌. 엄마를 사랑했던 삼촌. 아빠와 정반대의 삼촌. 쌍둥이를 잘 챙겼던 삼촌. 아빠라 부르고싶었던 삼촌. 쌍둥이를 구별할 줄 알았던 삼촌. 하지만 내 아빠가 될 순 없는 삼촌. 다정하고 한없이 상냥하더라도 그 이상이 될 수 없는 삼촌.

쌍둥이들에게는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도, 넘치는 애틋함도 바랄 수 없었다. 각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상황극을 하다보니 엇비슷 하더라도 아귀가 맞는 돌봄은 아니었다는 점. 그러니 쌍둥이는 보여지는 이들에게 애정을 갈구했으나 어디든 제대로 받아 볼 수 없었다. 쌍둥이들은 민형 민호 형제들에게 때때로 필요한 아이템이었고, 제 기능을 다 하면 버려진다고 느끼게된다. 꼭 필요하진 않다는 확신을 받았다. 영영 아빠가 원하는 딸이 될 수 없다는걸 느끼면서 안착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아이들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민형을 묘사하는 문장들에서 이혁진의 광인 속 준연을 닮아있었다. 완벽하고자 했으며, 타인에게 인정받는 젠틀함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모든 문장들이 자기방어의 수단처럼 비춰졌다. 아내가 자살하든, 딸을 바꿔치기하여 죽음을 알리든, 쌍둥이 동생을 살해하든 그 모든 악행은 자신이 살려고 할 수 밖에 없었다는 뉘앙스를 흘린다.

소설은 당연히 비극으로 달음질친다. 딸도 바꿔치기 한 판에 뭐가 두려울까 싶은 이의 눈은 살기어린 상태로 변질되어간다. 정도를 알았다면 이렇게 선을 넘지 않았겠지. 아내와 어떠한 이유에서 사별한들 자식들을 지키려 했을테고, 오랜시간 함께해오지 않은 공백을 메우려고 애를 썼을거다. 입시가 내맘같지 않은걸 안타까워하며 재수 삼수의 길을 응원하지만 꼭 그게 답일까 하며 하향지원이라던가 다른 길을 찾아보자 구슬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아빠들은 그러했다. 하지만 민형은 손에 쥐는게 남들보다는 많아야하고, 타인의 시선과 속닥거리는 세치 혀에서 빈틈을 주지 않으려한 결말이니 책속이 아니라 책밖의 어딘가에서 엇비슷한 삶을 사는 이가 존재할거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잘나 보여야하고, 그만큼 진짜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 자신이 부모를 통해 얻어내지 못한 처우에 관한건 응어리로 남아있다고 칠 수 있다. 그러하지 않은 유년시절이 어디있던가. 헌데, 지연과 우연을 바꾸는 시점부터 이 사람은 상종하기 어려운 캐릭터임을 느끼게했다. 정말 생물학적 아버지니까 죽고 살고를 지정 할 수 있는 결정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며 최근 드라마 '미지의 서울'의 미지와 미래를 나란히 두며 나와 닮은, 하지만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헌신의 정도를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고, 나와 같은 존재로서 일생을 비교당하고 곁눈질하는 삶. 합을 맞추어 나아가는 2인 3각의 게임처럼 평생을 어깨동무하며 구령을 맞출 수 없는게 사람의 인생이다. 나 만큼이나 나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의 애틋함을 강조하는게 드라마이고 책속의 쌍둥이들이었다. 그러한 미워죽겠지만 결국 내 반쪽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관계성을 철저하게 무시한 둘의 다른 성장. 주변인의 태도와 받아들이는 이의 다른 해석이벌어진 틈으로 스며들어 이 지경까지 간거라 보지만 악은 악을 키웠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약을 구하는 수단으로 민형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설정을 해 둔 뉘앙스와 함께, 우혁과의 자리를 가지며 삼촌 둘의 평판을 조카의 입장에서 들어보려고 했다는 점(내가 해석한 민형의 캐릭터는 그 시간조차 아깝고, 우혁을 믿고 조언을 들을만큼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은 눈이 돌아간 상태의 민형이 받아들인 상황일까를 생각한다. 악에 받친 민형이라면 에둘러 약을 구하기보단 그냥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약을 얻는게 더 빨랐을텐데 말이지. 그리고 본인의 생각이 곧 법이라 여길만큼 생각하는 자가 이제와서 타인의 평판에 궁금증을 가진다는 것 마저도.

어그러진 인간, 쓸데없이 확고한 신념, 왜 이러한 비뚤어진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쳐있어 하나를 잡아먹어야 성에 차는건지. 사람의 후천적인 악의에 대한 생각과 함께, 이 모든 이야기들이 소설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현실에선 옮겨놓지 않고싶은 인물로 기억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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