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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평점 :
특별한 순서없이, 그리고 자유롭게, 물 흐르듯 막힘없이 써내려 간 듯한 글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주제들이 '삶'이라는 콘텍스트를 이루며 "단 한번뿐인 우리의 삶, 어떻게 사용할까" 로 모여 귀결된다.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
의술의 발전 속도와 범위를 감안한대 해도 내 생은 아마 반환점을 돌았을 것인데 여전히 내 앞에는 1968년에 받은 일회용 인생이 그대로 남아있다.
작가는 인생에 대한 철학과 소회를 담담히 그리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 가족, 타인과의 관계맺기, 그리고 작가의 삶의 일부 또는 전부가 된 책, 영화, 커피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빈소에 이르러서야 알게된 비밀 이야기를 꺼내며 글을 시작한다.
"저희 어머니, 결혼전에 무슨 일 하셨어요?"
"너 몰라?"
"너네 엄마...."
"...이었잖아"
그날의 빈소는 마치 ..소설의 반전과도 같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엄마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별로 알고 있는게 없을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 영화감독까지 꿈꿨던 작가라서인가.. 가끔 영화이야기를 하거나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영화에 대한 조예도 깊어보인다.
또한 작가라는 사람은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고, 그래서 세상 어떤 충격적인 상황에 부닥쳐도 "아 이건 훗날 글로 쓰여지겠구나" "혹은 영화장면이 되겠는데?"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나 보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어린시절, 우리모두 미술시간에 갓 꺼낸 찰흙같았던 말랑말랑한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그때 찍힌 지문이나 조각도 자국같은건 평생 그 흔적이 잘 지워지지 않는것 같다.
우리모두 그랬듯 어린아이라도 적대와 환대를 구분할수 있다.
처음엔 잠시 멈칫하기도 하지만 금세 상대의 의도를 알애챈다.
이건 어쩌면 거의 본능적으로 주어진 유전형질 아닐까?
수렵, 채집시대부터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을테니까..
"영하야 괜찮겠니? 너무 어렵지 않겠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작가는 다시 '엄마'로 돌아간다.
엄마는 큰 수술과 입원을 여러번 겪었다.
전쟁과 전후의 혼란을 겪은 피란민 세대답게 엄마는 시스템이나 절차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언제나 '뒷문'과 '야로'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나는 '아는의사'가 없었다. 그것도 엄마에게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땐 "아는 사람"의 힘이 세상의 질서를 지배했다.
우리가 그 "아는 사람"이 되지 못했기에 더욱 "아는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어렸을 땐 꼭 어른들이 집안에 "판사 검사 의사 하나쯤 있어야 된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고들 했다.
이제 아버지 이야기를, 조금은 조심스럽게 꺼낸다.
아들을 글씨 잘 쓰는 회계사로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
아마 지금처럼 컴퓨터도, 워드도 없고 뭐든 글로 써야 했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는 글을 잘써야 출세한다고 믿었을 것이고, 살아오시는 동안 "돈은 회계사가 잘벌더라"라는 믿음, 혹은 맹신이 생기지 않았을까..
살아생전 아버지가 바란것과 내가 바란것은 언제나 달랐고, 우리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졌다.
아버지에 대한 실망,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느꼈던 실망과 아쉬움에 대해 작가는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니 무시한다는 뜻은 아닌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것 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고 한다.
한편, 작가는
로스터가 커피를 우리는 시간을 충분히 들이는것을 보고 사람의 참된 내면을 들여다 보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커피는 처음에 뜨거운 물과 만났을 때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내보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원두가 가지고 있는 나쁜 성질이 우러나는데, 그렇기 때문에 삼십 붐 이상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업장에서는 잘 숙련된 바리스타가 원두의 가장 좋은 성질만 우려내려 노력할 테지만
그래도 로스터들은 원두가 가진 모든 면, 특히 최악의 면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물의 참된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그리스비극을 만들었다.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 상황이 좋을 때,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다.
