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도 말려 죽이는 그대에게 - 반려식물 초심자를 위한 홈가드닝 안내서
송한나 지음 / 책밥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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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에 가슴이 뜨끔한 사람들 참 많았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주로 돌보는 것도 아니고 직접 사온 것도 아니지만 집안엔 늘 식물이 있었다. 무럭무럭 잘 자라고 가끔은 꽃을 피우기도 해서 그저 눈에 들어올 때 마음껏 감상하고 가끔 예뻐라한게 전부였지만, 가끔은 반대로 잎이 갈변하고 점점 시들해지는 녀석들도 있어서 그럴 때마다 물을 더 주거나 덜 주거나의 조치만 취할 뿐 뭐가 문제고 어떻게 돌봐줘야 하는지 몰라서 참 답답했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그런 나의 답답함을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됐다.

책에서는 총 다섯 가지 장으로 본문을 나누었는데, 1장에서 가드닝에 필요한 마음가짐부터 다양한 기초지식(구매, 도구,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흙/빛/물/비료 등의 조건들, 병충해, 분갈이와 가지치기 방법 등등 )을 간단히 다루고 2장부터 4장까지는 초급 식물/중급 식물/상급 식물로 구분해 널리 사랑받는 몇몇 식물들의 가드닝 팁을 알려 준다. 집에서 키우는 식물이 어떤 등급에 속해있는지 체크하고 팁을 얻기에도 좋고, 소개되는 각 식물마다 실제 사진 자료들이 풍성해서 가드닝을 하고 싶은 초보자라면 초급 식물부터 시작해 집안에 들일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때 키워보고 싶은 식물을 찜해보는 등 선택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본문 내에서는 가드닝을 할 때 온라인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팁을 주기도 하는데, 마지막 5장에서는 커뮤니티에서처럼 타인의 경험담을 엿보고 조언을 얻을 수 있도록 홈가드닝 고수들의 인터뷰를 실었다.





우리 집에 있는 식물들로는 고무나무, 커피나무, 산세베리아가 주를 이루고 페라고늄 화분도 하나 있는데, 이 중 꽃을 길게 볼수 있다 해서 우리 집에 온 페라고늄이 이 책에서 '상전'이라 표현할 만큼 상급 식물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베란다 창 바로 옆의 양지에서 키우고 있는데 꽃대가 잘 올라오지 않아 고민이었지만 쉽게 죽지 않고 잎이 무성하고 건강한 편이라 까다로운 타입의 식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책을 통해 갈변한 잎은 회복이 불가하니 바로바로 떼어내주고 적당한 가지치기로 통풍을 원활히 해줘야 하며, 봄까지는 필요에 따라 약간의 비료가 추가되어야 새로운 잎과 꽃대가 올라온다는 적절한 팁을 얻을 수 있었다.

고무나무와 산세베리아는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종류를 책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사촌지간쯤 되는 알리 고무나무, 움베르타 휘카스와 문샤인 산세베리아가 초급 식물에 실려있어 참고해보려고 한다. 이처럼 이 책을 읽으면 식물을 키울 때 필요한 팁을 부분적으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맨 처음 기대했던 것처럼 '이렇게 키우고 돌보면 잘 키울 수 있습니다'하고 완전히 보장된 규칙 같은 걸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어떤 식물을 키울 때 무조건 보장되는 성공 법칙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지만, 그런 성공적인 가드닝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드닝계에서 말해지는 '물 주기 3년'처럼 자신이 키우고 있는 식물들과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슬쩍 알려준다.

​​

이왕 식물을 집에 들였다면 '반려 식물'로 맞아 주세요. 서로에게 짝이 되어 준다면 식물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거예요. 식물에게 감정이 생기며 대하는 태도부터 변하게 됩니다. (중략) 초록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아보세요. 사랑을 준 만큼 보답해 줄 거예요

가드닝 세계에 '물 주기 3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정한 규칙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식물을 알아간다는 뜻이에요.

