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그윈플렌 커버 에디션 A) - 이석훈 & 규현 표지디자인 웃는 남자 (그윈플렌 커버 에디션)
빅토르 위고 지음, 백연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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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세하고 구체적인 배경과 인물들, 그에 반영된 사회상과 풍습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비판, 운명과 숙명이란 이름에 휩쓸린 비극적인 주인공, 때론 장황하지만 늘 매혹적인 문장들. 일일이 장점들을 나열해보아도 전체적인 이 책의 감상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저 좋았다, 재미있다고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150년 이상 독자에게 숨은 명작이란 평을 받고 꾸준히 사랑받을만한 작품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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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항하는 배에서 갑작스레 버려진 어린 소년, 그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얼어 죽은 여자의 품속에 숨을 쉬던 어린 여자아이. 두 아이가 가족이자 안식처가 될 우르수스와 호모의 집에 문을 두드린건 정말 천운이었다. 데아를 만나고 우르수스를 만난 두 가지 행운을 제외하면, 그윈플렌의 삶은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불행하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정말 주인공을 이렇게까지 홀대하고, 박해하는 소설은 처음 봤다. 일단 주인공의 '그윈플렌'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페이지가 무려 449페이지이다. 총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생각해도 중반쯤 들어서야 주인공의 이름이 처음 언급된다.


그가 겪는 사건들을 요약해보면 더 한숨만 나온다.(※줄거리 스포일러가 싫은 사람은 이 단락은 건너뛰세요)태어나자마자 기억조차 못 하는 사이 얼굴이 기형으로 만들어지고, 열 살 무렵 무리에서 갑작스레 버려지고, 그나마 좀 행복했을 성장과정은 본문 내에선 몽땅 생략되고, 돈도 벌고 데아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을 무렵 갑작스레 여공작에게 애인으로 점 찍혀 휘둘리게 되고, 출생의 비밀이 폭로되며 처지가 바뀌게되고, 되찾게 된 지위로 민중의 대행자 역할을 하려 연설을 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폭소를 불러올 뿐이고, 감싸주는 듯한 형이 생겨서 좋아하려다 그에게서 목숨을 건 결투 신청을 받고, 다시 정신 차려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니 또 이별이 기다리고 있고... 온 세상 불행이란 불행은 다 모아놓은 듯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이랄까.


이 처음 몇 장을 통해 우리가 희미한 윤곽이나마 잡아 보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제목을 붙여도 될 것 같은, 이 책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한 장이다.


운수 좋은 이들이 벌이는 불운한 자들에 대한 착취


(본문 중 48p)

그는 자신이 복수의 대행자라 여겼는데 다만 광대일 뿐이었다. 벼락을 치는 줄 알았는데 고작 해야 그들을 간지럽게 할 뿐이었다. 그가 거두어 온 것은 감동이 아니라 조소였다. 그가 흐느끼자 모두들 즐거워했다. 그는 그 즐거움 밑으로 침몰해버렸다. 서글픈 침몰이었다.

(본문 중 1020p)


사실 그윈플렌은 첫 등장에서 데아를 구하고 우르수스를 만나기까지의 강인한 모습을 제외하면, 이리저리 휘둘리고, 주체적으로 뭘 하려는 건 죄다 실패하고(유일한 성공은 광대로서 공연하는 것뿐), 혼란스러워하고 충격에 빠지는 모습뿐이라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격정적으로 연설하지만 책의 초반 예고되어 있듯이 그는 착취당한 불운한 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침몰하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우르수스는 화를 토하는 듯한 말을 잇몸 사이로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가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축축해진 눈을 쳐들어 우르수스를 바라보았다. 항상 학대만 받다가 모처럼 따스함을 느낀 아이에게 전해지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본문 중 276p)


