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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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하신 부모님이 등장하고, 자신의 상처에  벅차 혹은 그 이외의 이유로 부모님과의 연락이 뜸해진 딸이 있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혼자 계시게 된 아버지를 뵈러 딸은 아주 오랜만에 고향집을 방문한다. 주인공이 돌연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마음먹은 데는 아버지가 울었다는 동생의 전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눈물을 볼 기회는 사실 많지 않다. 부모가 잘 숨기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자식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이던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던 주인공은 고향인 J 시에 내려가서 아주 여러 번 그 눈물을 마주하고 충격을 받는다. 소설 속 아버지의 눈물에 딸은 자주 놀라지만, 나는 어쩌면 아버지는 잘 숨겨왔을 뿐 워낙 눈물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버지와 단둘이 집에 머무는 동안 주인공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곱씹는다. 농부였지만 농부 같지 않았던 아버지, 가게를 운영하던 아버지, 필요할 때면 나무 궤짝에서 돈을 꺼내 주시던 아버지, 자식들의 학사모 사진을 원하던 아버지. 그러다 기억에 남아있던 나무 궤짝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있던 아버지와 첫째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읽게 된다. 첫째 아들이 해외에서 일하던 동안 주고받은 편지들은 부자간의 끈끈한 정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었는데..' 하고 자신의 첫째 아들에게만 터놓는 속내, 자신이 살아온 동안 보고 느껴온 개인적인 경험의 기록. 그 속내와 기록을 보며 딸은 자신이 아버지를 한 번도 개별적인 인간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전염병으로 이틀 사이에 부모를 잃은 마음을, 전쟁을 겪을 때의 마음을, 얼굴 한번 보고 엄마와 결혼하던 때의 마음을, 큰 오빠가 태어났을 때의 아버지 마음은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이 되지 않았다.  ( …나는 아버지를 한 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를 농부로, 전쟁을 겪은 세대로, 소를 기르는 사람으로, 뭉뚱그려서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서 아버지 개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게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을.

(본문 중 197p)

딸이자 형제들 중 넷째인 주인공은 글을 쓰는 작가인데,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와 점점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아버지의 주변인들에게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인터뷰를 한다. 딸의 기억 속 아버지의 모습이 든든하고 포근한 순간들로 남아 있어서 그동안 아버지가 많이 애써왔다고 느껴졌고, 그 모습이 우리 아버지와도 겹쳐보게 되어 가끔은 울컥하기도 했다.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섞어서 자신이 보아온, 혹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준다. 삶의 단면들은 누구나 비슷비슷한지 짠하고, 우습고, 즐겁고, 무서운 기억들이 참 다양하게 있었다. 자식은 지금껏 알고 있던 아버지와 다른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충격을 받지만, 이내 익숙해진다. 그 과정은 점차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책에서 나오는 내용을 짚어보자면 소설 속 6남매의 나이가 우리 부모님 나이에 가까워 보이고 17살이 되던 해 전쟁을 겪었다던 소설 속 아버지는 나의 조부모 나이와 비슷할 것 같다.(나는 할머니가 초등학생 때 전쟁이 있었고, 마을이 폭격을 맞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설 속 내용처럼,  내가 점차 부모님을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 직면하는 것처럼, 부모님 역시 본인의 부모님을 그런 식으로 자각하고 느끼던 과정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소설 속에서 아빠의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생각해 보는 게 낯설었던 주인공처럼 나 역시 그랬다.

