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랜 세월 이런 유의 심사에 관여하면서, 단 한 번,
육필원고로 읽고 전율을 경험한 건, 후카자와 시치의 나라야마 부시코考」를 접했을 때이다. 오코론신인상은 400자 원고지 백 장 이상의 중편을 육필원고로 열편 이상 읽어야 하니, 결코 편한 심사는 아니다. 몇 개의 후보작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난 후에, 잊히지도 않는 어느 깊은 밤 고타쓰에 발을 집어넣고, 그 별로 아름답지 않은 손글씨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느슨해서, 깔보며 읽고 있었는데, 다섯 장을 읽고 열 장을 읽는 동안에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처절한 클라이맥스까지 쉬지 않고 다 읽고, 반박의 여지 없는걸작을 발견했다는 감동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 자체를 유년기라 생각하고, 다시 성인이 될때의 가열한 성인식을 드라마로 구성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전부 다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절대자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 지적인 구축성 뛰어난 SF에서 독자는 한순간 엄청난 아이디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다 보면,
거기에 너무나 불쾌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리스트교 신자가 이 소설을 읽은 때의 불쾌감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이 상쾌한 불쾌감은 작품의 완성도에 만족하느냐 아니냐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럼 이게 무슨 불쾌감인가를 설명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다. 지금부터가 아마 남들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을 나의 음울한 독백이다.

부유하던 것이 확정되어 하나의 작품 속에 봉인되는 순간에 겪는 일종의 아픈 경험에 관해서 작가는 아무리 요란을떨어도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한 권이 남아 있다. 마지막 권이 남아 있다.
‘이 소설이 끝나면‘이라는 말은 지금 내게 최대의 금기어다.
이 소설이 끝난 뒤의 세계를 나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세계를 상상하기 싫기도 하고 두렵다. 거기서 결정적으로 이 부유하는 두 현실이 결별하고 한쪽이 폐기되고 한쪽이 작품 속으로 감금된다면, 나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일하게 남겨진 자유는 그 작품의 ‘작가‘라 불리는 일일까. 마치 인연도 연고도 없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아, 어쩔 수없이 그의 자식의 대부가 되듯이

사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면서 노리는 효과도 이런 것이다. 효과 그 자체에 그런 범죄적 의도가 있더라도, 소설은 근대사회 특유의 관대함 덕에 좀처럼 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유유히 법률이나 사회도덕을 무시한 윤리적 긴장감을 줄 수 있고, 말하자면 법률상의 ‘확신범‘의 체계를 미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범인은 현실의 법률에 굴복할수밖에 없지만, 소설은 만일 성공하면 그 소설을 재판할 자로 신밖에 없는 곳까지 자기를 밀어붙일 수 있다.

소설가는 문체로써 세상과 대결하므로, 저절로 그가 평생쓰는 소설의 주제는 모두 문체의 문제에 포함되는 셈이다.
독자는 테마소설이라 불리는 주제를 노출한 소설을 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체의 중심이 골격이라고는 해도, 엑스레이로 찍은 미인의 해골은 미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자연주의문학과 파생 장르인 사소설의 피해를 받은건작가 본인보다 오히려 소설의 독자라고 생각한다. 소설은정당한 독자를 잃은 것이다. 즉 독자는 소설을 소설로 읽는습관을 잃은 것이다.

이다.
나는 소설을 쓸 때 우선 첫째로 대단히 곤혹스럽다. 속수무책일 정도로 곤혹스럽다. 내가 일본에서 도쿄의 한구석에서 소설 한 편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내 소설은 이불가능한 일과 얼마간의 타협을 하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도 한 명의 부도덕한 인간일 것이다.

사실 쓰기 시작하자마자, 유쾌한 기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한 줄 한 줄이 벽이 되고, 조각끌에 반항하는 대리석이 된다. 이 작업이 일상의 훈련이다. 독일어의 이른바 일상의 일ugenerk 인 것이다. 군인에게 훈련이 실전이며, 실전이 동시에 훈련이듯이, 실전 경험 없이 훈련만으로 좋은 군인이만들어질 리가 없고, 소설을 쓰지 않고 소묘만으로 소설가가될 리가 없다. 하나의 새로운 소설의 제작은 하나의 새로운훈련의 장이다. 인내와 의지가 필요하다.

재료는 아무 데나 굴러다닌다. 다만 어느 시점의 나의 내적 욕구에 딱 맞는 재료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 소설가는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걷는 사람 같은 존재다. 어느 때 길 위의 맥주병 조각이 회중전등의빛을 받아 강하게 빛난다. 그 순간 나는 재료와 함께 주제를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글자를 통해, 그것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내 안에되살려주고, 지금 나는 다시 그 풍경을 마주하며 거기서부터뭔가 어떤 ‘구체적인 것‘을 수확한다. 그것이 땅 밑을 흐르며감시하고 있는 까다로운 ‘주제‘를 만족시킬 때에 소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호흡하기 시작하고, 그리고 수십번, 수백 번이고 죽음에서 되살아나면서 한줄기 길로,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근대소설이 다다른 궁극의 기술적 시도가 근대소설의 근본적인 결함의 보완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조이스는 여기에서 다시 기술적 예술을 요구했다. 왜냐하면 이 근본적인 결합의 보완 없이는 소설의 기술은 기술로서의 안정을 얻지못하고, 새로움은 새로움에 머물러 금세 내팽개쳐질 수밖에없고, 다시 소설은 기술을 경시하면서 기술에 추적을 받으며위협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