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모르는 그리움 나태주 필사시집
나태주 지음, 배정애 캘리그라피, 슬로우어스 삽화 / 북로그컴퍼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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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시들을 따라 쓰며 한가롭게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책이다. 시인의 시집 혹은 시인의 이름으로 출간된 모음 시집 등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나태주 시인의 시들을 만날 수 있는 데다가 신작을 포함한 미공개 시 역시 30여 편 수록되어 있어 새로운 시들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신작 시들은 목차에서 제목 옆에 *표시가 되어 있는데 본문 내에서는 별도의 표시가 없다. 난 지금까지 시집을 읽어왔던 방식대로 소리 내어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시들과 따라 써보고 싶은 시들의 제목과 페이지를 적어두고, 그중 신작이 무엇인지 확인해봤다. 개인적으로는 '4월'과 '사치'라는 시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신작 말고도 이번 시집에서 좋았던 시들 역시 꽤 많았다. 안면이 있는 '풀꽃 3', '오늘의 약속'등은 다시 보아도 좋았고 만난 기억은 없지만 속상한 날 열 번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와 날씨 좋은 날 두근두근하며 읽기 좋을 것 같은 '새봄'도 마음에 들었다.


쉽게 읽히는 시들은 사람보단 풍경이 주를 이루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삽화와 참 잘 어울리는데 삽화를 그린이의 닉네임이 슬로우어스였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그림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시들은 배정애 캘리그라퍼의 서체로 쓰여있는데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 모여있는 글자들이 귀여웠다. 책에 실린 모든 시들이 사랑이나 자연을 예찬하고 늘 설레거나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사랑이나 삶에 대한 피로를 이야기하거나 가을을 배경으로 조금은 쓸쓸한 느낌의 시들도 있었고 사랑만큼 이별에 대한 시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나태주 시인의 짧은 시들에 대한 인상과 그림, 글씨체까지 이 세 가지 요소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잘 어우러진 느낌이라 책을 여러 번 보고 또 봐도 늘 읽기 편한 책이었다.






다섯 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본문은 각 제목을 시의 구절에서 따와 지었는데, 그 제목이 들어간 시들을 찾아내며 읽는 게 재밌었다. 각 파트는 내용이나 분위기상에서 커다란 구분은 딱히 없어서 그냥 읽히는 대로 술술 읽어내도 상관없었다. 다만 각 파트의 마지막 장은 시인이 직접 쓴 필사 페이지가 수록되어 있어, 시인의 팬이라면 사인만큼이나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필사 시집'이라 시와 그림을 빼고도 독자가 직접 책에다 필사할 공백들이 넉넉하다. 그림이 매번 책의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게 자리 잡은 그림들도 옆 페이지의 글을 충분히 옮겨 적을만큼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가끔은 그림 없이 원고지가 그려있거나 줄 몇 개만 그어진 깔끔한 페이지도 있었다.


