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랜 세월 이런 유의 심사에 관여하면서, 단 한 번,
육필원고로 읽고 전율을 경험한 건, 후카자와 시치의 나라야마 부시코考」를 접했을 때이다. 오코론신인상은 400자 원고지 백 장 이상의 중편을 육필원고로 열편 이상 읽어야 하니, 결코 편한 심사는 아니다. 몇 개의 후보작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 후에, 잊히지도 않는 어느 깊은 밤 고타쓰에 발을 집어넣고,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손글씨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느슨해서, 깔보며 읽고 있었는데, 다섯 장을 읽고 열 장을 읽는 동안에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처절한 클라이맥스까지 쉬지 않고 다 읽고, 반박의 여지 없는걸작을 발견했다는 감동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 자체를 유년기라 생각하고, 다시 성인이 될때의 가열한 성인식을 드라마로 구성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전부 다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절대자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 지적인 구축성 뛰어난 SF에서 독자는 한순간 엄청난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너무나 불쾌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스트교 신자가 이 소설을 읽은 때의 불쾌감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이 상쾌한 불쾌감은 작품의 완성도에 만족하느냐 아니냐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 이게 무슨 불쾌감인가를 설명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다. 지금부터가 아마 남들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을 나의 음울한 독백이다.

부유하던 것이 확정되어 하나의 작품 속에 봉인되는 순간에 겪는 일종의 아픈 경험에 관해서 작가는 아무리 요란을떨어도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한 권이 남아 있다. 마지막 권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이 끝나면‘이라는 말은 지금 내게 최대의 금기어다.
이 소설이 끝난 뒤의 세계를 나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세계를 상상하기 싫기도 하고 두렵다. 거기서 결정적으로 이 부유하는 두 현실이 결별하고 한쪽이 폐기되고 한쪽이 작품 속으로 감금된다면, 나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일하게 남겨진 자유는 그 작품의 ‘작가‘라 불리는 일일까. 마치 인연도 연고도 없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아, 어쩔 수없이 그의 자식의 대부가 되듯이

사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면서 노리는 효과도 이런 것이다. 효과 그 자체에 그런 범죄적 의도가 있더라도, 소설은 근대사회 특유의 관대함 덕에 좀처럼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유유히 법률이나 사회도덕을 무시한 윤리적 긴장감을 줄 수 있고, 말하자면 법률상의 ‘확신범‘의 체계를 미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범인은 현실의 법률에 굴복할수밖에 없지만, 소설은 만일 성공하면 그 소설을 재판할 자로 신밖에 없는 곳까지 자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

소설가는 문체로써 세상과 대결하므로, 저절로 그가 평생쓰는 소설의 주제는 모두 문체의 문제에 포함되는 셈이다.
독자는 테마소설이라 불리는 주제를 노출한 소설을 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체의 중심이 골격이라고는 해도, 엑스레이로 찍은 미인의 해골은 미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자연주의문학과 파생 장르인 사소설의 피해를 받은건작가 본인보다 오히려 소설의 독자라고 생각한다. 소설은정당한 독자를 잃은 것이다. 즉 독자는 소설을 소설로 읽는습관을 잃은 것이다.

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우선 첫째로 대단히 곤혹스럽다. 속수무책일 정도로 곤혹스럽다. 내가 일본에서 도쿄의 한구석에서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내 소설은 이불가능한 일과 얼마간의 타협을 하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도 한 명의 부도덕한 인간일 것이다.

사실 쓰기 시작하자마자, 유쾌한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 줄 한 줄이 벽이 되고, 조각끌에 반항하는 대리석이 된다. 이 작업이 일상의 훈련이다. 독일어의 이른바 일상의 일ugenerk 인 것이다. 군인에게 훈련이 실전이며, 실전이 동시에 훈련이듯이, 실전 경험 없이 훈련만으로 좋은 군인이만들어질 리가 없고, 소설을 쓰지 않고 소묘만으로 소설가가될 리가 없다. 하나의 새로운 소설의 제작은 하나의 새로운훈련의 장이다.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다.

