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룰렛 게임에서는 하루 저녁을 보내도 빨간 숫자와 검은 숫자가 나오는 비율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기가 힘들지만, 커피잔에서는 우유의 형태가 금방 사라져버리고 커피와 완전히 섞이어, 찻잔에는 최대한의 무질서가 지배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볼츠만이 발견한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는 것이다. 무질서(혹은 엔트로)는 항상 증가한다. 커피에 우유가 확산되는 것도 마치 유령이 조종하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책상이 뒤죽박죽되는 것도마찬가지다. 우연은 자신의 법칙을 따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의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위로 올렸다가 바위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면 다시 산 위로 올리는 벌을 받았다.
무질서에 대항한 자연과 인간의 싸움도 그와 비슷하다. 에너지 투입이 중단되면 무질서가 세력을 떨치게 된다. 질서는 고정되어 있지않다. 에너지가 무한하지 않기에 질서도 영원할 수 없다. 자동차는고물이 되며 인간은 죽고 태양도 빛을 잃는다. 무질서에 대한 질서의 승리가 아름답게 빛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 결국은 언제나우연이 승리한다.

질서와 무질서의 개념은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관찰할 때에만 비로소 적용된다. 양말 몇 켤레는 별로 무질서하지 않다.
그에 반해 서랍 가득 들어 있는 양말은 매우 무질서하다. 질서에서무질서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과거와 미래가 생긴다. 결국 우리는 우연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뒤쪽이 아닌 앞쪽에서부터 경험하게 되는것이다.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더 정확한 기상 예측 같은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카오스 연구자들은 그들의 장밋빛 약속을 실현하지못했다. 갑작스러운 영아 사망을 줄이지도 못했고, 카오스 방정식을응용하여 주식으로 돈을 벌어들이지도 못했다. 고속도로의 정체도여전히 변함이 없다. 카오스 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과는 다르게 결과를 빚어내지 않는 사건들도 있는 것이다.

무지와 우연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주변 세계를 모두 아는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쨌든 우리는 노력과 인내로 지식의경계를 확장하고 우연으로부터 자리를 억지로 좀 얻어낸다. 그러나에피메니데스의 이 모호한 발언에는 그런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다. 우리에게필요한 정보는 도무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 수 없을 때에 우연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한 원인의 일부가 자신이라면 이원인은 관찰되는 사건과 분리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피드백이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문제의 답으로 논리나 이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숫자를 얻게 된다. 카이틴은 그 수를오메가로 표시하였다. 오메가는 기독교에서 세상의 끝을 상징하는말이다. 카이틴은 "하느님은 도박에 약하신 듯, 순수 수학에서까지주사위 놀이를 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 전자의 스핀 값을 수평 방향으로 잴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0‘은 금지되어 있기에 전자는
‘오른쪽‘이나 ‘왼쪽‘ 중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1/2이나 1/2의 값에 해당한다. 이미 말했듯이 스핀은 측정 시 반정수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필이 책상 위에 수평으로 누울 때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진짜 실험에서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그런 장면을 보게 된다. 측정 시에 전자가 그의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전자의 스핀이 ‘오른쪽’으로 눕는 비율과 ‘왼쪽‘으로눕는 비율은 거의 같다. 장시간 동안 동전 던지기를 할 경우 거의 같은 비율로 앞뒷면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실험을 거듭할수록 두가지 가능성(오른쪽으로 쓰러지는 값 1/2과 왼쪽으로 쓰러지는 값 -1/2) 이 상쇄되어 스핀 값의 총량은 평균적으로 다시 0이 된다. 그러나 특정한실험에서 전자가 어느 방향을 택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연에 의해 정해진다.

우연은 물리학의 토대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익숙한 생각이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룰렛 구슬이 전자처럼 작았다면 파머는 결코 그 경로를 계산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자는 가는 길이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양자역학에서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예언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미 불가능하다. 그러나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예언할 수 없는 더 심오한 이유는 에피메니데스의 거짓말쟁이 패러독스와 같은 것, 즉 자기 연관성 때문이다.

예언자가 모든 예언을 함구한다면 그를 예언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예언이 불가능한 두 번째 논리는 인간 정신의 복잡성에기초하는 것으로, 그에 대해 철학자 카를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b
"누군가 나의 행동을 예언하려 한다면 그는 나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언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따지는 것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불확실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쨌든 마크 트웨인이 한 말은 옳다.
하드우
"예언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 지도부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상황은더 악화된다.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경제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하는 사람들이 정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행정부는 우즈베키스탄에 얼마나 많은 신발이 필요한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은 현지의 구두장이나 신발 상인만이 알아낼 수 있다. 행정부가 무리하게 그런 일을 결정할 때 사람들이 꽁꽁 언 발로 신발가게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는일이 발생한다.