나는 필사도 시집도 캘리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책에다 직접 줄을 긋거나 메모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책에다 필사를 남기는 게 조금은 어색했다. 예쁘게 완성된 페이지에 내가 뭔가를 더해 그게 틀어지는 게 좀 싫었던 것 같다. 글씨가 깨끗한 편도 아니고, 볼펜이나 붓 펜 등으로 따라 쓸 때 한 번에 깔끔하게 완성해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쓴 글씨가 뒤 페이지에 크게 비쳐 보일까도 신경이 쓰이고 책의 사이즈가 크지 않아 손바닥으로 책을 눌러 고정하고 쓸 때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받을 때 '필사'와 '시집' 중 필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망설이지 않고 본문에 내 글씨를 마음껏 남기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쓴 글씨들은 가끔 줄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틀린 글자를 까맣게 칠해버리기도 했다. 붓 펜으로 쓴 글씨는 뒤 페이지에 표가 났지만 그 페이지의 글을 읽지 못할 정도로 거슬리지는 않았고, 조금 더 편하게 글씨를 쓰고자 책을 누르고 고정했지만 책은 생각보다 유연하고 견고했다. 안에 내가 얼마나 글씨가 덧썼는가와는 별개로 책을 다시 덮으면 깔끔하고 새 책 같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붓 펜으로 캘리를 연습하며 쓰기도 하고, 가끔은 연필로, 가끔은 손에 잡히는 아무 볼펜으로 차곡차곡 책의 빈칸에 글씨를 채워 넣고 있다. 몇 개 이상의 시를 쓰고 나니 예쁘게 쓰고 싶은 욕심은 여전하지만 이제 처음 같은 망설임은 많이 없어졌다. 책에 쓰인 순서대로가 아니라 내가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책을 채우니 책을 펼 때마다 드문드문 내 글씨가 있는 게 재미있다. 이대로 이 책을 가득 채우면 이 책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까. 필사 책을 정말 제대로 필사 책으로 이용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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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 : 타이포그래피 편 - 세계적 거장 50인에게 배우는 개성 있는 타이포그래피 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
스티븐 헬러.게일 앤더슨 지음, 윤영 옮김 / 더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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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다녀온 기분이다. 혹은 그 전시회의 도록을 꼼꼼히 읽은 느낌이라는 게 더 적당하려나. 책을 펼치면 한 페이지 가득 작품을 보여주고 나머지 한 페이지에 글을 실은 단순한 본문 구성이 전시회의 도록과 비슷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나는 비록 디자이너도 아니고,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도 수많은 기법과 종류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그저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 이 책을 읽었다. 낯설지만 재미있었고 작품도 그 작품의 해설과 글쓴이가 그에 얹어준 디자이너들을 위한 조언들 역시 어렵지만은 않았다. 이론적 기초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저, 다양한 방법으로 글씨를 쓰고 그리고 변형하고 장식하여 완성되고 활용되었던 작품들을 구경하고 싶다면 겁먹지 말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이디어가 고갈된 디자이너를 위한 책>이라는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의 본문은 타이포그래피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을 주요 독자로 삼아 그들이 디자이너로서 책 속의 작품들(혹은 작품에서 사용된 다양한 기법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활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여있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종류의 타이포그래피인지, 어떤 기발한 기법들이 사용되었는지, 그 기법의 유래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등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려주고 어떤 점에서 이 작품과 작가의 시도가 의미가 있는지를 짚어준다. 디자이너로서 어떤 점이 칭찬할만한지 어떤 부분이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인지를 강조하고 조언을 덧붙이기도 한다. 처음 보는 작가들의 이름과 기법 이름들이 나열된다는 점에서 문외한인 독자들에게 아주 친절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연히 들어간 전시회에서 매력적인 작품을 먼저 보고 그에 붙어있는 작품 해설 등을 읽는다 생각하면 그리 난해하거나 아주 어려운 수준의 글도 아니라 그저 흥미로웠다.


  기초적인 지식을 알려 주는 훌륭한 책들은 이미 시중에 충분히 많다. 그보다 우리는 타이포그래퍼가 타이포그래피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재미있고 기발한, 때로는 난해하기까지 한 특별한 방법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중략 )

  다시 말해 다른 타이포그래피 기초서가 식사의 ‘메인 코스’라면, 이 책 속의 아이디어들은 ‘디저트’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타이포그래피 메뉴 중에서도 가장 달콤한 디저트들을 잔뜩 먹어볼 시간이다. 