​아버지, 어머니를 한 인간으로서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때는 언제일까. 자식 입장에서 부모님은 한 사람이기 앞서 내 아빠고, 내 엄마라는 생각이 우선시되기 쉽다. 건강한 부모 자식 관계를 위해서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서로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으나 쉽지 않은 이야기다. 다만 너무 늦기 전에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아버지에 대해 주로 말하지만, 나는 읽는 내내 부모님 모두와 가족들에 대해 생각했다. 태어나면서 정해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지금껏 나를 돌보고 사랑해 주고 기꺼이 보호자 역할을 해준 고마운 이들에게 너무 무심하게 살지는 말아야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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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무엇인가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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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은 본문에서 '문화란 ~이다.'라는 문장만 뽑아 모아도 책의 한두 페이지쯤은 가득 채우고도 넘칠 것 같다. 대개의 인문학 책이 그렇듯이 '정답은 이거다' 하고 딱 한마디로 정의해 주지 않는다.(하지만 재밌게도 목차를 보면 '결론'이라는 단어가 있다.) 문화의 의미는 다양하게 논의되어왔고 지금껏 그 정의를 내린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문학가, 문화비평가 등등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큼의 그 정의가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여러개의 의미 중 딱 하나를 고르거나 그 의견만이 옳다고 지지하는 책이 아니다, 문화와 그 의미를 이야기하는데 늘 그 주변에 함께 있던 몇몇 개념들까지를 포함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해온 그 과정을 먼저 훑어보자고 이야기한다.

  '문화'는 유난히 복합적인 단어로, 누군가는 이보다 복합적인 단어는 한두 개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어에는 네 개의 주요한 의미가 두드러진다. 문화는 (1) 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들 전체 (2) 정신적이고 지적인 발전 과정 (3) 사람들이 살아가며 따르는 가치, 관습, 신념, 상징적 실천들 (4) 총체적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 본문 중 13p 

​내가 알고 있던 '문화'의 개념이라고 하면, '예술이나 교양'으로서의 문화 또는 '삶이나 행동의 방식'으로서 문화 정도가 전부였다. 문화의 개념은 생각보다도 더 세세하게 나누어지거나 더 큰 범위로 확대되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들은 흥미로웠고, 다양한 사례와 다양한 의견이 끊임없이 나와서 지루할 틈은 없었지만 쉽진 않았다. 읽는 순간에는 이해한 줄 알았는데 비슷비슷한 개념과 예시들이 반복되다 보니 내용을 요약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고 앞서 나왔던 내용들을 순서대로 떠올리기도 어려웠다. 책을 읽는 도중과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왠지 강연으로 이 내용을 다시 듣고 싶었고 아니면 누가 책 좀 소리 내서 읽어줬으면 했다.(진심으로 오디오북이 나온다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큰 욕심을 내진 않았지만 정말 열심히 읽었다. 한 줄로 요약된 결론을 바라지도 않았고 '이 책 한 권을 온전히 이해하고 말 테다' 하는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문화'에 대해 이야기되었던 것들을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애쓰며 읽었고, 언급된 개념들이나 글쓴이가 주장하는 부분들에 대해 최대한 저항 없이 읽으려고 노력했다. 내게는 낯설고 새로운 정보 자체가 많은 책이어서 첫 번째 완독하는 동안은 그런 태도로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두 번은 읽고 싶은 책이다. 다음 완독을 한 후에는 책 후반부에 저자가 목차에 직접 '결론'이라 이름 붙인 부분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해 보고 싶다.

책에 수록된 다양한 문화의 의미 중에 내게 가장 어렵지 않고 와닿았던 정의를 하나 꼽자면 문화를 '삶을 지속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본문 중 77p)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문화가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누려왔거나 앞으로 만들어갈 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다양한 의미들 중에 이런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에 나는 아직도 '문화'가 궁금하고 더 잘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과 공부, 삶에 있어서 문화, 교양, 문화산업 등등에 관심을 갖게 된 요즘 그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었고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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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해변
이도 게펜 지음, 임재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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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상상력을 정말 잘 버무려놓은 소설들. 14편의 이야기가 담긴 풍성한 소설집이다. 책은 은근한 두께와 작은 글씨를 자랑(?)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한 권이 끝나버리는 매력 있는 책. 책의 뒤표지를 보면 한편마다의 줄거리를 요약해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줄거리를 알고 보아도 재밌다. 읽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는 「 파리와 고슴도치 」, 「 예루살렘 해변 」 이 두 편이었는데, 읽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 삶의 의미 주식회사 」와 「 예루살렘 해변 」이었다. 짧게 두 편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눈을 뜨고 삶을 살아나갈 이유를 잃어버린 청년이 나름대로의 노력을 거듭하는 이야기와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내와 함께 60년 만에 예루살렘에 방문한 한 노인이 아내의 첫기억 속 눈 덮힌 예루살렘 해변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말 느닷없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은 이유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중략​…) 나는 어디서부터 답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내가 아프리카 산꼭대기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므로 답을 찾기 위해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구글에서 '삶의 의미'를 검색했다.   ( 본문 중 84-5p, 「 삶의 의미 주식회사 」 )