본문 중 13p '마음가짐' / 본문 중 28p '물'

​​이 책에는 부제가 있다. '반려 식물 초심자를 위한 홈가드닝 안내서' 이 책을 읽어보면 초반부터 종종 반려 식물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다. 누구나 집에 화분 한두 개는 있지만, 누구나 자신이 가드닝을 한다거나 반려 식물을 키우고 있다고 의식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동물을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로 생각하면서 더 깊은 애정을 쏟듯이, 집에 있는 식물에게도 반려 식물이라 부르며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면 선인장이 말라죽을 때까지 방치하거나 잘못 키우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확 줄어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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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 - 무민 골짜기, 시작하는 이야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토베 얀손 지음,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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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참 작은 존재들이 많이 나온다. 무민 종족으로 사람들의 집 벽난로에 숨어살 정도로 작은 존재들인 무민과 가족들, 그런 그들이 작은 동물이라 부르는 스니프(이후 연재작에서 이름을 얻고, 이 책에서는 이름 없이 작은 동물이라고만 설명된다.), 사람들 집 마루밑에 살기도 하는 작은 트롤 생명체 인 해티패티, 튤립을 집으로 삼아 살고 있던 툴리파 등등. 이 작고 힘없는 존재들이 홍수를 비롯한 커다란 재해를 마주하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무민 시리즈의 시작이라고 하는 <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는 이후에 이어지는 시리즈에서 무민 가족들이 한평생 자리 잡고 살아가는 무민 골짜기에 도착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룬다. 해티패티를 따라 떠나버린 아버지를 찾는 동시에 겨울을 날수 있는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무민과 무민의 엄마는 길을 나선다. 숲과 늪, 바다까지 기나긴 여정을 지나오지만 아빠를 만나기도 전에 큰 홍수가 나서 이내 세상이 비에 잠긴다. 무민 가족은 여행중에 만났던 새로운 존재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에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 이야기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무렵 쓰였다는 작가의 서문을 떠올리면, 역자 후기의 내용처럼 안락한 집을 찾아 나선 무민 가족의 모습은 전쟁으로 살던 곳을 떠난 피난민의 모습과 쉽게 겹쳐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쟁이라는 재난 혹은 재앙 같은 상황은 이야기 속에서 큰 홍수로 대체되었는데 그 안에 휩쓸린 작은 존재들은 과연 그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까.

​ 처음에는 무민의 엄마도 무서웠지만, 잠시 뒤 아들을 달래며 말했다.

"아주 작은 동물일 거야. 기다려 보렴, 엄마가 저쪽으로 불빛을 비춰볼게.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게 더 비관적으로 보이지, 너도 알잖니."

그러고 나서 무민의 엄마는 등불처럼 빛나는 커다란 꽃을 한 송이 꺾어서 그늘 안을 비추었다. 그러자 무민과 무민의 엄마는 그곳에 무척 조그마한 동물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동물은 온순하게 생겼고 살짝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본문 중 10-12p

그 대답은 무민의 엄마를 잘 살펴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만큼은 주인공이 무민이 아닌 무민의 엄마라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서 무민의 엄마는 새로운 존재를 발견했을 때 먼저 다가가고, 위기에 처한 대상에게 서슴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홍수에 휩쓸려 위기를 겪고 있는 무민의 아빠를 걱정하고 슬퍼하는 등 여러 감정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무민의 보호자로서 여행의 도중 여러 결정들을 내리는 역할을 하며 많은 활약을 한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어두운 숲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눈을 발견하고 먼저 다가설 때 무민의 엄마가 한 말과 태도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혹은 낯설고 무서운 문제가 생겼을 때 겁먹고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작은 불빛을 비춰보는 게 어떨까. 어둠을 살짝이라도 벗어나 밝은 곳에서 보면 그 문제는 생각보다 덜 비관적일지도 모른다. 작고 힘없는 존재들이 서로 돕고 기대며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찾아내는 것, 이 책의 결말처럼 해피엔딩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그 '희망'을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캐릭터로만 알고 있던 무민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흥미진진했고 상징적이고 동화적인 면모가 많았다. 이야기의 시작을 들었으니 이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궁금해졌다. 각각의 캐릭터들이 무민마마, 무민파파, 스니프처럼 자신만의 이름과 스토리를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었을 때 또 어떤 매력이 있을지, 이번 편에서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아빠를 찾아 나선 어린아이일 뿐이었던 무민은 앞으로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 꼭 찾아 읽어봐야겠다. 글과 함께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 속 무민의 모습이 내가 알고 있던 무민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다는 점도 좋았다. 후속 이야기에는 토베 얀손의 동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그림 속 삽화에 변화가 있었을지도 궁금하다. 첫 번째 이야기만을 읽었는데 궁금한 게 너무 많아졌다. 뒷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내가 가진 무민 굿즈들의 캐릭터들이 더 사랑스럽게 보일는지 괜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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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그윈플렌 커버 에디션 A) - 이석훈 & 규현 표지디자인 웃는 남자 (그윈플렌 커버 에디션)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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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세하고 구체적인 배경과 인물들, 그에 반영된 사회상과 풍습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비판, 운명과 숙명이란 이름에 휩쓸린 비극적인 주인공, 때론 장황하지만 늘 매혹적인 문장들. 일일이 장점들을 나열해보아도 전체적인 이 책의 감상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저 좋았다, 재미있다고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150년 이상 독자에게 숨은 명작이란 평을 받고 꾸준히 사랑받을만한 작품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