반면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우르수스였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에서도 말로는 가라고 했다가 문을 열어두고 왜 안 들어오냐고 화를 내고, 기꺼이 어린 소년과 어린 여자아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음식을 양보해 주고서 긴 투털거림(투덜거리는 그의 대사만으로 5페이지가 넘는다ㅋㅋ)을 내뱉는 등 츤데레의 정석을 보여주는 우르수스가 귀엽고 재미있었다. 콤프라치코스가 배척당해 그 누구도 아이를 데리고 있으려 하지 않고 흑사병으로 인해 아무도 떠돌이를 받아주지 않던 시대상에서 두 어린 아이를 선뜻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존재가 특별했다. 많은 직업을 가졌지만 철학자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하는 말 하나하나에도 그의 인생철학이 배어있고 현실을 푹푹 찌르는 날선 대사들이 좋았다. 버릇이고 취미이자 특기인 긴 방백과 연설은 가끔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그윈플렌과 데아를 대하고 아버지로서 그 둘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한 존재였다. 그래서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 다하고서 아무도 남지 않은 곳에 홀로 눈을 떴을 그의 처지가 너무도 슬프고 안타까웠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데이비드와 조시안에 대해 말하고 싶다. 데이비드는 그윈플렌과 마찬가지로 귀족과 서민들의 삶 양쪽에 발을 딛고 있지만, 누구보다 그 시대의 귀족스러운 인물이었고 그윈플렌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할만한 인물이라 흥미로웠다. 여공작 조시안 역시 가장 귀족 다운 인물 중 하나였는데, 사실 뮤지컬에서 꽤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이야길 들어 기대하던 바가 있었으나 원작 소설에선 오직 귀족의 권위를 누리며 유희를 즐기고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이었다. 그윈플렌을 열렬히 좋아하게 된 척하지만, 딱히 그윈플렌이 아니어도 최상층의 아름다운 자신이 최하층의 추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당시에 유행이자 가장 고귀한 귀족에 걸맞은 행동이라 생각했기에 그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앤 여왕에게 한방 먹이듯 남긴 한 줄의 편지는 인상적이었지만 주인공과의 교류나 접점도 아주 적어서 인물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진 못 했던 것 같다.



다이내믹한 줄거리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 그 안에 얽힌 사연들도 파격적이고 재미있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장 감탄스러웠던 건 작가의 문장력이었다. 그윈플렌을 버리고 출항한 배가 바다위에서 겪는 고난과 최후의 생생한 장면에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회상과 풍습들을 설명할 땐 런던과 파리의 부유하고 한가한 귀족들의 즐기는 방법(오락)과 다양한 클럽들의 만행, 일반 시민들의 아무 이유 없는 피해상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의 긴 연설을 끊지 않고 몇 장 이상 이어지게 쓴 것도 신기했고(이런 부분에서 연극이나 뮤지컬 등 공연에서 인물들의 대사를 어떻게 줄여놓았을지가 엄청 궁금해졌다.), 그윈플렌과 데아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463p)이 한 줄의 이야기를 수십 장으로 풀어내는 솜씨에도 감탄했다. 장황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긴 호흡의 문장과 대사들이지만, 왠지 허투루 읽기엔 뒷이야기에 필요할 듯한 단서가 숨어 있을 것 같고, 흡입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몰아치듯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홀린 듯이 읽어나가게 된다. 