「 삶의 의미 주식회사 」에서 사실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바로 위에 첨부한 도입 부분이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훈훈한 엔딩 장면이다. '답을 찾기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이 구글 검색이라는 점에서 조금 웃었고, 검색을 통한 정보를 겁 없이 바로바로 이용해먹는 모습에서 청년 세대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등의 특징이 꽤나 반영되었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부분과 살면서 한 번쯤 고민해 볼 법한 내용을 다루는 등 현실 반영이 뛰어나면서도 '삶의 의미 주식회사'라는 판타지적 요소(실존 가능성을 따져보았을 때 비슷한 의도를 가진 회사는 있을지언정 책에서와 같은 경험을 제공해주진 못할 게 분명하다)가 들어간 이 단편과는 달리, 비슷한 느낌이지만 온라인과 sns에 익숙한 청년세대의 조금 비뚤어진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단편은「 베를린에서 3시간 떨어진 」이었다. 이 단편 속 주인공은 실현 가능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안쓰럽고 조금 무서웠다. 「 예루살렘 해변 」은 이야기를 읽고나면 이 책의 표지가 더 아름다워보인다.

좋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고객서비스 지침서」였다. 앞선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이름과 사연을 교묘히 연결해 고객과 고객서비스 담당자라는 역할에 집어넣더니, 둘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본문에서 고객과 담당자의 입장을 역전시키는 솜씨도 대단했다. 읽으면서 참을성 있게 진상 고객들의 말대꾸를 해주는 담당자의 입장에 몰입하다가, 순식간에 역전되어 담당자가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며 그를 응원하는 고객의 입장에 동화되어버려서 마지막 장면을 읽고 나선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몰입도가 굉장했다. 스핀 오프라기엔 애매하지만 이 책에 들어간 모든 이야기의 번외를 한편에 몽땅 넣어버린 느낌이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


참고로 이 책을 읽을 때 본문이 끝난 후 있는 '번역가의 글'도 꼭 끝까지 읽어보길 권한다. 이 소설의 한글판버전 첫 독자이기도 한 옮긴이는 책 말미에 성실한 서평을 남겼다. 그리고 이도 게펜의 두 번째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 희소식까지 함께 전한다. 난 이스라엘에 대해 잘 모르고, 이스라엘 작가의 글도 처음 읽었다. 주인공들의 이름과 등장하는 지명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고, 미국이나 한국에서 파병 뉴스가 나올 때나 들었던 지역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어색했지만, 소설가가 소설로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국적을 초월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됐든 난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하고, 무서워하고, 즐거워하고, 놀라고, 마음 아파하고, 감동하는 등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다양한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즐겼다. 작가의 상상력과 솜씨에 감탄했고, 작가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또 관심 있게 찾아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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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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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도, 앞으로 쓸 글들도 네가 읽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아. 그러나 상관없이 써볼 생각이야. 결국 혼잣말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말이지. 이 편지는 온전히 너를 향한 것, 우리의 대화를 이어 나가는 방법이자 너에게 말을 거는 나의 방식이니까. 듣지도 답하지도 않을 너에게. ​

(본문 중 17p)

이브 생 로랑이 21살 때 처음 만났고, 사업의 파트너이자 연인으로 곁을 지키다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날 때 눈을 감겨준 사람, 피에르 베르제가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이브 생 로랑이 떠난 후 장례식에서 읽었던 추도문을 시작으로 피에르 베르제가 이브 생 로랑에게 쓴 편지들을 모았다.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는 일반적인 책의 판형이 아니라 시집 혹은 편지지처럼 긴 판형을 가진 책으로, 본문은 날짜를 제목처럼 두고 그 날짜에 쓴 편지글만이 실려있다. 글을 읽을 수신인이 정해져 있다는 것만 빼면 자신의 위치와 안부를 전하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어 일기 같은 글이기도 하다. 편지 하나의 분량이 여러 장으로 길어질 때도, 단 한 줄로 그칠 때도 있어 더 그렇다. 

