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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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하면 아버지
술은 예전 아버지들이 마셨다. 물론 아직도 마시고 계시고. 바깥의 일이 힘들어서 집에 와 술을 드신다. 1. 골병 드시는 아버지. 2. 분노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집안의 것을 부시고... 비극으로. 3. 아침이 밝으면 잘못했다고 빌고는 아버지, 4. 혹은 뻔뻔하게 집을 다시 나서는 아버지. 5.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는 아버지.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술은 왜 아버지만 드시나. 아버지만 힘들었나. 다른 이들은 아버지의 힘듦으로 과연 살만했나. 아니 아니 아니,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 뿐이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라는 개인이 마시는 술
이곳은 2010년도 이미 중반, <봄밤>에서 요양원을 며칠씩 탈주해 술을 마시는 영경의 알콜 중독 증상은 자해에 가깝다. 자해는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지만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게 되면 주위 사람이 감지 할 수 있고 곧 문제를 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영경에게는 그 문제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그러니까 영경 자신 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그마저도 사라지고 있다)... 그녀는 국어교사였다. 남편과 이혼하고 뒤이어 양육권을 빼앗겼다. 그리고 이 사이 한 가지 사건이 더 있어, 큰 언니 영선이 '차라리 잘된 일이니 내버려두라'고 말했고 둘째 언니 영미가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던 일이다. 영경이 사라진 아이에 대해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하고 소송을 준비하려고 했던 때였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비극으로 포장되는 예정된 사건이 아니라 
단 두 줄로 서술된 사건에서 영경의 절망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를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서 두 배의 절망이다. 함께 나고 자랐을 자매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건넸을 이야기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무감각하게 영경의 사태를 지나가는 일이야 말로 언제고 당신의 인생에 나타날 '비극'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큰 언니는 이 싸움에서 영경이 곧 깨질 계란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고 난 후에야 말할 수 있는 일이며, 인간의 일을 하늘에 맡기는 둘째 언니의 말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 언니들의 말이 또한 뜻하는 것은 영경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응원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란 거다. 이렇게 두 개의 문제가 있다. 가부장제의 폭압과, 그 압력에 대응할 생각도 못하고 수그러져버리고 마는 언니들의 모습. 언니들의 발언은 이혼과 양육권으로 말미암은 발화가 아니라 그들이 삶에 대해 갖는, 그것도 영경보다 더 오랜 시간 축적해 놓은 '태도'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영경의 삶에서 틀렸다)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어쩔 수 없으며, 미연에 방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언니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지만, 영경은 이렇게 비롯되는 고통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형편없이 기억할게
그런 영경이 수환을 만난다. 그때 만남을 일러 영경은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기억한다. 이런 놀람은 다시 말해 영경에서 얼마나 행운이 형편없었던가, 를 생각해볼 수 있다. 수환은 의료보험 발급도 되지 않는 취약계층이다. 15년간 쇠를 만지고 한때 돈도 많이 벌었었지만 위장 결혼등으로 모두 날리고 남은 것은 류마티즘으로 손쓸 수 없는 몸과 제대로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가난뿐이다. 이들은 십 몇년을 함께 살다가 요양원에 함께 입원한다. 독한 약으로도 병세를 멈출 수 없는 수환과 겹쳐지는 나날이 병세를 악화 시키는 영경. 죽음으로 병과 가난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들이 선택한 길이라면 길인데, 삶에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1보다 큰지 작은지'를 병원 침대에서 가늠해 볼 뿐이다. 이 지경에, 영경이 발음도 어려운 '도스토예프스키'의 구절을 읽어주며 대화를 하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고 그나마 '생각'을 좀 하는 것 뿐이다. 수환은 그런 영경의 말을 듣고,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하다'고 이야기한다. 영경을 존중하며 영경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응원한다. 그게 알콜중독을 더 심화시키는 일이었음에도 말이다. 사랑을 하지만 이것이 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떻게 이 일들이 '어쩔 수' 없었다는 건가

권여선의 소설에는 지적-계급이 나뉘는 이들이 만나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장면이 자주 보인다. 특히, 주로 소위 '엘리트 여성'이 주인공으로, 그녀를 둘러싸고 엘리트가 아닌 여성 혹은 남성과 만났을 경우 어떤 충돌이 있는지를,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적는다. 배운 그녀들이 술에 몹시 취하는 삶을 보여준다. 그녀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마시게 되었는가. '생의 비극을 견디는 주정뱅이들에게 건네는 쓸쓸한 인사'라는 말은 더 없이 매혹적인 카피이지만 '비극'은 비극적인 일을 당하는 이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극은 대체로 최선을 다함, 어떻게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치기 쉬운 '계층'의 이들에 한한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고통'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다. 영경의 비극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인가, 수환의 비극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나. 몰리고서야 만난 이들의 만남을 비극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벌어진 상처는 얼마든지 아름답게 쓸 수 있다. 아파하고 우는 일을 아름답게 쓰는 일도 쉽다. 그 상처, 왜 벌어졌는지를 이야기 해야 한다. 


