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그윈플렌 커버 에디션 A) - 이석훈 & 규현 표지디자인 웃는 남자 (그윈플렌 커버 에디션)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세세하고 구체적인 배경과 인물들, 그에 반영된 사회상과 풍습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비판, 운명과 숙명이란 이름에 휩쓸린 비극적인 주인공, 때론 장황하지만 늘 매혹적인 문장들. 일일이 장점들을 나열해보아도 전체적인 이 책의 감상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저 좋았다, 재미있다고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150년 이상 독자에게 숨은 명작이란 평을 받고 꾸준히 사랑받을만한 작품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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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하는 배에서 갑작스레 버려진 어린 소년, 그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얼어 죽은 여자의 품속에 숨을 쉬던 어린 여자아이. 두 아이가 가족이자 안식처가 될 우르수스와 호모의 집에 문을 두드린건 정말 천운이었다. 데아를 만나고 우르수스를 만난 두 가지 행운을 제외하면, 그윈플렌의 삶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불행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정말 주인공을 이렇게까지 홀대하고, 박해하는 소설은 처음 봤다. 일단 주인공의 '그윈플렌'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페이지가 무려 449페이지이다. 총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생각해도 중반쯤 들어서야 주인공의 이름이 처음 언급된다.


그가 겪는 사건들을 요약해보면 더 한숨만 나온다.(※줄거리 스포일러가 싫은 사람은 이 단락은 건너뛰세요)태어나자마자 기억조차 못 하는 사이 얼굴이 기형으로 만들어지고, 열 살 무렵 무리에서 갑작스레 버려지고, 그나마 좀 행복했을 성장과정은 본문 내에선 몽땅 생략되고, 돈도 벌고 데아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을 무렵 갑작스레 여공작에게 애인으로 점 찍혀 휘둘리게 되고, 출생의 비밀이 폭로되며 처지가 바뀌게되고, 되찾게 된 지위로 민중의 대행자 역할을 하려 연설을 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폭소를 불러올 뿐이고, 감싸주는 듯한 형이 생겨서 좋아하려다 그에게서 목숨을 건 결투 신청을 받고, 다시 정신 차려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니 또 이별이 기다리고 있고... 온 세상 불행이란 불행은 다 모아놓은 듯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랄까.


이 처음 몇 장을 통해 우리가 희미한 윤곽이나마 잡아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여도 될 것 같은, 이 책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한 장이다.


운수 좋은 이들이 벌이는 불운한 자들에 대한 착취


(본문 중 48p)

그는 자신이 복수의 대행자라 여겼는데 다만 광대일 뿐이었다. 벼락을 치는 줄 알았는데 고작 해야 그들을 간지럽게 할 뿐이었다. 그가 거두어 온 것은 감동이 아니라 조소였다. 그가 흐느끼자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는 그 즐거움 밑으로 침몰해버렸다. 서글픈 침몰이었다.

(본문 중 1020p)


사실 그윈플렌은 첫 등장에서 데아를 구하고 우르수스를 만나기까지의 강인한 모습을 제외하면, 이리저리 휘둘리고, 주체적으로 뭘 하려는 건 죄다 실패하고(유일한 성공은 광대로서 공연하는 것뿐), 혼란스러워하고 충격에 빠지는 모습뿐이라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격정적으로 연설하지만 책의 초반 예고되어 있듯이 그는 착취당한 불운한 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침몰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우르수스는 화를 토하는 듯한 말을 잇몸 사이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가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축축해진 눈을 쳐들어 우르수스를 바라보았다. 항상 학대만 받다가 모처럼 따스함을 느낀 아이에게 전해지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본문 중 276p)