다른 이의 일기나 편지를 엿보는 데는 기묘한 희열이 있다. 대외적인 것 말고, 여기에만 남기고픈 혹은 특정인에게만 하고픈 말들이 쓰여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글을 쓰는 이나 받는 이의 깊은 속마음이나 비밀이 한두 개쯤은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이 편지들에는 그다지 비밀이랄 건 없는 것 같다. 그저 두 사람이 늘 바라던 영원에 대해, 당신이 남기고 간 것들(수집품, 재산, 추억, 업적 등등)을 정리하는 과정에 대해, 젊은 날에 함께 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해, 가끔은 현실적이고 가끔은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전하며 여전히 당신이 그립다는 마음 또한 담아 쓰여있다.




마지막 편지에 남겨있는 내용을 보면, 어쩌면 이 편지들은 공개하기 위해 쓰인 글일지도 모른다. 떠나기 직전의 고통받고 힘겨워하던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싫어서, 그들이 모르는 더 멋지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모습들이 많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자신과 그의 일생을 결산하기 위해, 피에르 베르제는 편지를 남겼다. 그 글이 왜 편지의 형식일까 내 마음대로 생각해 보자면, 1. 그를 생각하며 쓰고 싶어서 2. 그가 없다는 외로움과 고통을 줄여보기 위해서 3. 가끔 자신의 마음을 전하던 이브의 편지가 떠올라서(자신도 그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서류를 정리하면서 너의 '특별한 여행'전시회 날 네가 내가 쓴 편지를 다시 읽었어.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끝까지 읽기가 힘들더군. 너는 이따금씩 그런 식으로 사랑을 전하곤 했어. 편지 말미엔 이렇게 적혀 있었지. "언제나, 앞으로도 영원히, 너의 이브." 2006년, 네가 죽기 2년 전이었어. 그 편지는, 읽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순정의 극치야. 처음부터 우리는 그 만남이 영원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잖아. 편지는 그에 관한 내용이었어.

(본문 중 101p)

​​



이브 생 로랑의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그의 일생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다양한 나라와 도시의 이름이 나오고, 대부분이 유명인사인 그의 주변인들의 이름도 잔뜩 나온다. 나는 책을 먼저 읽고 난 후 그들(저자와 이브 생 로랑,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그의 주변인들)에 대해 검색을 해봤는데, 개인적으로는 최소한의 정보는 알고 책을 보는 걸 추천한다.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지식백과의 정보 한두개만 읽어봐도 충분하다. 그들의 인생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이 편지속에서도 등장하는데 먼저 알고 있다면 '이 얘기가 그 얘기군!' 하며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물론 귀찮다면 생략해도 된다. 책에서 각주로 설명이 되어있는 부분도 있다.) 

피에르 베르제의 말처럼 예술가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서 이브 생 로랑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를 기억하고, 그가 만들어낸 패션을 이어가려 애쓰는 재단이나, 그의 옷을 사랑하는 이들 역시 많이 남아있다. 그가 떠난 후로도 꾸준히 사랑을 보내는 연인도 있었다. 그들의 인생을 결산하고 싶었다던 편지에서 이브 생 로랑에 대한 감탄과 찬사와 자랑과 사랑은 있지만, 정작 글쓴이인 피에르 베르제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다. 그 역시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업적을 이룬 사람이지만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 중 '이브 생 로랑의 연인'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유명하며 가장 오랜 시간 자리했다고 한다. 이브 생 로랑의 업적과 인생에 대해서는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지만, 그의 연인이자 든든한 파트너에 대해서는 주목도나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자랑스러워하며 열렬한 사랑꾼으로 남기를 바랐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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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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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의 팬이라면 어느 페이지를 펴도 행복해질 수 있는 책. 사실 사심을 그대로 전하자면, 전시회 도록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풍부한 삽화의 양만 보더라도 충분히 구매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재작년에 알폰스 무하의 전시회를 다녀왔는데, 그림과 이름은 익숙해져 있는데도 그 화가나 그림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알수록 더 보인다고, 알폰스 무하와 그의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그와 그의 그림들이 좋아졌다. 그 기억이 점점 멀어질 때쯤 반갑게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림이 풍성했으면 좋겠다, 책형이 조금 크니 그림도 큼직하게 볼 수 있겠다 하는 기대가 있었고, 좋은 기억으로 남은 무하 전시회에서 얻었던 정보를 되새기거나 그 이상의 정보를 추가하기에도 좋은 기회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

