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우르수스였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말로는 가라고 했다가 문을 열어두고 왜 안 들어오냐고 화를 내고, 기꺼이 어린 소년과 어린 여자아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음식을 양보해 주고서 긴 투털거림(투덜거리는 그의 대사만으로 5페이지가 넘는다ㅋㅋ)을 내뱉는 등 츤데레의 정석을 보여주는 우르수스가 귀엽고 재미있었다. 콤프라치코스가 배척당해 그 누구도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고 흑사병으로 인해 아무도 떠돌이를 받아주지 않던 시대상에서 두 어린 아이를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존재가 특별했다. 많은 직업을 가졌지만 철학자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하는 말 하나하나에도 그의 인생철학이 배어있고 현실을 푹푹 찌르는 날선 대사들이 좋았다. 버릇이고 취미이자 특기인 긴 방백과 연설은 가끔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윈플렌과 데아를 대하고 아버지로서 그 둘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한 존재였다. 그래서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 다하고서 아무도 남지 않은 곳에 홀로 눈을 떴을 그의 처지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웠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데이비드와 조시안에 대해 말하고 싶다. 데이비드는 그윈플렌과 마찬가지로 귀족과 서민들의 삶 양쪽에 발을 딛고 있지만, 누구보다 그 시대의 귀족스러운 인물이었고 그윈플렌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만한 인물이라 흥미로웠다. 여공작 조시안 역시 가장 귀족 다운 인물 중 하나였는데, 사실 뮤지컬에서 꽤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길 들어 기대하던 바가 있었으나 원작 소설에선 오직 귀족의 권위를 누리며 유희를 즐기고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이었다. 그윈플렌을 열렬히 좋아하게 된 척하지만, 딱히 그윈플렌이 아니어도 최상층의 아름다운 자신이 최하층의 추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당시에 유행이자 가장 고귀한 귀족에 걸맞은 행동이라 생각했기에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앤 여왕에게 한방 먹이듯 남긴 한 줄의 편지는 인상적이었지만 주인공과의 교류나 접점도 아주 적어서 인물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 했던 것 같다.
다이내믹한 줄거리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 그 안에 얽힌 사연들도 파격적이고 재미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감탄스러웠던 건 작가의 문장력이었다. 그윈플렌을 버리고 출항한 배가 바다위에서 겪는 고난과 최후의 생생한 장면에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회상과 풍습들을 설명할 땐 런던과 파리의 부유하고 한가한 귀족들의 즐기는 방법(오락)과 다양한 클럽들의 만행, 일반 시민들의 아무 이유 없는 피해상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의 긴 연설을 끊지 않고 몇 장 이상 이어지게 쓴 것도 신기했고(이런 부분에서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어떻게 줄여놓았을지가 엄청 궁금해졌다.), 그윈플렌과 데아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463p)이 한 줄의 이야기를 수십 장으로 풀어내는 솜씨에도 감탄했다. 장황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긴 호흡의 문장과 대사들이지만, 왠지 허투루 읽기엔 뒷이야기에 필요할 듯한 단서가 숨어 있을 것 같고, 흡입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몰아치듯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홀린 듯이 읽어나가게 된다.
귀족들의 이름들이 나열되는 부분(초반의 예비 이야기, 왕권별로 변화해온 귀족의 수와 의상 등에 대한 설명, 후반의 데이비드의 결투 요청 대사 등)이 제일 고비이긴 했지만 작품 해설에서 등장하는 "《웃는 남자》의 진정한 제목은 《귀족》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한마디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줄거리에서 중요한 문장이든, 그냥 그 문장만 떼어놓고 보았을 때도 의미 있고 멋진 문장이든 남겨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평소 버릇처럼 읽을 때 메모해둔 페이지의 수가 정말 많았다. 전체를 필사하긴 너무 힘들 것 같고, 따로 《웃는 남자》 전용의 필사 노트를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