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내 기억에 '할머니'같은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미지도 없고, 그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나는 쪼글쪼글한 손을 만져본 일이 거의 없다. 기억이 생긴 이후 안겨본 일이 없으며, 냄새도 알지 못한다. 힘이 없으나 다 받아주면서 거들어 주고 웃어만 주는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고, 평생에 친해본 일이 없다.


어려서 예민하고 눈치가 빠르고 무엇보다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첫째였고 동네에 애들이 별로 없어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것을 말할 줄 알게 될 무렵, 거의 언제나 말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최소한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막 자랐던 것 같다. 그때 이미 동생이 둘이나 있었지만. 모두 내 차지였을 것이고 의기양양했다.


시간이 흘러 엄마와 아빠를 나와 다른 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부모 일에도 적성이 있고 누구나 이 일을 훌륭하게 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러나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면서, 아버지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지만 가족 아니고 친구들끼리 놀러 가는 휴일이 재밌었다면, 그 인생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않나,라고 관조하기까지 스무 해가 걸리지 않았다.




사랑과 미움과 이해의 배합의 끝에 부모님이 계신다. 사랑이 큰 만큼 미움도 컸다. 부모님도 부모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실수가 많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믿지만, 서로 상처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다. 웃기게도 키워진 주제에, 얼마간은 나를 키움으로써 함께 성장하는 구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머리도 가지게 되었다.  


대체로 이 싸움과 투쟁의 날들이-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분들의 가장 좋은 시절이 내 유년에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귀여워하며 즐거워했던 젊었을 적 두 분이 거기 계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건조하고 쌀쌀맞은 대화에서 내가 감사를 되찾는 유일함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사랑은, 이 최전선의 사랑에도 싸움과 미움이 깃든 무엇이었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의 속성이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할머니. 내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 할머니지만 일화가 하나 있다. 한 살 때인가, 몸이 좋지 않았다. 시골에서 갓난애를 처음 보는 젊은 엄마도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할머니가 이러면 낫는다고, 온몸에 마늘 찧은 것을 발라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애길 처음 들었을 때는 입이 벌어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좀 어려웠는데, 내가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몹시 울었을 것이고, 몸이 낫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울고불고하는 어린애의 몸에는 마늘 냄새가 진동하고... 그 민간요법을 해야 했던 열 손가락의 마음은 영영 알 수 없다. 할머니는 1살 때인가 돌아가셨으므로. 엄마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한 마디 덧붙이셨다. 너를 많이 안아주셨어. 동생들은 안겨보지도 못했지. 너는 그래도 안겨봤지.


한참 큰 후에 알게 된 친한 언니는-할머니의 사랑을 무진 받고 자랐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나를 진심으로 가여워해 나는 졸지에 '가여운 유년'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언니는 진심으로, 할머니가 없었다니, 안타깝다며 대놓고 동정했다. 나는 이 혼란스러움이 무엇인지 밝혀보고 싶었지만, 평생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상실의 마음도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항변했지만 그건 '다른 사랑'이라는 거다. 대체 그들이 말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을 받은 이의 마음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좋았다는 얘기는 많았지만 제대로 꺼내보여준 이는 왜 없는가. 아마 말로 하기 어려운 특질이 있었겠지만, 뚜렷한 증거도 똑 부러지는 말도 없이 그저 두루뭉숭한 사랑의 실체를 나는 믿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바야흐로 그토록 궁금해하던 할머니 사랑 보고서가 나왔다. 그것은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 자랑 연대기에서 벗어나, 그들의 사랑을 해석하고 그 사랑이 어떻게 위대한지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써놓은 책이었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이다.




심윤경 작가는 <설이>로 처음 알게 되었다. 세상에 너무 좋은 소설이라서 나는 두 번을 보고 세 번도 보았다. 시간에 대해서 대단한 깍쟁이가 되어버린 내게 한 소설을 두 번 세 번 읽는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 소설이 주는 어린 시절의 고단함과 위로, 괜찮게 자란 것 같은 어른들의 못남과 상처, 그리고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하는 할머니를 만나 어린 시절의 나를 불러내 울고, 어른이 된 마음으로 울고, 만나보지 못한 할머니를 생각하면 울었다. 여기 할머니는 친할머니도 아니고 그냥 아는 할머니인데(설이를 실제로 키운다), 그녀가 주는 웅숭깊은(대개 문화재를 소개할 때 사용한 언어) 사랑 속에 있는 설이를 보는 게 행복했다. 자랄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해 보였던 설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그러니 여느 아이들처럼 눈물 콧물로 자라나는 모습이 눈부셨다.