삶을 우연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모두 이런 기술 덕분이다.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틀에 박힌 세계에서는 결코 이만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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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학자 그레고리 차이틴은 겉보기에 제멋대로인 것 같은데이터들 사이에 내적인 연관관계가 있는지 확인하는 시금석 따위는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이틴에 따르면 임의의 숫자들이든, 하마터면 치명적이었을 뻔한 사고든 간에 어떤 사건의 고리들이 정말우연히 맞물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우연은 증명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건을 그냥 우연으로 돌리지 않고 더 깊은 원인을 찾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규칙은 그것이 어떤 일을 더 간단한 분모로 통합할 수 있을 때,
전체의 이야기를 더 적은 수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성립된다.
그렇지 않고 규칙이 너무 복잡하면 일은 미궁 속에 빠진다. 그럴 때는 규칙을 가늠할 수 없고 그 일을 우연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편하다. 그리하여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너무 복잡한 규칙은 규칙이아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페르마와 밀라노 출신의 의사 지롤라모카르다노 같은 선구자들은 실러의 표현처럼 "우연이라는 무시무시한 현상 속의 친숙한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 도박에 빠졌다. 카르다노는 "나는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적지 않은 위안을 얻었다"라고 고백했다.

우연의 효과는 돌로 언덕을 쌓는 경우와 비슷하다. 돌덩이 몇 개만 쌓아서는 그럴듯한 형태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돌을 많이 모아놓으면 가까이에서 보면 여전히 표면이 삐죽삐죽하고 구멍이 뻥뻥뚫려 있다 해도 멀리서 보면 그런 울퉁불퉁한 것들이 보이지 않고제법 매끈한 언덕이 생겨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개별적인 우연들도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 즉 수많은 동종의 사건들을 관찰하면조화로운 전체로 어우러진다.

그럼에도 이런 연속적인 비극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하지만만약 이런 이상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일이기때문이다. 미국의 수학자 존 앨런은 말했다.
"가장 놀라운 우연은 우연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파머의 승리는 300년 전 인간 인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물리학의 승리였다. 정원에서 사과가 머리에 떨어졌을 때 농부의 아들아이작 뉴턴은 하늘과 땅에 똑같은 자연 법칙이 통용되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다면 천체를 운행하는 힘과 사과를 떨어뜨리는 힘은(룰렛 회전판 위에서 구슬을 회전시키는 힘도 같을 거라고,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역학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이것들은 해와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우연한 일이 아닐 거라고 말이다.

"모든 데이터를 분석할 만큼 포괄적이고 완벽한 지성은 그렇게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완벽한 지성의 눈에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없으며 미래는 과거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질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이런 완벽한 지성의 희미한 그림자다."

그러므로 어떤 시스템이 법칙을 따르고 우리가 그 법칙을 정확히 안다고 해도 그 시스템의 행동을 아무 때나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선은 그리 예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기때문이다. 지식이 언제나 인식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뉴턴이후의 낙천적인 지식인들에게 이런 통찰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모든 일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카오스적인 시스템에서도 이런 현상이 잦다. 룰렛 구슬이 튀거나 당구공이 부딪힐 때 초기의 불확실성은 지수적인 원칙에 의거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현자의 체스판에서 쌀알이 점점 빨리 불어나듯이 부정확성도 매초 배가적으로 증가한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물리학에서보다 더 많은 영향이 작용한다.
더 먼 미래일수록 더 많은 우연에 대비해야 한다. 하늘을 쳐다보면다음 몇 시간 동안의 날씨가 어떨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사에 대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 지 수백 년이지난 후에도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시간에 ‘공간의 네 번째 차원‘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던 아인슈타인은 바로 그런 생각이었던 듯하다. 죽기 한 달 전인 1955년 3월,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상을 당했고 그 친구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애도의 편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는 것은………… 오랜 환상일 뿐"이라고 썼다. 아인슈타인의 사고 자체는 무리가 없지만 그런
"생각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느낌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맨 아래 놓인 편지를 꺼내면 그것은 아마도 Z로 시작하는 차카리아스의 편지가 아니라 다른 편지일 것이다.
이제 편지의 배열은 우리 눈에 완전히 우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 지식의 제한성일 뿐, 더 높은 지능은 아마도 순서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단열통의 편지라면인간의 뇌로도 파악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인식이 가능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 속에서 우연을 보는 것이다.

볼츠만은 당시 모든 전문가가 알고 있던 룰렛 게임에서의 우연의 법칙이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룰렛 게임에서우리는 구슬이 언제 빨간색, 검은색에 떨어질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게임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빨간색과 검은색에 떨어지는 비율이상당히 균형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룰렛 게임에 대해 일반적인 진술을 할 수 있다. 카지노에서 하루 저녁 내내 빨간 숫자만 나오는 경우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극히 드물다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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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신이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기 싫을 때 사용하는 신의 가명이다."