출항하는 배에서 갑작스레 버려진 어린 소년, 그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얼어 죽은 여자의 품속에 숨을 쉬던 어린 여자아이. 두 아이가 가족이자 안식처가 될 우르수스와 호모의 집에 문을 두드린건 정말 천운이었다. 데아를 만나고 우르수스를 만난 두 가지 행운을 제외하면, 그윈플렌의 삶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불행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정말 주인공을 이렇게까지 홀대하고, 박해하는 소설은 처음 봤다. 일단 주인공의 '그윈플렌'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페이지가 무려 449페이지이다. 총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생각해도 중반쯤 들어서야 주인공의 이름이 처음 언급된다.


그가 겪는 사건들을 요약해보면 더 한숨만 나온다.(※줄거리 스포일러가 싫은 사람은 이 단락은 건너뛰세요)태어나자마자 기억조차 못 하는 사이 얼굴이 기형으로 만들어지고, 열 살 무렵 무리에서 갑작스레 버려지고, 그나마 좀 행복했을 성장과정은 본문 내에선 몽땅 생략되고, 돈도 벌고 데아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을 무렵 갑작스레 여공작에게 애인으로 점 찍혀 휘둘리게 되고, 출생의 비밀이 폭로되며 처지가 바뀌게되고, 되찾게 된 지위로 민중의 대행자 역할을 하려 연설을 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폭소를 불러올 뿐이고, 감싸주는 듯한 형이 생겨서 좋아하려다 그에게서 목숨을 건 결투 신청을 받고, 다시 정신 차려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니 또 이별이 기다리고 있고... 온 세상 불행이란 불행은 다 모아놓은 듯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랄까.


이 처음 몇 장을 통해 우리가 희미한 윤곽이나마 잡아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여도 될 것 같은, 이 책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한 장이다.


운수 좋은 이들이 벌이는 불운한 자들에 대한 착취


(본문 중 48p)

그는 자신이 복수의 대행자라 여겼는데 다만 광대일 뿐이었다. 벼락을 치는 줄 알았는데 고작 해야 그들을 간지럽게 할 뿐이었다. 그가 거두어 온 것은 감동이 아니라 조소였다. 그가 흐느끼자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는 그 즐거움 밑으로 침몰해버렸다. 서글픈 침몰이었다.

