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모르는 그리움 나태주 필사시집
나태주 지음, 배정애 캘리그라피, 슬로우어스 삽화 / 북로그컴퍼니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태주 시인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시들을 따라 쓰며 한가롭게 마음을 다스리기 좋은 책이다. 시인의 시집 혹은 시인의 이름으로 출간된 모음 시집 등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나태주 시인의 시들을 만날 수 있는 데다가 신작을 포함한 미공개 시 역시 30여 편 수록되어 있어 새로운 시들도 함께 읽어볼 수 있다. 신작 시들은 목차에서 제목 옆에 *표시가 되어 있는데 본문 내에서는 별도의 표시가 없다. 난 지금까지 시집을 읽어왔던 방식대로 소리 내어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시들과 따라 써보고 싶은 시들의 제목과 페이지를 적어두고, 그중 신작이 무엇인지 확인해봤다. 개인적으로는 '4월'과 '사치'라는 시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신작 말고도 이번 시집에서 좋았던 시들 역시 꽤 많았다. 안면이 있는 '풀꽃 3', '오늘의 약속'등은 다시 보아도 좋았고 만난 기억은 없지만 속상한 날 열 번은 소리 내어 읽어야 할 것 같은 '세상일이 하도 섭해서'와 날씨 좋은 날 두근두근하며 읽기 좋을 것 같은 '새봄'도 마음에 들었다.


쉽게 읽히는 시들은 사람보단 풍경이 주를 이루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삽화와 참 잘 어울리는데 삽화를 그린이의 닉네임이 슬로우어스였다. 느긋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그림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시들은 배정애 캘리그라퍼의 서체로 쓰여있는데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 모여있는 글자들이 귀여웠다. 책에 실린 모든 시들이 사랑이나 자연을 예찬하고 늘 설레거나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사랑이나 삶에 대한 피로를 이야기하거나 가을을 배경으로 조금은 쓸쓸한 느낌의 시들도 있었고 사랑만큼 이별에 대한 시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나태주 시인의 짧은 시들에 대한 인상과 그림, 글씨체까지 이 세 가지 요소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까 잘 어우러진 느낌이라 책을 여러 번 보고 또 봐도 늘 읽기 편한 책이었다.






다섯 개의 파트로 나누어진 본문은 각 제목을 시의 구절에서 따와 지었는데, 그 제목이 들어간 시들을 찾아내며 읽는 게 재밌었다. 각 파트는 내용이나 분위기상에서 커다란 구분은 딱히 없어서 그냥 읽히는 대로 술술 읽어내도 상관없었다. 다만 각 파트의 마지막 장은 시인이 직접 쓴 필사 페이지가 수록되어 있어, 시인의 팬이라면 사인만큼이나 특별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이 책은 '필사 시집'이라 시와 그림을 빼고도 독자가 직접 책에다 필사할 공백들이 넉넉하다. 그림이 매번 책의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작게 자리 잡은 그림들도 옆 페이지의 글을 충분히 옮겨 적을만큼의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가끔은 그림 없이 원고지가 그려있거나 줄 몇 개만 그어진 깔끔한 페이지도 있었다.


나는 필사도 시집도 캘리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책에다 직접 줄을 긋거나 메모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책에다 필사를 남기는 게 조금은 어색했다. 예쁘게 완성된 페이지에 내가 뭔가를 더해 그게 틀어지는 게 좀 싫었던 것 같다. 글씨가 깨끗한 편도 아니고, 볼펜이나 붓 펜 등으로 따라 쓸 때 한 번에 깔끔하게 완성해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쓴 글씨가 뒤 페이지에 크게 비쳐 보일까도 신경이 쓰이고 책의 사이즈가 크지 않아 손바닥으로 책을 눌러 고정하고 쓸 때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받을 때 '필사'와 '시집' 중 필사에 더 큰 비중을 두기로 마음먹었기에 더 망설이지 않고 본문에 내 글씨를 마음껏 남기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쓴 글씨들은 가끔 줄이 삐뚤어지기도 하고 틀린 글자를 까맣게 칠해버리기도 했다. 붓 펜으로 쓴 글씨는 뒤 페이지에 표가 났지만 그 페이지의 글을 읽지 못할 정도로 거슬리지는 않았고, 조금 더 편하게 글씨를 쓰고자 책을 누르고 고정했지만 책은 생각보다 유연하고 견고했다. 안에 내가 얼마나 글씨가 덧썼는가와는 별개로 책을 다시 덮으면 깔끔하고 새 책 같은 모양새를 유지했다.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붓 펜으로 캘리를 연습하며 쓰기도 하고, 가끔은 연필로, 가끔은 손에 잡히는 아무 볼펜으로 차곡차곡 책의 빈칸에 글씨를 채워 넣고 있다. 몇 개 이상의 시를 쓰고 나니 예쁘게 쓰고 싶은 욕심은 여전하지만 이제 처음 같은 망설임은 많이 없어졌다. 책에 쓰인 순서대로가 아니라 내가 마음에 드는 순서대로 책을 채우니 책을 펼 때마다 드문드문 내 글씨가 있는 게 재미있다. 이대로 이 책을 가득 채우면 이 책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될까. 필사 책을 정말 제대로 필사 책으로 이용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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