재료는 아무 데나 굴러다닌다. 다만 어느 시점의 나의 내적 욕구에 딱 맞는 재료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 소설가는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걷는 사람 같은 존재다. 어느 때 길 위의 맥주병 조각이 회중전등의빛을 받아 강하게 빛난다. 그 순간 나는 재료와 함께 주제를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글자를 통해, 그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내 안에되살려주고, 지금 나는 다시 그 풍경을 마주하며 거기서부터뭔가 어떤 ‘구체적인 것‘을 수확한다. 그것이 땅 밑을 흐르며감시하고 있는 까다로운 ‘주제‘를 만족시킬 때에 소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호흡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수십번, 수백 번이고 죽음에서 되살아나면서 한줄기 길로,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근대소설이 다다른 궁극의 기술적 시도가 근대소설의 근본적인 결함의 보완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조이스는 여기에서 다시 기술적 예술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이 근본적인 결합의 보완 없이는 소설의 기술은 기술로서의 안정을 얻지못하고, 새로움은 새로움에 머물러 금세 내팽개쳐질 수밖에없고, 다시 소설은 기술을 경시하면서 기술에 추적을 받으며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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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프랑스에 가서 화가가배워 오는 건 매일 아침 반드시 캔버스 앞에 제대로 앉아서일을 시작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이 단순한 습관이 일본에돌아온 후에 크게 발전하는 원천이 된다니 일본인의 게으른기질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텔레비전이 발달하면서 라디오는 상당히 쇠퇴했다. FM방송과 자동차 라디오로 되살아났다는 말도 있지만, 가장 빠른 뉴스를 오로지 라디오에 의존했던 시대에 비하면, 그 근본적 유효성이 상실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이차세계대전 전에 올림픽 수영에 출전한 마에하타 히데코秀子선수의 경기를 물보라 소리와 함께 들으며 흥분하던 시절을떠올리면,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유의 활발한 상상력을 수반한 흥분을 라디오에서 찾지 않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영향은 묵과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건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골치 아픈 독자를 양성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이런 경향에 빠지기 쉬운 독자의 마음을 지배할 의도로 만들어진 다양한 사이비 예술 즉 ‘인생론적 소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설‘이라는 근시안적인 현상을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고백과 자기방어는 언제나 미묘하게 맞물려 있기에, 고백형 소설가를 상처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마치 인도의 수행자처럼 자신의 입술이나볼에 바늘을 통과시켜 보여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타인이하도록 내맡겨 둔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타인의 가해에 앞서 선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바꿔말하면 몸의 안전을 위해서!

언어예술에서야말로, 우리는 언어를 통해 꿈과 현실, 환상과 사실의 완전한 등질성을 마주할 수 있다. 역사소설과 환상소설은 이 특징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 것인데, 역사소설이나 환상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여 독자들이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이 현명하지 않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음악이나 미술에서는 소리와 색채 그 자체가 이미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소리나 색채와 다른 법칙성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꿈과 현실에는 동질성이 없고, 그 대신 예술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 상징기능의 순화를 획득하고 있는셈이다.

작자에게는 처참함, 괴기, 신비, 색채의 취향이 넘쳐흐른다. 소설은 우선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야 한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싶다. 무엇을?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알고 싶다.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소설 본연의 기능이라고한다면 신슈 홀치기성』은 그것만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소설일 것이다.

전기소설의 이점은 수수께끼가 밝혀진 뒤에도 여전히 수수께끼가 신비로움이라는 이점을 전혀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니에다 시로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의 알고 싶다는 목적과 작자의 알려 주고 싶다는 목적이 실은 어딘가에서 어긋나 있고, 작자 역시 독자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매혹된 게 아닐까 하고 직감할 것이다. 이 뭔가 달콤하고 가슴이 설레는 불신감은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배가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알몸은 백조처럼 하였다. 등불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보라색을 띤 그림자였다.
그녀는 어떤 자세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등을 구부렸다.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 위로 턱을 올렸다.
그 모습을 등불이 정면에서 비추었다. 팔꿈치 바깥쪽이 어슴푸레하게 빛났다. 엷은 마노색 빛이었다. 세운 무릎에서 정강이에 걸쳐, 그리고 발바닥까지 희미하게 빛났다. ..."