귀족들의 이름들이 나열되는 부분(초반의 예비 이야기, 왕권별로 변화해온 귀족의 수와 의상 등에 대한 설명, 후반의 데이비드의 결투 요청 대사 등)이 제일 고비이긴 했지만 작품 해설에서 등장하는 "《웃는 남자》의 진정한 제목은 《귀족》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한마디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줄거리에서 중요한 문장이든, 그냥 그 문장만 떼어놓고 보았을 때도 의미 있고 멋진 문장이든 남겨놓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평소 버릇처럼 읽을 때 메모해둔 페이지의 수가 정말 많았다. 전체를 필사하긴 너무 힘들 것 같고, 따로 《웃는 남자》 전용의 필사 노트를 하나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려 노력하지만 고전에 많이 취약한 독자인 내가 이 벽돌 책을 읽어낸 게 뿌듯했고, 머리가 뺑뺑 돌아가고 다양한 생각과 감상에 한동안 빠져있을 정도로 정말 읽을만한 책이었다는 점이 좋았다. 두꺼운 책에는 아직도 걱정이 앞서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싶어지게끔 만든 작가의 명성과 다른 독자들의 리뷰와 멋진 책의 디자인에도 박수쳐주고 싶다. 특히 뮤지컬 공연과 맞물려서 그윈플렌 역을 맡은 배우들의 화보로 표지를 장식한 건 주인공에 대한 매력과 호기심을 확 높여주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느꼈고, 그 종이 표지를 벗겨내면 드러나는 고풍적인 디자인의 하드커버도 정말 멋졌다. 한마디로 '나 이 책 있다', '나 이 책 읽었다' 자랑하고 싶은 책이랄까. 그래서 더 정성 들여 사진을 찍고 서평을 쓰며 나도 이렇게 자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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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신과 영웅들 - 레전드 오브 레전드
댄 그린 지음, 데이비드 리틀턴 그림, 고정아 옮김 / 제제의숲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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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이 많다는 이유로 조금 쉽게 봤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것도 꽤 방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참신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보면서 꽤 많이 웃었고 한가한 날에는 엄마를 붙잡고 들어보라고 하면서 소리 내 책을 줄줄 읽기도 했다. 그만큼 혼자 읽기에도, 누군가에게 읽어주기에도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신화와 영웅이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밖에도 전 세계에는 정말 셀 수 없는 신과 영웅들이 많다는 걸 새삼 알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친숙한 신과 영웅들, 유럽의 신과 종교와 기사들의 이야기, 아프리카 설화와 동물 우화들, 아메리카의 수많은 민족들과 문명들이 남긴 다양한 신화들, 우리나라가 속해있고 가장 넓은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와 수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는 오세아니아의 신화까지 제목대로 정말 전 '세계의 신과 영웅들' 의 이야기가 골고루 이 책에 담겼다.


