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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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몸'에서부터 시작하고

나는 저만치 '목소리'로 물러나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으로 '내'이야기의 입을 뗀다. 아버지 얘기는 '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몸이 그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는 다리를 절었단다' 그는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유공자가 된다. 유공자란, 국가가 몸을 뺏아간 대신 주는 증표아닌가. 그래서 아버지는 뭔가 불리한 일이 있을 때,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유공자증을 내밀며 선처를 요구하거나, 혹은 존경을 요구하거나,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정당'한 것으로 혹은 모른척 넘어가 주길 바라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가 그런것을 극복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실패한 인간이 될 확률은 적었겠지만, 그걸 차치하고 나더라도 '내'가 선택한 노선은 암담하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굴절한다. '나'는 아버지의 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젊은 날 몸을 빼앗겨버린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아버지가 중년이 되어 보이는 어정쩡한 우격다짐만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몸'에 대한, 사람이 갖는 형체에 대한 이해가 생략되어 있다. 사람을 이토록 비굴하게 만드는, 이토록 약한 '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몸에 빚어진 상처를, 뚝뚝 떨어지는 유일무이한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다.


너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네가 듣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이야기로


그런 '나'는 이야기를 매우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진짜'에 대한 곡진한 이해 없이 머릿속으로만 시뮬레이션 하는 문답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그럴싸하게 넘어간다. 거의 재주다. 얼핏보면 문장에는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깊은 곳에 있는 내면, 개인적인 굴곡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생략과 생략이 만난 궤변을 만들고, 그 궤변을 기반으로 다시 논리를 얹어 뻗어가는 이야기는 갈 수 없을때까지 가버린다.


'몸'은 사람이 갖는 첫 번째 '것'이다. 이 몸에 대한 '상처'의 반대편에는 어떻게 해도 상처받을 수 없는 '독백'이 있다. 듣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말도 없는 메아리. 때문에 '나'는 단편 소설분량만큼 내 이야기를, 나의 어쩔 수 없었음을 떠들어대지만, 그가 받을 피드백은 아무것도 없다. 이 소설에서 '나'는 오직 목소리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설명은 이렇게 피상적이다. '당시의 나는 젊고 의욕적인 교사였지만 노련하지 못했단다' 당신은 혹시 이런 사람을 아는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거의 '모든' 젊은 교사의 모습아닌가. 자신을 집단의 평균치에 앉혀 '안정'혹은 '인정'을 획득하고야 마는 장면이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사랑. 섹스 아니라 사랑


이렇게 목소리 뿐인 '내'가 할 수 있는게 뭐였겠니. 부른 배를 하고 교무실에 나타난 연주가 무릎을 꿇으며 '사랑'했다고 비는, 그녀 몸을 통째로 들고와서 바치는 전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속으로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되뇌이는 것 뿐이다. 하. 나의 사랑으로 연주의 배가 부르고, 부른 배 앞에서 나는 '존나 무서웠다' 이것이 '몸'없이 객체화된 인간이 오늘날 하고 다니는 사랑의 풍경이다. '내'가 믿는대로의 '내'가 사람들의 '평균'처럼 되는 것. 생각속에서 진정성을 얻는 것. 만질 수 없는 곳에서 말로서 안전해 지는 것. 그런 '내'가 진짜로 할 수 있는게 뭐였을까? 고귀해서 사랑이라는 말만으로 배가 불러오는 사랑? '나'는 사랑으로 섹스를 지우더니 '책임'까지 지워버린다. 


'뻣뻣해진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이것은 그런 내가 '너'의 집에 앞에가서 오랫동안 서 있으면서 겨우 얻게 된 '고통'이다. '나'는 거의 첫 번째로 내 몸이 겪는 고통에 대해 서술한다. 발목이 욱신거린다거나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역시 보편적인 고통이지만, 내게도 있는 고유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보통의 보통이 목소리를 꿰하며 안전한 곳에 있던 내가 드디어 나 하나의 고통으로만 이야기 될 수 있는 몸에 대해 쓰게 된 것이다. 고통의 연대는 그런 고유한 개인의 이야기의 고백과 대답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해없이 피상적으로 몰려다니는 무리를 수도 없이 본다. 웹상에서의 우리의 얼굴이 아닌가.


서사를 생략하고 이해를 궤변으로 수렴하는 중에 쌓아 올리는 논리는 어디서부터 부숴야 할까. 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말들이 너무나 많다. '○녀', '충'등의 말들. 세상에 없던 신종 인류를 만들고 코너로 몰아가는 이들의 얼굴은 무엇인가. 그들의 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두고두고' 건네지 못하는 말은 이 소설의 '내'가 하지 못하는 사과처럼 숨겨져 있는데, 진짜를 말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되려 분노가 된다. (이 맥락마저도 이해하는 이가 바로 약자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되버리는 끝간데. 이 소설이 비추는 것은 무엇일까.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파'하는' 것이다. 발목이 욱신댔고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한 개인의 '몸'이 작동하지 않은체 저 사람의 밑바닥을 가보는 용기 없이, 내가 닥친 상황만 크게 떠들어 대는 통에 '목소리'가 몸보다 두 배, 세 배로 살아 있는 방식을 입만 살아서, 비죽이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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