이 ‘언어 표현에 의한 최종완결성‘이야말로, 아마 예술로서의 소설의 가장 본질적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정말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장르라 생각되고 있는 만큼 이 점에 대한 인식을 등한시한 채 쓰인 소설이 많은데 일본어의오랜 교양이 무너지면서 이 인식 자체가 소설가 내부에서나날이 쇠퇴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공허하고 미칠 것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아치문밑에 선 검은 옷차림의 에드와르다를 ‘내‘가 볼 때, 이미 성적 해방을 통해 그녀로부터 풀려나 도취에서 벗어난 ‘나‘는에드와르다가 자칭한 것처럼 ‘신‘이었음을 인식한다.

바타유의 소설은 흡사 그 반대 같아서 타락의 교양소설이라고 부를 만한데, 기본 구조는 아주 비슷하다. 즉 독자의 순수한 진리 탐구 욕구, 지적 분석 욕구, 자의식, 서정성, 성욕등을 ‘내‘가 대표하고, 본의 아니게 그러한 욕구의 필연적 결과로서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진상을 직면하고, 그 혐오와 전율을 겪어야 비로소 강림 체험을 하도록 설계된 소설이다.

‘물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준적 전형적인 개념과좋아하는 소설, 싫어하는 소설이라는 지극히 주관적 취향이나 감각의 선택은 종종 애매하고 혼동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취향적 감각적으로 싫은 소설이라도 자신의 감각을 거스르기까지 하면서 객관적인 비평 기준을 적용하려는 양심적노력은 충분히 기울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종종 엉뚱한노력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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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빠질 수도 있다. 로이드 베츠는 실제로 더 나쁘다. 최근 그는 몸무게가 늘었고 머리카락이 빠졌다. 그는 근무시간 내내 연락한 통 받지 못하고 테이블 시중을 한 번도 들지 못하고 결국 P-51날개에 앉아 늘어져 출렁이는 뱃살이 드러나는 웅크린 자세로 솔리테어 게임이나 하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달려간다. 민과 제이드와 버니 이모와 아기들이 소파 뒤에 모여 웅크리고 있다. 총소리가 시작되었을 때 아기들을 밖에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트로이의 보행 보조기가 총에 맞았다.
다행히도 트로이는 그 안에 없었다. 오리처럼 보여야 하는 보행 보조기인데 지금은 부리가 사라졌다.

내가 앤절라 실베리를 위해 테이블 댄스를 추는 것은 있을 수없는 일이다. 앤절라 실베리의 친구에게 내 좆을 보고 싶으냐고 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얼쩡거리다 앤절라가 항공재킷에 T팬티 차림을 한 나를 보고 속으로 내가 어쩌다 이렇게 잘못되었는지 등등을 궁금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끔 이모는 꿈으로 나에게 온다.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있다. 한번은 수갑을 차고 있었다. 한번은 벌거벗고 있었고 더러웠으며 그 나쁜 고양이가 그녀의 몸 앞쪽을 따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매번 똑같다.
"왜 어떤 사람은 모든 걸 갖고 나는 아무것도 못 가졌을까?" 이모가 말한다. "왜? 왜 그럴까?"
매번 나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진짜로 모른다.

너는 아름다워, 아름다워, 소년이 몸부림치는 걸 멈춘 지 오래였음에도 작대기 인간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너를 사랑해, 너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워.

놀랄 만큼 아름다운 아가씨 세 명을 빠르게 지나갈 때 대학 남학생 클럽 스웨터를 입은 아이가 다가왔다. 그는 이발사를 보자 익살맞게 목구멍으로 늙은이가 기침하는 소리를 냈고, 아가씨 하나가 깔깔거리며 이발사가 드레스 속을 훔쳐보는 것을 막으려는 듯어깨끈을 조정했다.

