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덫이 무엇인지를 안다. 미끼가 무엇인지도 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실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참담한 결과를 잘 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반드시) 무기력에 빠뜨린다고 할 수는 없다. 늙은 여우는 세상 물정에 밝고 지적으로 뛰어나, 이 세계를 덫을 놓는 자와 덫에 걸리는 자의 완전히 정지한 대립 상황으로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명석한 인식에는티끌만큼도 우스운 요소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명석함이 사람을 우스운 상황에서 영원히 구원해줄 거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물정에 밝아 위험을 다 알아서 겁을 먹고 신중하면 신중할수록, 그 위험의 매혹은 그의 최대의 신중함을 무너뜨릴만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꾸어진 위험은 점점 비대해진다. 그가 소유했다고 일단은 믿은 미래를 송두리째 뽑는듯한, 그의 존재의 본질 전체에 대한 부정 위에 성립하는 듯한 그 위험은 그의 ‘미래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만 작용할것이다. 그것이 그 위험의 최대의 유용성일 것이다. 그를다시 ‘미래를 갖지 않은 존재‘로 환원시킬 그런 위험. 즉, 늙은 여우를 매혹하는 최대의 위험이란 바로 ‘청춘‘일 것이다.
소설 습작을 하고, 친구와 문학에 대해 긴 편지를 주고받고, 만나면 문학 이야기만 하고, 문학서만 읽으며,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다이쇼시대의 문학청년의 표현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문학을 하며 산다‘라니! 그 풍부한 교양주의적 자기 형성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생활감. 그만큼 당시의 나와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원고용지에 글을 쓰는 것은, 시대에 저항해 자신이 일종의 추상적 인간,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한 닌자 훈련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시대적 정신의 은둔처, 갈 길이 먼 인생의 은둔처…, 더구나 거기에는 아무런 영웅적 요소는 없었고, 시대의 비적격자인 나를 시인하기 위한 최후의 은둔처로서 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 쳐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고백하기에는 가장 불편한 장르이고, 이 ‘가짜의 기록‘인 장르에는 고백의 신빙성을 보증할 만한 것은 무엇 하나 없다. 고백과 소설을 연결 지은 낭만파의 편견은 인종적 편견과 엇비슷한 불명예스럽고 어리석은 생각이며, 문학은 시, 희곡, 소설 순으로 고백에 부적합하다.
이십몇 년 전에 학교 선배가 말했던 ‘문학을 하며 산다‘라는 말은 지금 내게 점점 가슴속을 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다가온다. 과거의 작품은 이른바 모두 배설물이고,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 대해 희희낙락하며 떠드는 작가는자신의 배설물을 주무르며 좋아하는 광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어쨌든 문학을 하며 사는 것은 지성과 육체에 대한 양면작전이었다. 문학 덕분에 나는 모든 학구적 지성을 경멸할수 있었고, 육체의 덧없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만은 문학은 정신에 (엄밀히 나 한 사람만의 정신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되고, 심지어 나는 남에게즐거움을 주는 거리공연자들의 기술조차 얼마간 손에 넣을수 있었다.
그렇다면 문학의 본질은 요약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가 그 정도로 간단하다면,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가능한 한 요약 불가능한 요소를 더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작가는 이 요약 불가능성의 근거를 ‘개성‘에서찾고, 결국 낭만적인 개성의 자동기술법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사례를 많이 알고 있다. 끝으로 모든 것이 이상해지면 찾아오는 것이 진정한 낙천주의다. 어떤 희망적인 관측과도 상관없는 낙천주의다. 나는내가 숲속의 대장장이처럼, 계속 낙천적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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