'꼬추의 발광'만큼 우스운 '초추의 양광'

사랑을 해도 그것이 삶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봄밤>. (엘리트)여성은 스스로 해방되지 못하며 다른 이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봄밤>에서 폭력적인 가부장제의 억압에 영경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일 수 있고, 자신의 앎 따위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불법체류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건만을 축소해 놓고 보았을 때 '무지'(불법체류자의 주거구역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관주)를 막을 수 없어 벌어진 일에 여전히 '무지'로 대응할 수 밖에 없는(약자를 미워하는 약자로 남는 관희) 까닭일 수 있다<카메라>. 최고조는 <층>에서 나타난다. 박사과정을 마친 여자는 '초추의 양광'니 같은 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것을 들은 인태초밥의 남자는 '꼬추의 발광'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처럼 이들은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된 것 같다. 그는 그저 '모든 게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가 무릅쓰고 '초추의 양광'이라는 말이 평소 쓰이는 말인가요' 내지는 '제게는 그저 꼬추의 발광으로 들립니다'라고 가름했다면 여자는 픽하고 웃거나, 같잖은 한자어의 조탁을 부끄럽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연은 지들만 웃긴 농담의 '배운(남)자들의 세계'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들과의 대화는 한 시도 참을 수 없는데, 조금이나 다른 미래를 생각하게 했던 남자에게, 예연과의 만남으로 작은 미래를 상상하는 남자에게 우습게도 이 하찮은 '꼬추의 발광'이 넘을 수 없는 산이다. 러지 못한 이들의 말로에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라는 여자의 독백뿐이다<층>. 

대화의 가능성
권여선이 주로 그리는 여성 화자들이 소통 가능한 사람으로 꼽은 남성 화자들은 이혼하고, 돈 없고, 의료보험증도 없는 취약계층이거나<봄밤>, 바보 누나가 있고, 그런 누나가 너무 싫고, 헬스장과 일식집의 일을 병행하는 이<층>거나 눈이 다 멀어가 보르헤스 비슷하게 생각을 수놓아가는 중년의 소설가거나<역광>, 조교가 된 것(이 작은 과정을)무슨 성공의 교두보인 것처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카메라>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류 남성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라는 것. 때문에 역으로 억압된 가치에서 보다 자유롭고, 여성 화자들과 소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적인 지는 소설에서 점칠 수 없지만)

이 소설은 2010년도 중반의 것이다. 이 책 이전 실제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여성은 자신을 구속하는 삶을 탈출하기 위해 앎을 구축해왔다. 소설의 여성들을 삶을 보았을 때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 없음을 확인하거나, 대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경우 이미 삶의 끝간데 와 있는 수순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보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성화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들을 소설에서 굳이 크게 그리는 대신 소설 바깥을 보면 선명해질 일이기 때문에. 다시 소설로 들어오면 그를 피해 달아났을, 달아나 다른 가능성을 찾는 여성화자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안녕! 주정뱅이!
여기서 잠깐 그려지는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남성들의 모습이 궁금한가. '몇 번을 말해, 김선생? 내가 지금 상태가 심히 안 좋다고.' <층>. 자신의 상태가 안좋으면 옆에서 계속 술을 마셔줘야 하는 것인가. 술자리를 피해 달아는 여자 선생에게 욕을 지껄이는 것으로 화면은 바뀐다. 이런 사태에 권여선의 일단의 대답은, '커피잔에 술을 따라' 마시고, 이들이 아닌 다른 대화의 가능성을 찾는 여성의 출현이다. 몸에 술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파괴할 방법 외에는 도저히 자유로울 수 없고, 한 밤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김수영의 시 '봄밤'을 읊는 여성의 탄생. 다수의 사람들은(수적으로는 아니나 질적으로) 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나 듣지 않고, 이 소수(수적으로는 아니나 질적으로)의 사람들은 이들은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들어보려고 노력한다. 이 사이에 갇힌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이 주체적으로 술을 마시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면 이 글을 접고 술을 마셔야겠다. 그녀들은 언젠가 술을 적당히 마시게 될 것이다. <안녕 주정뱅이>가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다. 




*<역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는 정확히 그렇게 한 줄 알겠지만 달은 결코 자기 감정을 격조 있게 표현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무력하게 다짐했다.' 역광 151


권여선은 소설에 계급 혹은 여성-남성의 구도를 의도하고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실내화 한 켤레>의 수학 선생의 대사로 보아 '수학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세상 천지에 그냥이 어딨냐 말이야, 그냥이?' 권여선이 천착하려고 했던 것은 좀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비극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을 것같다. 그러나 이런 물음은 예술의 세계에서나 고혹적이다. 작중의 인간을 비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후 사정이 필요한데, 이 사정들은 아무리 짧게 서술되어도 맥락이 여간 현실에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 없다. 이건 작가의 천의무봉할 실력 때문이 아니라, 그저 어디서도 부조를 뜰 수 있는 현실에 만연한 비극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이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인간의 비극에 대해 소설의 의문이 든다면 '고통받는 인간과 고통하는 인간'을 설명한 소설의 말미 신형철의 해설을 보면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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