코리건스는 스코틀랜드 골프 코스 가장자리에 있는 펍 같은 느낌이 들도록 꾸민 곳이었다. 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옹이와 흉터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단단한 플라스틱 재질의 어마어마한 테이블들 위로 매우 낡아 보이는 골프 클럽들이 걸려 있고, 헤더나 조 같은 이름의 웨이트리스가 킬트를 입고 스코틀랜드세인트앤드루스의 올드 코스 항공 사진 근처에서 커다란 금속 통에 치킨 윙과 구운 치즈와 랍스터 덩어리를 털썩털썩 던져넣고 있었다.

뭐, 누가 완벽하겠는가? 그는 완벽하지 않고 그녀도 완벽하지않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특별한 화학반응이 있었고, 이것은 ‘운전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에 기초하고 있었다. 어쨌든, 뭐어떠랴, 청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더 알려고 노력해볼까 고려중일 뿐인데,

그렇게 멋지게 행동하다니. 뭘 걱정했던 걸까? 그는 귀여웠고, 여자들은 늘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빠지고 배가 좀 나왔다는 건 신경쓸 거 없다. 그에게는 딱 여자들이 좋아하는 그런 게 있으니.
우와 그 여자는 예쁘다. 그가 한 것치고는 아주아주 잘한 일이다.
테이블로 돌아오니 미스터 젱크스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있었다. 그는 한 사람이 한 장씩 가질 수 있도록 ‘운전학교‘ 그룹을여섯 번 찍을 생각이라고 말했고 이발사는 예쁘지만 묵직한 아가씨 뒤에 서서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그녀는 손을 위로 뻗어 그의 손목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이발사는 분노하여 욕조에서 일어섰다. 여기 거울에 그의 검버섯이 퍼진 삼각근과 검버섯이 퍼진 둥그스름한 가슴 근육과 이상할 만큼 창백한 사랑의 손잡이가 있었다.
엄마가 크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문에 기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그의 가게 차양 아래 놓인 나무 벤치 옆에 서 있었다. 거무스름한 갈기 같은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여기까지 얼마나 거칠게 달려온 것인지, 그가 이미 자신에 관해서 얼마나 많이 알게 된 것인지!
"왔어요." 그녀가 수줍게 예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와줘서 정말 기쁩니다." 그는 말하며 허리를 굽혀 가게문에 열쇠를 꽂았다.

모스는 학교가 파하는 시간에 세인트주드 학교 구내를 가로지르는 것이 신경 곤두서는 일임을 알게 되었는데, 만일 교복을 입은가톨릭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으면 자신이 괴짜거나 변태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미소를 짓지 않으면 세상에 한이 맺힌 나이든 투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기준에서보자면 그는 투덜이가 맞다. 가끔 자신이 어떤 부류의 미치광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지만, 변태는 확실히 아니다. 그건 확실하다. 아니 상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는 상대적으로 확신했다. 확실하다고 지나치게 믿는 것이, 결국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든다고. 따라서 겸손이 중요하다. 그 딴에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따뜻한 마음으로 되돌아보는 사람의 표정이라고 통할만한 얼굴, 괴짜나 변태 느낌은 싹 제거한 얼굴로 표정을 조정하며생각했다. 겸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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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은 여섯 살이다. 석 달 전 넬슨의 근육이 뻣뻣해졌다. 근육을 풀어주는 약은 실제로 근육을 약간 풀어주었지만 동시에 근육을 부어오르게 했다. 그것만 아니면 아이는 괜찮다. 뻣뻣하고 부어올라서 움직일 때 아플 뿐. 원래 아이의 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있었지만, 약 때문에 아이가 붓자 닥터 에번스는 아이의 문제가 뭐든 처음 생각했던 것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아이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예비 크래커‘를 먹으면서 가끔 손으로서로를 찰싹찰싹 때린다. 우리는 동굴 주위에서 허리를 구부리고비명을 지르며 옥신각신하고 종종걸음을 치는 척하고 있다. 그녀는 정말로 아주 잘하고 있다. 나는 성난 모습으로 돌에 돌을 두들겨 그녀의 얼굴에 흙을 던질 작정이라는 표시를 한다. 그녀는 아주날카롭게 마주 짖어댄다.