나는 작가가 어떻게 이런 할머니를 어떻게 찾아내 그렸는지 궁금했고, 실제로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의아했다. 그건 아무래도 소설이니까 가능하지 싶었다. 화도 안 내고, 성질도 없고, 그저 허허실실, 바보 같은 사랑을 가득 주는 사람이 어떻게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소설 속 할머니는 너무나 생생했는데, 모티브가 바로 작가의 실제 할머니였다.


딸의 양육기와 함께 전개가 되는 이 흥미로운 보고서는, 꿀짱아라고 이름 붙인 자신과 똑 닮은 딸을 키우면서 맞닥뜨리는 초보 엄마의  좌절과 절망과 분노를 그리는 한편, 자신에게는 있었으나 딸에게는 없는 할머니의 관대한 사랑을 떠올리고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를 복기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뒤에야 작가는 그 사랑을 깨닫고 펑펑 운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면 족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은 아이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평화로 가득 찬 작은 방을 주셨는데, 그 방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서 내가 힘들 때 들어가 쉴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할머니의 소멸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애틋한 그리움을 남겼을 뿐이지만, 왠지 공익적으로 마음이 아프다. 인류는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시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그분을 상실한 것은 내 마음에 본질적으로 전혀 생채기를 남기지 않았다. 전혀. 거창했던 사랑의 전설치고는 참 조용하게 그분은 나를 떠나가셨다. 하긴 그분은 늘 조용한 분이었으므로 나는 내 애도가 그토록 얄팍한 것에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검은색 얼룩이 있는 하얀 강아지와 놀아준 근처 놀이터의 우레탄 바닥에서 나는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았다. 사랑한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의 원래 모습. 몸을 낮추고, 손으로 바닥을 두드리고, 데굴데굴 구르고,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것. 만지고 부비고 냄새 맡고 즐기는 것. 내가 강아지를 보자마자 자동으로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딸에게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

사랑한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의 원래 모습. 뒤이어 나오는 눈물 나는 설명들.

나는 한 번도 낯가림으로 비난받거나 야단을 맞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낯가림의 순간에 할머니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뿐이었다. 나는 내 낯가림이 잘못된 것이거나 영원히 문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지 않았다. 그것은 생의 초기에 잠시 내 곁을 떠돌다가 유쾌한 농담 같은 자취만을 남기고 열 살이 넘은 어느 날 스르르 사라졌다.

아이의 성정을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일이 양육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해주는 대목. 아주 넉넉한 시간을 살아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확신의 관용.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문제들은 대수롭지 않게 사라졌다.

야단맞지 않고 자책하지 않는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저 잘 먹고 잘 노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큰일이 아니구나. 괜찮구나. 세상은 여전히 좋은 곳이구나.

작가의 필력이 아름다운 부분. "마치 공기에서 따뜻한 손이 솟아나 나를 달래고 어루만진 것처럼 할머니는 등 뒤의 익숙한 촉감과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내가 방을 따로 쓰겠다고 문을 잠가버렸던 사춘기의 그날, 할머니는 몹시 상심한 얼굴이었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막내 손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을 할머니는 비통하게 맞이했다. 섭섭하지만 원래 그런 법이라고, 오랫동안 혼자 마음을 달래셨을 것이다.
직업이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풍부한 언어를 옹호하는 쪽으로 쉽게 기울 수 없었다. 그것이 큰 갈등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가 실천하신 미니멀리즘의 간결한 아름다움과 강력함을 깨달았다. 행복에 인간의 언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간결하고 정확한 언어를 떠올릴수록 나의 풍성하고 다양한 언어는 촌스럽고 불완전하게, 심지어 성가시고 불편하게까지 느껴졌다.