(본문 중 1020p)


사실 그윈플렌은 첫 등장에서 데아를 구하고 우르수스를 만나기까지의 강인한 모습을 제외하면, 이리저리 휘둘리고, 주체적으로 뭘 하려는 건 죄다 실패하고(유일한 성공은 광대로서 공연하는 것뿐), 혼란스러워하고 충격에 빠지는 모습뿐이라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격정적으로 연설하지만 책의 초반 예고되어 있듯이 그는 착취당한 불운한 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침몰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우르수스는 화를 토하는 듯한 말을 잇몸 사이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가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축축해진 눈을 쳐들어 우르수스를 바라보았다. 항상 학대만 받다가 모처럼 따스함을 느낀 아이에게 전해지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본문 중 276p)


반면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우르수스였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말로는 가라고 했다가 문을 열어두고 왜 안 들어오냐고 화를 내고, 기꺼이 어린 소년과 어린 여자아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음식을 양보해 주고서 긴 투털거림(투덜거리는 그의 대사만으로 5페이지가 넘는다ㅋㅋ)을 내뱉는 등 츤데레의 정석을 보여주는 우르수스가 귀엽고 재미있었다. 콤프라치코스가 배척당해 그 누구도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고 흑사병으로 인해 아무도 떠돌이를 받아주지 않던 시대상에서 두 어린 아이를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존재가 특별했다. 많은 직업을 가졌지만 철학자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하는 말 하나하나에도 그의 인생철학이 배어있고 현실을 푹푹 찌르는 날선 대사들이 좋았다. 버릇이고 취미이자 특기인 긴 방백과 연설은 가끔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윈플렌과 데아를 대하고 아버지로서 그 둘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한 존재였다. 그래서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 다하고서 아무도 남지 않은 곳에 홀로 눈을 떴을 그의 처지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웠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데이비드와 조시안에 대해 말하고 싶다. 데이비드는 그윈플렌과 마찬가지로 귀족과 서민들의 삶 양쪽에 발을 딛고 있지만, 누구보다 그 시대의 귀족스러운 인물이었고 그윈플렌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만한 인물이라 흥미로웠다. 여공작 조시안 역시 가장 귀족 다운 인물 중 하나였는데, 사실 뮤지컬에서 꽤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길 들어 기대하던 바가 있었으나 원작 소설에선 오직 귀족의 권위를 누리며 유희를 즐기고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이었다. 그윈플렌을 열렬히 좋아하게 된 척하지만, 딱히 그윈플렌이 아니어도 최상층의 아름다운 자신이 최하층의 추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당시에 유행이자 가장 고귀한 귀족에 걸맞은 행동이라 생각했기에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앤 여왕에게 한방 먹이듯 남긴 한 줄의 편지는 인상적이었지만 주인공과의 교류나 접점도 아주 적어서 인물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 했던 것 같다.



다이내믹한 줄거리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 그 안에 얽힌 사연들도 파격적이고 재미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감탄스러웠던 건 작가의 문장력이었다. 그윈플렌을 버리고 출항한 배가 바다위에서 겪는 고난과 최후의 생생한 장면에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회상과 풍습들을 설명할 땐 런던과 파리의 부유하고 한가한 귀족들의 즐기는 방법(오락)과 다양한 클럽들의 만행, 일반 시민들의 아무 이유 없는 피해상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의 긴 연설을 끊지 않고 몇 장 이상 이어지게 쓴 것도 신기했고(이런 부분에서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어떻게 줄여놓았을지가 엄청 궁금해졌다.), 그윈플렌과 데아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463p)이 한 줄의 이야기를 수십 장으로 풀어내는 솜씨에도 감탄했다. 장황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긴 호흡의 문장과 대사들이지만, 왠지 허투루 읽기엔 뒷이야기에 필요할 듯한 단서가 숨어 있을 것 같고, 흡입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몰아치듯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홀린 듯이 읽어나가게 된다. 


