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명상이 어떤 새로운 상태, 혹은 경험을 얻기 위해마음이 행하는 어떤 활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명상이 마음의 속성, 혹은 본질 그 자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명상은 우리의 존재 방식이지,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서 자기로서 머무르고, ‘아이엠‘ 안에 휴식하며, 신의 존재를실천하는 것. 이것만이 경험의 개별적인 주체인 에고를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자 기도이며, 최고의 궁극적인 명상이자 기도입니다. 다른 모든 형태의 명상은 바로 이궁극적인 명상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밤이라고 태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같은 밝기로 계속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뿐이지요. 그래서 지구의 한 부분이 어두워지는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돌면 어두워졌던 부분이 다시 또 밝아집니다.

나알아차림의 존재는 모든 경험의 안과 뒤에서 늘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알아차림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그 빛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돌아설 때‘, 즉 대상적인 경험에서 평온함과 만족감을 찾아 헤매던 것을 멈출 때, 그리하여 방향이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고, 마음의 근원인 알아차림의 중심으로 더 깊이 가라앉을 때.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평생 갈망해 온 영원한 평온함과 만족감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외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면으로 돌아서는 것,
즉 마음의 돌아섬을 초기 정교회는 헤시카즘 Hesychasm 36 또는 마음의 고요함이라 불렀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사야가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평안을 주신다" 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이러한 비활동non-activity 안에서 지식으로의 길과 사랑,
혹은 헌신으로의 길이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탐색과 자기 굴복은 하나이며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험입니다.

이러한 곤경에 빠진 보통 사람들의 측은한 처지를 감안하여, 불이론적 가르침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내면의 평온함행복의 원천으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끄는 활동이나수행을 제안합니다.

불이론적 가르침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우선 마음을 준비시킬 수 있는 중간 단계 정도의 수행을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이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본 모습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리어왕이 겹겹이 쌓인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면서 생각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 등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게 된다면, 그의 마음의 본모습이 외관상의 모호함으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불필요한 지식과 경험이 모두 다 버려지는 순간, ‘나는 존 스미스다‘라는 앎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만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립니다. 유한한 마음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이라는 것은 존스미스가 연극의 극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취하는 활동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것은 알아차림이 대상적 지식과 경험을 알기 위해 취하는 활동입니다.

그래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제외하고 그를 본 사람은 없으며, 그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에게 이르지못하며, 그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는 그를통해서만 그를 알며 그에 의해서만 그를 본다. 오직 그만이그를 본다."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외관상 개별적인 자아인 유한한
‘나‘는 곧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의 진정하고 유일한 ‘나‘
입니다. ‘아이엠‘이라는 앞으로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 존재이지요. 거기에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 등의 색깔이 덧입혀진다하더라도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 즉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 존재만이 "자"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무한한 알아차림, 즉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존재가 되기 위해서 개별적인 자아를 제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거해야 할 개별적 자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개별적인 자아를 해체하고 완전히 뿌리뽑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환상적인 존재를 영속시킬 뿐입니다. 개별적인 자아를 길들이겠다는 것은 개별적인 자아를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현자 아트마난다 크리슈나 메논AtmanandaKrishna Menon, 1883~1959 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에 안착하게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생각, 감정, 감각, 지각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게 되었을 때입니다."

리어왕이란 하나의 환상입니다. 하지만 모든 환상과 마찬가지로 리어왕에게도 실체가 있습니다. 리어왕의 실체는 존스미스입니다. 리어왕이라는 것에서 환상적인 요인을 모조리제거했을 때, 존 스미스라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됩니다. 다시 말해서 존 스미스가 새롭게 무언가를 알게 된것은 아닙니다. 다만 존 스미스에게서 무명이 제거되었을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경험조차 아니지요.
이러한 인식을 통해 본질적이고도 환원할 수 없는,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존재는 외관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실체를드러냅니다. 그것은 열려 있으며, 투명하고, 환히 빛나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멸의 실체입니다.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이며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도와 해류가 바다의 움직임이나 활동이라고 부를 수있듯이, 마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나 활동입니다.
바닷속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파도와 해류가 일어난다고 해서 물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파도와 해류가 잦아든다고 해서 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파도와 해류가 일어난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잦아든다고 해서 어떤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자신의 본질로 점차 가라앉으면서 고요해지고 넓어집니다. 그 내면의 유한하고 조건적이며 제한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정수로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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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 마하리쉬는 과정이 없는 이 여정을 마음을 가슴속으로 가라앉히는 것sinking the mind into the hear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방향이 없는 이 여정 동안 마음은 가라앉고 이완되고, 뒤로 안으로, 그리고 ‘자아 쪽으로 향합니다. 여정을 거치며마음은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문득 순수한 마음으로,
본연의 무한한 알아차림으로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점진적으로, 가끔은 아주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이지요.

