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언덕을 올라가면, 그러면 바로 병원이 나올 터였다. 병원에서, 진료소에서 일단 검사를 받고 나면 분명 괜찮아질 것이다. 은채는 들고 있던 고장난 우산을 바닥에 버렸다. 한영은 은채의 팔을 잡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은채도 한영을 따라 발을 떼었다.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컴컴해지고 비가 더욱 맹렬히 내렸다. 발등까지 고였던 물이 발목을 넘어섰다. 마치 세찬 폭포를 거스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은채와 한영은 우산 하나를 나란히 받쳐 쓴 채 나아갔다. 언덕 위에 어렴풋이 불빛이 보였다.
둘은 계속해서 그 빛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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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고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던 디지털마케팅팀에 심상치않은 바람이 불었다. 15층으로 올라간 게 호재만은 아니었다. 타부서의 사람들과 임원들이 디지털마케팅팀을 두고 온갖 말로 찧고 쌓기 시작했다. 유연근무제를 빌미로 근태가 엉망진창이라는둥, 출장은 핑계고 법인 카드로 놀러 다닌다는 둥 모함과 헛소문이 돌았다. 한영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사실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임원 승진 기간이 되자. 마케팅 2부의 진연희 부장이 상무 자리를 두고 마케팅1부의 김무진 부장과 경합을 벌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둘은 공채 동기이며 수십 년 동안 나란히 승진가도를 달려왔다. 필연적으로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마케팅 본부에는 지나가는 새조차 숨죽일 만큼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다 곧 문제가 터졌다. 월요일, 주간 회의 직전에 진연희 부장이 은채와 한영을 급하게 호출했다. 둘은 12층의 마케팅2부 사무실로 내려갔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진연희는 책상 앞으로 다가온 그들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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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시작하고 난 후 일주일 동안 우리는 커다란 책장에 백 권도 넘게 꽂힌 매거진 C의 과월호를 보며 잡지의 구성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스터디했다. 사수인 배서정이 시시때때로 기사마다 ‘야마‘가 되는 내용을 정리해 오라고 했다. 흥미로운 인터뷰가 많았고,
순수예술부터 대중문화까지 문화계 전반을 골고루 다루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꼭 들었다. 잡지를 읽으며 나는 부푼 꿈에 사로잡혔다. 언젠가 그러니까 삼 개월의 수습기간이 끝나고 머지 않아 이런 유명인들을 만나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설렘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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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파도조차없는 저 바다가 사실은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않았다.
이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줄곧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행복한 사람들만 보며 살아가야 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얼굴은 직전에 비해 열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나는 피지사람들은 언제나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만 생각했어. 그렇게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저곳으로 가고 싶지 않아. 그래서 이곳을 떠날 거야.
태어나면 죽기를 기다려야 하는 건 모두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대신 굿바이 인사를 했고 곧 숙소로 돌아와 노래를 불러주는 원주민 소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스위스 여학생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원주민 소녀는 갑자기 싱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웃음에 고개를 갸웃하자 이런 말을 건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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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와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옮길 동안 수납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수령하고 병실에 가 제일 먼저 출연 예정자와 만나는 것은 내 일이었다. 병원 원무과장과 명함을 주고 받은 뒤 P에게 메시지로 병실 번호를 보내둔 다음 혼자 엘리베이터를 탔다.
늘 해 오던 일인데 영 내키지 않았다. 느리디느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복도에 발을 내딛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냥 이번 건은 빠진다고 할 걸 괜히 따라나선 걸까. 서울에서 진작 끝냈던 고민이 병실 앞에서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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