그리스 로마신화와 아시아의 신화는 나름대로 친숙했지만,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신화들은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들이 정말 많았다. 이야기를 가지고 온 거미 아난시와 노래를 잘하고 싶었던 아르마딜로, 사람을 괴롭히는 요괴 사시 페레레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셋 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고 특히나 이야기의 시작에 관한 설화인 거미 이야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인간들에게 도란도란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신에게 찾아가는 현명한 거미 아난시 덕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만들어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잘 모르는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책의 내용만으로도 흥미로웠는데, 이 책이 더 재미있는 이유는 독특한 이야기 전달 방식과 유쾌하고 개성 있는 삽화들의 몫도 컸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위인전이나 인문학 책들의 설명 조의 글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을 때 굉장히 자연스러운 구어체의 서술을 기본으로 하고, 가끔은 등장인물들 간의 편지 혹은 인터뷰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길고 복잡한 설명은 단순하게 줄이고, 가끔은 과장된 표현이나 우스운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이야기들은 전해지는 신화의 핵심 내용과 인물들의 특징은 놓치지 않되 그림과 어우러지는 약간은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꾸준히 유지해 간다. 그림들 역시 본문의 장면들을 상상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역할과 웃음 포인트 양쪽 모두를 맡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한결같은 그림체의 미남미녀들에 모습(예를 들어 에로스와 푸시케)에도 웃음이 났고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의 색다른 버전(예를 들어 웨딩드레스를 입은 토르)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었다. 단단한 양장 표지를 열면 처음으로 보이는 속지에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다양하게 모여있는데, 아이들이 책의 독자라면 책을 다 읽은 후 그 캐릭터가 누구인지 맞춰보는 게임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제목만 본문의 글과 구분될 뿐 각각의 이야기가 어느 대륙, 어느 나라의 신화인지는 본문 내에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지는 않다. 이야기 속의 설명이나 힌트로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더러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의 장소적 출처가 궁금하다면 본문 맨 마지막에 '세계의 신화와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구성된 파트에 각 대륙별로 그 이야기가 속한 지역이 지도와 함께 표기되어 있어 확실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특징과 전해오는 이야기들의 특성도 간략하게 보충 설명을 해주는데, 삽화만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 본문들과 달리 지도와 실물 유적, 문화 자료들의 사진을 함께 실어놓아서 더 유익하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책의 마지막까지 독자들이 흥미를 놓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아이들이 혼자 읽기에(특히 한꺼번에 완독을 하기엔) 꽤 분량이 많은 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구분되어 있어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해본 결과 인터넷 서점에서도 대부분 어린이 도서에 분류가 되어있지만, 책 내에서 몇 세 이상이라는 권장 연령 등의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독자를 타깃으로 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워낙 신화나 우화, 옛날이야기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도 꽤 쉽고 재미있을 책이라고 자신 있게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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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프리랜서 번역가 일기 - 베테랑 산업 번역가에게 1:1 맞춤 코칭 받기
김민주.박현아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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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베테랑 산업 번역가에게 1:1 맞춤 코칭 받기'라는 부제 중 '산업'에 별표가 그려져있다. 산업 번역가란 뭘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도 책 속의 주인공 미영처럼, 번역가하면 소설이나 영화 등의 분야에서 번역하는 사람들만을 떠올렸다. 산업 번역가란 해외에서 수입된 다양한 상품들의 제품명이나 사용설명서 등 제품 관련 모든 번역을 맡아 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전 세계에서 들어온 상품들이 일상생활 어디에나 있어서 그 제품에 붙은 한글들을 누군가 번역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고 싶지만 번역에 관련된 전공이 아니고 얼마 전까지 평범한 회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전부인 '미영'이란 인물이, 5년 차 산업 번역가로 번역에 대한 강의와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는 '하린'이라는 멘토를 만나 번역가가 되는 과정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가감 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충실한 피드백을 받아낸다. 이 멘티와 멘토의 상담은 메일로만 이루어지는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을 첨부해 보낼 때 그 이력서가 통째로 책 속에 들어있어서 두 사람의 메일 내용을 읽을 때면 정말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내는 메일을 보는 느낌이라 재미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보에서, 번역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림 끝에 샘플 테스트를 보고, 일을 얻어 실제 번역으로 돈을 벌고, 이런 식으로 단계 단계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신기하고 실제로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어떤 고민과 궁금증들이 생기는지 알게 되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만으로도 궁금증이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결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하린처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하는 넓은 마음으로 진지한 조언과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특히나 마음가짐과 멘탈 관리 같은 부분에서는, 그 대답이 듣고 보면 잠시 잊었을 뿐 스스로 잘 알고 있던 사실이나 흔한 말이라는 걸 깨달아도, 내 앞이 막막하고 생각이 복잡해질 때 딱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으니 제때에 적절한 조언을 던져주는 멘토가 얼마나 고마운가. 훌륭한 멘토 하린만큼, 미영 역시 궁금증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답장 받은 내용을 토대로 무엇이든 바로바로 실행해버리는 점이 대단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현실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멘티-멘토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받고 성장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에필로그를 보면 하린의 이야기에서 미영의 태도에 대한 언급을 하며 프리랜서 번역가가 갖춰야 할 몇 가지 소양(좋은 습관) 등을 자연스레 알게 해주는 것도 센스 있다고 느꼈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도 번역가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는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담는 구성이 굉장히 독특해서 인상적이었다. 실제 현실을 배경으로 가짜 인물들을 내세워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번역가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 주는데 가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점이 소설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이트나 번역에 쓰이는 프로그램 등을 언급하기도 하고 취업관련 현실들이 등장하면서 배경만은 온전한 현실의 이야기인데다 미영의 상황을 중계하거나 하린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상담이 이루어져 에세이스러운 면도 있었다.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막연한 로망과 실제 번역가의 영업 및 번역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는데, 실제 번역가 지망생들에겐 리얼리티 있는 자기개발서로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었다. 번역에 관한 책을 이렇게 재밌게 출간할 수 있다니, 다음엔 시리즈로 베테랑 '문학'번역가, '영화'번역가에게 받는 맞춤 코칭에 대한 책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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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습니다 I LOVE 그림책
제프 뉴먼 지음, 래리 데이 그림 / 보물창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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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집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던 아이가 비를 맞고 거리를 헤매는 강아지를 발견하곤 집으로 데리고 온다. 유기견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점은 주인공 역시 키우던 개를 잃어버려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기견 하면 보통 버려진 개들을 떠올렸는데, 생각해보니 부주의 혹은 우연한 사고로 주인과 떨어져 길을 헤매고 있는 개들 역시 유기견이었다. 비 오는 날 쫄딱 젖은 개를 보고 어쩌면 자신이 키우던 개 '도담이' 역시 어디선가 비를 맞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아이는 작은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글 없는 그림책이 좋다. 전 세계의 아이들이 그림이라는 공통된 언어로 별다른 번역을 거치지 않은 똑같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고(물론 제목과 배경에 등장하는 글자들이 번역되긴 하지만), 그림만으로 스토리를 끌어가고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점도, 등장인물의 말이나 생각을 상상하는데 글이 있는 그림책보다 한층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림책인 만큼 사이즈도 큼직해서 그림의 세세한 부분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사실 그림책만큼 책 속의 삽화에 집중하게 되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책의 경우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 속 글과 아이가 아직 가지고 있던 강아지 용품(밥그릇 등)에 새겨진 '도담이'라는 강아지의 이름, 그리고 애완동물 용품점과 유기견 센터 등의 건물 간판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가게나 센터의 간판은 그렇다 치고 도담이나 초롱이 등의 강아지 이름이 원작에선 어떤 이름일지 괜히 궁금했다. 아이의 머리색이 검은색이고 배경이 생략된 그림도 제법 있기에 생활환경 자체가 아주 외국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니라 위화감은 없었지만, 강아지 이름에 외국 이름을 붙이는 것도 흔한 일이라 아주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면 원작 그대로의 이름을 살리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구성에서 몇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하드커버를 열면 바로 보이는 속지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마찬가지로 뒤표지의 속지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과, 보통의 책에는 시작이나 마지막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판권기(그 책의 서지사항을 기록해둔 페이지)가 본문이 시작된 후 몇 페이지 뒤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시작과 끝점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느낌을 주지만 본격적인 본문이 시작되어도 글이 없는 건 마찬가지기에 이어지는 느낌이 자연스러웠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장은 주인공 소녀의 또 다른 만남과 시작을 시사해 주기에 희망적인 인상을 남겨주었다. 판권기가 들어간 페이지 역시 자연스레 주어진 그림의 빈 공간을 이용한 느낌이었는데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구성을 독특하지만 자연스럽게 잘 이용한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특징은 강아지와 주인공 소녀만을 주목하고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어린아이가 혼자 살고 있을 리 없고, 강아지를 잃어버렸을 때 함께 전단지를 만들고 아이를 도닥여주었으며 유기견 초롱이를 집으로 데려온 날도 조용히 타이르거나 안쓰러운 시선으로 함께 밥을 챙겨주었을 가족들이 있었으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소녀와 강아지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아이와 강아지의 만남, 시간이 흐르며 쌓이는 애정, 헤어짐을 겪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되고 쉽게 감정이입하게 된다. 자신이 데려온 강아지 초롱이를 찾는 전단지를 발견한 소녀의 놀라움, 주인에게 강아지를 데려다주는 날 문을 두드리기 전 망설임, 본래 주인을 보고 신난 강아지를 보며 느끼는 섭섭함을 그리 복잡하지 않은 그림만으로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부분적으로 채색된 그림은 아주 세밀하지도 너무 단순화되지도 않았지만 섬세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이 읽는다면 유기견에 대한 이야기, 어떤 존재를 만나고 헤어지는 이유와 그 감정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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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 댄서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민 옮김 / 살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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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조 모예스의 소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알게 해준 책. 68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에 이걸 언제 다 읽나 살짝 걱정은 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오히려 그 긴 이야기 내내 얼마나 많은 감정을 소모할지를 걱정하는 게 옳았다. 너태샤와 맥이 여러 가지 일로 부딪히거나, 할아버지가 쓰러진 후 사라의 처지가 나빠질 때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을 넘어서면 그보다 더한 위기가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인물들 간의 갈등이 조율되고 희망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장면 역시 '이대로만 행복해지면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보고 있으면 그다음에는 더한 기쁨과 더 커다란 희망이 등장하곤 하니 행복과 위기 사이의 한도가 어디까지 일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강도가 점점 커지는 위기와 행복이 번갈아 오거나 동시에 진행되곤 해서 그 낙차에 휘둘리는 게 정말 즐겁기도 했지만 다 읽고 난 후의 피로감이 의의로 상당했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껏 휘둘릴 작정으로 단번에 읽어버리길 추천하겠다.    

