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본문은 각 제목을 시의 구절에서 따와 지었는데, 그 제목이 들어간 시들을 찾아내며 읽는 게 재밌었다. 각 파트는 내용이나 분위기상에서 커다란 구분은 딱히 없어서 그냥 읽히는 대로 술술 읽어내도 상관없었다. 다만 각 파트의 마지막 장은 시인이 직접 쓴 필사 페이지가 수록되어 있어, 시인의 팬이라면 사인만큼이나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필사 시집'이라 시와 그림을 빼고도 독자가 직접 책에다 필사할 공백들이 넉넉하다. 그림이 매번 책의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게 자리 잡은 그림들도 옆 페이지의 글을 충분히 옮겨 적을만큼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가끔은 그림 없이 원고지가 그려있거나 줄 몇 개만 그어진 깔끔한 페이지도 있었다.
나는 필사도 시집도 캘리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책에다 직접 줄을 긋거나 메모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책에다 필사를 남기는 게 조금은 어색했다. 예쁘게 완성된 페이지에 내가 뭔가를 더해 그게 틀어지는 게 좀 싫었던 것 같다. 글씨가 깨끗한 편도 아니고, 볼펜이나 붓 펜 등으로 따라 쓸 때 한 번에 깔끔하게 완성해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쓴 글씨가 뒤 페이지에 크게 비쳐 보일까도 신경이 쓰이고 책의 사이즈가 크지 않아 손바닥으로 책을 눌러 고정하고 쓸 때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받을 때 '필사'와 '시집' 중 필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망설이지 않고 본문에 내 글씨를 마음껏 남기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쓴 글씨들은 가끔 줄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틀린 글자를 까맣게 칠해버리기도 했다. 붓 펜으로 쓴 글씨는 뒤 페이지에 표가 났지만 그 페이지의 글을 읽지 못할 정도로 거슬리지는 않았고, 조금 더 편하게 글씨를 쓰고자 책을 누르고 고정했지만 책은 생각보다 유연하고 견고했다. 안에 내가 얼마나 글씨가 덧썼는가와는 별개로 책을 다시 덮으면 깔끔하고 새 책 같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붓 펜으로 캘리를 연습하며 쓰기도 하고, 가끔은 연필로, 가끔은 손에 잡히는 아무 볼펜으로 차곡차곡 책의 빈칸에 글씨를 채워 넣고 있다. 몇 개 이상의 시를 쓰고 나니 예쁘게 쓰고 싶은 욕심은 여전하지만 이제 처음 같은 망설임은 많이 없어졌다. 책에 쓰인 순서대로가 아니라 내가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책을 채우니 책을 펼 때마다 드문드문 내 글씨가 있는 게 재미있다. 이대로 이 책을 가득 채우면 이 책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까. 필사 책을 정말 제대로 필사 책으로 이용하고 있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