마음은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색칠하는 활동입니다. 반대로 색칠을 지우는 것, 그리하여 색깔이 지워진 마음의 본래상태인 순수한 알아차림을 드러내는 것이 명상입니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알아차림이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은 아무런 색깔이 없는 비대상적경험입니다. 마음이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 던지고 난 후의 본성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순수한 마음이며 알아차림 그 자체입니다. 내재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불멸의 정수를 아는 것입니다. 선의 전통에서는 이를 ‘본래면목our26original face‘ 이라고 부릅니다

주의 attention 라는 단어의 어원을 살펴봅시다. [a]는 라틴어로 ‘~로‘, ‘~를 향하여‘라는 뜻이고, [tendere)는 신축성있게 늘어난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주의란 지식, 혹은 경험의 대상을 향하여 알아차림을 쭉 뻗어낸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러분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분 자신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라고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내딛으시겠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향해서는 한 발짝도 갈수가 없습니다. 이미 내가 서 있는 곳이 나 자신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는 한 발짝도 멀어질 수없습니다. 어디로 가든 나는 항상 나 자신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앎, 단 하나의 ‘불이론적인 삶으로부터 모든 상대적인 앎이나 경험이 파생되어 나옵니다. 마치 자면서꿈을 꿀 때 여러 사람과 다양한 사물들이 나오지만, 이것은모두 꿈꾸는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왜곡되고 파생되어 나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 다른 어떤행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그저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이나 ‘주의‘라는 형태를 띨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 홀로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그래서 발리아니는 "나는 나의 신을 통해서 나의 신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아차림의 본질은 순수한 앎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알며, 스스로 알아차립니다.
우리들의 존재와 우리들의 존재를 아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마치 태양의 존재와 태양의 빛남 사이에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알아차림은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스스로를 압니다.

알아차림으로부터 알아차림까지는 어떤 공간도 거리도간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길이나 수행 practice 의 가능성도없습니다. 따라서 알아차리기를 알아차리는 것은 수행이닙니다.

명상은 주의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 결과 알아차림이 스스로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의 정수입니다.
이는 마음을 어딘가로 향하게 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집중하거나 통제할 필요도 없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지요.
무엇을 수행하든 우리 본연의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수행을 통해서는 본연의 존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아를 일시적이고도 유한한 실체라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확고히 믿고 있으니, 이를 감안하여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불이론적 가르침은 자기 탐색 self-enquiry, 또는 자기 굴복self-surrender의 형태로서 명상을 수행하라고 권유하게 되었지요.

주먹을 쥐려면 처음에는 애를 써야 하지요. 하지만 주먹을쥔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주먹을 쥔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손을 펴려고 한다면, 손을 펴기 위해서 또다시 애를 써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알아차림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리고 있다는경험, 존재의 느낌, ‘아이엠 I am‘이라는 앞으로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이엠‘이라는 삶은 알아차림의 스스로에 대한알아차림입니다.
‘아이엠‘이라는 앎은 모든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의 마지막순간에 우리의 경험 속에서 잠깐 빛나지만, 워낙 짧기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영화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서 텅 빈 스크린이 잠깐 드러나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아이엠‘이라는 앎, 즉 알아차림의 스스로에 대한앎은 모든 유한한 마음의 상대적 지식과 경험보다 앞서고 이를 초월하는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절대적인앎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앎이 곧 신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삶이 곧 신에 대한 신의앎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알아차림의심에서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 실습 the practiceof the presence of God, 또는 무한한 신의 존재에 대한 마음의굴복 surrender 이라고 하지요.

수피 격언도 바로 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는 신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헤맸으나 결국 신을 발견했다."