상황이 나쁠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문제다.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려면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첫인상은 전부가 아니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1등이 아니라 2등을 해야 돼요"
"왜요?" 1등이 제일 많이 벌잖아요? 영화 같은데 보면..
"그거야 영화니까 그런거고, 1등 크게 한번 하는 것 보다 꾸준히 2등을 하는게 최선이에요. 2등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개평 달라고 보채는 사람도 없고...
1등만을 고집하는 세상도 문제지만 어쨌든 1등은 존재하고, 또 그 1등은 늘 위험에 노출되고 질시의 타겟이 되기 쉽다.
조금 덜 벌어도 남의 눈에 안띄는 2등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말마따나 1등이든 2등이든 그저 살아남으면 되는 세상이라서일까..
나는 책도 수 십 권을 두서 없이 같이 읽는다. 이 책을 읽다가 저 책을, 저 책을 읽다가 또 다른 책을, 그래서 한 권의 책을 다 읽는데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어쨌든 오랜 세월이 지나면 다 읽게 된다. 좀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책을 읽는 방법도 저자와 책의 관계도 독특하다.
롤랑바르트는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저자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무한히 재 생산, 재 창조 될 대상이다.
텍스트에서 저자는 명목 상의 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에서 오독이란 무의미한 말이다 라고 설파한 바 있다.
어쩌면 읽고 쓰는데 엄청난 내공이 쌓인 작가라 가능한 일일지도..
감옥에 갇혀 책만 읽을래, 글만 쓸래 선택해..라는 질문에는
주저없이 책을 택할 것이라는 작가
작가는 이제 평론가 앤드루 H.밀러는 '우연한 생'에서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의 말을 인용한다.
누구나 수천 개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결국에는 그중 단 한개의 삶만 살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 만약 그 길로 갔더라면/가지 않았더라면'으로 시작하는 상상을 통해 자주 후회에 도달한다.
진화심리학 쪽에서는 인간이 이런 후회를 자꾸 하도록 진화한 이유가 과거의 실수를 반성함으로써 미래에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그런 개체가 더 잘 살아남았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런데도 계속 그 진화의 이유에 부합되지 않게, "반성없이 계속 실수하고 후회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진다.
작가는 삶을 돌아보며 인간의 도덕성은 우리가 통제할수 없는 (칸트는 이런 통제할수 없는 요소들과 도덕적 평가는 무관해야 한다고 말했단다) 일종의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언급한다.
칸트의 '선한의지' 만으로는 "범죄자가 되지 않고 선량하게"사는데 충분치 않으니, 즉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읽다보니, 문득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글로 쓴다고 생각해보니 후회가 너무 많고, 이루지 못한게 너무 많아서
뭔가 "글로 쓰기가 참 그러네.." 이런 생각이...
범죄자가 되지 않은것은 참 다행한 '운'의 덕인데, 그렇다고 또 뭐 크게 자랑할만한 것도 없으니 참.. 그역시 '운'이 작용한 탓도 있을까?
테세우스의 배라는 소제목에선 요가수련을 비롯해서, 작가가 즐기고 오랫동안 해오는 것들에 빗대어 사람의 변화에 대해 논한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 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 평가 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 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변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흔히 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많이 변한다.
노력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도 한다.
끝으로 인생에 단 한번밖에 쓸수 없을것 같은 예감이 드는 책을
세상밖으로 내보내는 소회를 말하는 작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단 한번의 삶이 주어졌다는것뿐
그리고 소로의 단언(*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 월든-)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 단 한번의 삶'을 무시무시활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서바이벌 게임의 세계관이 스크린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은밀히 믿고 있다. 액정화면 밖 진짜 세상은 다르다고,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삶을 통해 "단한번의 삶"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이 책은
때때로 삶의 길에서 지치기도 하고,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읽어보시길 권한다.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 '이탈한 자가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