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신과 영웅들 - 레전드 오브 레전드
댄 그린 지음, 데이비드 리틀턴 그림, 고정아 옮김 / 제제의숲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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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 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이 많다는 이유로 조금 쉽게 봤는데 예상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것도 꽤 방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참신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보면서 꽤 많이 웃었고 한가한 날에는 엄마를 붙잡고 들어보라고 하면서 소리 내 책을 줄줄 읽기도 했다. 그만큼 혼자 읽기에도, 누군가에게 읽어주기에도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신화와 영웅이라고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기 쉬운데 그 밖에도 전 세계에는 정말 셀 수 없는 신과 영웅들이 많다는 걸 새삼 알았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친숙한 신과 영웅들, 유럽의 신과 종교와 기사들의 이야기, 아프리카 설화와 동물 우화들, 아메리카의 수많은 민족들과 문명들이 남긴 다양한 신화들, 우리나라가 속해있고 가장 넓은 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와 수많은 섬을 포함하고 있는 오세아니아의 신화까지 제목대로 정말 전 '세계의 신과 영웅들' 의 이야기가 골고루 이 책에 담겼다.


그리스 로마신화와 아시아의 신화는 나름대로 친숙했지만,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신화들은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들이 정말 많았다. 이야기를 가지고 온 거미 아난시와 노래를 잘하고 싶었던 아르마딜로, 사람을 괴롭히는 요괴 사시 페레레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셋 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고 특히나 이야기의 시작에 관한 설화인 거미 이야기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지루한 일상을 보내는 인간들에게 도란도란 나눌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신에게 찾아가는 현명한 거미 아난시 덕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만들어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잘 모르는 이야기가 제법 많아서 책의 내용만으로도 흥미로웠는데, 이 책이 더 재미있는 이유는 독특한 이야기 전달 방식과 유쾌하고 개성 있는 삽화들의 몫도 컸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위인전이나 인문학 책들의 설명 조의 글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을 때 굉장히 자연스러운 구어체의 서술을 기본으로 하고, 가끔은 등장인물들 간의 편지 혹은 인터뷰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길고 복잡한 설명은 단순하게 줄이고, 가끔은 과장된 표현이나 우스운 장면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재구성된 이야기들은 전해지는 신화의 핵심 내용과 인물들의 특징은 놓치지 않되 그림과 어우러지는 약간은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를 꾸준히 유지해 간다. 그림들 역시 본문의 장면들을 상상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역할과 웃음 포인트 양쪽 모두를 맡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한결같은 그림체의 미남미녀들에 모습(예를 들어 에로스와 푸시케)에도 웃음이 났고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의 색다른 버전(예를 들어 웨딩드레스를 입은 토르)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었다. 단단한 양장 표지를 열면 처음으로 보이는 속지에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다양하게 모여있는데, 아이들이 책의 독자라면 책을 다 읽은 후 그 캐릭터가 누구인지 맞춰보는 게임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제목만 본문의 글과 구분될 뿐 각각의 이야기가 어느 대륙, 어느 나라의 신화인지는 본문 내에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지는 않다. 이야기 속의 설명이나 힌트로 대략적으로는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더러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의 장소적 출처가 궁금하다면 본문 맨 마지막에 '세계의 신화와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따로 구성된 파트에 각 대륙별로 그 이야기가 속한 지역이 지도와 함께 표기되어 있어 확실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각 지역의 특징과 전해오는 이야기들의 특성도 간략하게 보충 설명을 해주는데, 삽화만 포함되어 있는 이야기 본문들과 달리 지도와 실물 유적, 문화 자료들의 사진을 함께 실어놓아서 더 유익하고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책의 마지막까지 독자들이 흥미를 놓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아이들이 혼자 읽기에(특히 한꺼번에 완독을 하기엔) 꽤 분량이 많은 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구분되어 있어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좀 더 꼼꼼하게 확인해본 결과 인터넷 서점에서도 대부분 어린이 도서에 분류가 되어있지만, 책 내에서 몇 세 이상이라는 권장 연령 등의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아이들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독자를 타깃으로 한 책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워낙 신화나 우화, 옛날이야기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도 꽤 쉽고 재미있을 책이라고 자신 있게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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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프리랜서 번역가 일기 - 베테랑 산업 번역가에게 1:1 맞춤 코칭 받기
김민주.박현아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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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면 '베테랑 산업 번역가에게 1:1 맞춤 코칭 받기'라는 부제 중 '산업'에 별표가 그려져있다. 산업 번역가란 뭘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도 책 속의 주인공 미영처럼, 번역가하면 소설이나 영화 등의 분야에서 번역하는 사람들만을 떠올렸다. 산업 번역가란 해외에서 수입된 다양한 상품들의 제품명이나 사용설명서 등 제품 관련 모든 번역을 맡아 하는 사람들을 말했다. 전 세계에서 들어온 상품들이 일상생활 어디에나 있어서 그 제품에 붙은 한글들을 누군가 번역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고 싶지만 번역에 관련된 전공이 아니고 얼마 전까지 평범한 회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전부인 '미영'이란 인물이, 5년 차 산업 번역가로 번역에 대한 강의와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는 '하린'이라는 멘토를 만나 번역가가 되는 과정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가감 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충실한 피드백을 받아낸다. 이 멘티와 멘토의 상담은 메일로만 이루어지는데,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을 첨부해 보낼 때 그 이력서가 통째로 책 속에 들어있어서 두 사람의 메일 내용을 읽을 때면 정말 책이 아니라 누군가가 보내는 메일을 보는 느낌이라 재미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보에서, 번역회사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림 끝에 샘플 테스트를 보고, 일을 얻어 실제 번역으로 돈을 벌고, 이런 식으로 단계 단계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신기하고 실제로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어떤 고민과 궁금증들이 생기는지 알게 되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만으로도 궁금증이 생겼을 때 바로바로 해결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하린처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하는 넓은 마음으로 진지한 조언과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특히나 마음가짐과 멘탈 관리 같은 부분에서는, 그 대답이 듣고 보면 잠시 잊었을 뿐 스스로 잘 알고 있던 사실이나 흔한 말이라는 걸 깨달아도, 내 앞이 막막하고 생각이 복잡해질 때 딱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으니 제때에 적절한 조언을 던져주는 멘토가 얼마나 고마운가. 훌륭한 멘토 하린만큼, 미영 역시 궁금증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답장 받은 내용을 토대로 무엇이든 바로바로 실행해버리는 점이 대단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현실이 아니기에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멘티-멘토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서로에게 영향받고 성장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었다. 에필로그를 보면 하린의 이야기에서 미영의 태도에 대한 언급을 하며 프리랜서 번역가가 갖춰야 할 몇 가지 소양(좋은 습관) 등을 자연스레 알게 해주는 것도 센스 있다고 느꼈다.