그렇기에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 입구 위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 있지요. 같은 이유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신을 안다"

이를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아트마 비차라 atma vichara"라고합니다. 이는 주로 ‘자기 탐구self enquiry ‘나 ‘자기 탐색 selfinvestigation‘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서양 문화에서 ‘탐구‘와
‘탐색‘이라는 단어는 마음의 과정이나 작용을 시사하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지요. 그보다는 오히려 ‘자기준수self-abidance‘ 혹은 ‘자기 휴식 self-resting‘이 더 적절한 번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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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림awareness "만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리기 being aware "만이 알아차리기를 알아차립니다. 따라서알아차리기라는 경험과 알아차림의 존재를 간과하는 "우리we‘란 분명 스스로를 간과하거나 망각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의 스크린 위에서는 경험이라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그로부터 ‘알아차리는 나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그것은대상적 경험과 너무나 밀접하게 엮여 있기에, 자신의 본모습을 잊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현존을 망각해버립니다. 마치 우리가 꿈속에서 내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것과 같습니다.

알아차림을 숨기는 것, 알아차림을 경솔하게 놓치는 것, 알아차림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이를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부르고, 베단타에서는 ‘무지 ignorance‘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주로 ‘죄sin‘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인 하타아chata ah는‘과녁을 벗어난다’라는 의미입니다

외관상 개별적인 자아가 대상적 경험 속에서는 더 이상 평온함과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 안에서 평온함과 행복을 찾게 될 가능성이 열립니다. 바로 이 깨달음이야말로 본질적으로 평온하고 무조건적으로 충만한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회귀하는 첫걸음인 동시에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알아차리기의 경험을 향하여 마음을 보낼 수 없습니다. 다만 경험에서부터 우리 마음을 멀리 떠나보낼 수 있을뿐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아차림이란 주의 집중을 이완시키고 대상적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써 주의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쉬게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최상의 명상은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스스로의 원천이자 본성인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되돌아가고, 쉬고, 깊이 침잠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스스로에게 되돌아가는 것, 자신의 본모습을 기억하는 것이곧 알아차리기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명상과기도의 핵심이며, 영원한 평온함과 행복으로 향하는 직접적인 길direct path 입니다.

개별적 자아의 관점에서 볼 때, 순수한 알아차림의 본질로향하는 것은 욕망이나 갈망으로 느껴집니다. 본질적으로 이완되고 평온한 알아차림으로 끌리는 것은 개별적 자아의 수축contraction 때문이며, 이것이 곧 은총의 끌어당김attraction입니다.
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곧 우리를 향한 신의 사랑입니다.

명상이란 우리의 자아를 이런 의미에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빛나며 본래적으로 평온하고 무조건적으로 충만한 알아차림에 대한 경험, 우리 자신은 이미 언제나 그러한경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늘 함께합니다. 그것은 생각, 느낌, 감각, 지각 때문에 가려지는 듯 보일지라도제로는 결코 가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무한을 알 수 있는 것은 무한뿐이며, 유한을 알 수 있는 것은 유한뿐입니다.
대상적 경험을 알기 위해서 무한한 알아차림은 유한한 마음의 형태를 취하지만,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라면 마음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알아차림은 마음의형태를 통해 생각, 이미지, 느낌, 지각, 인식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형태를 통해서는 알아차림은 그 자신을 알 수없습니다.

스크린의 활동이 영화이고, 바닷물의 활동이 해류이듯이,
알아차림의 활동이 곧 마음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알아차림이 움직이는 것이며, 알아차림은 마음이 쉬는 것입니다.

마음은 알아차림의 활동이자 창작물입니다. 알아차림은자신이 만들어 낸 것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알아차림은 자신의 활동 속에서 스스로를 가려버립니다.
명상이란 알아차림을 스스로의 활동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 알아차림의 단순한 경험은 우리가 알게 되는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줍니다.

명상이란 마음의 활동을 가라앉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본성이 순수한 앎, 곧 알아차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직 알아차림만이 알아차림을 압니다. 비활동non-activity,
혹은 비실천non-practice 으로서의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활동은 가라앉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본질인 순수한 알아차림이 제약으로부터 벗어나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알아차림에 대한 인식, 즉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아는 것은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늘 볼 수있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새롭거나 특별한 종류의 경험이 아닙니다. 경험자체의 본질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죠.
알아차림은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식될 뿐입니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Am I aware?"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그렇다"입니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질문은 첫 번째 생각이며, 우리는 아직 답변에 대해 확신하지못합니다. "그렇다"라는 답변은 두 번째로 일어나는 생각이며, 이때 우리는 그 답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합니다.