소녀와 말을 앞세우고 있지만, 이 책은 부모와 아이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매컬리 부부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 중 너태샤의 반복된 유산이 언급되고, 너태샤의 새로운 연인 코너와의 관계에서도 코너의 두 아이가 등장하며 "너태샤, 당신은 아직 자식이라는 존재를 잘 몰라" 라는 코너의 대사가 나오고,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을 변호하는 너태샤의 업무, 아이들에게 휘둘리는 너태샤의 언니 이야기, 사라에게 좋은 보호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너태샤와 맥의 다양한 시도,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찾아온 선물 같은 아이 등등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야기되는 경우는 몇 번 없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성장 도중의 아이들의 미숙함과 그 미숙함을 감당하고 보살펴줘야 할 어른들의 의무, 그 피로감과 특별함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말과 아이들이 겹쳐 보일 때가 꽤 있었다. 기본적으로 돌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부분이 그랬고, 말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와 말을 돌보거나 훈련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들(예를 들어 앙리 할아버지가 사라에게 가르쳐주는 표현이나, 각 장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 작은 글씨로 쓰인 크세노폰의 『기마술』의 내용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데 필요하고 주의해야 할 점들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동물에 비해 말들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천성적으로 커피나 걱정이 많고 성질도 까다로운 단점이 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정직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 55p)