귀족들의 이름들이 나열되는 부분(초반의 예비 이야기, 왕권별로 변화해온 귀족의 수와 의상 등에 대한 설명, 후반의 데이비드의 결투 요청 대사 등)이 제일 고비이긴 했지만 작품 해설에서 등장하는 "《웃는 남자》의 진정한 제목은 《귀족》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한마디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줄거리에서 중요한 문장이든, 그냥 그 문장만 떼어놓고 보았을 때도 의미 있고 멋진 문장이든 남겨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평소 버릇처럼 읽을 때 메모해둔 페이지의 수가 정말 많았다. 전체를 필사하긴 너무 힘들 것 같고, 따로 《웃는 남자》 전용의 필사 노트를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하지만 고전에 많이 취약한 독자인 내가 이 벽돌 책을 읽어낸 게 뿌듯했고, 머리가 뺑뺑 돌아가고 다양한 생각과 감상에 한동안 빠져있을 정도로 정말 읽을만한 책이었다는 점이 좋았다. 두꺼운 책에는 아직도 걱정이 앞서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싶어지게끔 만든 작가의 명성과 다른 독자들의 리뷰와 멋진 책의 디자인에도 박수쳐주고 싶다. 특히 뮤지컬 공연과 맞물려서 그윈플렌 역을 맡은 배우들의 화보로 표지를 장식한 건 주인공에 대한 매력과 호기심을 확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느꼈고, 그 종이 표지를 벗겨내면 드러나는 고풍적인 디자인의 하드커버도 정말 멋졌다. 한마디로 '나 이 책 있다', '나 이 책 읽었다' 자랑하고 싶은 책이랄까. 그래서 더 정성 들여 사진을 찍고 서평을 쓰며 나도 이렇게 자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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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신과 영웅들 - 레전드 오브 레전드
댄 그린 지음, 데이비드 리틀턴 그림, 고정아 옮김 / 제제의숲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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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이 많다는 이유로 조금 쉽게 봤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것도 꽤 방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참신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보면서 꽤 많이 웃었고 한가한 날에는 엄마를 붙잡고 들어보라고 하면서 소리 내 책을 줄줄 읽기도 했다. 그만큼 혼자 읽기에도, 누군가에게 읽어주기에도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신화와 영웅이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밖에도 전 세계에는 정말 셀 수 없는 신과 영웅들이 많다는 걸 새삼 알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친숙한 신과 영웅들, 유럽의 신과 종교와 기사들의 이야기, 아프리카 설화와 동물 우화들, 아메리카의 수많은 민족들과 문명들이 남긴 다양한 신화들, 우리나라가 속해있고 가장 넓은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와 수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는 오세아니아의 신화까지 제목대로 정말 전 '세계의 신과 영웅들' 의 이야기가 골고루 이 책에 담겼다.