​​이 책은 내용면에서도 번역가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도움이 되는 책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의 내용을 담는 구성이 굉장히 독특해서 인상적이었다. 실제 현실을 배경으로 가짜 인물들을 내세워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번역가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 주는데 가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점이 소설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이트나 번역에 쓰이는 프로그램 등을 언급하기도 하고 취업관련 현실들이 등장하면서 배경만은 온전한 현실의 이야기인데다 미영의 상황을 중계하거나 하린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상담이 이루어져 에세이스러운 면도 있었다.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막연한 로망과 실제 번역가의 영업 및 번역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는데, 실제 번역가 지망생들에겐 리얼리티 있는 자기개발서로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이었다. 번역에 관한 책을 이렇게 재밌게 출간할 수 있다니, 다음엔 시리즈로 베테랑 '문학'번역가, '영화'번역가에게 받는 맞춤 코칭에 대한 책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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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습니다 I LOVE 그림책
제프 뉴먼 지음, 래리 데이 그림 / 보물창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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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집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던 아이가 비를 맞고 거리를 헤매는 강아지를 발견하곤 집으로 데리고 온다. 유기견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점은 주인공 역시 키우던 개를 잃어버려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기견 하면 보통 버려진 개들을 떠올렸는데, 생각해보니 부주의 혹은 우연한 사고로 주인과 떨어져 길을 헤매고 있는 개들 역시 유기견이었다. 비 오는 날 쫄딱 젖은 개를 보고 어쩌면 자신이 키우던 개 '도담이' 역시 어디선가 비를 맞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아이는 작은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글 없는 그림책이 좋다. 전 세계의 아이들이 그림이라는 공통된 언어로 별다른 번역을 거치지 않은 똑같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고(물론 제목과 배경에 등장하는 글자들이 번역되긴 하지만), 그림만으로 스토리를 끌어가고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는 점도, 등장인물의 말이나 생각을 상상하는데 글이 있는 그림책보다 한층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그림책인 만큼 사이즈도 큼직해서 그림의 세세한 부분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사실 그림책만큼 책 속의 삽화에 집중하게 되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책의 경우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 속 글과 아이가 아직 가지고 있던 강아지 용품(밥그릇 등)에 새겨진 '도담이'라는 강아지의 이름, 그리고 애완동물 용품점과 유기견 센터 등의 건물 간판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가게나 센터의 간판은 그렇다 치고 도담이나 초롱이 등의 강아지 이름이 원작에선 어떤 이름일지 괜히 궁금했다. 아이의 머리색이 검은색이고 배경이 생략된 그림도 제법 있기에 생활환경 자체가 아주 외국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니라 위화감은 없었지만, 강아지 이름에 외국 이름을 붙이는 것도 흔한 일이라 아주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면 원작 그대로의 이름을 살리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구성에서 몇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하드커버를 열면 바로 보이는 속지부터 본문이 시작되고 마찬가지로 뒤표지의 속지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점과, 보통의 책에는 시작이나 마지막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판권기(그 책의 서지사항을 기록해둔 페이지)가 본문이 시작된 후 몇 페이지 뒤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본문의 시작과 끝점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느낌을 주지만 본격적인 본문이 시작되어도 글이 없는 건 마찬가지기에 이어지는 느낌이 자연스러웠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장은 주인공 소녀의 또 다른 만남과 시작을 시사해 주기에 희망적인 인상을 남겨주었다. 판권기가 들어간 페이지 역시 자연스레 주어진 그림의 빈 공간을 이용한 느낌이었는데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본문의 구성을 독특하지만 자연스럽게 잘 이용한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특징은 강아지와 주인공 소녀만을 주목하고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어린아이가 혼자 살고 있을 리 없고, 강아지를 잃어버렸을 때 함께 전단지를 만들고 아이를 도닥여주었으며 유기견 초롱이를 집으로 데려온 날도 조용히 타이르거나 안쓰러운 시선으로 함께 밥을 챙겨주었을 가족들이 있었으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집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소녀와 강아지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아이와 강아지의 만남, 시간이 흐르며 쌓이는 애정, 헤어짐을 겪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되고 쉽게 감정이입하게 된다. 자신이 데려온 강아지 초롱이를 찾는 전단지를 발견한 소녀의 놀라움, 주인에게 강아지를 데려다주는 날 문을 두드리기 전 망설임, 본래 주인을 보고 신난 강아지를 보며 느끼는 섭섭함을 그리 복잡하지 않은 그림만으로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부분적으로 채색된 그림은 아주 세밀하지도 너무 단순화되지도 않았지만 섬세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아이들이 읽는다면 유기견에 대한 이야기, 어떤 존재를 만나고 헤어지는 이유와 그 감정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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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 댄서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민 옮김 / 살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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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모예스의 소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알게 해준 책. 68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에 이걸 언제 다 읽나 살짝 걱정은 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오히려 그 긴 이야기 내내 얼마나 많은 감정을 소모할지를 걱정하는 게 옳았다. 너태샤와 맥이 여러 가지 일로 부딪히거나, 할아버지가 쓰러진 후 사라의 처지가 나빠질 때마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을 넘어서면 그보다 더한 위기가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인물들 간의 갈등이 조율되고 희망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장면 역시 '이대로만 행복해지면 좋겠다' 싶은 마음으로 보고 있으면 그다음에는 더한 기쁨과 더 커다란 희망이 등장하곤 하니 행복과 위기 사이의 한도가 어디까지 일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강도가 점점 커지는 위기와 행복이 번갈아 오거나 동시에 진행되곤 해서 그 낙차에 휘둘리는 게 정말 즐겁기도 했지만 다 읽고 난 후의 피로감이 의의로 상당했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껏 휘둘릴 작정으로 단번에 읽어버리길 추천하겠다.    

