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상상력을 정말 잘 버무려놓은 소설들. 14편의 이야기가 담긴 풍성한 소설집이다. 책은 은근한 두께와 작은 글씨를 자랑(?)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한 권이 끝나버리는 매력 있는 책. 책의 뒤표지를 보면 한편마다의 줄거리를 요약해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줄거리를 알고 보아도 재밌다. 읽기 전에 가장 궁금했던 이야기는 「 파리와 고슴도치 」, 「 예루살렘 해변 」 이 두 편이었는데, 읽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 삶의 의미 주식회사 」와 「 예루살렘 해변 」이었다. 짧게 두 편의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눈을 뜨고 삶을 살아나갈 이유를 잃어버린 청년이 나름대로의 노력을 거듭하는 이야기와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내와 함께 60년 만에 예루살렘에 방문한 한 노인이 아내의 첫기억 속 눈 덮힌 예루살렘 해변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정말 느닷없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은 이유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중략…) 나는 어디서부터 답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내가 아프리카 산꼭대기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니므로 답을 찾기 위해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구글에서 '삶의 의미'를 검색했다. ( 본문 중 84-5p, 「 삶의 의미 주식회사 」 )
「 삶의 의미 주식회사 」에서 사실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바로 위에 첨부한 도입 부분이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훈훈한 엔딩 장면이다. '답을 찾기 위해 기꺼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 이 구글 검색이라는 점에서 조금 웃었고, 검색을 통한 정보를 겁 없이 바로바로 이용해먹는 모습에서 청년 세대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 등의 특징이 꽤나 반영되었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부분과 살면서 한 번쯤 고민해 볼 법한 내용을 다루는 등 현실 반영이 뛰어나면서도 '삶의 의미 주식회사'라는 판타지적 요소(실존 가능성을 따져보았을 때 비슷한 의도를 가진 회사는 있을지언정 책에서와 같은 경험을 제공해주진 못할 게 분명하다)가 들어간 이 단편과는 달리, 비슷한 느낌이지만 온라인과 sns에 익숙한 청년세대의 조금 비뚤어진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단편은「 베를린에서 3시간 떨어진 」이었다. 이 단편 속 주인공은 실현 가능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안쓰럽고 조금 무서웠다. 「 예루살렘 해변 」은 이야기를 읽고나면 이 책의 표지가 더 아름다워보인다.
좋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고객서비스 지침서」였다. 앞선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이름과 사연을 교묘히 연결해 고객과 고객서비스 담당자라는 역할에 집어넣더니, 둘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본문에서 고객과 담당자의 입장을 역전시키는 솜씨도 대단했다. 읽으면서 참을성 있게 진상 고객들의 말대꾸를 해주는 담당자의 입장에 몰입하다가, 순식간에 역전되어 담당자가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며 그를 응원하는 고객의 입장에 동화되어버려서 마지막 장면을 읽고 나선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몰입도가 굉장했다. 스핀 오프라기엔 애매하지만 이 책에 들어간 모든 이야기의 번외를 한편에 몽땅 넣어버린 느낌이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참고로 이 책을 읽을 때 본문이 끝난 후 있는 '번역가의 글'도 꼭 끝까지 읽어보길 권한다. 이 소설의 한글판버전 첫 독자이기도 한 옮긴이는 책 말미에 성실한 서평을 남겼다. 그리고 이도 게펜의 두 번째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 희소식까지 함께 전한다. 난 이스라엘에 대해 잘 모르고, 이스라엘 작가의 글도 처음 읽었다. 주인공들의 이름과 등장하는 지명은 조금 낯설게 느껴지고, 미국이나 한국에서 파병 뉴스가 나올 때나 들었던 지역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어색했지만, 소설가가 소설로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국적을 초월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됐든 난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하고, 무서워하고, 즐거워하고, 놀라고, 마음 아파하고, 감동하는 등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다양한 생각을 하며 이야기를 즐겼다. 작가의 상상력과 솜씨에 감탄했고, 작가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또 관심 있게 찾아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