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캡터 체리 12 - 완결
CLAMP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이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오묘하냐--

TV방영 당시에도 ‘아빠와 딸이 같이 보다가 아빠가 더 열광하는 이상한 만화’라는 평가까지 받았던 괴작이긴 하지만, 알 거 다 알아버린 지금 와서 보니 이건 뭐 와아... 교복도 안 벗은 여고생하고 신혼 차린 아저씨가 있지 않나, 얼굴 붉히면서 초등학생한테 약혼반지를 주는 선생이 있지 않나, 오빠한테 고백했기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이 귀여운 이웃집 여자아이의 고백을 못 받아주겠다는 놈이 있지 않나, 이웃집 소꿉친구(여자)를 대놓고 노리고 있는 여자애가 있지 않나 거의 온퍼레이드다. 모를 때야 그냥 어이구 귀여워라 하던 아이들이지만 이제 와서 보니 뭐랄까... 클램프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은근한 분위기를 자랑하긴 하지만, 상당히 심각한 수준까지 뻗어 있다. 역시 클램프... 은근히 야한 할머니들 같으니라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하는 소수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9
시오노 나나미 지음, 이현진 옮김 / 한길사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닉슨 대통령이 “‘사일런트 머조리티’가 나를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태어난 단어, 침묵하는 다수. 한때 다수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중, 대세, 메이저라는 단어가 ‘정의는 이곳에 있다’는 얼굴로 네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과 다른 존재는 침묵하는 소수, 사일런트 마이너리티인 것이다. 잘난 것이나 위대한 것이아니다. 그저 다수와 다르니까 마이너리티인 것이고, 목청 높여 주장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일런트인 것 뿐이다. 남과 같다는 것도 남과 다르다는 것도 무슨 큰 벼슬처럼 여기는 풍조가 만연한 시대에 “나는 남과 다르다. 그것뿐이다.”고 말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자전 에세이 [침묵하는 소수]는, 그렇기에 그녀가 사랑해온 지중해처럼 초연하게 서 있다.

에세이집에서는 그 사람의 심경이 드러난다.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나 [바다의 도시 이야기] 등과는 달리 아무런 부담도 없이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사일런트 마이너리티]는, 지독하게 관능적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군 전체에 깃들어 있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듯한’ 애정과 ‘시간의 흐름 아래 무뎌진 예술품을 사랑하는 듯한’ 관능은 그녀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감성적인 축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 책 [침묵하는 소수]에서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능을 폭발시키지는 못했다. 하기사 생각해 보면 ‘호메로스에 빠져 그리스어와 악전고투하느라 수험공부를 소홀히 한 탓에 가고 싶은 대학에 미끄러지자 배우고 싶은 서양철학과 교수가 시간강사로라도 와 주는 대학에 입학한’ 여자일 만큼 스스로에게 충실한 여자가 아니던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를 두고 ‘자신에게만은 한결같은’ 사람이며 ‘일생동안 관능적이었던’ 남자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바쳐야 할 평가인지도 모른다.

카이사르의 연인이며 마키아벨리의 친구. 이런 남자들을 사랑했기에 변한 것일까, 처음부터 그랬기에 이런 남자를 사랑한 것일까. 최근 며칠간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들을 처음부터 다시 뒤적거리고 있는데, 오늘 [침묵하는 소수]와 [신의 대리인]을 마무리했고 내일은 그녀의 친구에게 바친 헌정작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과 [르네상스의 여인들]에 손을 댈 생각이다(...시험은!?). 과연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서른 다섯이 넘어 관능이 무엇인지 알고 난 다음에야 모피와 보석이 어울리는 것처럼, 꺾인 오십 고개를 넘은 지금에야 그녀의 관능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대리인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신의 어린 양들과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 신성과 속계를 오가며 기도하고 통치하고 흥정했던 존재, 교황.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의 시대를 살아간 네 교황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가 겪은 ‘교황으로서의 시간’을 그려낸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교황과는 전혀 다른 교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손에 검 한 손에 십자가를 들고 종횡무진하던 세 명의 교황들이야 익숙치는 않을지라도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나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많이 보아오던 모습이라고 하겠지만, 네 번째 교황 레오 10세의 모습은 아주 틀렸다.