반면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우르수스였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말로는 가라고 했다가 문을 열어두고 왜 안 들어오냐고 화를 내고, 기꺼이 어린 소년과 어린 여자아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음식을 양보해 주고서 긴 투털거림(투덜거리는 그의 대사만으로 5페이지가 넘는다ㅋㅋ)을 내뱉는 등 츤데레의 정석을 보여주는 우르수스가 귀엽고 재미있었다. 콤프라치코스가 배척당해 그 누구도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고 흑사병으로 인해 아무도 떠돌이를 받아주지 않던 시대상에서 두 어린 아이를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존재가 특별했다. 많은 직업을 가졌지만 철학자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하는 말 하나하나에도 그의 인생철학이 배어있고 현실을 푹푹 찌르는 날선 대사들이 좋았다. 버릇이고 취미이자 특기인 긴 방백과 연설은 가끔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윈플렌과 데아를 대하고 아버지로서 그 둘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한 존재였다. 그래서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 다하고서 아무도 남지 않은 곳에 홀로 눈을 떴을 그의 처지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웠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데이비드와 조시안에 대해 말하고 싶다. 데이비드는 그윈플렌과 마찬가지로 귀족과 서민들의 삶 양쪽에 발을 딛고 있지만, 누구보다 그 시대의 귀족스러운 인물이었고 그윈플렌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만한 인물이라 흥미로웠다. 여공작 조시안 역시 가장 귀족 다운 인물 중 하나였는데, 사실 뮤지컬에서 꽤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길 들어 기대하던 바가 있었으나 원작 소설에선 오직 귀족의 권위를 누리며 유희를 즐기고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이었다. 그윈플렌을 열렬히 좋아하게 된 척하지만, 딱히 그윈플렌이 아니어도 최상층의 아름다운 자신이 최하층의 추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당시에 유행이자 가장 고귀한 귀족에 걸맞은 행동이라 생각했기에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앤 여왕에게 한방 먹이듯 남긴 한 줄의 편지는 인상적이었지만 주인공과의 교류나 접점도 아주 적어서 인물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 했던 것 같다.



다이내믹한 줄거리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 그 안에 얽힌 사연들도 파격적이고 재미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감탄스러웠던 건 작가의 문장력이었다. 그윈플렌을 버리고 출항한 배가 바다위에서 겪는 고난과 최후의 생생한 장면에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회상과 풍습들을 설명할 땐 런던과 파리의 부유하고 한가한 귀족들의 즐기는 방법(오락)과 다양한 클럽들의 만행, 일반 시민들의 아무 이유 없는 피해상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의 긴 연설을 끊지 않고 몇 장 이상 이어지게 쓴 것도 신기했고(이런 부분에서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어떻게 줄여놓았을지가 엄청 궁금해졌다.), 그윈플렌과 데아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463p)이 한 줄의 이야기를 수십 장으로 풀어내는 솜씨에도 감탄했다. 장황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긴 호흡의 문장과 대사들이지만, 왠지 허투루 읽기엔 뒷이야기에 필요할 듯한 단서가 숨어 있을 것 같고, 흡입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몰아치듯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홀린 듯이 읽어나가게 된다. 


귀족들의 이름들이 나열되는 부분(초반의 예비 이야기, 왕권별로 변화해온 귀족의 수와 의상 등에 대한 설명, 후반의 데이비드의 결투 요청 대사 등)이 제일 고비이긴 했지만 작품 해설에서 등장하는 "《웃는 남자》의 진정한 제목은 《귀족》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한마디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줄거리에서 중요한 문장이든, 그냥 그 문장만 떼어놓고 보았을 때도 의미 있고 멋진 문장이든 남겨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평소 버릇처럼 읽을 때 메모해둔 페이지의 수가 정말 많았다. 전체를 필사하긴 너무 힘들 것 같고, 따로 《웃는 남자》 전용의 필사 노트를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하지만 고전에 많이 취약한 독자인 내가 이 벽돌 책을 읽어낸 게 뿌듯했고, 머리가 뺑뺑 돌아가고 다양한 생각과 감상에 한동안 빠져있을 정도로 정말 읽을만한 책이었다는 점이 좋았다. 두꺼운 책에는 아직도 걱정이 앞서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싶어지게끔 만든 작가의 명성과 다른 독자들의 리뷰와 멋진 책의 디자인에도 박수쳐주고 싶다. 특히 뮤지컬 공연과 맞물려서 그윈플렌 역을 맡은 배우들의 화보로 표지를 장식한 건 주인공에 대한 매력과 호기심을 확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느꼈고, 그 종이 표지를 벗겨내면 드러나는 고풍적인 디자인의 하드커버도 정말 멋졌다. 한마디로 '나 이 책 있다', '나 이 책 읽었다' 자랑하고 싶은 책이랄까. 그래서 더 정성 들여 사진을 찍고 서평을 쓰며 나도 이렇게 자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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