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룰렛 게임에서는 하루 저녁을 보내도 빨간 숫자와 검은 숫자가 나오는 비율이 완전히 균형을 이루기가 힘들지만, 커피잔에서는 우유의 형태가 금방 사라져버리고 커피와 완전히 섞이어, 찻잔에는 최대한의 무질서가 지배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볼츠만이 발견한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는 것이다. 무질서(혹은 엔트로)는 항상 증가한다. 커피에 우유가 확산되는 것도 마치 유령이 조종하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책상이 뒤죽박죽되는 것도마찬가지다. 우연은 자신의 법칙을 따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의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위로 올렸다가 바위가 아래로 굴러떨어지면 다시 산 위로 올리는 벌을 받았다.
무질서에 대항한 자연과 인간의 싸움도 그와 비슷하다. 에너지 투입이 중단되면 무질서가 세력을 떨치게 된다. 질서는 고정되어 있지않다. 에너지가 무한하지 않기에 질서도 영원할 수 없다. 자동차는고물이 되며 인간은 죽고 태양도 빛을 잃는다. 무질서에 대한 질서의 승리가 아름답게 빛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 결국은 언제나우연이 승리한다.

질서와 무질서의 개념은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관찰할 때에만 비로소 적용된다. 양말 몇 켤레는 별로 무질서하지 않다.
그에 반해 서랍 가득 들어 있는 양말은 매우 무질서하다. 질서에서무질서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과거와 미래가 생긴다. 결국 우리는 우연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뒤쪽이 아닌 앞쪽에서부터 경험하게 되는것이다.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더 정확한 기상 예측 같은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카오스 연구자들은 그들의 장밋빛 약속을 실현하지못했다. 갑작스러운 영아 사망을 줄이지도 못했고, 카오스 방정식을응용하여 주식으로 돈을 벌어들이지도 못했다. 고속도로의 정체도여전히 변함이 없다. 카오스 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것과는 다르게 결과를 빚어내지 않는 사건들도 있는 것이다.

무지와 우연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주변 세계를 모두 아는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쨌든 우리는 노력과 인내로 지식의경계를 확장하고 우연으로부터 자리를 억지로 좀 얻어낸다. 그러나에피메니데스의 이 모호한 발언에는 그런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없다. 우리에게필요한 정보는 도무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 수 없을 때에 우연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한 원인의 일부가 자신이라면 이원인은 관찰되는 사건과 분리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피드백이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문제의 답으로 논리나 이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숫자를 얻게 된다. 카이틴은 그 수를오메가로 표시하였다. 오메가는 기독교에서 세상의 끝을 상징하는말이다. 카이틴은 "하느님은 도박에 약하신 듯, 순수 수학에서까지주사위 놀이를 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우리가 위쪽으로 향하고 있는 전자의 스핀 값을 수평 방향으로 잴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0‘은 금지되어 있기에 전자는
‘오른쪽‘이나 ‘왼쪽‘ 중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1/2이나 1/2의 값에 해당한다. 이미 말했듯이 스핀은 측정 시 반정수가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필이 책상 위에 수평으로 누울 때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진짜 실험에서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그런 장면을 보게 된다. 측정 시에 전자가 그의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전자의 스핀이 ‘오른쪽’으로 눕는 비율과 ‘왼쪽‘으로눕는 비율은 거의 같다. 장시간 동안 동전 던지기를 할 경우 거의 같은 비율로 앞뒷면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실험을 거듭할수록 두가지 가능성(오른쪽으로 쓰러지는 값 1/2과 왼쪽으로 쓰러지는 값 -1/2) 이 상쇄되어 스핀 값의 총량은 평균적으로 다시 0이 된다. 그러나 특정한실험에서 전자가 어느 방향을 택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연에 의해 정해진다.

우연은 물리학의 토대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익숙한 생각이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룰렛 구슬이 전자처럼 작았다면 파머는 결코 그 경로를 계산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자는 가는 길이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양자역학에서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의 행동을 예언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미 불가능하다. 그러나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예언할 수 없는 더 심오한 이유는 에피메니데스의 거짓말쟁이 패러독스와 같은 것, 즉 자기 연관성 때문이다.

예언자가 모든 예언을 함구한다면 그를 예언자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예언이 불가능한 두 번째 논리는 인간 정신의 복잡성에기초하는 것으로, 그에 대해 철학자 카를 포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b
"누군가 나의 행동을 예언하려 한다면 그는 나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언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따지는 것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불확실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쨌든 마크 트웨인이 한 말은 옳다.
하드우
"예언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 지도부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상황은더 악화된다.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경제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하는 사람들이 정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행정부는 우즈베키스탄에 얼마나 많은 신발이 필요한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은 현지의 구두장이나 신발 상인만이 알아낼 수 있다. 행정부가 무리하게 그런 일을 결정할 때 사람들이 꽁꽁 언 발로 신발가게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는일이 발생한다.

삶을 우연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모두 이런 기술 덕분이다.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틀에 박힌 세계에서는 결코 이만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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