 머리말 중 7, 8p



​책의 본문이 끝나면 그 뒤로 '용어 사전',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찾아보기' 등이 부록처럼 붙어있다. 설명은 간략한 편이지만 상당히 도움이 되는데 본문의 낯선 용어들이 걱정된다면 본문을 읽기 전에 가볍게 용어 사전을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하지만 몇몇 용어들은 간단한 외국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아 어렵진 않다. 난 오히려 서체를 개발해낸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붙은 서체의 이름이 더 많이 낯설었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속 목록은 아마도 전부 원서 같아서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이 있는지, 이 책들은 저자가 말한 메인디시 같은 기초서일지, 이 책과 결을 같이 하는 디저트 같은 책 들인지 조금 궁금했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고 여러 개념들을 알게 되면서 실생활에서 타이포그래피를 꽤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면 책표지, 회사나 출판사의 로고, 매년 열리는 국제 도서전의 포스터, 캘리그래피 작품들, 거리의 간판, 음악 앨범의 표지, 모자나 옷에 프린트된 글자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만 당장 사진을 찍어도 10개 이상은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프로 타이포그래퍼가 만들어내고 상업적이나 예술적으로 큰 가치가 있느냐는 등 개개의 차이는 있겠지만, 알면 알수록 타이포그래피는 친숙하고 흥미로운 디자인 분야인 것 같다. 우리는 자라면서 글자, 특히 모국어인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반복해 배우는데, 굳이 배우지는 않더라도 한글을 비롯해 모든 글자의 예술성과 미학적 특성을 발전시킨 장르가 바로 타이포그래피가 아닐까. 아이들이 처음 글자를 배울 때 자음 모음을 닮은 그림이나 같은 글자로 시작되는 단어의 그림과 매치해 만들어진 커다란 한글 포스터를 붙여두는 것처럼 타이포그래피란 용어나 개념은 낯설지 몰라도 실생활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주 친숙한 예술 장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속의 작품들 역시 전시를 위한 예술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쓰인 영화 포스터나 캠페인 광고 등에 쓰인 활용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친숙하기에 더 매력적인 타이포그래피의 인정받는 작품들을 둘러볼 수 있는 책이었다. 디자이너라면 안목을 넓히고 실용적 조언도 얻을 수 있겠고, 그저 흥미가 있는 일반 독자들이라면 세계적 거장들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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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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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프레드릭 배크만은 마치 동화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 현실적인 짧은 이야기를 쓰고 책으로 낸다. 내가 접하기로 첫 번째가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었고, 두 번째가 이 책 <일생일대의 거래>였다. 본문 곳곳에 들어간 아기자기한 그림들도 글의 분위기에 참 잘 어울렸다. 이 책의 시작과 마무리는 아빠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아들에게 남긴 일기 같은 메시지로 쓰여있다. "안녕, 아빠다."하고 평생 아들에게 편지 한번 보내본 적 없다는 듯 어색한 인사말로 시작하는 이야기에는 생명과 죽음, 아들에 대한 애정을 주로 담았다.​​

너희 인간들은 항상 언제든 목숨을 내어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실제로 어떤 일이 수반되는지 알아차리기 전의 얘기지.

(본문 중 89p)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아빠로서 좋은 아빠가 되지는 못했던 한 남자,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찾아오는 한 여자를 목격하는 남자, 사신과 같은 일을 하지만 사신도 유령도 아닌 존재에게 아낌 받았던 특별한 남자. 일생을 사업가로 살았던 그 남자는 생명과 죽음에 관한 말 그대로 '일생일대의 거래'에도 "인간은 생긴 대로 산다"(본문 중 92p)는 대담한 대답을 내어놓는다. 부모가 된다는 건 정말 특별하고도 어려운 일이라, 이 책에서는 그 일 앞에서 머뭇거리다 도망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노라 고백하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모든 부모는 가끔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5분쯤 그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거다. 그저 숨을 쉬고, 온갖 책임이 기다리고 있는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를 그러모으면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숨 막히는 부담감을 달래며. 모든 부모는 가끔 열쇠를 들고 열쇠 구멍에 넣지 않은 채 계단에 10초쯤 서 있을 거다. 나는 솔직했기에 딱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도망쳤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지. 그럴 때 우리 사이엔 늘 정적이 흐르잖니. 너는 바 카운터를 닦고 유리잔을 정리했고 나는 사랑이 담긴 네 손길에 대해서 생각했다. 너는 좋아하는 걸 만질 때면 항상 거기서 심장이 뛰고 있는 듯이 다루잖니. 너는 그 술집을 아꼈고 이 도시를 사랑했지.