사실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아차리도록 변화하는 것은아닙니다. 태양이 언제나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알아차림도언제나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그렇다"라는 대답사이에서 잠시 멈추는 순간, 마음은 그 작용을 멈추고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무한한 알아차림으로 드러납니다. 그리하여스스로를 빛내며 스스로를 압니다.

1마음은 항상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스스로에게 "나는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그때야 비로소 대상이 없는 방향으로의 여정,
즉 ‘길 없는 길‘ pathless path 이 시작됩니다.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순수한 알아차림으로 향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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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기의 경험은 우리가 알아차리는 대상과는 아무런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경험도 알아차리기라는 비대상적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그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듯이 말이지요.
알아차림이라는 배경을 인지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대상적 경험을 바꾸거나 조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렵든 지루하든 동요하는 우울하든 사랑에 빠지든 평온하든 상관없이, 알아차리기의 경험은 변함이 없습니다.

알아차리기의 경험을 경험의 전면으로 나오게 하고,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이 배경으로 물러서게 하십시오. 순수한 알아차리기의 경험에 주목하십시오. 누구나 바라는 평온함과 행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십시오.

깨달음enlightenment이나 자각 awakening은 충분히 힘들게수련하거나 충분히 오래 명상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특수한 경험이나 마음 상태가 아닙니다. 단지 마음의 본성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것뿐입니다.

반면에 누군가가 "의식 consciousness 은 존재하나요?"라거나
"알아차림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단어들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머뭇거릴 것입니다.
그러니 이 책에서 ‘알기 knowing‘나 ‘알아차리기 being aware대신에 ‘의식 consciousness’과 ‘알아차림 awareness ‘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도 모두 ‘알아차리기‘라는 의미로 이해해주기바랍니다.

"나는 알아차린다"라는 경험은 곧 알아차림의 자기 자신에대한 앎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삶은 알아차림의 자기 자신에 대한 앎입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나기 위해 특정 방향으로 빛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도 스스로를 알기 위해 자신의 "주의 attention"를, 즉 삶의 빛을 특정한 방향으로 보낼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차리기는 지식을 습득하거나 특정 경험을 한다고 해서 결코 강화되지도 않고 손상되지도 않습니다. 알아차리기는 경험에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특정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않으며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 그 자체는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 그 자체는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조건 지워지지 않습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는 마음의 본질적이고도 환원불가한 핵심이며, 대상적 경험이라는 형태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조건적입니다.

따라서 사랑과 아름다움은 알아차림의 본질입니다. 사랑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친숙한 경험 속에서 알아차림은 자신의 영원하고 무한한 현실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 폴세잔Paul Cezanne은 예술이 우리에게 "자연의 영원함을 맛보게 해준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지적인 생각을 아는 알아차림은 가장 바보 같은 생각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고통, 긴장, 동요의 감각을 아는 알아차림은 기쁨, 느긋함,
따뜻함의 감각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분노, 슬픔, 비탄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은 고마움, 친절,
즐거움의 경험을 아는 알아차림과 동일합니다.

평생 자연을 담은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를 상상해 봅시다.
풍경을 비춰주는 빛의 존재를 화가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는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지식과 경험을 비춰주는 알아차림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알아차림이 몸의 한계, 몸의 운명을 공유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이 몸의 속성과 한계와 혼합된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별적 자아인 에고 separate self or ego가 생겨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개별적 자아가 곧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되지요.
참되고 유일한 "나self"는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이라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은 결코 대상적 경험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대상적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거나 마비시킬 때라도 영원함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행복에 대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신에 대한 갈망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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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의 논의는 주로 베단타 철학에 기반하고 있지만기독교나 불교의 관점도 수시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베단타 철학 자체를 다룬다기보다는 신비주의적이고도 종교적인것들을 싹 걷어내고 핵심적 논의만을 추출하여 현대적이고도 일상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그럼으로써 가장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증류 과정을 거쳐 원액을 뽑아내듯이 베단타철학으로부터 핵심만 추출한 그의 논의는 기독교나 불교의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는 전혀 종교적이지 않지만, 어떠한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보다도 더욱더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동시에 어떠한 명상 지도자보다도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명상법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한 수련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게 해주겠다거나 신비한 경험을 하게 해주겠다는 "명상 전문가는 사실 명상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 보면 된다.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고 있음을 늘 알아차리고 있는 존재가 곧 진짜 ‘나‘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할 때 그행위가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는존재가 곧 진짜 "나"다. 이 진짜 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늘 알아차리고 있다. 다만 잊고 있을 뿐 뒤에 배경에 늘 있다.
나는 이것을 ‘배경자‘라 부른다. 스파이라가 이 책에서 영화 스크린에 비유하는 것이 바로 이 배경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손에 있는 휴대폰을바라보라. 휴대폰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이 휴대폰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는 분명히 있다. 그것이 바로 나다.
휴대폰이 "나"인 것이 아니라 휴대폰을 바라보는 것이 나다.
휴대폰이라는 대상을 경험하는 주체가 곧 진짜 나다. 내가지닌 온갖 소유물들 역시 그 자체로서 "나"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주체가 진짜 "나다.

