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에게 "초자연의 빛"은 그 자체로 탐구대상이 될 수 없다. 탐구할 것은 초자연이 아니라실재하는 것, 바로 이 세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창조된 사물은 본질적으로 매개물"이기 때문이다. 각자 서로에게 닿기 위한 매개물, 또한 신에게닿기 위한 매개물이다. 즉, 비유와 상징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베유에게 세계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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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무섭다고? 아니. 그 반대야. 나타나지않아 무서워. 점점 희미해져서 무서워. 희미해지기만 할 뿐 끝내 사라지지 않아 무서워. 사라졌는데 사라지지 않았다는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않아 더 무서워. 얼마나 그리우면 망상으로 상상으로 만들어내는 걸까. 밤을 꿈으로, 생각을 헛생각으로 맞은편 그 사람의 얼굴 위로 덮여지는 한조각의 그 얼굴. 어떤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는 사람이 있지. 공포가 스며 있다면 그건 뭔가 나타서가 아니라 나타나지 않아서야. 차라리 슬퍼지고싶지. 이렇게 쓸쓸한 것은 너무 괴로우니까.
페르난두 페소아는 말했다.
‘하지만 내 영혼은 덜 보이는 것과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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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으로 먹고 마실 것을 마련한다는, 즉 밥벌이한다는 것까지는 그리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지도모르겠다. 누구나 어떤 수단으로 밥벌이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저 시의 놀라운 점은, 창을휘둘러 마련한 포도주를 마실 때조차 그 창에 기대어 마신다는 마지막 부분이다. 잠시 한잔할 때도 감히 내려놓을 수 없는 저 창. 차라리 인생 자체라고 부르고 싶은 저 창. 인생이 흘리고 인생 때문에 흐른 온갖 피 냄새를 풍기는 창이다. 그리고오늘도 나는 저 창에 기대 서 있다. 창이여, 부디나를 버리지 말라. 그대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오늘도 나는 그대를 들고 삶 속으로 용감히 뛰어들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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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전달받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인다. 부품을 나누고, 날카로운 단면을갈아내며 조절하는 동작은 숙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미 노동의 범주 안으로 진입해 있다. 어긋나고 어설픈 손의 움직임이 노동의 시작을 알리고, 보수도 절반가량에 그친 채 몸은 이런저런 기계의 속도에 맞춰 조정된다. 전체적인 측면에서 창우가 수행하는 노동은 부품 하나씩 빠져있는,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미완(未完)의 노동이다. 아침 일찍 작업장으로 향하는 출근길, 곧이어 나눠지는 각자의 작업. 군집이 해체되고 개개인으로 존재하는 노동의 시간 속 창우와 우재는 어딘가 어색한 존재감을 띄며 현장의직원과 동떨어져 있다.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현장에서 둘의 손은 아직능숙하지 않았고, 그 미숙함은 화면 안에 그대로 담긴다. 이렇듯 이 영화가조율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로서 의미가 아닌 노동에 적응해가는 신체의 속도와 감각의 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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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트하우스 모모는 한국퀴어영화제의 대관 불허에 항의하는 대자보가 영화관에 게시되자 이를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로 가리는 대응을 보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역시 한국퀴어영화제와 이화퀴어영화제의 문제 제기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아트하우스 모모의 이러한 태도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검열과 혐오 정치에 침묵으로 동조해 온 한국 사회의 정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럼에도 퀴어 영화와 퀴어 영화문화 그리고 퀴어 민주주의가 지니는 의미를 고려할 때, 앞서 언급한 저항의 사례들은 해당 사태를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의 문제로 남겨두지 않고, 앞으로 어떠한 운동과 문화적 실천이요구되는지를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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