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프랑스에 가서 화가가배워 오는 건 매일 아침 반드시 캔버스 앞에 제대로 앉아서일을 시작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이 단순한 습관이 일본에돌아온 후에 크게 발전하는 원천이 된다니 일본인의 게으른기질을 감안하면 재미있는 일이다.

텔레비전이 발달하면서 라디오는 상당히 쇠퇴했다. FM방송과 자동차 라디오로 되살아났다는 말도 있지만, 가장 빠른 뉴스를 오로지 라디오에 의존했던 시대에 비하면, 그 근본적 유효성이 상실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이차세계대전 전에 올림픽 수영에 출전한 마에하타 히데코秀子선수의 경기를 물보라 소리와 함께 들으며 흥분하던 시절을떠올리면,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유의 활발한 상상력을 수반한 흥분을 라디오에서 찾지 않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영향은 묵과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건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골치 아픈 독자를 양성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 이런 경향에 빠지기 쉬운 독자의 마음을 지배할 의도로 만들어진 다양한 사이비 예술 즉 ‘인생론적 소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소설‘이라는 근시안적인 현상을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고백과 자기방어는 언제나 미묘하게 맞물려 있기에, 고백형 소설가를 상처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 그가 마치 인도의 수행자처럼 자신의 입술이나볼에 바늘을 통과시켜 보여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타인이하도록 내맡겨 둔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타인의 가해에 앞서 선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바꿔말하면 몸의 안전을 위해서!

언어예술에서야말로, 우리는 언어를 통해 꿈과 현실, 환상과 사실의 완전한 등질성을 마주할 수 있다. 역사소설과 환상소설은 이 특징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확장한 것인데, 역사소설이나 환상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여 독자들이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이 현명하지 않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음악이나 미술에서는 소리와 색채 그 자체가 이미우리가 평소 사용하는 소리나 색채와 다른 법칙성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꿈과 현실에는 동질성이 없고, 그 대신 예술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 상징기능의 순화를 획득하고 있는셈이다.

작자에게는 처참함, 괴기, 신비, 색채의 취향이 넘쳐흐른다. 소설은 우선 신비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야 한다는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싶다. 무엇을?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알고 싶다.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소설 본연의 기능이라고한다면 신슈 홀치기성』은 그것만으로도 가장 모범적인 소설일 것이다.

전기소설의 이점은 수수께끼가 밝혀진 뒤에도 여전히 수수께끼가 신비로움이라는 이점을 전혀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니에다 시로 같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자신의 알고 싶다는 목적과 작자의 알려 주고 싶다는 목적이 실은 어딘가에서 어긋나 있고, 작자 역시 독자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에 매혹된 게 아닐까 하고 직감할 것이다. 이 뭔가 달콤하고 가슴이 설레는 불신감은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배가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알몸은 백조처럼 하였다. 등불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보라색을 띤 그림자였다.
그녀는 어떤 자세를 취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등을 구부렸다.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 위로 턱을 올렸다.
그 모습을 등불이 정면에서 비추었다. 팔꿈치 바깥쪽이 어슴푸레하게 빛났다. 엷은 마노색 빛이었다. 세운 무릎에서 정강이에 걸쳐, 그리고 발바닥까지 희미하게 빛났다. ..."

이 ‘언어 표현에 의한 최종완결성‘이야말로, 아마 예술로서의 소설의 가장 본질적 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정말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장르라 생각되고 있는 만큼 이 점에 대한 인식을 등한시한 채 쓰인 소설이 많은데 일본어의오랜 교양이 무너지면서 이 인식 자체가 소설가 내부에서나날이 쇠퇴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공허하고 미칠 것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아치문밑에 선 검은 옷차림의 에드와르다를 ‘내‘가 볼 때, 이미 성적 해방을 통해 그녀로부터 풀려나 도취에서 벗어난 ‘나‘는에드와르다가 자칭한 것처럼 ‘신‘이었음을 인식한다.

바타유의 소설은 흡사 그 반대 같아서 타락의 교양소설이라고 부를 만한데, 기본 구조는 아주 비슷하다. 즉 독자의 순수한 진리 탐구 욕구, 지적 분석 욕구, 자의식, 서정성, 성욕등을 ‘내‘가 대표하고, 본의 아니게 그러한 욕구의 필연적 결과로서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진상을 직면하고, 그 혐오와 전율을 겪어야 비로소 강림 체험을 하도록 설계된 소설이다.

‘물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기준적 전형적인 개념과좋아하는 소설, 싫어하는 소설이라는 지극히 주관적 취향이나 감각의 선택은 종종 애매하고 혼동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취향적 감각적으로 싫은 소설이라도 자신의 감각을 거스르기까지 하면서 객관적인 비평 기준을 적용하려는 양심적노력은 충분히 기울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종종 엉뚱한노력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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