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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우리의 피로는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보다 나무가 더 많고, 숲 이면에는 이제는 보일일 없는 오래된 제사가 있다. 사람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선정릉은 특별한 날 외에는 사람을 초대하지 않는 죽은 자의 집이다. 신도와 어도가 명령하는 산 이와 죽은 이의 길 다름은, 막연하지만 앞으로의 ‘나’와 두운이 가진 삶-차를 보여준다. 그러나 프랑스어과를 나와 에펠탑이나 빵이나, 파리 8대학 같은 것을 생각했떤 예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떤가. 이것은 두운과 ‘나’ 못지않게 넘을 수 없는 낙차다.
정확하고 묵직한 훅을 날리는 두운, 나무의 이름을 정확하게 읊는 두운, 생각이 있긴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두운. 열거한 범상치 않은 모습은 두운이 스스로 자각할수 없는 그의 가능성인데, 이것은 ‘내’가 알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이는 ‘나’의 가능성을 염두 한다. ‘나’인지 두운인지, 어쨌든 밝혀진 일 없던 ‘무엇’을 발견하고 싶었던 ‘나’의 하루는, 역시 그런 것은 없었다는 귀결로 돌아갈 참이다. 여기, 두운과 헤어지기 전 최대한 숨기고 싶었던 변곡점을 만나는 것을 제외하면.
두운씨. 우리 이제 헤어지네,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120
이 망설임은 오래 곱씹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감정은 '내'가 두운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왔다. ‘나’에게 황당했던 만남은 그러나 무엇보다 두운에게 불쑥 찾아오지 않았나. 두운은 매번 바뀌는 알바와 간신히 하루를 보내야 내일이 겨우 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전날 형의 전화를 받았고, 일의 자조지종을 들었고, 한 번은 고사한 후에야 한두운의 프로필을 받았다. 준비된 하루는, 만남이 익숙해지지 않는 하루와 다르게 헤어질 시간도 안다. 모든 것에서 우위다. 적어도, '나'는 두운의 인생에 하루쯤 끼어들기로 ‘선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당 9만원은 다소 이상한 사내를 맡을 만하다는 정당성을 준다. 그러나 두운에게는, 자신의 하루를 보낼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망설임이 아니다. 말을 하려다 만 것은 '내'가 두운에게 줄 수 있는 상냥함으로 보이지만, 저변을 살피면 이정도면 두운에게 만족스러운 하루를 선사하지 않았나, 하는 자신감 어린 ‘확신’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헤어진다'는 뜻을 두운이 알게 되었을 때 그의 행동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도 아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내 줄 수 있는 최대치가 하루, 도 아니고 겨우 8시간이라는 사실은 정말 두운의 장애만으로 해석해야 할까. 두운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더라면, 동가식서가숙 하는 모습으로 두운의 하루는 이손 저손 빌리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그런 것은 이미 없으며, 보살핌은 어머니도 아니고 그를 맡고 있는 이모에게서도 부재함을 알릴뿐이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로 '피로'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이 서로 가능한 타인을 만날 일은 요원한 것 같다. 두운에 지친 '나'는 어디에서 보살핌을 구할 수 있는 걸까.
장애가 있는 남자와, 그를 하루치 돌보는 알바를 뛰는 남자. 장애가 겨우 아닌 사람이 장애가 있는 사람을 돌본다. 그리고는 최선이 극에 달해 나가 떨어진다.
<선릉 산책>은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는 여기 거리의 ‘신도’와 ‘어도’를, 자신감 어린 ‘확신’에 가려 9-6시에만 감지하면 되겠지 싶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선릉을 소개하고, 거기엔 조금 이상한 바람이 불고, 호되게 한두운이 한두운을 때리는 장면이 나오고 ‘나’는 홀린 것 같은 오늘을 광대를 쳐보는 것으로 실재임을 확인하는 '소설 같은' 마무리에 혹해서 '그렇게 되었군', 하고 안도하고 지나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