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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대리인 ㅣ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평점 :
품절
신의 어린 양들과 이탈리아를 지키기 위해 신성과 속계를 오가며 기도하고 통치하고 흥정했던 존재, 교황.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의 시대를 살아간 네 교황 비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가 겪은 ‘교황으로서의 시간’을 그려낸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교황과는 전혀 다른 교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손에 검 한 손에 십자가를 들고 종횡무진하던 세 명의 교황들이야 익숙치는 않을지라도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나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많이 보아오던 모습이라고 하겠지만, 네 번째 교황 레오 10세의 모습은 아주 틀렸다.
사실 레오 10세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잠깐 등장해 마르틴 루터에게 호되게 혼나는 역할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시오노 나나미가 그린 레오 10세와 [16세기 초엽의 로마 풍경]은 생경하기까지 했다. [로마인 이야기] 14권에서 부제를 자그마치 ‘그리스도의 승리(=로마의 패배)’라고까지 붙여놓고 “나의 로마를 돌려줘! 나의 로마는 이렇지 않아!”를 외치게 만들었던 일신교, 기독교는 여기서 이교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확신하는, 마치 옛 로마 제국처럼 유쾌하고 개방적인 (루터의 표현을 빌자면) ‘타락한’ 종교가 되어 있었다. 역시 기독교도가 아닌 시오노 나나미였기에 그려낼 수 있었을까. ‘악마의 소굴 로마에서 벌어지는 이교 축제’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피비린내나는 전장으로 가득한 세 장을 지나 갑자기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등장하는 행진과 사육제로 메워진 네 번째 장은 마치 모든 종교와 인종과 문명을 인정했던 로마가 되돌아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터키 술탄이 성모 마리아를 뒤쫓고 그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올림푸스의 신들이 달려가는 축제. 시오노 나나미가 그려낸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에게 철저히 공박받은 타락한 교황이 아니라 루터의 비난과 규탄을 태연하게 받아넘기며 “저 친구는 재미가 없어.”라고 평가해줄 만큼 자신의 우월성을 확신한 진정한 귀족 정신의 소유자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렇게 표현한 사람이 몇이나 되었던가. 그의 죽음과 함께 르네상스가 끝나고,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시작된다. 상당히 재미없는 시대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