최대한 많은 장면과 소음에 노출시켜 친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말이 그런 광경과 소리에 겁먹을 때마다 화를 내거나 자극하지 말고 잘 달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크세노폰 <기마술> 

(본문 중 259p)

"루시 같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해줄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지 않아요. 선생님이나 부모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컬리 변호사님, 아이들은 대개 아무도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얘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 중 471p)


부모와 아이의 관계, 사람과 말의 관계, 혹은 그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신뢰관계를 쌓는 과정은 비슷하다. 서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며 온전히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믿고 자신의 문제나 비밀을 전부 털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에선 아이들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란 착각에 빠지거나, 타인에게 말했을 때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거란 불신감에 의지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아이들만이 가진 모습일까. 많은 어른들 역시 자신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 들고 타인에게 쉽사리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다만 조금 더 살아온 만큼의 경험과 지식과 경제력이 쌓여서 아이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어른들은 그 약간의 차이로 아이들을 도우려 한다.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나는 자라면서 가족 혹은 누군가에게 나의 문제를 온전히 털어놓고  믿고 기댄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제법 나이를 먹은 지금 내게 모든 문제를 말해주며 온전히 자신을 기대어온 사람이 있었는가도.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대답이 "있었다"라면 있었다면 그 누군가는 아마도 가족이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사라가 너태샤와 맥에게 쉽사리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무모한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이 안타까웠고, 할아버지의 병실을 사라와 부의 사진으로 가득 채워준 맥의 상냥함이 좋았으며, 말투가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모습도 나다움이란 걸 깨닫고 사라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도움을 받으라 말을 건네는 너태샤의 당당함이 멋졌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들을 겪은 후에야 너태샤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는 사라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이 책은 말과 기수가 한 몸이 되어 완벽하고 멋진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말을 훈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나 사람 간 관계에 있어서 서로에게 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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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폰은 더 나은 것을 추구할 뿐이야. 그가 요구하는 것은 최고의 보살핌과 존중, 일관성, 공정함, 다정함 같은 것들이지. 사랑해 주기만 하면 말들이 더 행복할까? 그렇진 않아."

(본문 중 547p)

"저도 늘 더 나은 동작을 하기 위해 애쓰는 거예요. 말과 나의 완벽한 소통이나 교감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요. 고삐를 잡는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압력의 정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말의 기분이나 제 몸의 상태, 땅바닥의 조건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기술적인 문제가 전부가 아니거든요. 말과 나, 두 마음과 두 심장이...... 균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해요."

(본문 중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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