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완전히 상징화되어 작품의 질량을 재는 추상적인단위가 된다면 그것은 그 소설을 시간과 비슷한 구조로 이끌게 된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시간 예술로서 거기에는 회꼭 같은 대사도 틀리지 않고 그저 냉엄한 시곗바늘 소리만들린다.
삶의 끝에,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문학이 있다. 그것을 순수한 문학이라고 나는 부르겠다. 백조는 최후의 한마디를 아름답게 노래하기 위해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산다고 한다. 작가는 임종의 순간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침묵을 맛보기 위해서 평생을 계속 말하고 떠들기를 계속한다. 백조의 평생의 침묵과 작가의 평생의요설, 그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장편소설은 하나의 순수를 얻기 위해 천의 순수함을 희생한다는 그 무시무시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에서 연기하는것이다. 극히 짧은 소설은 그 지독한 마키아벨리즘을 작품으로부터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농간이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지, 밖에서 이루어지는지의 차이에 불과하다. 가공할 마키아벨리즘은 어쨌든 완전히 수행되어야 한다. 이 농간의 질량이 없는 작품은 현대에 살아갈 수 없다. 한 편의 뛰어난 장편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손바닥 소설은 무의미하다. 한 편의 뛰어난 손바닥 소설과 동등한 질량을 갖지 않은 장편소설은 무의미하다. 장편소설은 육지로 옮겨진빙산의 전체 모습이다.
‘극히 짧은 소설‘을 쓰면서 배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설을 쓰면서 그는 현대에서 순수함과 투명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그 자신이 얼마나 그것들을 말살하면서 마음 편히 살고 있었는지를 알 것이기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쩌면 현대에서의 시라는 것의 존재방식, 시의 비정상적인 어려움이 이해될지도 모르기에.
다. 따라서 내 소설은 소송이나 음악과 마찬가지로, 반드시암시를 내포하고 매우 완만히 시작해 처음에는 진척이 느리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도록 해 두고, 서서히 크레센도가 되어, 마지막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모든 것을 끌어올리는 정석을 밟고 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예술의 기본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형태를 무너뜨리기는 싫다.
일본인 중에는 체력 문제도 있어서 이런 초인적 괴물이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되는 면이 있다. 일반인을 백이라고 하면 고작 백이십 정도가 초인의 한도이고, 그 백이십의배분을 통해 각각의 재능이 정해지는 셈인데, 법대 출신 소설가는 어설프게 법학을 공부하는 바람에 그중 칠십 퍼센트정도를 지성에 빼앗겨버린 게 아닌가 한다.
그런 일이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불리하고, 얼마나 사람의동정심을 끌지 못하는지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자신이 소설가라는 것을 원망해야 할지 법대 출신인 것을 원망해야 할지, 알다가도 모를 심경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추상성, 다소 나의 독단에 따르면 시대라는 것의 본질일지도 모를 이 추상성을 기초로 하여 순수소설을 생각함으로써, 지금까지 순수소설을 주장하며 시대와 결별해야 했던 것과 달리, 문학 그리고 소설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시대의 완전한 투영, 시대의 가장 정확한 투영이라는 주장을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독단으로 가득찬 주장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쓰고 싶다고 바라지않는 날이 없다. 바라건대 한 마리의 불길한 검은 나비여, 이제부터 나의 작품 위로 끊임없이 그 정처 없는 비상의 그림자를 드리워주려무나.
내 문체에 대한 글은 남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는 상황이 된 것은 아마 내가 남의 작품을왈가왈부하면서 문체, 문체 하며 앵무새처럼 떠든 대가일 것이다.
"말을 마친 소년은 다시 오열했다. 떨리는 목덜미는 꽃이핀 억새처럼 나긋나긋하고, 어깨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떨렸다. 저절로 흘러내려 마치 얼굴의 반에 고운 버드나무 같은그늘을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선사는 무심코 손을 대고 그것을 살짝 치워 보았다. 사원에는 중후한 만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농밀한 밤이 빛나며 내려앉았다. 번을 서는 스님이 통로에서 통로로 불을 켜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시간의 경과라는 건 무섭다. 나는 괜히 현재의 ‘우리‘는 부자연스럽고 손이 오그라들지만, 과거의 ‘우리‘는 아름다웠던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청춘‘의 동의어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 청춘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우리‘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었다.
예술가가 미래를 먼저 차지한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사람들의 빛나는 실용적인 미래상을 미리 주도면밀하게 모독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 충동적으로 본능적으로 모독하는것이 아니라, 심지어 완전한 계획과 기획에 기반하여 이성적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미래를 먼저 차지하고, 모독하고 점유하는 것. ・・・단 문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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