그리스 로마신화와 아시아의 신화는 나름대로 친숙했지만,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신화들은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들이 정말 많았다. 이야기를 가지고 온 거미 아난시와 노래를 잘하고 싶었던 아르마딜로, 사람을 괴롭히는 요괴 사시 페레레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셋 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고 특히나 이야기의 시작에 관한 설화인 거미 이야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인간들에게 도란도란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신에게 찾아가는 현명한 거미 아난시 덕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만들어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잘 모르는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책의 내용만으로도 흥미로웠는데, 이 책이 더 재미있는 이유는 독특한 이야기 전달 방식과 유쾌하고 개성 있는 삽화들의 몫도 컸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위인전이나 인문학 책들의 설명 조의 글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을 때 굉장히 자연스러운 구어체의 서술을 기본으로 하고, 가끔은 등장인물들 간의 편지 혹은 인터뷰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길고 복잡한 설명은 단순하게 줄이고, 가끔은 과장된 표현이나 우스운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이야기들은 전해지는 신화의 핵심 내용과 인물들의 특징은 놓치지 않되 그림과 어우러지는 약간은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꾸준히 유지해 간다. 그림들 역시 본문의 장면들을 상상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역할과 웃음 포인트 양쪽 모두를 맡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한결같은 그림체의 미남미녀들에 모습(예를 들어 에로스와 푸시케)에도 웃음이 났고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의 색다른 버전(예를 들어 웨딩드레스를 입은 토르)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었다. 단단한 양장 표지를 열면 처음으로 보이는 속지에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다양하게 모여있는데, 아이들이 책의 독자라면 책을 다 읽은 후 그 캐릭터가 누구인지 맞춰보는 게임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제목만 본문의 글과 구분될 뿐 각각의 이야기가 어느 대륙, 어느 나라의 신화인지는 본문 내에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지는 않다. 이야기 속의 설명이나 힌트로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더러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의 장소적 출처가 궁금하다면 본문 맨 마지막에 '세계의 신화와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구성된 파트에 각 대륙별로 그 이야기가 속한 지역이 지도와 함께 표기되어 있어 확실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특징과 전해오는 이야기들의 특성도 간략하게 보충 설명을 해주는데, 삽화만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 본문들과 달리 지도와 실물 유적, 문화 자료들의 사진을 함께 실어놓아서 더 유익하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책의 마지막까지 독자들이 흥미를 놓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아이들이 혼자 읽기에(특히 한꺼번에 완독을 하기엔) 꽤 분량이 많은 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구분되어 있어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해본 결과 인터넷 서점에서도 대부분 어린이 도서에 분류가 되어있지만, 책 내에서 몇 세 이상이라는 권장 연령 등의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독자를 타깃으로 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워낙 신화나 우화, 옛날이야기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도 꽤 쉽고 재미있을 책이라고 자신 있게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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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프리랜서 번역가 일기 - 베테랑 산업 번역가에게 1:1 맞춤 코칭 받기
김민주.박현아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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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베테랑 산업 번역가에게 1:1 맞춤 코칭 받기'라는 부제 중 '산업'에 별표가 그려져있다. 산업 번역가란 뭘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도 책 속의 주인공 미영처럼, 번역가하면 소설이나 영화 등의 분야에서 번역하는 사람들만을 떠올렸다. 산업 번역가란 해외에서 수입된 다양한 상품들의 제품명이나 사용설명서 등 제품 관련 모든 번역을 맡아 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전 세계에서 들어온 상품들이 일상생활 어디에나 있어서 그 제품에 붙은 한글들을 누군가 번역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고 싶지만 번역에 관련된 전공이 아니고 얼마 전까지 평범한 회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전부인 '미영'이란 인물이, 5년 차 산업 번역가로 번역에 대한 강의와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는 '하린'이라는 멘토를 만나 번역가가 되는 과정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가감 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충실한 피드백을 받아낸다. 이 멘티와 멘토의 상담은 메일로만 이루어지는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을 첨부해 보낼 때 그 이력서가 통째로 책 속에 들어있어서 두 사람의 메일 내용을 읽을 때면 정말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내는 메일을 보는 느낌이라 재미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보에서, 번역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림 끝에 샘플 테스트를 보고, 일을 얻어 실제 번역으로 돈을 벌고, 이런 식으로 단계 단계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신기하고 실제로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어떤 고민과 궁금증들이 생기는지 알게 되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만으로도 궁금증이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결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하린처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하는 넓은 마음으로 진지한 조언과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특히나 마음가짐과 멘탈 관리 같은 부분에서는, 그 대답이 듣고 보면 잠시 잊었을 뿐 스스로 잘 알고 있던 사실이나 흔한 말이라는 걸 깨달아도, 내 앞이 막막하고 생각이 복잡해질 때 딱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으니 제때에 적절한 조언을 던져주는 멘토가 얼마나 고마운가. 훌륭한 멘토 하린만큼, 미영 역시 궁금증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답장 받은 내용을 토대로 무엇이든 바로바로 실행해버리는 점이 대단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현실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멘티-멘토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받고 성장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에필로그를 보면 하린의 이야기에서 미영의 태도에 대한 언급을 하며 프리랜서 번역가가 갖춰야 할 몇 가지 소양(좋은 습관) 등을 자연스레 알게 해주는 것도 센스 있다고 느꼈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도 번역가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는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담는 구성이 굉장히 독특해서 인상적이었다. 실제 현실을 배경으로 가짜 인물들을 내세워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번역가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 주는데 가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점이 소설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이트나 번역에 쓰이는 프로그램 등을 언급하기도 하고 취업관련 현실들이 등장하면서 배경만은 온전한 현실의 이야기인데다 미영의 상황을 중계하거나 하린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상담이 이루어져 에세이스러운 면도 있었다.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막연한 로망과 실제 번역가의 영업 및 번역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는데, 실제 번역가 지망생들에겐 리얼리티 있는 자기개발서로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었다. 번역에 관한 책을 이렇게 재밌게 출간할 수 있다니, 다음엔 시리즈로 베테랑 '문학'번역가, '영화'번역가에게 받는 맞춤 코칭에 대한 책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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