작가를 키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요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편안한 유년, 마음대로 탐구하고 집중할 수 있었던 아주 작은 아이에게 주어진 거대하고도 안심할 수 있던 시간.

"예쁜 사람, 왜 그러나." 그것이 생떼의 최종 단계에서 할머니가 꺼내는 마지막 한탄이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생떼를 부리느라 진땀이 쏙 빠지도록 지쳐서 잠들었을 것이다. 한잠 자고 나면 기분이 맑아지기도 하고, 여전히 뿌루퉁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기절하듯 한잠 자고 일어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눈물이 나는 말이다. "예쁜 사람, 왜 그러나." 별로 어려운 단어도 아닌데 이런 조합의 말은 처음 본다. 어떤 마음이 이런 문장을 가져오게 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왜 저 말을 들으면 내 다음이 다 수그러지고 마음 아픈지.

어린 시절 부렸던 생떼에 대해서 지금껏 나는 아무런 죄책감도, 심지어 가벼운 머쓱함조차 느끼지 않았다. 어쨌거나 최종적으로 나는 예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죄책감과, 가벼운 머쓱함조차 느끼게 하지 않는 마음.

아이는 다 그렇게 자란다고 믿어주는 할머니.

할머니가 나를 야단칠 때 쓴 말도 싱거웠다.
"착한 사람이 왜 그러나."

역시 눈물이 나는 말.

더 어릴 때 진이 빠지도록 잠투정을 한 끝에 들은 말이 "예쁜 사람 왜 그러나"였던 것처럼 사춘기에 이르러 온갖 심술을 다 부리고 듣는 말도 겨우 그거였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부연 설명 없이, 할머니는 엄한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 착한 사람이 왜 그러냐고 묻고 끝이었다. 야단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베푼 넉넉한 관용들은 나의 내면에 매우 선명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었다. 많은 잘못들을 저지른 것에 비해 심하게 야단 맞거나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데, 분명히, 반사회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어떤 방향으로 자라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근본적으로 뼛속까지 무력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TV를 보면서 조촐하게 늙어가는 중이었다. 그분은 한 번도 어떤 능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곤경에 처했다고 두 팔 걷고 나서서 도와주는 일도 없었다. 그저 함께 속상한 얼굴로 워쩌,라고만 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그 말이 상처 난 마음에 반창고가 되어주었다.

어떤 능력도 없는 할머니가 보여준 한 없는 사랑.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마음.




사랑을 하기 전에 보이는, 보여주는 능력은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기본 조건인 것 같다. 여러 가지로 풀이될 수 있는 이 말에 그러나 '사랑의 능력'만큼은 포함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그런 마음이 있다고 사랑을 잘할 줄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까 죄책감과 머쓱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 사랑, 한 없이 커서 뛰어놀게 하는 사랑. 혼내거나 야단치지 않는 사랑.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사랑. 이런 사랑을 어떻게 배웠는지 어떻게 아는가.


나는 가능한 이성적이고 다정하고 친절하고 잘 자란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그런 척은 여간해서 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 아주 친밀해지면, 퇴행을 바라는 마음이 아직도 키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때를 쓰고 심술을 부린다. 싸우고 미움을 주는 것이 마땅히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없는 마음을 받기를 원하는 나. 멀쩡한 사람이라면 받아주지 않는다. 이 나이에는 반드시 고쳐져야 하는 무엇이고, 잘못된 성정이니까.


어떤 행패를 부려도 '예쁜 사람'이 되고, 못난 모습을 보여도 '착한 사람'으로 남게 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할머니는 주셨구나.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랐구나.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무엇을 바라지 않고 예쁘고 착한 사람으로 상대를 남게 하는 마음.


이 책을 그 언니에게도, 엄마에게도, 그리고 아빠에게도 드릴 참이다. 당신들만의 노란 장판, 수더분한 할머니와 말이 없는 고요 속에서 자랐을 유년을 오랜만에 떠올리면 좋겠다. 그 사랑을 내가 드릴 수는 없겠지만, 여기 살뜰한 기록이 살아보지 못한 시간으로 데려가 거기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줄 거라고. 이 책에 누구나 받고 싶은 사랑의 원형과 주고 싶은 사랑의 실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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