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속으로 하강하여 세월의 가치를 다시 해석하다
저자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읽으려니 가독성이 많이 떨어졌지만 여자로서 살아온 세월에 대한 저자의 철학은 상당히 매력있었다.
집단의 역사를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한 무언의 압박과 강요를 견뎌야만 했던 삶을 지나 누군가의 아내, 엄마라는 소유된 삶을 살지만, 결국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선택을 하는 모습은 주체적이고 당당하다. 고민과 불안이 따르지만 가치가 있다.
결혼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결혼은 안정감을 갖는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속박되는 것에 영원히 익숙해져야 한다는 숙제인것 같다. 동시에 개인적인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연습도 해야 한다. 어쩌면 관계 속에서 맺는 공동체적 정체성을 자신이라고 정의하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결국 결혼을 함으로써 그 익숙함에 끝에 도달하는것이 아닐까.
시간 속으로 하강한다는 저자의 말이 인상 깊다. 시간과 관련된 문구들 중 나는 시간을 거스른다는 문구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시간을 거스른다는 것은 이미 그 뜻에서 시간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타임머신과 같은 개념도 시간을 정복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됐다. 욕망의 목적이 되는 대상은 욕망하는 대상보다 우선적이다.
인간은 왜 시간을 조종할 수 있기를 욕망하는가? 시간은 인간에게 세월을 만들게 하는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을 하며 스스로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이미 닦아온 길을 뒤따르고 있는것에 불과하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를 앞서고 인도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시간이란 개념은 이렇다.
하지만 시간 속으로 하강한다는 것은 아예 시간과 세월의 관계를 뒤바꾸는 개념이다. 인간이 시간과 함께 세월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역사를 보고, 역사를 만드는 집단의 생각을 관찰하고, 개개인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내가 지나온 세월을 시간과 함께 그 순간 살아갈 수 있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하강하여 그 순간의 감각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어느새 시간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나와 세월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어 있다. 인생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전환된다. 내 조상과 부모가 내가 되며 내 아이들이 내가 된다.
시간 속으로 하강하여 지나온 세월의 순간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내 스스로 묶어놓은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시간의 영속성을 체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장 잘 해소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월 p. 227
세월의 가치를 한번에 떨어뜨리는 저자의 오만함

알제리는 살육장이었다. 알제리 무장 이슬람 조직원의가면을 쓴 얼굴에서 우리는 민족해방전선을 봤다. 알제리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래 전에, 마치 독립이후로 그래왔다는 듯이, 이번만큼은 더 이상 그곳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르완다.
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더했다. 후투족과 투치족, 착한 쪽과나쁜 쪽을 구분하지 못했기에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항상 아프리카는 무기력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곳은 우리보다 전근대적인 시대를 사는, 미개한 복장을 하고,
프랑스에 성을 소유하고 있는 전제군주들이 있는 곳이라는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고통은 절대 끝나지않을 것처럼 보였다. 실망스러운 대륙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월 p. 197

현재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은 다니엘 카사노바가에 있는 호텔 방에서 오후에 만나는 애인과의 약속이고,
오래 병원에 머물고 계신 어머니를 문병하는 일이다. 이 두개의 일은 서로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가끔은 하나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피부,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과 애인과의 에로틱한 몸짓이 같은 본능에서 나온 것처럼. 사랑을 나눈 후, 그녀는 그에게 묵직한 몸을 포갠 채, 자동차들의 소음 속에 반쯤 잠이 들며 이렇게 낮잠을 잤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 어릴 적 이브토의 일요일, 책을 읽다가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잠든 낮잠, 영국에서 오페어로 머물 때 전기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잤던 낮잠, 팜플로니나의 메종나브 호텔에서의 낮잠. 그녀는 매번 이 달콤한 무감각 상태에서 빠져나와 일어나 숙제를 하고, 거리로 나오고,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존재해야했다. 이 순간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두 개의 축이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 순간에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녀가 보고들은 것들을 지탱하는 수평선, 또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이미지가 동반된, 밤을 향해 빠져드는 수직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월 p. 196

인생의 이 시기에, 그녀는 이혼 후 두 아들과 함께 살며애인을 만난다. 9년 전에 샀던 집과 가구들을 팔아야 했지만, 스스로 놀랄 정도로 초연했다. 그녀는 물질의 상실과 자유 속에서 산다. 마치 결혼은 그저 막간극이었던 것처럼, 두고 온 사춘기 시절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다. 그때와 같은 기대, 하이힐을 신고 약속장소로 달려가며 숨을 헐떡이는 그방식, 사랑 노래에 민감한 그때와 같은 태도를 되찾는다. 같은 욕망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욕망들을 더 완벽하게 충족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섹스를 하고싶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다. 이제 자신의 육체의 절대적인동의 안에서 《성적 혁명을 이루고, 이미 오래돼 버린 68년 이전의 가치를 뒤집으며, 그녀의 나이가 갖고 있는 연약한 찬란함을 너무도 분명히 자각한다. 그녀는 늙는 것이, 피의 냄새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최근에는 행정부로부터 2000년까지 현 학교 교사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받고몸이 굳어버렸다. 여태껏 그 날짜에는 현실성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월 p. 122

그녀는 내면의 목표를 빗겨나가 그저 어머니로서만 전진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조용하고 편안한 이 삶에 정착하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이 삶을 살아 버리는 것이 두렵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순간에도, 그녀는 일기장에 절대 적혀 있지 않은 모든 것들, 함께 하는 삶, 같은 공간을 나누는 친밀함, 그녀가 수업이 끝나면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집, 둘이서 자는 잠, 아침의 전기면도기 소리, 저녁의 돼지 삼 형제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반복되는 일상, 잠시 떨어지면 삼 일을 넘기지 못하고 그리워지는, 그녀가 증오하고아낀다고 믿는 것들을 - 사고로 잃는다는 상상만 해도 그녀의 가슴을 옥죄는 모든 것들 -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