명상이란 말과 말 사이의 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실제 명상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한 문장과 다음 문장 사이에긴 정적이 있습니다. 명상하는 사람들은 고요함 속에서 한 마디 한 마디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탐구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실제 명상 모임에 앉아서 명상 가이드를 듣는 것과 유사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각 문장과 단락 사이에 공간을 두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했던 순간이 반복되기를바라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하는 대상적 경험을 추구하거나 싫어하는 대상적 경험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결핍, 탐색, 일시적인 충족이라는 무한한 순환에 중독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Thoreau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용히 절박한 삶을 살아간다"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하고 나면 더 이상 대상적 경험에서지속적인 평온함이나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를 할 수가 없게됩니다. 이러한 직관을 자꾸 잊어버리고 대상적 경험에서 만족감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을점점 더 자주, 더 강하게, 더 분명하게 깨닫게 마련이지요. 이러한 직관을 무시하다가는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음이 알아차림의 빛의 방향을 경험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로 향하게 할 때, 마음은 점진적으로, 때로는 갑자기,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대상적 경험 속에서 찾아 헤매었던 평온함과 행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온함과 행복이 우리 자신의 본질이라면, 왜 우리는 항상평온함과 행복을 경험하지는 않는 것일까요? 당연히 떠오르게 마련인 의문입니다. 왜 다른 일반적인 경험과 마찬가지로행복도 가끔씩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요? 행복과 불행 모두알아차림 안에서 번갈아 생겨나는 대상적 경험이 아닐까요?

행복이라는 우리의 본래적인 상태가 잠시 드러나는 순간은 마치 잿빛 구름 사이로 파란 조각하늘이 살짝 드러나는것과도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그저 불만족이라는 구름이 잠시 없어진 일시적인 상태에 불과하며, 사람들은 그 행복한 상태로부터 얼른 도망가 버리고는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마음mind‘의 본래적 모습을 깊이 탐구해본다면, 즉 생각, 느낌, 감각 지각의 여러 층위를 뚫고 내려가서 우리 마음의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실체에 도달하게 된다면 우리는 항상 그곳에서 파란 하늘과도 같은 평온함과 온전한 충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행복은 불행과 더불어 번갈아 일어나는 일시적인경험이 아닙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서로 반대가 아니듯이행복과 불행이 서로 반대는 아닙니다. 구름이 파란 하늘을 잠시 가리고 있듯이 불행은 행복을 잠시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우리의 본성이며,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도 마음의 원천에, 우리 자신의 핵심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드러날 수 있을 뿐입니다.

가장 깊고 본질적인 내면에 존재하는 평온함과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에집중하고, 마음을 관찰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명상은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마음의 본질을 명료하게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 그 자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이세상에 대한 앎과 경험에 충만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과 실체의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 알아차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알아차림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이미 내재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알아차리기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연속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알아차리기는 시간을 초월해서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의흐름이라는 개념이 너무도 익숙하므로, 여기서는 일단 알아차리기가 모든 경험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해두겠습니다.

지식과 경험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경험하는 대상은 항상 변화하지만, 그것에 대한 알아차림은 늘 그대로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지식과 경험의 주된 요소입니다. 또한모든 지식과 경험이 생겨나는 배경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경험이 나타나는 매개체입니다. 모든경험은 알아차림을 통해 알려집니다. 궁극적으로 알아차림은모든 경험이 만들어지는 바탕이자 실체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앎에 있어서 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기는 모든 경험에 있어서 경험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에서 가장 명확한 요소이면서도 우리가 늘 간과하고있는 것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따라서 이는 카슈미르 시바Kashmir Shaivite 철학 전통에서
"가장 잘 숨겨진 것보다 더 숨겨져 있으면서도, 가장 명백한대상보다 더욱 명백한, 가장 위대한 비밀"이라 일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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