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명상이 어떤 새로운 상태, 혹은 경험을 얻기 위해마음이 행하는 어떤 활동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명상이 마음의 속성, 혹은 본질 그 자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명상은 우리의 존재 방식이지,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알아차리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안에서 자기로서 머무르고, ‘아이엠‘ 안에 휴식하며, 신의 존재를실천하는 것. 이것만이 경험의 개별적인 주체인 에고를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형태의 명상이자 기도이며, 최고의 궁극적인 명상이자 기도입니다. 다른 모든 형태의 명상은 바로 이궁극적인 명상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밤이라고 태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같은 밝기로 계속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뿐이지요. 그래서 지구의 한 부분이 어두워지는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돌면 어두워졌던 부분이 다시 또 밝아집니다.

나알아차림의 존재는 모든 경험의 안과 뒤에서 늘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모든 경험은 알아차림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그 빛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고 돌아설 때‘, 즉 대상적인 경험에서 평온함과 만족감을 찾아 헤매던 것을 멈출 때, 그리하여 방향이 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고, 마음의 근원인 알아차림의 중심으로 더 깊이 가라앉을 때. 이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평생 갈망해 온 영원한 평온함과 만족감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외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면으로 돌아서는 것,
즉 마음의 돌아섬을 초기 정교회는 헤시카즘 Hesychasm 36 또는 마음의 고요함이라 불렀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사야가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평안을 주신다" 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이러한 비활동non-activity 안에서 지식으로의 길과 사랑,
혹은 헌신으로의 길이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탐색과 자기 굴복은 하나이며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험입니다.

이러한 곤경에 빠진 보통 사람들의 측은한 처지를 감안하여, 불이론적 가르침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내면의 평온함행복의 원천으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끄는 활동이나수행을 제안합니다.

불이론적 가르침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우선 마음을 준비시킬 수 있는 중간 단계 정도의 수행을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이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본 모습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리어왕이 겹겹이 쌓인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면서 생각이미지, 기억, 느낌, 감각, 지각 등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게 된다면, 그의 마음의 본모습이 외관상의 모호함으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불필요한 지식과 경험이 모두 다 버려지는 순간, ‘나는 존 스미스다‘라는 앎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만이 알아차림을 알아차립니다. 유한한 마음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실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이라는 것은 존스미스가 연극의 극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취하는 활동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것은 알아차림이 대상적 지식과 경험을 알기 위해 취하는 활동입니다.

그래서 발리아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제외하고 그를 본 사람은 없으며, 그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에게 이르지못하며, 그를 제외하고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는 그를통해서만 그를 알며 그에 의해서만 그를 본다. 오직 그만이그를 본다."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외관상 개별적인 자아인 유한한
‘나‘는 곧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의 진정하고 유일한 ‘나‘
입니다. ‘아이엠‘이라는 앞으로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 빛나고 있는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 존재이지요. 거기에 생각, 이미지, 느낌, 감각, 지각 등의 색깔이 덧입혀진다하더라도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알아차림, 즉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 존재만이 "자"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무한한 알아차림, 즉 무한하고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신의존재가 되기 위해서 개별적인 자아를 제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거해야 할 개별적 자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개별적인 자아를 해체하고 완전히 뿌리뽑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환상적인 존재를 영속시킬 뿐입니다. 개별적인 자아를 길들이겠다는 것은 개별적인 자아를계속 유지하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도의 현자 아트마난다 크리슈나 메논AtmanandaKrishna Menon, 1883~1959 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에 안착하게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생각, 감정, 감각, 지각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게 되었을 때입니다."

리어왕이란 하나의 환상입니다. 하지만 모든 환상과 마찬가지로 리어왕에게도 실체가 있습니다. 리어왕의 실체는 존스미스입니다. 리어왕이라는 것에서 환상적인 요인을 모조리제거했을 때, 존 스미스라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게됩니다. 다시 말해서 존 스미스가 새롭게 무언가를 알게 된것은 아닙니다. 다만 존 스미스에게서 무명이 제거되었을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경험조차 아니지요.
이러한 인식을 통해 본질적이고도 환원할 수 없는,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존재는 외관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실체를드러냅니다. 그것은 열려 있으며, 투명하고, 환히 빛나며,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멸의 실체입니다.

알아차림을 바다에 비유하자면, 생각은 수면에서 움직이는 파도이며 느낌은 그 밑에서 흐르는 해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도와 해류가 바다의 움직임이나 활동이라고 부를 수있듯이, 마음은 알아차림의 움직임이나 활동입니다.
바닷속 깊은 곳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파도와 해류가 일어난다고 해서 물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파도와 해류가 잦아든다고 해서 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파도와 해류가 일어난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잦아든다고 해서 어떤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자신의 본질로 점차 가라앉으면서 고요해지고 넓어집니다. 그 내면의 유한하고 조건적이며 제한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질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정수로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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