나는 넬슨 생각을 한다. 성긴 머리카락과 구부러진 코, 내가 약용감하게 다 먹어줘서 고맙다고 할 때마다 아이는 늘 머리를 내어깨에 뉘며 말한다. 문제없어. 다만 지을 발음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들린다. 문에 없어. 그런 다음 내 배를 두드린다. 마 치약을 용감하게 다 먹은 사람이 나인 것처럼.
태도상 곤란한 점이 눈에 띄는가?

하얏트의 조명을 끈 회의실에서 여든 명이 대량 생산된 종이 모자를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모자‘는 ‘시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분홍 모자‘는 ‘시작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초록 모자‘
는 ‘아주 확실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황금 모자‘까지 올라가는 먼길을 향해 ‘삶에 통달한 ‘황금 모자‘는 ‘간식 테이블‘ 주위에 모여서서 아래 등급 모자를 쓴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소곤거리고 의논하고 팔꿈치로 서로 쿡쿡 찔렀다.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그 만트라를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급 ‘하얀 모자‘도 만트라를 알았다―심지어 완전히 넋을 잃은 채불안정하게 첫 줄에 앉아 콧수염을 빨고 있는 닐 야니키조차 만트라를 알았다. 늘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고 또 ‘오리엔테이션 자료‘
의 표지에도 크고 굵은 글자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이 엄청나게 멍청한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실 아무런 경력도없었고 사업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컴퓨파츠에서 일을 받아 지하실에서 하나에 사십칠 센트를 받고 작은 삼각형 조각을 납땜하는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뭔가 나은 일을 하겠다는큰 희망은 품고 있었고, 그것이 여기 온 이유지만.

" 좋습니다!" 톰 로저스가 "미친 것처럼 보이고"를 지웠다.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향해 곧장 나아갈 수 있도록 단순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좋아요. 이 지점에서, 만일 이 여자를 닐의집에서 내보낼 수 있으면 미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견딜 만하다고우리는 결정을 했습니다. 큰 진전입니다. 하지만 왜 거기서 멈추겠어요? 내가 하나 제안하죠. 그 여자가 닐한테 가까이 오지만 않으면 종교적이든 아니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는 비키의 손상된 얼굴을 향해 그녀가 자신의 삶을 망치고 있고 피를 몽땅 다 빨아먹었으니 이제 다른 데 가서 살아야 한다고말하기 시작했고, 비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토닥이다가이따금 그의 말을 끊고 그가 너무 가혹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부엌에서 그녀는 쿠키 봉투를 뜯어 열었지만 깨끗한 접시가 없어서 접시를 하나 씻었지만 타월이 없어서 상의로 접시의 물기를닦았다. 이런, 그녀는 여전히 노란 상의를 입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녹색 상의가 어디 있더라? 막 서랍에서 꺼내지 않았나? 하하!
웃긴다. 이걸 <크라이스트라이프>에 보내야겠다. 거기는 설령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더라도 실제로 일어난 귀엽고 웃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그녀는 다시 층계를 달려올라가 상의를 갈아입었다. 녹색 상의가 있었다, 층계 맨 꼭대기에! 나쁜 상의! 때려줘야겠어! 그녀는녹색 상의를 찰싹 때려 먼지를 털고 규율을 잡아주고, 기다란 몰딩과 더러운 양말을 계단에 내려놓고 바로 거기 그 자리에서 상의를갈아입고, 몰딩을 집어들고 더러운 양말을 어깨에 걸치고 쿵쾅거리며 다시 층계를 내려갔다.

그녀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다! 이것은 그의 파티가 될 거다.
그가, 오빠가, 그녀의 끝까지 함께 갈 친구가, 그녀가 이 세상에서발견한 유일하게 사랑스러운 영혼이 받아 마땅한 엄청나게 크고큰 파티의 작고 작은 일회분 파티가 될 거다.