그림 형제는 자신들이 편찬한 사전에서 "우연은 뜻밖에 다가오는 일들이다"라고 간결하게 정의하고는 "이성이나 의도를 벗어나는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우연이라고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 우리는 우연이라는 말을 정확히 이런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아무런 규칙을 인식할 수 없거나,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우리에게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느 날 악장을 만나 이렇게 말했어요. ‘어제 친구랑 카우핑거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어요. 우리는 마침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 대해이야기하고 있었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정말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정말 신기하죠?‘ 그러자 악장이 물었어요.
‘그래서요? 그가 말이라도 걸던가요?‘ ‘아뇨. 그는 그냥 우리를 지나쳐서 가버렸어요.‘ 그러자 악장은 시큰둥하게 말했어요. ‘카우핑거 거리에서 자전거를 탄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야. 그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하도 많아 몇 발짝 못 가 자전거탄 사람과 계속 마주칠 지경이니까.‘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막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 지나가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매우 이성적인 사람조차 이런 질문 앞에서는 양다리를 걸친다.
노벨상을 받은 덴마크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도 그랬다. 닐스 보어는 엄격한 법칙을 추구하던 자연과학에 우연의 중요성을 도입한 현대 원자물리학의 아버지였지만 자신의 별장 현관 위에 행운의 상징인 말편자를 걸어놓고 살았다. 그리고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정말로 말편자가 액운을 막고 행운을 가져 온다고 믿느냐고 물으면 그는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준다오."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는 사람은 원인과 결과의 끝없는 행렬 속에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건을 둘러싼 상황을 얼마나자세히 알든 상관없이 그 남자가 왜 하필이면 그 지점에서 사고를당해야 했으며, 다행히 그 불행이 가벼운 부상으로 그쳤는지에 대한필연성을 찾아낼 수 없다. 만약에 그가 도중에 직원을 만나 수다를것이라는 사실과 이날 공사장 인부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일을 할것이며 강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행을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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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덫이 무엇인지를 안다. 미끼가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실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참담한 결과를 잘 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반드시) 무기력에 빠뜨린다고 할 수는 없다.
늙은 여우는 세상 물정에 밝고 지적으로 뛰어나, 이 세계를 덫을 놓는 자와 덫에 걸리는 자의 완전히 정지한 대립 상황으로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명석한 인식에는티끌만큼도 우스운 요소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명석함이 사람을 우스운 상황에서 영원히 구원해줄 거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물정에 밝아 위험을 다 알아서 겁을 먹고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그 위험의 매혹은 그의 최대의 신중함을 무너뜨릴만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꾸어진 위험은 점점 비대해진다. 그가 소유했다고 일단은 믿은 미래를 송두리째 뽑는듯한, 그의 존재의 본질 전체에 대한 부정 위에 성립하는 듯한 그 위험은 그의 ‘미래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만 작용할것이다. 그것이 그 위험의 최대의 유용성일 것이다. 그를다시 ‘미래를 갖지 않은 존재‘로 환원시킬 그런 위험. 즉, 늙은 여우를 매혹하는 최대의 위험이란 바로 ‘청춘‘일 것이다.

소설 습작을 하고, 친구와 문학에 대해 긴 편지를 주고받고,
만나면 문학 이야기만 하고, 문학서만 읽으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다이쇼시대의 문학청년의 표현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문학을 하며 산다‘라니! 그 풍부한 교양주의적 자기 형성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활감. 그만큼 당시의 나와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원고용지에 글을 쓰는 것은, 시대에 저항해 자신이 일종의 추상적 인간,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한 닌자 훈련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시대적 정신의 은둔처, 갈 길이 먼 인생의 은둔처…, 더구나 거기에는 아무런 영웅적 요소는 없었고, 시대의 비적격자인 나를 시인하기 위한 최후의 은둔처로서 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 쳐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고백하기에는 가장 불편한 장르이고, 이
‘가짜의 기록‘인 장르에는 고백의 신빙성을 보증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고백과 소설을 연결 지은 낭만파의 편견은 인종적 편견과 엇비슷한 불명예스럽고 어리석은 생각이며, 문학은 시, 희곡, 소설 순으로 고백에 부적합하다.