무하는 비로소 포스터 화가, 삽화가로서뿐만 아니라 보석 디자이너, 조각가, 실내 장식가로서도 그 재능을 알리게 되었다. 이제 파리 유행의 정점에서 사람들은 무하라는 이름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실로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여주며 아르누보의 '총체 예술' 이념을 성공적으로 보여준 독창적인 아르누보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본문 중 175p)

​​

이미 고령의 나이임에도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하는 거의 20년 동안을 식사하고 잠자며, 잠깐 갖는 티타임을 뺀 아홉 시간 내지 열 시간을 꼬박 작업실에서 보냈다. <슬라브 서사시>는 그야말로 수도승에 가까운 그의 성실한 노동과 열의의 결과였다. (본문 중 249p)


체코 태생이지만, 파리와 미국에서 더 큰 사랑을 받은 화가.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화가이면서 포스터, 광고, 삽화, 보석디자인, 실내장식, 조각까지 다양한 방면으로 재능을 발휘했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워커홀릭. 그의 삶을 따라 진행되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사람은 정말 지독한 일중독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 덕에 우리는 그의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수나 <슬라브 서사시>같은 대작의 작업과정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저 대단하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재능도 넘치지만 성실함도 넘치는 사람. 그에게 그림은 일이자 곧 삶이었겠지만 힘들진 않았을까.






이제 무하의 포스터는 거리를 메우고 그의 장식 패널은 값싼 목로주점의 먼지 낀 벽에서, 가난한 학생의 허름한 하숙방에서 혹은 고급 주택의 응접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의 포스터와 장식 패널은 다시 비단 천에 그리고 엽서에, 작은 과자 상자, 도자기 접시에도 인쇄되었다. 그의 작품은 굳게 닫힌 미술관의 유리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이 닿는 거기에, 눈이 머무르는 어느 곳에나 있는 대중을 위한 예술이 되어가고 있었다. ​(본문 중 92-3p)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하의 작품은 아무래도 파리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의 연극 포스터와 광고용 상업포스터 및 삽화들이 아닐까. 풍성하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부드럽고 풍만한 몸매의 아름다운 여성들, 꽃과 화려한 장식 및 배경이 들어가 있는. 이 책에서는 파리에서의 전성기 작품들은 물론, 무하의 삶 전반을 다루고 있어 미국 이주 후의 작품, 결혼 후 조국으로 돌아가 민족과 고국에 헌신하는 작품 활동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실려있어 좋았다.


그의 삶 후반부에 그려낸 그림들은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어서인지 무하 특유의 분위기는 살아있으되, 스토리와 무게감이 있는 작품들이 아주 많다. 이 그림들은 무하라는 화가의 전체 삶을 보았을 때 자신에게도 더 큰 의미가 있는 작품들일 것만 같아 낯설지만 왠지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된다. 전시회에 가서 봤을 때도 인상적이었던 작품 <브르노 남서 모라비아를 위한 국민 연합 복권>은 특히 본문에서도 도슨트처럼 생생한 해설을 더해주어서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었는데 전시회를 한 번 더 다녀온 느낌. 무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아름다운 그림들에 반할 기회를 주고, 무하를 좀 더 알고 싶은 사람에겐 그의 삶과 다양한 작품들을 폭넓게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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