사실 레오 10세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잠깐 등장해 마르틴 루터에게 호되게 혼나는 역할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시오노 나나미가 그린 레오 10세와 [16세기 초엽의 로마 풍경]은 생경하기까지 했다. [로마인 이야기] 14권에서 부제를 자그마치 ‘그리스도의 승리(=로마의 패배)’라고까지 붙여놓고 “나의 로마를 돌려줘! 나의 로마는 이렇지 않아!”를 외치게 만들었던 일신교, 기독교는 여기서 이교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확신하는, 마치 옛 로마 제국처럼 유쾌하고 개방적인 (루터의 표현을 빌자면) ‘타락한’ 종교가 되어 있었다. 역시 기독교도가 아닌 시오노 나나미였기에 그려낼 수 있었을까. ‘악마의 소굴 로마에서 벌어지는 이교 축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피비린내나는 전장으로 가득한 세 장을 지나 갑자기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등장하는 행진과 사육제로 메워진 네 번째 장은 마치 모든 종교와 인종과 문명을 인정했던 로마가 되돌아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터키 술탄이 성모 마리아를 뒤쫓고 그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올림푸스의 신들이 달려가는 축제. 시오노 나나미가 그려낸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에게 철저히 공박받은 타락한 교황이 아니라 루터의 비난과 규탄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저 친구는 재미가 없어.”라고 평가해줄 만큼 자신의 우월성을 확신한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 표현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던가. 그의 죽음과 함께 르네상스가 끝나고,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상당히 재미없는 시대였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랙 아이언 3
김하인 지음 / 명상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한참 전에 한 번 나왔다가 이름을 바꾸어 다시 나온 책. 사실 굳이 구분하자면 반일주의에 국수주의, 덤으로 성상품화와 마초이즘까지 결합된 B급 정신적 자위물로밖에 볼 수 없는 책이지만, 그 와중에도 식물들 사이의 대화와 교감은 나의 마음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블랙 아이언의 공세를 받으며 방어태세로 들어가지만 엄청나게 빠른 침투속도와 확산속도에 당황하고 무너져가는 소나무들의 모습 - 그리고 인간들의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겨내는 그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면서 인간 부분은 별로 재미없다고 느낀 사람이라면 내 심정에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슬링거 걸 Gunslinger Girl 6
아이다 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표지의 캐릭터 페트르슈카는 그동안 어릴수록 유리했던 의체화와 조건첨부를 단순화시켜 좀 더 성인에게도, 그리고 좀 더 오랫동안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2세대 의체화의 첫 시도라고 한다. 그러기에 페트르슈카는 어린아이다. 생후 2일. 어린아이는 귀엽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가진 가능성, 그리고 무력함. 그래서 어린아이는 사랑스럽다. 인간은 그것에 배혹되며, 그것을 지키려 한다. 의체들에게 있는 것은 무엇으로라도 발전할 수 있는 어린아이의 가능성과 조금의 발전도 기대하지 못하고 낡아갈 뿐인 인형의 절망. 명령에 복종하는 안전함과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위험함.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없는 한계, 사랑하고 싶지만 위험이 가득한 두려움. 그 불균형은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권을 액션으로 가득 채워넣었던 반동인지 6권 내내 포근하고 평화로운 이야기. 그러나 늘 그랬듯이 주제는 부도덕하고 전개는 음울하며 심리묘사는 도착적이다. 발레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던 아이에게 주어진 것은 절망. 그리고 다리를 절단하지 않아도 나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갸냘픈 희망. 결국 다리를 절단한다는 파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도 버리고 남은 허무. 그러나 그녀에게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 가능성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2세대 의체의 등장과 함께 2기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슬링거 걸. 그러나 1기의 의체들은 여전히 맑은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다. 그들은 여기에서 꿈을 꿀 수 있을까?

어쨌거나 사회복지공사는 악당이고 나쁜 놈은 죠제라는 데 한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