슬픈 일이다. 그래, 약간 슬프다. 하지만 훌륭해지는 게 쉬운 거라면 누구나 훌륭해질 거다.
그래, 그녀도 한때는 귀여운 아이였다. 그래, 그들은 좋은 순간들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녀는 그에게 크래커와 조그만 라디오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아빠가 저녁을 먹다울기 시작하는 바람에 그가 계단 밑에서 꼬박 다섯 시간 동안 숨어있었을 때, 그래, 큰 남자애들과 낚시를 하다 관자놀이에 미늘이걸려 그에게 달려왔을 때 겁에 질려 있던 그녀의 눈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래, 그가 그녀를 집에 안고 갈 때 큰 남자애들은 낄낄거렸다. 그래, 그녀는 노래를 너무나 못하는데도 스스로 잘한다고각하는 것은 슬프고 세탁물에서 발견한 그녀의 팬티가 이제 엄청나게 큰 것도 슬프지만,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화장용 장작더미를 가로지르려면 염병할 몸이 엄청나게 뜨거워질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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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모든 순간을 푸른색으로 칠하라는 뜻은 아니다. 기쁨의 푸른색 안에도 고통이 주는 어둠이 있을 수 있다. 과거에 겪은 슬픔을 떠올리면서도 행복의 맛을 새롭게음미할 수 있다. 가장 아름다운 푸른색은 바다의 짙은 푸른색이 아닐까? 바다의 짙은 푸른색은 검은색이 칠해진 과거처럼 장엄하고 비밀스러운 상처와 같지 않은가? 인생을 푸른빛으로 본다고 해서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니다. 칙칙한 일상을 빛낼 무엇인가를 끌어내어 삶의 기쁨을 찾는것이다.

신이 얼마나 재능있는지 잊게 될 때,
나는 바다를 본다.

휘청이는 배에서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커다란닻뿐이다. ‘성스러운 닻‘ 혹은 ‘자비의 닻‘이라고 불리기도한다. 배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바로 닻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휩쓸려가지 않고, 내가 가고자하는 방향대로 가기 위해서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한 버팀목이다

닻은 힘을 불어넣어준다. 도무지 벗어나기 힘든 어려운이다지도 모든 것을 싫어도 물러서지 않게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낮은 지방을 상징한다. 낮은 믿음. 그것이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믿음이다.

파도와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도와주는 자신만의 닻을 찾으면 된다. 그 닻을 알아보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주고 의지를 갖고 결정할 수 있게 돕는 구원의 존재가 그 닻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닻으로 반복되는 부정적인 시나리오를 끝내야 한다. 그 순간에는 참고 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태도와 결별해야 한다. 닻은 우리가 자신에게 멈추라는 말. 당하고 있지 말라는 경고, 두려움과 계속 생각나는 옛 상처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다. 나만의 닻이 있으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편안한 마음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내게 자주 상처를 안겨주는 것이나 쓸데없는 근심에서벗어나려면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 힘을 빼고 스스로 재능을 낭비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꼭 붙어 있는 신성한 닻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자유를안겨준다. 물결이 아무리 강해도 닻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얻을 수 있는 자유다.

바다의 물결은 가슴을 채우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편안한 호흡과 같다.

그건 바다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다는 지조가 있다. 바다는 자유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존재다. 우리는 어디에 갇히거나 무엇에 방해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한다. 이처럼바다는 우리에게 삶에서 억지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다. 늘 준비해서 대답을 할 필요가 없고, 아무계산 없이 도와야 할 의무도 없고, 남의 말을 조용히 경청할 의무도 없다. 바다와 선원들은 따뜻하고 건강한 ‘이기주의‘가 있어야 독립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은 부당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러나 부당함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억만 선명하게 되살릴 뿐이다. 분노만 해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무력감 때문에 복수하려는 사람은 더 분노하며 피의 복수는 강도가 더욱 세진다.

선장은 모비 딕의 등 위에 갈고리를 던졌으나 갈고리는빗나간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에서는 모든 것이 미끄러져버린다. 이처럼 분노의 고래잡이배에 올라타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에이해브 선장처럼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할수 있을까? 특별한 방법은 없다. 그저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파도가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이란 바다처럼 다양한 색을 띤다.
어느 날은 눈부신 푸른색이었다가
또 다른 날은 짙은 회색이다.
바다의 빛이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처럼
산다는 것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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