소녀와 말을 앞세우고 있지만, 이 책은 부모와 아이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매컬리 부부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 중 너태샤의 반복된 유산이 언급되고, 너태샤의 새로운 연인 코너와의 관계에서도 코너의 두 아이가 등장하며 "너태샤, 당신은 아직 자식이라는 존재를 잘 몰라" 라는 코너의 대사가 나오고, 부모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을 변호하는 너태샤의 업무, 아이들에게 휘둘리는 너태샤의 언니 이야기, 사라에게 좋은 보호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너태샤와 맥의 다양한 시도,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찾아온 선물 같은 아이 등등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야기되는 경우는 몇 번 없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성장 도중의 아이들의 미숙함과 그 미숙함을 감당하고 보살펴줘야 할 어른들의 의무, 그 피로감과 특별함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말과 아이들이 겹쳐 보일 때가 꽤 있었다. 기본적으로 돌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부분이 그랬고, 말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와 말을 돌보거나 훈련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들(예를 들어 앙리 할아버지가 사라에게 가르쳐주는 표현이나, 각 장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 작은 글씨로 쓰인 크세노폰의 『기마술』의 내용들)이 아이들을 키우는 데 필요하고 주의해야 할 점들과 그리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동물에 비해 말들은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천성적으로 커피나 걱정이 많고 성질도 까다로운 단점이 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주느냐에 따라 정직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은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 55p)

최대한 많은 장면과 소음에 노출시켜 친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말이 그런 광경과 소리에 겁먹을 때마다 화를 내거나 자극하지 말고 잘 달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크세노폰 <기마술> 

(본문 중 259p)

"루시 같은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해줄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지 않아요. 선생님이나 부모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컬리 변호사님, 아이들은 대개 아무도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에 얘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 중 471p)