(본문 중 34p , 95p)

​​

​잘 해내지 못했지만 아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은 늘 존재해왔기에 죽음 혹은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앞두고 가장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역시 가족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사소한 습관이나 작은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지켜보고 그 시간만큼의 애정을 가졌다고 느껴지곤 하는데 아들의 손길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눈길에서도 그런 애정이 드러났다. 이렇게 떠나기 직전에야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하는 후회를 남기는 게 인간이라 참 안타까웠다. 겁이 나거나, 혹은 여자의 말대로 아쉽고 슬픈 감정으로 마지막 한 발자국을 걸어야 하는 순간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는 대상은 실제로 표현하지 못했더라도 온 생을 다해 애정 했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책을 읽기 전만 해도 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나니 아버지와 아들 또는 부모와 자식 간의 애틋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더 크게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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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그해, 여름 손님》 리마스터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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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리뷰에 영화와 소설의 줄거리 및 몇몇 장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주연 배우들의 아름다운 외모와 좋은 연기, 그보다 더 눈부셨던 이탈리아 시골마을의 풍경, 가장 크게 남았던 엘리오의 아버지가 남긴 명대사가 내 감상의 대부분이었다. 국내에서는 영화가 흥행하고 원작 소설 역시 인기를 얻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는데, 영화의 원작인 소설에 대해서는 첫사랑을 섬세하게 표현한 걸작이라는 칭찬이 참 많았다. 책을 읽기 전 영화만으로는 이 부분에 크게 동의하지 못했는데 원작 소설을 읽어보니 알겠다. 엘리오의 서술로 진행되는 이 소설을 읽다 보니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 그도 날 좋아한다 확신에 차 으쓱해지기도 하고, 냉정한 시선 한 번에 내가 뭘 잘못했나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수많은 '불'과 '황홀감'을 맛보고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자신의 감정에 어쩔 줄 모르는 엘리오의 모습은 누구나 겪는 첫사랑에 너무도 깊숙이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몽땅 다 그 사랑이란 것의 시작이라고들 하니까. 그래서 조금은 우습기도, 귀엽기도, 부럽기도 했다.

내가 푹 빠지면 상대방도 푹 빠진다는 법칙이 어딘가에 있다. Amor ch'a unll'amato amar perdona,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지옥> 편에서 프란체스카는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자. 나는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영원히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 본문 중 44p )

엘리오네 가족은 늘 이탈리아 시골마을의 별장에서 여름과 겨울을 보내는데 매년 여름 언어학자인 아버지가 젊은 학자들을 초빙해 손님으로 머물게 했다. 17살의 엘리오는 그렇게 손님으로 찾아온 24살의 올리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서로에게 첫눈에 반해 추파를 보내고 낙심하고 두근거리기를 반복하다 결국 몸과 마음을 통하게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올리버가 엘리오와 함께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만 빼면 완벽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불타오르는데, 올리버가 제안한 로마행을 엘리오가 수락하고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엘리오의 마음속에서 언제든 올리버를 떠올리게 만드는 한 장소와 장면을 만들게 된다.

나는 곡의 어느 부분이 그를 동요시켰는지 처음으로 정확하게 알았고, 매번 그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곡을 연주했다. 정말로 그에게 헌정하는 곡이었으니까. 내 안에 자리한 아름다운 무언가의 표시였다. 헤아리기 어렵지 않은 그것은 나를 긴 카덴차(끝부분에서 연주자의 기교를 보여 주는 화려한 솔로 파트- 옮긴이)로 내몰았다. 오직 그를 위해서.