이십몇 년 전에 학교 선배가 말했던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말은 지금 내게 점점 가슴속을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다가온다. 과거의 작품은 이른바 모두 배설물이고,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 대해 희희낙락하며 떠드는 작가는자신의 배설물을 주무르며 좋아하는 광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어쨌든 문학을 하며 사는 것은 지성과 육체에 대한 양면작전이었다. 문학 덕분에 나는 모든 학구적 지성을 경멸할수 있었고, 육체의 덧없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만은 문학은 정신에 (엄밀히 나 한 사람만의 정신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심지어 나는 남에게즐거움을 주는 거리공연자들의 기술조차 얼마간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학의 본질은 요약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그 정도로 간단하다면,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가능한 한 요약 불가능한 요소를 더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가는 이 요약 불가능성의 근거를 ‘개성‘에서찾고, 결국 낭만적인 개성의 자동기술법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끝으로 모든 것이 이상해지면 찾아오는 것이 진정한 낙천주의다. 어떤 희망적인 관측과도 상관없는 낙천주의다. 나는내가 숲속의 대장장이처럼, 계속 낙천적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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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완전히 상징화되어 작품의 질량을 재는 추상적인단위가 된다면 그것은 그 소설을 시간과 비슷한 구조로 이끌게 된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시간 예술로서 거기에는 회꼭 같은 대사도 틀리지 않고 그저 냉엄한 시곗바늘 소리만들린다.

삶의 끝에,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문학이 있다. 그것을 순수한 문학이라고 나는 부르겠다. 백조는 최후의 한마디를 아름답게 노래하기 위해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산다고 한다. 작가는 임종의 순간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침묵을 맛보기 위해서 평생을 계속 말하고 떠들기를 계속한다. 백조의 평생의 침묵과 작가의 평생의요설, 그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장편소설은 하나의 순수를 얻기 위해 천의 순수함을 희생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에서 연기하는것이다. 극히 짧은 소설은 그 지독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농간이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밖에서 이루어지는지의 차이에 불과하다. 가공할 마키아벨리즘은 어쨌든 완전히 수행되어야 한다. 이 농간의 질량이 없는 작품은 현대에 살아갈 수 없다. 한 편의 뛰어난 장편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손바닥 소설은 무의미하다. 한 편의 뛰어난 손바닥 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장편소설은 무의미하다. 장편소설은 육지로 옮겨진빙산의 전체 모습이다.

‘극히 짧은 소설‘을 쓰면서 배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설을 쓰면서 그는 현대에서 순수함과 투명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그 자신이 얼마나 그것들을 말살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있었는지를 알 것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쩌면 현대에서의 시라는 것의 존재방식, 시의 비정상적인 어려움이 이해될지도 모르기에.

다.
따라서 내 소설은 소송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암시를 내포하고 매우 완만히 시작해 처음에는 진척이 느리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도록 해 두고, 서서히 크레센도가 되어, 마지막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모든 것을 끌어올리는 정석을 밟고 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예술의 기본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형태를 무너뜨리기는 싫다.

일본인 중에는 체력 문제도 있어서 이런 초인적 괴물이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 일반인을 백이라고 하면 고작 백이십 정도가 초인의 한도이고, 그 백이십의배분을 통해 각각의 재능이 정해지는 셈인데, 법대 출신 소설가는 어설프게 법학을 공부하는 바람에 그중 칠십 퍼센트정도를 지성에 빼앗겨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일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불리하고, 얼마나 사람의동정심을 끌지 못하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을 원망해야 할지 법대 출신인 것을 원망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를 심경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추상성, 다소 나의 독단에 따르면 시대라는 것의 본질일지도 모를 이 추상성을 기초로 하여 순수소설을 생각함으로써, 지금까지 순수소설을 주장하며 시대와 결별해야 했던 것과 달리, 문학 그리고 소설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시대의 완전한 투영, 시대의 가장 정확한 투영이라는 주장을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독단으로 가득찬 주장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바라지않는 날이 없다. 바라건대 한 마리의 불길한 검은 나비여, 이제부터 나의 작품 위로 끊임없이 그 정처 없는 비상의 그림자를 드리워주려무나.

내 문체에 대한 글은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는 상황이 된 것은 아마 내가 남의 작품을왈가왈부하면서 문체, 문체 하며 앵무새처럼 떠든 대가일 것이다.

"말을 마친 소년은 다시 오열했다. 떨리는 목덜미는 꽃이핀 억새처럼 나긋나긋하고, 어깨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떨렸다. 저절로 흘러내려 마치 얼굴의 반에 고운 버드나무 같은그늘을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선사는 무심코 손을 대고 그것을 살짝 치워 보았다. 사원에는 중후한 만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농밀한 밤이 빛나며 내려앉았다. 번을 서는 스님이 통로에서 통로로 불을 켜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시간의 경과라는 건 무섭다. 나는 괜히 현재의 ‘우리‘는 부자연스럽고 손이 오그라들지만, 과거의 ‘우리‘는 아름다웠던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청춘‘의 동의어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 청춘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우리‘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예술가가 미래를 먼저 차지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사람들의 빛나는 실용적인 미래상을 미리 주도면밀하게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모독하는것이 아니라, 심지어 완전한 계획과 기획에 기반하여 이성적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미래를 먼저 차지하고, 모독하고 점유하는 것. ・・・단 문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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