부모와 아이의 관계, 사람과 말의 관계, 혹은 그저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의 신뢰관계를 쌓는 과정은 비슷하다. 서로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며 온전히 상대방을 믿을 수 있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믿고 자신의 문제나 비밀을 전부 털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에선 아이들이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란 착각에 빠지거나, 타인에게 말했을 때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거란 불신감에 의지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아이들만이 가진 모습일까. 많은 어른들 역시 자신의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려 들고 타인에게 쉽사리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다만 조금 더 살아온 만큼의 경험과 지식과 경제력이 쌓여서 아이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정한 어른들은 그 약간의 차이로 아이들을 도우려 한다. 책을 읽고 나서 문득 나는 자라면서 가족 혹은 누군가에게 나의 문제를 온전히 털어놓고  믿고 기댄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제법 나이를 먹은 지금 내게 모든 문제를 말해주며 온전히 자신을 기대어온 사람이 있었는가도.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대답이 "있었다"라면 있었다면 그 누군가는 아마도 가족이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사라가 너태샤와 맥에게 쉽사리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무모한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이 안타까웠고, 할아버지의 병실을 사라와 부의 사진으로 가득 채워준 맥의 상냥함이 좋았으며, 말투가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모습도 나다움이란 걸 깨닫고 사라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도움을 받으라 말을 건네는 너태샤의 당당함이 멋졌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일들을 겪은 후에야 너태샤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는 사라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이 책은 말과 기수가 한 몸이 되어 완벽하고 멋진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말을 훈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나 사람 간 관계에 있어서 서로에게 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

"크로노폰은 더 나은 것을 추구할 뿐이야. 그가 요구하는 것은 최고의 보살핌과 존중, 일관성, 공정함, 다정함 같은 것들이지. 사랑해 주기만 하면 말들이 더 행복할까? 그렇진 않아."

(본문 중 547p)

"저도 늘 더 나은 동작을 하기 위해 애쓰는 거예요. 말과 나의 완벽한 소통이나 교감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요. 고삐를 잡는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압력의 정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요 말의 기분이나 제 몸의 상태, 땅바닥의 조건에 따라서도 다르고요. 기술적인 문제가 전부가 아니거든요. 말과 나, 두 마음과 두 심장이...... 균형을 찾는 과정이기도 해요."

(본문 중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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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툰 위로가 너에게 닿기를
선미화 지음 / 시그마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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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한결같은 말투를 유지하며 친근하게 짤막한 이야기를 건네고, 포근한 그림으로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책. 이런 종류의 책들이 대개 그렇듯 그냥 편안하게 읽기에 무난하고 힘들 때 읽으면 마음에 와닿는 글 한둘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책이었다. 사실 힐링 에세이류의 책을 그리 많이 보지 않는데 이 책은 표지의 그림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하나의 글에 하나의 그림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수의 그림들이 들어있는데 동화책 속 삽화처럼 약간은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들, 수채화 느낌이 물씬 나는 풍경 그림들, 어딘가 문구류나 장식품 등에 그려있을법한 일러스트들처럼 각각의 그림들이 비슷한 듯 다양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그림에 대한 인상은 책을 읽고 난 후에도 꽤 깊게 남았다. 꽃과 동물들도 주요 소재로 그려져 있는데 동식물 특유의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는 빽빽하지 않은 글의 배치와도 제법 잘 어울렸다.

반면 글이 주는 인상은 그리 진하지 않다는 게 사실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여행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빼면 구체적인 경험이나 특별한 서사를 담은 이야기는 없기에 소설이나 하나의 주제를 쫓는 기타 장르의 글처럼 흠뻑 빠져서 읽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저 힘을 빼고 하나 둘 읽다 보면 하나같이 틀린 말은 없어서 '그렇지, 나도 이런 생각한 적 있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된다. 본문은 내내 반말로 진행되는데 담담하게 조금은 딱딱하게 생각을 풀어놓기보다는, 보다 친숙하게 또래의 사람에게 말을 거는 느낌으로 적어보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사실 나에게는 조금 낯설었고 독자의 연령대에 따라서는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이나 사랑의 의미를 일상의 한 부분에서 연결 지어 쓴 글들은 누구나가 하는 생각과 비슷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생각들을 말로 내뱉거나 글로 써보는 일은 드물기에 문어체로 쓰인 이 글이 더 낯설고 어색한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본문의 글에서 한두 줄을 떼어와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페이지가 좋았다. 막상 글 전체를 읽어보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한 줄과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었지만, 그 페이지만 똑 떼어다 엽서처럼 간직하고 싶기도 했다. 수채화 느낌의 그림들이 특히 취향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비중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살짝 아쉬웠다. 도서관에 간다면 저자의 책들을 들춰보고 그림들을 훑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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