"침묵 속에서 당신에게. 1980년대 중반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세월이 흘러 그가 여전히 이 책을 가지고 있다면 보고 가슴 아프기를 바랐다. 그보다는 언젠가 그의 책을 살펴보던 누군가가 이 작은 <아르망스>를 발견하고 1980년대 이탈리아 어딘가에서 누가 침묵 속에서 쓴 글인지 물어본다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때 그가 울컥 슬픔을 느끼거나 후회보다는 더 강렬한 감정을 느꼈으면 했다.

( 본문 중 22p , 136-7p )

​​

엘리오는 어떻게 그렇게 똑똑하냐는 올리버의 질문에 교수 아버지를 둔 덕이라 대답하는데, 그 점을 빼더라도 그는 타고나길 자신만의 지성과 감성을 지닌 특출난 아이로 보였다. 두 사람이 만나기 전부터 엘리오는 매년 여름 별장에서 지내는 동안 음악을 다른 작곡가의 스타일로 혹은 자기식대로 편곡하거나, 일기를 남기고 글을 썼다. 올리버가 오고 난후 두 사람이 교류하는 과정에서도 음악과 글은 좋은 매개가 되어준다. 올리버에게 피아노를 연주해주거나 그에게 느끼는 감정 등을 일기로 쓰고 책에 짧은 메시지를 남겨 선물하기도 한다. 일기나 짧은 글의 내용은 본문에도 가끔씩 등장하곤 하는데 단순히 그때의 기록이라는 의미보다 나중에 그 글을 읽을 때의 시기, 상황, 읽을 사람 등을 상상하고 그 소망을 담아 글을 쓰는 방법에 감탄했다. 올리버에게 선물한 <아르망스>에 쓰인 글에서도 그랬고, 글은 물론 가끔은 소리쳐 입 밖으로 내뱉는 것으로 말의 생명을 더해주는 그 방식도 그저 놀라웠다. 이런 엘리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냈기에 별장에서 한 여름을 보낸 17살 소년의 일기와도 같은 이 글이 전혀 지루하거나 시시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기억을 되살려서) 영화와 책의 다른 점들을 꼽아봤다. 첫 번째로 영화에선 전화를 통해 전달된 이별 통보가 책 속에선 엘리오의 방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한 채 이루어진다. 영화 속 벽난로 앞에서 울렁이던 눈동자로 그를 보내던 엘리오의 마음은 책에서는 생각보다 더 담담히 그리고 서서히 그 이별을 받아들인다. 또 영화와 달리 책에서는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의 재회 장면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난 너무나도 좋았다. 마지막 문장 말고도 책 곳곳에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문장들이 있었는데, 의외로 영화에선 보다 직접적이었기에 더 와닿았던 새뮤얼 펄먼의 대사는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아쉬웠다. 물론 그 의미와 진심 어린 조언이 주는 감동은 여전했지만. 개인적으로 많이 좋았던 문장을 하나 첨부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늦은 오후 마팔다는 집 안에 할 일이 없으면 그에게 바구니를 들려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부끄러움에 낯이 붉어진 살구를 따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탈리아어로 농담을 던진 뒤 살구 한 알을 따서 그녀에게 물었다. "부끄러움에 낯이 붉어진 게 맞나요?" 마팔다는 아니라고, 그건 너무 어리다고, 어릴 때는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성숙하면서 느끼는 거라고 대답했다.

( 본문 중 49-50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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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드 미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속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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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비롯해 원작 소설로도 인기를 얻은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엘리오와 올리버, 그리고 엘리오에게 삶과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던 그의 아버지를 기억한다면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 그 후의 이야기인 이 책 <파인드 미>는 세 사람의 관점으로 각자의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전작을 봤던 사람이라면 더 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인데, 만약 보지 못한 사람이 읽게 된다면 엘리오와 올리버의 이야기에서 뭔가 생략된 듯한 과거가 궁금해질 것 같다. 하지만 세 이야기에서 모두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눈을 감겨주길 바라는 단 한 사람'을 기적처럼 만나고 그 감정을 기억하고 소중히 여기며 사랑을 이뤄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해피엔딩을 향해가는 멜로라 마음 편히 흘러가는 대로 읽기 참 좋은 소설이었다.

 

 

"세상에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아서가 아니라

상처받을 만큼 의미 있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상심한 사람들도 있거든요." 

-본문 중 69p

 

첫 번째 이야기처럼 운명의 대상이 생의 어느 순간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외롭지만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서서히 포기할 때쯤 아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너무 놀랍고 기적 같은 순간이라 서로 머뭇거릴지 몰라도 결국엔 새뮤얼과 미란다처럼 서로를 붙잡게 될 거라 상상하면 삶에서 사랑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다른 두 이야기에서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조금 더 일찍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마냥 아쉬워하거나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간 이럴 줄 알았다는 태연한 모습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 시간들 역시 지금의 더 나은 우리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성숙한 모습이라 그들의 사랑이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첫사랑에 들떠 쌍방향의 사랑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 감정에 마음껏 취하고 초조해하고 행복해하며 휘둘리던 엘리오가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이뤄내는 그 과정이 감동적이다. 올리버의 말처럼 그리고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엘리오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 "최악의 시나리오 아닌가요?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았고,

가능성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 말이에요."

-본문 중 31p

 

핑퐁같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 공감, 특별함이라던가, 살면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가림막 속에 숨겨진 진심을 스스로 알고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는 애틋함, 자신이 선택하지 않아서 그 자리에 두고 온 삶에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이끌림 등 뭔가 돌고 돌아 고비를 넘기고 이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결국엔 서로를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 여기게 된다. 읽으면서 두근거리고 울컥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마지막 책을 덮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전작의 후속 이야기란 걸 알아서 최대한 이름이 생략된 듯한 각 부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궁금해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줄거리나 커플링을 더 소개하고 싶기도 한데 더 이상 쓰게 되면 너무 큰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차마 못 쓰겠다. 전작의 커플링을 응원하는 사람이라면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아련함과 이야기의 결말에 얻게되는 울컥함을 잔뜩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만 말해두겠다. ​​

 

참고로 영화를 모르시는 분들을 염두에 두고 작가에 대해 소개하자면, 이집트 출생이자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안드레 애치먼'은 이 책의 전작 즉 <콜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2007년 람다 문학상 게이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또한 등장 커플들의 성별을 떠나 애정 신 혹은 스킨십에 있어서 적나라한 표현이 있는 편이라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서 피해 가라고 미리 말해두고 싶다. 나 같은 경우 영화를 먼저 보고 이 작가와 책들을 알게 되었는데, 리마스터판이 나왔다길래 두 권을 순서대로 연달아 읽고 싶어서 연초에 읽을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두 작품을 연달아 읽었을 때 주인공의 감정이 이어지는 장점이 있고 전작의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두 사람만의 암호나 사랑의 단서들이 <파운드 미>에서도 그대로 재등장하는 데 그런 부분을 캐치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다.(예를 들어 올리버가 여름 손님이던 시절 엘리오가 그를 위해 연주하던 '카덴차'와 이번 책에서 한 파트의 제목이기도 한 '카덴차'라던가) 본문 곳곳에 들어가 있는 이텔릭체(기울임이 들어간 폰트)나  아마도 이탈리아 원어(혹은 나폴리어? 프랑스어? 등)들이 가끔 등장하는 조금 낯선 본문 구성에도 두 권을 연달아 읽어서인지 어색하거나 거슬리는 부분 없이 특유의 분위기를 받아들여 편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권 모두 주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가본적 있는 로마나 영화 속에서 보았던 바닷가 집이 자꾸 떠올라서 정말 좋았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과 <파인드 미>는 두 권을 모두 봐야만 완결된 이야기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책들이었다. 이왕 이 책과 작가와 주인공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두 권을 꼭 연달아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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